“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요한계시록 21:1-22:5
요절: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18장에서 바벨론의 멸망 후, 19:7-8절에서 한 천사가 어린 양의 혼인을 알렸했습니다. 이 혼인이 있기 전에 하나님은 원수들, 곧 짐승과 거짓 선지자와 사탄을 완전하고도 영원히 멸하셨습니다(19:11-20:15). 그러므로 더 이상 악도 없고 거짓도 없고 살인이나 불의도 없습니다. 이제 21장에서 혼인 잔치가 벌어집니다. 혼인 잔치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지킨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보상입니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결혼식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 예비된 매우 놀라운 장소도 있습니다.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아담이 타락했을 때 인간은 낙원을 상실했습니다. 이 저주받은 세상에서 우리는 나그네와 이방인처럼 진정한 소망도 없이 좌절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크신 긍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와 함께 영생을 누릴 영광스러운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최후 종착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최후 종착지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이라고 가정해 보십시오. 이생에서 아무리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누린다 할지라도 최후 종착지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이라면 매우 비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최후 종착지는 영광스러운 하늘 나라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어떻게 예비하셨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새 하늘과 새 땅(21:1-8). 이 부분은 20:11-15절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두 부분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의 두 측면을 보여줍니다. 첫째는 부정적인 측면인데, 악인들과 하나님의 모든 원수들이 받을 형벌입니다. 다음은 긍정적인 측면인데,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에 대한 보상입니다. 20:11-15절은 상급에 관한 내용은 한 구절이고, 나머지 구절은 처벌을 강조하는 반면, 21:1-8절은 심판에 관련된 내용은 한 구절이고, 나머지 구절은 상급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목적은 단지 원수들을 멸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영원히 함께 살 수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1a절은 말합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이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이사야의 비전에서 인용한 것인데, 그곳은 기쁨과 즐거움이 지배하는 곳입니다(사 65:17-18). “new”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시간의 순서를 가리키는 “neo”가 아니라, 질이나 본질에 있어서 새로운 것을 나타내는 “kainos”입니다.1 이것은 옛 것을 완전히 파괴하고 무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옛 것을 새로운 것으로 변형시키는 것을 암시합니다. 사도 바울의 몸의 부활에 대한 가르침은 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우리의 육신은 이 땅에서 살기에 적합하지만, 다가올 세상에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고전 15:48-50). 우리는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새 하늘과 새 땅에 살기에 적합한 새로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옛 하늘과 옛 땅은 새로운 것으로 변모할 것입니다. 1b절은 말합니다.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이 말은 새로 창조된 곳에 물이 없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생명수의 강이 그 성의 길 가운데로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22:1-2). 오히려 그 말은 모든 악이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바다”는 우주적인 악과 혼돈과 우상 숭배의 기원을 상징하는데, 그곳에서 짐승(13:1)과 죽은 자들(20:13)이 나타났습니다. 한마디로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악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환상을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놀랍고 경이로울 것입니다.
이제 요한에게 주신 하나님의 환상은 거룩한 도시인 새 예루살렘으로 옮겨갑니다. 그 곳은 남편을 위해 아름답게 차려입은 신부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신부에게 있어 결혼식 날은 가장 축복받고 행복한 날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허영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신랑을 위해서 가능한 한 자신을 아름답게 단장합니다. 이 신부는 교회, 곧 속량함을 받은 사람들을 말하고(14:3; 19:7-8), 신랑은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을 말합니다. 신부는 하나님께로부터 내려 오는데, 하늘에서 은혜롭고 아름답게 내려옵니다. 이 축복받은 결혼식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의 완성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가장 큰 축복은 3-4절에서 묘사된 대로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보좌로부터 나오는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3a). “보라”라는 단어는 명령형입니다. 이는 우리의 주위를 환기시키는 것으로, 이제 하나님의 장막이 그의 백성 가운데 함께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더 이상 분리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은 완벽하고 영원한 연합을 하게 됩니다. 이는 낙원의 완전한 회복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은 에덴 동산의 낙원의 환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곳은 물리적으로, 감정적으로, 영적으로 완벽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오염도, 자연 재해도, 미움도, 폭력도, 불의도, 가난도, 배고픔도 없었습니다. 그 곳은 생명과 기쁨, 사랑과 평화로 가득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곳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셨고, 그들을 보호하셨고, 그들과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했을 때, 그는 낙원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특권을 잃게 되었습니다. 죄와 죽음의 권세가 세상에 들어왔고, 모든 것이 파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 위해 길을 내셨습니다. “거하다”는 단어는 “장막” 혹은 “성막”을 의미하며,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함께 거하신 처소를 상기시켜 줍니다. 이는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속량하신 후 장막에서 그들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후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은 성막이 되었고, 그 후에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거기에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사하셨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는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고, 그들은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역사 내내, 하나님은 그들에게 매우 은혜로우셨고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불순종했고 우상 숭배의 죄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요 3:16).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신 예수님은 육신이 되셨고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요 1:14a).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으로 인생의 의미와 목적과 희망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크신 긍휼로 수많은 병든 사람들을 돌보셨고, 억눌린 자들을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상한 마음을 가진 자들을 위로하셨고 회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종류의 죄인들을 한 사람 한 사람씩 섬기셨고, 결국에는 자기 생명을 우리를 위한 대속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성전의 휘장이 둘로 찢어져 하나님께로 나아갈 새롭고 산 길이 열렸습니다(히 10:19-20). 이렇게 예수님은 성전이 되셨습니다(요 2:21). 예수님은 승천하신 후에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었습니다. 이 교제가 놀라운 것이지만 앞으로 올 것의 제한된 경험에 불과합니다. 교제가 제한된 이유는 우리는 여전히 죄악된 본성과 썩을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나라에서는 우리의 죄악된 본성은 사라질 것이고, 우리의 몸은 영광스럽고 신령한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과 매우 친밀하고 지속적인 교제를 누릴 것입니다. 유명한 영국 청교도의 지도자인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는 이 교제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없이도 완벽하게 이해할 것이고, 기록된 율법이 없이 다스림을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그의 법을 완성시키실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완전히 가르침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필요한 것을 공급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은 전혀 아무 것도 필요한 것이 없으십니다.”2
3b-4a절은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우리가 4장을 상기해 보면 하나님은 경이로우신 위엄과 영광 가운데 보좌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래서 네 생물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할 때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었습니다. 이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은 이제 온유함으로 자기 백성을 품으십니다. 하나님은 천사들에게 시키지 않고 친히 우리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이 눈물은 타락한 세상에 살면서 우리가 겪은 고통과 슬픔의 자국입니다. 이 눈물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때의 눈물이고, 가혹한 부당함을 견딘 눈물입니다. 그 눈물은 배반으로 상처난 마음의 눈물이며, 좌절과 실패와 우울과 슬픔과 죽음으로 인한 눈물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흐르는 이 눈물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울지 말라. 내가 너의 모든 슬픔을 짊어졌도다”라고 말씀하심으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 눈에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더 이상 사망이 없고 곡하는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육체적으로 감정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을 당합니다. 누가 우리의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우리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 가운데 거하실 때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심으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옛 것들이 다 사라진 놀라운 새로운 세계를 만드실 것입니다(4b).
5a절에서 보좌에 앉으신 이가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나님은 친히 만드실 새로운 창조에 대한 확실성을 보증하십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천지를 창조하셨던 그 권능으로 이제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십니다. 이는 우리가 믿기에 너무나 놀랍고 신비롭습니다. 사실 이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이를 믿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요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5b). 그 후 하나님은 “이루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6a).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나게 합니다(요 19:30).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말씀은 구속 사역(redemption work)의 완성을 나타내는 반면, 하나님의 이 말씀은 구속 역사(redemptive history)의 마지막을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원수들은 완전히 멸망당하였고,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히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하나님은 요한에게 자신이 누구신지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6b). 하나님은 주권적인 창조주요 완성자로서 우주의 시작과 끝을 초월해 계십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갑니다(롬 11:36). 하나님은 영원한 하나님으로서, 생명수 샘물을 목 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심으로 우리의 목마른 영혼을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6c). 다른 어떤 것도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7-8절은 하나님의 승리에 대한 약속과 심판에 대한 경고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2-3장에서 하나님은 이기는 자들을 축복하시겠다고 교회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승리자는 어린 양의 피를 의지하고 증언의 말씀으로써 사탄과 죄와 죽음을 이긴 사람입니다(12:11). 그들은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심지어 박해 가운데에서도 타락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자신의 자녀로서 영원한 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환영하십니다. 반면에 모든 악인들은 새로운 세계에서 배제될 것입니다. 이 악인들은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로서 이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이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그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받지 못할 것이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바된 어린 양의 신부만이 상속받을 것입니다.
둘째, 새 예루살렘(21:9-22:5). 첫 번째 부분이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의 친밀한 관계를 강조한 것이라면, 두 번째 부분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아름다운 거처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을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신다는 것과, 그가 다시 와서 그들을 영접하여 그가 있는 곳에 그들도 있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요 14:2-3). 우리의 미래의 집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살펴 보겠습니다.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요한에게 말했습니다.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9). 그 후 그는 성령으로 요한을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여주었습니다(10). 그것은 장소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백성이기도 합니다.
11-21절은 새 예루살렘의 성곽과 문과 기초석과 수치와 같은 건축구조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도시의 기본적인 특징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이 난다는 것입니다(11a). 그 곳의 찬란함은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았습니다(11b). 하나님의 광채는 이 거룩한 도시를 가득 채웠습니다. 고대 시대에 문과 성곽은 보호를 위한 역할을 했습니다. 모든 악이 소멸된 이후 그 성은 더 이상 보호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열두 문이 있는 크고 높은 성곽을 준비하셨고, 건축가로서의 지혜를 드러내셨습니다. 그 문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어린 양의 열두 사도들은 그 성곽의 기초석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는 구약과 신약의 신자들의 연합을 상징합니다(12-14).
15-17절은 성의 규모를 말해 줍니다. 성전의 지성소가 정육면체처럼 생겼듯이, 새 예루살렘도 너비와 길이와 높이가 모두 1400마일이 되는 정육면체 모양입니다. 이 성은 하늘에 1400마일을 펼치면 미국의 절반 이상 크기에 해당될 것입니다. 이는 모든 신자들이 자기의 저택을 가질 만큼 충분히 넓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 성을 다닐지 궁금할 것입니다. 우리의 부활의 몸은 자연의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기 때문에 방해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거기에는 사고가 없고 오직 완벽한 조화만이 있을 것입니다. 18-21절은 그 성이 만들어진 재료에 대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재료는 다이아몬드와 같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고, 사파이어, 마노, 에메랄드, 줄마노, 루비, 감람석, 녹주석, 황옥, 녹보석, 황보석, 자수정과 같은 각색 보석으로 꾸며졌습니다. 열두 문은 열두 진주이고, 그 거리는 금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 보석들은 함께 어우러져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아름다운 색깔들의 찬란한 배열입니다. 그 곳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할 최고의 장소입니다. 이는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성 안에서 요한은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는 하늘에 성전이 있었습니다. 그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서,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지켜주는 방패입니다. 그런데 악과 죄와 죽음이 모두 제거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완전히 변화된 이후로 이제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성전이 필요 없습니다.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계속해서 거할 것입니다. 삶이 예배이고 예배가 삶이 될 것입니다. 현재의 지구는 빛과 어두움의 순환과 해양의 조류를 생기게 하는 태양과 달에 의존합니다. 그러나 거룩한 성은 현재의 지구와는 완전히 다를 것입니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시기 때문입니다(23). 왕의 왕이 되신 어린 양께서 반역하는 왕들과 나라들을 멸하실 때, 그 나라들로부터 구속함을 입은 사람들은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 성으로 들어갈 것입니다(24,26). 그 성의 문은 결코 닫히지 않을 것인데, 이는 밤도 없고 대적도 없기 때문입니다(25).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한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고,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갈 것입니다(27).
22:1-5절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에 대한 마지막 환상은 에덴의 낙원의 완전한 회복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사실, 질적 측면에서는 새 예루살렘이 훨씬 뛰어납니다. 거기서는 사탄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인간이 더 이상 죄를 지을 가능성이 없습니다. 우리는 영생을 얻었고 영원히 하나님을 즐거워합니다.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 나옵니다(22:1). 에스겔 47장은 성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의 강을 묘사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어린 양은 새로운 세계의 중심인 성전이 되십니다. 생명수의 강은 영생을 상징하는데, 이는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 나옵니다. 그것은 멈추거나 마르지 않고 계속해서 흐릅니다. 스페인 탐험가 폰세 데 레온은 “젊음의 샘”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는 결코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여기 거룩한 성에 있습니다! 영생은 풍성하며 성의 큰 길 한 가운데로 유유히 흐릅니다.
강 좌우에는 생명 나무가 있습니다. 생명나무는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습니다(2). 생명 나무는 에덴 동산 중앙에 있었고 이는 영생의 축복을 상징하였습니다. 그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위해 공급하시는 영원한 양식을 나타냅니다. “달”(month)이라는 단어는 시간의 단위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기쁨으로 모든 영원한 것을 공급하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낙원에서 끝없이 다양한 맛있는 과일을 즐길 수 있고 많은 과일 스무디를 만들 수 있습니다. “치료”라는 단어는 망가진 것을 고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건강함을 주는 것”이나 “생명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나무의 열매는 우리를 생동감 있고 강하게 하며 에너지가 넘치고 젊게 할 것입니다. 아무도 늙지 않고 우리 모두 영원히 아름다움과 젊음을 유지할 것입니다.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 땅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 결과 죄와 다툼, 생존을 위한 투쟁과 질병, 슬픔과 죽음이 왔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세상에서는 “다시 저주가 없을 것입니다”(3a).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는 성 가운데에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을 섬길 것입니다(3b). 이 축복의 핵심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과,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4). 과거에 아무도 죄 때문에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없었고, 또 그 얼굴을 보고 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맞대고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1:16b절은 “예수님의 얼굴이 해가 힘있게 비치고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너무 빛나서 우리에게 끝없는 기쁨을 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기뻐하는 것 같이, 예수님도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스바냐 3:17절은 말합니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보는데 질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를 영원히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우리의 이마에 있을 것이며 우리를 그의 보배로운 소유로 인치실 것입니다. 거기서는 다시 밤이 없을 것입니다(5a).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스러운 광채가 영원히 우리를 비추일 것입니다. 그리고 왕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우리는 제사장으로서 그를 예배할 것이며, 새 땅에서 그와 함께 세세토록 왕 노릇할 것입니다(5b).
우리는 이 세상에서 바이러스 대유행병과 인종 갈등, 폭동과 정치적 소용돌이와 같은 많은 시련 가운데 처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 위해 오실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나라에 대한 비전은 순례자로서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큰 희망을 줍니다. 그것은 시련과 고난 가운데에서 기쁨과 위로를 줍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섬길 영적인 열정을 갖도록 해 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자라도록 격려해 줍니다. 그것은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우리를 깨끗하게 해 줍니다(요일 3:3). 무엇보다 이 희망을 가지고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의 나라에 대한 영광스러운 비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이 희망을 붙들고 문제 많은 세상에서 예수님을 증언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