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 View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라

by Mark Yang   06/26/2022   Revelation 4:1~11

Message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라

계시록 4:1-11

요절: 4:8b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우리는 2-3장에 나타난 일곱 교회에 대해 공부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실제 존재했던 교회들, 곧 삶의 현장에서 영적인 싸움을 싸우고 있는 실제 사람들에게 진리와 은혜의 말씀을 주셨음을 배웠습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는 큰 목자의 심정으로 교회들을 칭찬하셨고, 꾸짖으셨으며, 카운슬링하셨고, 약속과 상급도 주셨습니다. 이제 4-5장에서는, 장면이 지상에서 하늘로, 실제 삶의 투쟁에서 하늘의 비전으로 완전히 바뀝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과 죽임 당하신 어린 양에 초점을 맞춘 하늘의 예배 장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도 요한에게 왜 이 환상을 보여주셨을까요? 하나님은 세상의 악과 사악함을 심판하실 것인데, 이 계획을 6-19장에서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은 배후에서 악을 행하는 사탄을 드러내시고, 그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을 계시하시기 전에, 하나님은 요한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좀더 충분히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모든 악을 완전히 심판하실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가지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에 관한 이러한 지식은 요한과 교회들에게 최후 승리에 대한 확신을 줄 것입니다. 이런 확신으로 그들은 박해를 견디고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과 비교하여 볼 때, 우리는 매우 우호적인 상황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와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나누며 성경을 가르치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세상의 악의 위협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타협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싸우는 영적 용사가 되기를 열망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에 대한 생생한 비전이 필요합니다. 이 비전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태도와 세계관을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이 비전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문제를 극복하고, 유혹을 물리치며, 고난을 견디며, 대적하는 세력을 이길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관심을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로 돌리십니다. 우리가 하늘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모습을 얼핏이라도 보고, 그 깊은 의미를 파악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6a절에서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에 대한 그의 비전을 묘사했습니다. 6b-1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찬송을 받으시고 경배를 받으십니다.

첫째,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에 대한 비전(1-6a). 1절 상반절은 말합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요한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에 대한 비전을 보고, 일곱 교회에 전하는 그의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 후 그는 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NIV 성경은 이를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한글 개역개정도 이를 언급하지 않음), 헬라어 원문에는 “보라(behold)”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는 그가 본 것은 너무 놀라워서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하늘의 열린 문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하늘은 모호한 개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늘을 초월적인 실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땅은 이 하늘의 모형이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히 8:5; 11:16). “하늘”은 계시록에 47회나 반복되어 나옵니다.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처소입니다. 하늘은 실체이지만 인간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은 요한을 위해 하늘 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요한을 지상의 영역 너머에 있는 다른 차원의 세계, 곧 하늘의 영역을 볼 수 있도록 초청하셨습니다. 그때 요한은 나팔소리와 같은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처음 환상을 보았을 때 그에게 말씀하셨던 권위 있고 위엄있는 음성이었습니다. 그 음성은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이었습니다.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1b). 요한은 곧 성령에 감동되었고, 예언적 환상에 사로잡혔습니다(2a).

우리는 요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알지 못했고, 하나님만 아신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습니다(고후 12:3-4). 하나님은 그가 본 것을 말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셨지만, 요한에게는 말하도록 명하셨습니다. 그가 본 환상은 우리에게 하늘의 실체에 대한 통찰력을 갖게 해 줍니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거의 죽음을 체험”함으로 하늘을 방문하였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이야기는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뢰할만한 것이 못됩니다. 사실 그런 환상은 잘못된 길로 인도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사도 요한의 환상은 성경의 일부가 되었고 신뢰할만합니다. 우리는 나름대로의 자기만의 환상을 가지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이 봤다는 환상에 주목해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요한이 우리에게 말한 것을 성경 진리로 받아들여야 하며, 요한의 환상을 우리의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요한이 보았던 환상은 하늘 보좌였는데, 그 보좌 위에 어떤 이가 앉아 있었습니다(2b). “보좌”라는 단어는 계시록에서 47회(ESV) 반복되어 나오는데 이는 계시록의 핵심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40회 언급되고, 그 외에 사탄의 보좌[권좌, 왕자] 3회(2:13; 13:2; 16:10), 이십사 장로들과 신적인 존재들인 신비한 그룹들의 보좌가 4회 나옵니다(4:4[2]; 11:16; 20:4 ESV). 사탄의 보좌는 하나님의 보좌를 대적하다가 멸망당합니다(16:10). 다른 보좌들은 하나님의 보좌에 종속되었으며, 그 위에 앉은 자들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깁니다. 하나님의 보좌만이 최고의 보좌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세상의 보좌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과 위엄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하나님은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세상 왕들과 비교될 수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정의로우시고, 긍휼이 풍성하시며, 사랑과 평화로 가득차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중심이 되시고, 심판할 권세를 갖고 계십니다. 이 권세는 보좌에 의해 상징됩니다. 본문에서 모든 것이 보좌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누구시며, “보좌 주위에서” 일어난 일이 무엇이고, “보좌로부터” 나온 것이 무엇이며, “보좌 앞에” 서 있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보좌 위.” 요한은 보좌 위에 앉으신 이를 보았습니다. 요한은 다른 존재들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보좌와 관련되어 있는 존재에 대해서는 이름이나 특징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이 환상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딤전 6:16). 요한은 그가 본 존재를 벽옥과 홍보석의 모양을 가지신 분으로 묘사했습니다(3a). 벽옥은 황색이나 초록색의 투명한 것도 있지만, 대체로 밝은 선홍색의 불투명한 보석입니다. 홍보석은 홍옥수로 알려진 것으로, 밝고 붉은 다이아몬드처럼 보입니다.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이 빛났습니다(3b). 창세기 9:13-17절에 의하면 무지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자비와 은혜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심판 가운데에서도 이런 특징들을 계속해서 나타내셨습니다. 벽옥과 홍보석과 녹보석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는 단지 비유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의 언어와 형상으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보좌 주위.”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흰 옷을 입었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있었습니다(4). 이십사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의 열 두 족장들과 열 두 사도를 상징합니다. 어쨌든 보좌에 앉은 장로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광 중에 다스릴 하나님의 백성을 나타냅니다(마 19:28). 흰 옷을 입었다는 것은 그들이 순결하고 거룩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의는 그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 은혜로 입혀주는 의이기 때문입니다. 이 흰 옷은 문화속에 젖어있는 죄와 타협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더럽히지 않은 충성스러운 신자에게 주어집니다(3:4-5,18). 그들은 옳은 행실을 하며 성령을 힘입어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19:8). “금관”은 헬라어 “스테파노스 (stephanos)” 라는 단어에서 왔는데, 이는 승리자의 관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그의 고난에 기꺼이 참여하는 모든 자에게 승리의 면류관을 약속하십니다(계 2:10). 이 장로들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의와 생명과 영원한 영광으로 그들에게 관을 씌워주십니다(딤전 2:12; 딤후 4:7-8; 벧전 5:4). 고난은 잠시 뿐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영광은 영원합니다.

“보좌로부터.”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났습니다(5a). 이는 시내 산에서 보여준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상기시켜 주는데, 하나님의 영광의 무시무시한 광채를 보여줍니다(출 19:16). 그 광경이 너무 두려워서 모세도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라고 말했습니다(히 12:21). 보좌로부터 나오는 능력의 놀라운 광채는 하나님이 원수들에게 부으시는 진노를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16:18).

“보좌 앞.”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5b). 이 등불은 1장에서 언급된 촛대가 아니라, 맹렬하게 빛나는 빛으로 불타는 횃불을 말합니다. 횃불은 전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삿 7:16,20). 하나님의 일곱 영들은 그의 충만하신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마귀와의 전쟁을 벌일 준비가 되어 있고, 성령님께서는 그의 전쟁의 횃불이 되십니다. 또한 보좌 앞에는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6a). 유리바다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에 대한 예언적 환상 속에서 나타납니다(출 24:10). 그것은 창조된 우주의 “천장”과 하늘의 “바닥”입니다. 그 투명한 고요함은 지상의 혼란과 대조되어 하늘의 평화를 나타냅니다. 세상이 아무리 문제가 많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보좌 앞에는 고요와 평화가 있습니다. 놀랍게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4:16절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혼돈의 때에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긍휼과 은혜를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장면은 하늘의 법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좌에서 만유의 주권자로서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 가까이 있어 그와 더불어 통치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미래가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둘째,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6b-11). 6b-11절에서 요한은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누가 있으며, 또 보좌를 향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6b절은 말합니다.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네 생물들은 천사 그룹(cherubim)을 말하는데, 이는 가장 권세가 있는 하늘의 천사들로서, 선지자 이사야와 에스겔도 이를 언급했습니다(사 6:2; 겔 10:15). 그룹들은 경배와 전쟁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배할 때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고, 또한 하나님의 원수들과 싸우는 전쟁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이기도 합니다(8; 5:14; 6:1). “생물”이라는 단어는 그들이 하늘의 존재이지만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된 존재임을 가리킵니다.

각 생물들은 각각 고유의 특징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자와 소, 사람, 그리고 날아가는 독수리와 같습니다(7). 그들은 각기 다른 고유한 힘과 능력을 나타내는데, 이는 마치 각 도시의 스포츠 팀, 곧 시카고 베어즈, 디트로이트 라이온즈, 필라델피아 이글즈가 각기 다른 고유한 힘과 능력을 나타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또한 중요한 공통의 요소를 갖고 있습니다. 각기 여섯 날개가 있고 그 날개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였습니다(8). 아마도 그들은 이사야 6:2절에 나오는 스랍들처럼,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두 날개로는 날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눈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겪고 있는 모든 부당한 일과 박해를 보고 있습니다. 날개 안에 눈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보지 못하는 곳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항상 깨어 있고, 완전히 알고 있으며, 종합적인 식견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는 데 참여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6:1-7).

요한은 생물들을 묘사한 후,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말해 줍니다. 우리는 그들이 많은 일을 하느라 매우 바쁘다고 생각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8b). 그들은 하나님의 세 가지 속성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전능하시며, 영원하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거룩, 거룩, 거룩” 하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 번이나 반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순결과 어떤 형태로든 악으로부터 완전히 구별되시다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일부가 범죄했고, 인간들은 모두 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과 달리 어떤 악행으로부터도 더럽혀지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결코 용인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는 죄를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또 다른 면은 피조물을 초월하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20절은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피조물에 의해 매료되어 천체들과 자연, 동물, 다른 인간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식을 포함하여 자기 자신과 같은 피조물을 숭배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우상입니다. 돈이나 쾌락이나 권력을 포함하여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그 아들 이삭이 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를 시험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기꺼이 그렇게 하고자 하였고,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있음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사랑, 의로움, 정의, 긍휼, 자비와 그의 모든 속성에서 완전무결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인간의 사랑처럼 사람을 망가지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영혼을 구원합니다. 하나님은 그가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벧전 1:15-16).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다음으로 네 생물들은 전능하신 주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연약함이 없으신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강하신 분이십니다. 그의 능력은 너무나 강해서 아무도 그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하고자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힘들이지 않고 하실 수 있습니다. 그의 전능하신 능력은 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왜 죽어가고 있는 나의 사랑하는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시는가?”라고 의아해 합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헤아려 알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하고자 뜻 두신 것은 반드시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32:27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은 창조에서 잘 나타났습니다. 그는 말씀하셨고, 그 말씀은 이루어졌습니다. 그가 명령하시자, 견고히 섰습니다(시 33:9). 그는 그가 만드신 것을 다스릴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대상 29:11-12). 특별히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리심으로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를 영원히 파하신 것에서 잘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은 모든 악한 세력들에 대해 최후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며, 구원하시고, 심판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 큰 위로가 되며, 그를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두려움이 됩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생물은 또한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로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신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계십니다(9,10). 이사야 46:10a절은 말합니다.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장차 일어날 일을 미리 말씀하실 때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그를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악에 대한 심판이 반드시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그를 믿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이로서 그를 신뢰하는 자에게 영생을 주실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악한 자들을 영원한 정죄에 처하게 하실 것입니다(마 25:46).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돌릴 때마다, 이십사 장로들은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합니다. 그들은 즉시 자신들의 보좌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습니다. 그들은 완전하고 특별하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자기 자리를 포기합니다. 그들은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립니다. 그들은 모든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존귀를 드립니다. 그들은 바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굴복하며, 그 분을 주로 인정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9-11). 장로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와 능력 앞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권세와 모든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께 속하고, 주에게로 돌아갈 것을 인정합니다(롬 11:36). 그들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구속하시고 심판하실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본문의 중심 주제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성경의 중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진실로 경배받기에 합당하신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경배가 무엇입니까?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은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습니다. “경배는 우리의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 두는 것으로 그 중심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지, 그 곳에서 이탈하여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중심이신 살아계신 하나님께 응답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으며 살기 위해 경배한다. 경배하지 않는 삶은 우리를 즉흥적이고 어리석은 삶으로 이끌고, 모든 광고와 유혹과 달콤함에 자신을 맡기게 한다. 경배하지 않을 때, 우리는 거짓에 의해 조작된 삶을 살거나 속이는 삶을 살게 된다...중심이 없을 때 원을 그릴 수 없다. 경배하지 않는 사람들은 확고한 방향이나 지탱해 주는 목적이 없이 세상의 불안과 유행에 휩쓸리게 된다.1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쉼이 없고 괴롭고 불안합니다. 그들의 삶은 의미와 목적도 없이 혼란스럽습니다. 그들은 그 원인이 부모님이나 지도자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 이는 모든 것의 중심이 되시는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삶의 중심이 무엇인가?” 물어보아야 합니다. 만일 내 삶의 중심에 참되신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이 있다면, 우리는 우상숭배자들입니다. 그러나 경배받기에 합당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한다면, 우리는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의미 있고, 역동적이며, 열매 맺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우리의 삶과 가정과 교회의 중심에 모시고 경배합시다.

  1. Peterson, Eugene H., Reversed Thunder: The Revelation of John & the Praying Imagination (San Francisco: Harper & Row, 1988), p.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