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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양이 합당하시도다

by Mark Yang   06/26/2022   Revelation 5:1~14

Message


어린 양이 합당하시도다

계시록 5:1-14

요절: 5: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계시록은 주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계시하고 있습니다(1:1). 1장과 5장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중앙에 계십니다. 1장에서는 영화로우신 그리스도께서 촛대 사이에 계십니다. 5장은 그리스도의 대관식인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심판과 구속을 이루시는 능력과 권세를 받으십니다. 계시록의 나머지 부분은 이 영광스러운 사건을 축으로 일어납니다. 이 사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의 회복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 첫 사람 아담에게 이를 다스리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께 범죄했을 때, 사탄이 이 세상의 임금이 되었습니다(요 12:31; 14:30; 16:11). 그 이후로 경건치 못한 사람들, 즉 느브갓네살, 알렉산더 대왕, 쥴리우스 시이저, 징기스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아돌프 히틀러 등과 같은 자들이 권력을 잡고 세상을 통치하였습니다. 그들은 기만과 무자비한 군사력을 사용하여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행하였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뜻을 따르도록 강요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자비와 진리와 정의가 없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모두 사탄의 대리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공통적인 요소는 그들은 실패했고, 죽었고, 그들의 왕국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의로운 통치자가 세상을 지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극악무도한 통치자들의 압제 아래서 무법천지가 되고, 악이 정상적이 되고, 사람들은 불의로 고통하게 되었습니다.

5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세상을 통치하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심을 말해 줍니다. 그는 진정한 공의와 평화를 세울 것이며, 영광 가운데서 영원히 통치하실 것입니다. 그가 오시겠다는 약속은 우리에게 승리감과 경건한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참된 희망을 줍니다. 이 시간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의 대관식을 상상해 보고 그에게 경배합시다.

첫째, 두루마리를 펴시기에 합당하신 분(1-7). 1절은 말합니다.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내가 보았다(I saw)”라는 말은 5장에서 3회가 나오고, 계시록 전체에서는 35회나 나옵니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계시해 주신 시각적 이미지의 증인입니다. 이 이미지들은 시각적 형태로 복음 진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영적 실체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상상을 이용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할 때 상상력을 동원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상상력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배움의 도구입니다. 상상력은 인간의 속성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분명한 영적 조명이 없다면 상상력은 환영이 될 수 있습니다.

요한은 무엇을 보았습니까? 그의 환상은 보좌에서부터 하나님의 오른손에 있는 두루마리로 옮겨갑니다. 이 두루마리는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었는데, 이는 고대 로마의 유언장이나 계약서와 유사합니다. 두루마리 안쪽에는 상세한 내용이 있고, 바깥쪽에는 간략한 요약이나 라벨(표)이 있었습니다. 이는 일곱 개의 밀랍인으로 봉해져 있었고, 그 안에는 진본임을 표시하는 저자의 휘장이 있었습니다. 그 두루마리는 소유주의 인가 없이는 합법적으로 열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에 들고 계신 두루마리 안에 무엇이 있을까요? 그것은 체계적으로 펼쳐질 심판과 구속의 명령을 담고 있습니다.

그때 요한은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2) 그 음성은 너무도 우렁차서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심지어 땅 아래까지 울려 퍼졌습니다(3). 그 음성은 누군가 앞으로 나아와 두루마리를 취하여,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을 심판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수행하기에 합당한 자를 부르는 음성이었습니다. 이런 공개적인 도전이 모든 피조물에 울려퍼졌지만 아무도 나아오지 않았습니다. 가브리엘이나 미가엘 천사도 감히 나오지 못했습니다. 믿음의 영웅 아브라함과 모세와 엘리야나 사도들도 잠잠히 있었습니다. 요한은 이를 보고 크게 울고 또 울었습니다(4). 요한의 눈물은 온 인류의 눈물을 대표합니다. 그 눈물은 에덴에서 쫓겨나 저주받은 땅에서 얻은 첫 아들 아벨을 땅에 묻은 아담과 하와의 눈물이었습니다. 그 눈물은 외아들을 방금 잃고 슬픔에 빠진 나인 성의 이름 없는 과부의 눈물이었습니다. 그 눈물은 죄와 죽음의 냉혹한 현실과 마귀의 괴롭힘으로 인한 참담한 결과로 고통하는 모든 사람들의 눈물입니다. 만일 아무도 그 두루마리를 열지 못한다면, 인간을 위한 해결책도 전혀 없게 됩니다. 우리는 아무런 신원이나 희망이 없이 영원히 고통할 것입니다.

요한이 이 현실에 대해 생각하자 너무 슬퍼서 눈물이 샘물처럼 솟았습니다. 그때 장로 중 하나가 요한에게 말했습니다.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5). 모든 피조물 가운데 두루마리와 일곱인을 열 수 있는 단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이 누구입니까? 그는 “유다 지파의 사자”입니다(창 49:9-10). 사자의 이미지는 다스릴 힘이 있는 이미지입니다. 사자는 정글의 왕입니다. 아무도 그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을 모든 악으로부터 능히 보호하실 수 있는 강하고 힘이 센 그런 통치자를 갈망합니다. 그는 또한 “다윗의 뿌리”(사 11:1,19; 22:16), 즉 다윗 왕의 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합법적인 계승자가 되십니다. 한 마디로 그는 약속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이기셨고, 두루마리와 일곱 인을 여실 수 있습니다. 6절은 그가 어떻게 승리하실 수 있었는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6a절은 말합니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놀랍게도 요한은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이 보이는 어린 양을 보았습니다. 이는 주목할만한 역설입니다. 유다 지파의 사자, 하나님의 백성의 챔피언이 죽임 당한 어린 양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보좌 한 가운데 서 계셨습니다. “어린 양”이라는 단어는 예수님을 가리키는데, 계시록에 33번이 나옵니다(NIV). 헬라어 단어는 온순하고 연약한 작은 어린 양을 가리킵니다. 어린 양은 절대로 어떤 것도 공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린 양을 정복자와 연관시키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어린 양은 매우 특별합니다. 그는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졌는데,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을 말합니다(6b). 일곱 뿔은 그의 신적 능력의 충만함을 상징합니다. 일곱 눈은 그의 무소부재하심과 전지하심을 나타내는데, 그는 어디에나 계시고,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은 완전하심과 충만하심 가운데 계신 성령님을 나타냅니다.

요약하자면 어린 양은 능력과 지식에 있어 완전하시고, 동시에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시공간을 초월하신 분으로, 우리는 그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어린 양이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에게 둘러쌓여 가운데 서 계셨습니다. 어린 양은 무슨 일을 합니까? 7절을 보십시오. “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이제 어린 양은 두루마리에 써 있는 것을 시행하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권세를 받습니다(단 7:13-14). 이는 두루마리를 취하시기에 합당하신 어린 양의 장엄한 대관식입니다.

둘째, 경배받기에 합당하신 분(8-14). 어린 양이 두루마리를 취하시자 장면이 완전히 바뀝니다. 요한의 눈물이 그칩니다. 찬송과 경배와 송영이 전 우주로부터 터져나오기 시작하더니 이것이 고조되면서 장엄한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4장에서 두 개의 송영이 창조주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이제는 두 개의 새로운 송영이 어린 양에게 초점을 맞추어 울려 퍼지고, 그 다음에 창조주와 어린 양을 향한 마지막 송영이 나옵니다. 핵심은 어린 양이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경배를 받는 것입니다.

5장의 송영들은 세 그룹의 경배하는 자들로부터 나왔습니다. 첫 번째 그룹은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입니다(8a). 어린 양이 두루마리를 취하자마자, 그들은 모두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들은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는데, 이 향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들이었습니다(8b). 믿는 자들이 박해를 받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기도가 하찮은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금대접에 우리의 기도를 담아 놓으시고, 그것에 따라 심판하십니다. 진실로 하나님은 어린 양을 통해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경배하는 사람들은 경건한 기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노래를 어린 양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보면, 새로운 노래들은 중요한 사건을 기념하여 드려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피조물을 구속하시는 것은 역사상 가장 기념비적인 사건입니다. 이 새로운 노래의 내묭이 무엇입니까? 9-10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이 새 노래는 우리에게 몇 가지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그리스도는 죽임을 당하셨으므로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십니다(9a). “죽임을 당하다”는 말은 본문(5장)에서 세 번이나 반복되어 나옵니다(6,9,12). 이는 폭력적이고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어린 양은 매우 온순하고 얌전하여 그런 식으로 죽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어린 양은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사야는 메시아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사 53:7a). 복음서는 예수님이 끔찍하게 죽으셨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심하게 맞으시고, 채찍질 당하셨으며,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한 군인은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고 거기서 물과 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왜 이렇게 죽으셔야 했습니까? 이는 예수님을 인간의 죄를 위한 제물로 삼으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사 53:10a).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죄를 가볍게 여깁니다. 그러나 죄는 치명적인 영적 질병입니다. 그것은 코로나바이러스보다 훨씬 더 심각합니다. 죄는 사람들을 이기적이 되게 하고, 탐욕스럽게 하고, 정욕적이 되게 하며, 교만하게 만듭니다. 죄는 사랑스럽고 선량한 아이들을 사악한 불량배로 만들고, 성적 약탈자로 만들며, 냉혹한 살인자로 만듭니다. 죄는 가정과 공동체와 국가를 파괴시킵니다. 인간에게는 이 죄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린 양을 희생하심으로 길을 만드셨습니다.

이 희생이 왜 유일한 길이 됩니까?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정의롭고 의로우십니다. 그는 결코 죄를 용인하시거나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죄는 공정하게 처벌받아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 6:23a). 그러므로 죄인들은 자기 죄 때문에 죽어야 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죽음 후에 심판과 영원한 정죄가 있다는 것입니다(히 9:27; 계21:8). 이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공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사랑이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이런 공의와 사랑 간의 모순이 어떻게 해결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그의 공의와 사랑을 조화시키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이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아무도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조화킬 수 없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완벽하게 이를 이루셨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경배받기에 합당하십니다.

우리는 9b-10절에서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의 능력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사람들을 자기 피로 사셨습니다(9b). 세상에는 수많은 인종과 언어와 문화가 있지만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현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죄와 죽음과 마귀에게 속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속박은 돈이나 과학, 교육이나 선한 행위과 같은 어떤 인간적인 수단에 의해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직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의 피만이 죄의 속박을 끊고 사람을 자유케 합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이는 인종이나 사회적 지위나 어떤 인간적 차이들과는 상관 없이, 믿는 사람은 누구에게든지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갈 3:28). 예수님을 통해 누구든지 새 생명과 하늘의 기쁨과 평화와 자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고 경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하나님 안에서 인간의 정체성과 인생 목적을 회복시켜 줍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시고 하나님을 섬기게 하십니다(10). 예수님을 믿는 자는 나라와 제사장들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이 정체성에는 민족적 요소나 어떤 인간적 차이도 없습니다. 모든 신자들은 가장 우선적으로 왕되신 예수님의 신하들이요 그의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구별된 제사장들입니다. 우리는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우리 하나님을 섬기는 엄청난 특권을 갖게 되었습니다(눅 1:74-75). 이는 우리에게 의미와 기쁨을 줍니다. 우리는 현재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장차 지상에서 왕노릇할 것입니다(딤후 2:12). 우리는 모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왕같은 통치자가 될 것입니다.

경배자들의 두 번째 그룹은 하늘의 천사들입니다. 11절은 말합니다.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천사들의 수가 너무 많아 셀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아름다운 화음으로 찬양하는 거대한 합창단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찬송합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12) 어린 양은 그의 신성에 대해 일곱 겹의 찬사를 받으셨는데, 이런 경배를 받기에 전적으로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경배에서 어떤 의무감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기꺼이, 기쁨으로, 그리고 전심으로 경배합니다.

경배자들의 세 번째 그룹은 하늘에서와 땅에서와 땅 아래와 바다에서와 또 그 가운데 있는 모든 피조물입니다. 그들은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13). 이는 어린 양의 피로 구속받은 피조물들이 모든 영역에서 찬양하는 우주적인 찬양 노래입니다. 구속받은 늑대와 어린 양이 듀엣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구속받은 사자와 송아지가 “으르렁”, “음메”하며 아름다운 화음으로 찬양합니다. 심지어 맹독을 가진 코브라도 구속함을 받아 어린 아이가 어떤 위험도 느끼지 않고 독사의 굴에 손을 넣고 놀 수 있을 정도로 친하게 지냅니다. 이 모든 구속함을 받은 피조물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어린 양을 경배합니다. 네 생물들은 “아멘”하며 응답합니다.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합니다(14).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도 또한 영원히 감사와 찬송의 제사를 드림으로 아버지와 어린 양을 찬양해야 합니다.

이 경배의 장면에 대해 반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찬양입니다. 수 세대를 걸쳐 가장 훌륭한 몇몇 찬송가들은 이 구절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헨델의 메시야입니다. “죽임 당하신 어린 양(Worthy is the Lamb that was slain)”과 “아멘” 합창은 바로 5:9,11-12에 근거한 것입니다. 위대한 찬송가 “주 예수 이름 높이어(All hail the power of Jesus’ name)”는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성도”에 참여하게 하게 합니다. 또한 익숙한 찬송인 “면류관 가지고 주 앞에 드리세(Crown him with many crowns, the Lamb upon his throne)”라는 찬송가도 바로 이 구절에 영감을 받아 지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크리스 톰린(Chris Tomlin)의 “엎드려 그의 발 앞에 면류관 드리네 (We fall down, we lay our crowns at the feet of Jesus)”를 포함하여 현대적인 찬양(CCM)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 구절에 기초해서 새로운 노래를 지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어린 양은 우리 죄를 위해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어린 양께 경배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