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지어다, 그가 오시리라
요한계시록1:1-20
요절: 1: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많은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계시록의 예언을 해석함으로써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아 내고자 하는데 매우 열정적입니다. 그들은 경제와 정치에 관한 숨은 진리를 찾기 원합니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오류에 빠져 잘못된 길로 갈까봐 계시록을 공부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런 접근은 그 어떤 것도 적절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계시록을 공부할 때 이 책의 요점을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계시록은 왕이요 심판주로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것과, 자기 백성과 함께 나눌 새 하늘과 새 땅을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마음에 새길 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의미있는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은, 악을 선하다고 하고 선을 악하다고 할만큼, 매우 무질서하고 도덕적으로 혼란스럽습니다. 최근 홀마크 TV 채널과 같은 기독교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기관들이, 살아 남기 위해 타협하도록 악의 세력들에 의해 지속적인 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이는 미국이 소돔과 고모라가 갔던 방향으로 떠내려가고 있다는 징조입니다. 진리가 왜곡되면서 성적 타락과 불의와 폭력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진리의 편에 선 그리스도인들은 희롱을 당하고 박해 받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분위기에 예민해져서 몸을 사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이 왕이요 심판주로서 다시 오신다는 진리를 알도록 기록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원수들은 심판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이 희망은 우리에게 악의 세력에 대한 승리의 확신을 줍니다.
1장은 영화로우신 예수님에 대한 환상이 어떻게 요한에게 임하게 되었는지, 또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 환상을 교회들에게 보내셨는지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이 환상이 우리에게 왔습니다. 우리가 영화로우신 예수님을 볼 때 모든 것이 달라지게 됩니다. 이 시간 영화로우신 예수님을 보고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3). 1a절은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계시”라는 단어는 ‘공개하다’, ‘베일을 벗다’라는 의미인 헬라어 “apocalypsis”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계시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냅니다. 그것은 사탄으로부터 오는 숨은 악의 세력을 드러내고, 또 하나님의 심판과 사탄에 대한 승리를 드러냅니다. 궁극적으로 이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통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위엄을 드러냅니다. 이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 계시는 인간의 마음에서 생겨난 것도 아니고, 인간의 노력이나 이성으로 알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인데, 예수님은 이를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으셨습니다(1b). 이 신적 기원은 우리로 하여금 이 계시가 신뢰할 만한 하고 진짜라는 확신을 갖게 해 줍니다. 예수님은 그의 천사를 보내어 그의 종 요한에게 알게 하셨습니다(1c). 요한은 하나님이 주신 환상을 보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을 들었습니다(2). 요한은 단순하게 그가 보고 들은 것을 증언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계시가 우리에게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자신만의 고유한 계시를 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 외에 어떤 종류의 경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도 요한의 증언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참여할 수 있고, 하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3절을 큰 소리로 읽어 보겠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이 복은 계시록에서 선포된 일곱 가지 중 첫 번째 복입니다. “복이 있나니”라는 단어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행복과 관련된 것으로 진정한 영적 기쁨과 평화를 가리킵니다. 이 복은 읽고 듣고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크게 읽는 것은 집회에서 공적으로 읽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단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공적으로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족들이나 소모임에서 나눌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고, 이로 인해 구원에 대한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왜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일까요? 왜냐하면 “때가 가까왔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의 시기가 가까왔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깨어 있도록 경고합니다. “깨어 있으라”(막 13:35,37).
둘째, 성부, 성자, 성령으로부터 오는 축복들(4-8). 이제 요한은 자신을 이 편지의 송신자로 소개하고, 수신자인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인사를 합니다. 이 인사는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과 아들, 즉 성삼위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매우 특별합니다. 성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이 편지는 은혜로 시작해서 은혜로 끝납니다(22:21). 은혜는 무조건적이고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친절입니다. 평화는 온전함과 안녕(well-being)으로 히브리어로는 “샬롬”이라고 합니다. 은혜와 평강의 축복은 박해 시대에 교회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시대가 힘들고 신앙 때문에 고난을 당할 때 은혜와 평강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어디로부터 옵니까? 어떤 인간도 단체도 국가도 우리에게 진정한 은혜와 평강을 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축복을 주시는 분이 크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축복은 엄청난 것입니다.
요한은 성삼위 하나님에 관한 몇가지 속성을 기술합니다. 하나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이십니다. 그는 현재 여기에 계시고, 과거에 거기에 계셨고, 미래에도 계신 분으로 영원하십니다. 일곱 영은 완전함과 충만함에 거하시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은혜의 영이시고, 믿는 자의 삶 속에 평강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히 10:29; 갈 5:22). 축복이 성삼위의 세 분의 위격로부터 온 것이지만, 요한은 예수님께 초점을 맞춥니다. 곧 예수님이 누구시고, 그가 하신 일이 무엇이며, 그가 하실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5-7).
예수님은 충성된 증인이십니다. 충성된 증인은 아무리 값비싼 대가를 치루더라도 항상 진실을 말하고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요 18:37). 예수님은 충성스러운 증인의 가장 좋은 본이 되십니다(딤전 6:13).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가장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 이는 부활로 말미암아 그가 만물의 으뜸이 되시고, 죽음을 이기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골 1:18). 예수님은 세상의 왕들을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대통령이나 시장이나 상사 등과 같은 세상 권세자들에 의해서 다스려진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국내외적인 사건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투쟁에 항상 의미와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만유의 주권자가 되심을 기억합시다.
5b-6절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말해 줍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예수님은 만유의 주권자가 되시지만, 세상 통치자처럼 권력을 남용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세 가지 방법으로 그의 크신 권세를 사용하십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하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겪을 때,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을 때라도,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모래 위의 발자국”이라는 유명한 시에서, 시인은 해변에 두 세트의 발자국을 주목했습니다. 그 발자국은 비유적으로 자신의 것과 예수님의 것입니다. 시인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슬프고 힘든 시기에 한 세트의 발자국 밖에 없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왜 그 때에 자기와 함께 하지 않으셨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아,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고, 너를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란다…그 때는 내가 너를 업고 갔을 때란다.” 예수님이 항상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모든 일에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롬 8:37).
둘째로, 예수님은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의 노예가 되었을 때, 우리는 무력했습니다. 이 노예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값을 치루어야 했습니다. 그 죄값은 피를 흘리며 생명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피 흘려 죽으심으로 이 죄값을 완전히 치루셨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는 대부분 자신의 죄 때문에 고통합니다. 죄는 우리를 악한 생각, 정욕, 시기, 게으름, 교만, 이기심, 파괴적 습관들의 노예로 만듭니다. 죄는 정죄와 죄의식을 가져다 줍니다. 우리가 어떻게 죄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죄의 쇠사슬을 끊으시는 예수님의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실로 어떤 사람도 변화시키고,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우리는 이 자유로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위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으로서, 그의 보호하심과 공급하심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왕이신 예수님을 섬기는 데 헌신하며, 형제 자매들과 사랑으로 화목하며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우리를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나누어 주고, 그들이 하나님께 나아가 올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도울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실로 엄청난 축복이요 특권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가 하신 일을 묵상했을 때, 찬송의 송영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요한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찬양한 후, 수신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앞으로 하실 일이 무엇인지 주목하도록 권면합니다. 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예수님의 재림은 계시록의 중심 주제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약속하신 대로, 큰 능력과 영광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막 13:26). 해와 달과 별들은 빛을 잃고, 창조세계는 칠흙같이 어두워질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영광의 구름 중에 나타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찬란한 광채는 해보다 더 밝게 빛나면서 구름을 덮을 것입니다. 그가 오시면 “모든 눈이 그를 볼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초림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재림은 한쪽 구석에서 일어나거나, 조용히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인 사건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한 종으로 오시지 않고, 온 인류의 왕이요 심판의 주로 오실 것입니다.
“오시리라(is coming)”라는 동사의 시제는, 그가 이미 오시기 시작했고, 오고 계시는 중이심을 가리킵니다. 그의 오심은 임박했습니다. 현재 이 순간에도,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께 돌이킴으로 구원을 받을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이는 마치 노아의 방주의 문이 최후의 순간까지 열려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방주의 문이 닫힌 것과 같이, 예수님이 오시면 구원받을 기회는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마 25:10; 눅 17:30). “그를 찌른 자들”은 그가 오시는 것을 보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슥 12:10). 그리고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할 것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로서, 최후의 심판의 때에 당할 운명으로 인해 애곡할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경고로 엄중한 벌을 받았지만, 최후의 순간까지도 회개하기를 거절했습니다(9:20,21; 16:9,11,12).
예수님의 심판은 의롭습니다. 요한은 “그러하리라 아멘” 하고 말함으로 이를 확인했습니다. 모든 악과 불의를 멸하기 위해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좋은 소식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러하리라 아멘”라고 화답할 수 있습니다. 주 하나님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고 선언하심으로, 이를 승인하는 인을 치셨습니다(8). 주 하나님은 구원의 계획을 이루시는 데 영원하시고 전지하시고 전능하십니다. 아무도, 아무 것도 영광 중에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막을 수 없습니다.
셋째, 일곱 교회 가운데 계신 영화로우신 예수님(9-20). 1-8절은 서론이었습니다. 9-20절에서 요한은 영화로우신 예수님에 관한 환상을 어떻게 받게 되었는지 말해 줍니다. 그 장면은 너무 놀랍고 경이로워서 그는 죽은 사람처럼 땅에 엎드렸습니다. 우리는 복음서 공부를 통해, 온갖 종류의 죄인들을 섬기신 겸손하신 예수님께 친숙해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하셨고, 치료하셨으며, 은혜와 긍휼로 크게 위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시 오실 때 우리가 뵙게 될 예수님의 또 다른 모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광스러우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영광스러우신 분이십니다.
9절을 보십시오. 요한은 위대한 환상을 보았지만 매우 겸손했고, 고난받는 예수님의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이해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그들의 형제요 동료로 소개했습니다(9). 요한은 도미시안 황제가 다스릴 때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 제국은 시저를 신으로 여기고 충성을 다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이 이 땅의 왕들의 통치자이심을 증언했습니다. 그가 유배를 당한 것은 바로 이 증언 때문이었습니다. 밧모섬은 그 당시 휴양지가 아니라 로마의 죄수 유형지였습니다. 요한은 정치범으로서 사회로부터 격리되었습니다. 그곳에는 휴대전화 서비스도 없었고, 식료품점이나 쇼핑몰도 없었습니다. 그는 고립되었고 외롭고 버림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돌보기에 너무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는 낙심하고 무기력과 슬픔에 빠지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주의 날에 그는 성령에 감동되어 그의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10). 그 음성은 말했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11). 이 일곱 교회는 소아시아에 있는 지역 교회의 실제 장소에서 실제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였습니다. 교회 역사에 따르면, 요한은 에베소 교회의 목자였는데, 에베소 교회는 다른 여섯 교회의 모교회였습니다. 그는 틀림없이 이 교회들의 영적 상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원래 이 편지는 일곱 교회에 보내어졌지만, 성령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포함하여 모든 교회에 이 편지를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이 자신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몸을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습니다(12). 일곱 촛대는 교회를 상징합니다(20). 이는 매일 24시간 동안 등불을 밝힌 성막 안에 있는 등잔대와 등잔을 상기킵니다(출 25:31-40). 이 등잔은 세상을 비추는 하나님의 빛을 상징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계신 교회는 세상의 빛입니다. 때로는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있어서 교회는 금 촛대와 같이 귀하고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촛대 사이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교회에 힘을 불어넣으시고 인도하십니다.
요한은 이 영화로우신 예수님을 묘사했습니다.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셨습니다(13). 그는 큰 대제사장으로 섬기고 계셨습니다.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았는데, 이는 아버지 하나님의 순결과 영원함과 지혜를 상징합니다(14a). 그의 눈은 불꽃 같았는데, 이는 모든 위선과 거짓을 꿰뚫어 보시고, 우리의 죄와 믿음과 삶의 방향에 대한 진실을 다 알고 계시는 능력을 상징합니다(14b). 아무도 진실을 감출 수 없고 그를 속일 수 없습니다.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았습니다(15a). 이 강력한 힘을 가진 발은 죄와 사탄의 권세를 포함한 모든 악의 세력들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를 말합니다. 그의 음성은 나이아가라 폭포 소리와 같은 많은 물 소리와 같았습니다(15b). 그의 말씀은 정결하게 하고, 새롭게 하며,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의 오른손에는 일곱 별이 있었는데, 이는 일곱 교회의 천사들을 상징합니다(16a; 20). 이 천사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달하는 인간의 메신저들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의 손에 일곱 별을 쥐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개인적으로 보호해 주시고, 힘을 주시고, 인도하심을 나타냅니다.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왔는데, 그의 말씀은 그것을 영접하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을 주고, 거절하는 자들은 심판하십니다. 그의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았습니다(16b). 예수님의 얼굴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을 반영합니다. 해가 밤의 어둠을 몰아내듯, 예수님은 그 임재의 찬란함으로 영적 어둠을 다 태우십니다.
요한은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알았고, 변화산에서 그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성숙한 사도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았을 때 압도당하여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17a). 위대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Summa Theologica)”이라는 위대한 작품을 썼습니다. 한번은 그가 하늘의 환상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후 그는 “내가 쓴 모든 것은 나에게 지푸라기에 불과하다”라고 말했습니다.1 우리는 모두 자신의 경험과 연구와 생각에 기초해서 예수님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의 관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로우신 예수님은 우리가 깨닫는 것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십니다. 요한계시록 공부를 통해 영광스러운 예수님을 원래 모습 그대로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능력과 큰 영광으로 다시 오실 비전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때 우리는 세상 일들로 인해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비전과 희망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온갖 종류의 난관을 극복하고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요한이 완전히 무기력하게 되었을 때, 영광스러운 예수님이 그에게 오른손을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이는 예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17b-18) 이 예수님은 모든 생명의 창조주시요 만물을 붙드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손에 시간과 공간을 쥐고 계시며, 처음부터 끝까지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그는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죄와 사망권세를 정복하셨습니다. 그는 누가 죽고 누가 살 것인지, 누가 영생을 얻고 누가 영벌에 처할 것인지 결정할 권한이 있으십니다. 그를 믿는 자는 죽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입니다. 이 살아계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우리는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종신토록 성결과 의로 그를 섬길 수 있습니다(눅 1:75). 예수님은 요한에게 모든 믿는 자들이 이 영광스러운 환상을 가질 수 있도록, 그가 본 것을 기록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19-20). 요한계시록 공부를 통해 영화로우신 예수님과 그의 나라를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Thomas_Aquinas#Final_days_and_”straw”_(1272-12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