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양, 우리의 목자
요한계시록 6:1-8:5
요절: 7: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여러분은 “요한 계시록”이라는 말을 들을 때 무엇이 떠오릅니까? 종말? 666? 또는 144,00명? 천년왕국? 짐승들? 계시록의 중심 단어가 “보좌”, “어린 양”, “경배”, “증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단어를 떠올리는 사람은 드뭅니다. 많은 책들과 영화들, 예를 들어 “남겨진 사람들(Left Behind)” 시리즈와 같은 것들이, 계시록이 실제로 말하고 있는 것을 드러내기보다, 계시록 내용의 이미지를 대중화시켜 놓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입견을 가지고 요한계시록을 공부할 위험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계시록의 이미지와 상징들, 그리고 숫자에 대한 암호 해독과 같은 자세한 부분을 해석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소비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핵심을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계시록을 통해 하나님의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찾는 대신에, 불안해 하고 두려워하며 괴로워합니다. 우리는 묵시 문학이 고난받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준다는 것과, 또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되고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이 편지가 역사적 맥락 속에서 먼저 일곱 교회에게 주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동시에 이곳에 쓰여진 말씀들은 성령께서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에게 말씀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해석하기 힘든 많은 이미지와 상징들과 숫자들이 나와 있는 6-22장 공부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역사적으로 요한계시록 해석에 관해 네 가지 접근방법이 있습니다. 과거적 해석, 미래적 해석, 역사적 해석, 이상적 해석 방법입니다.1 각각의 접근방법은 그 나름대로의 강점과 약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각 접근방법의 강점들에 주목하며 요점에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에 관한 내용입니다. 주요 등장인물은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입니다. 어린 양은 인을 떼시고 심판주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쏟아 놓으십니다. 또한 어린 양은 목자로서 그의 백성을 돌보십니다. 이 시간 어린 양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어린 양께서 하나님의 진노를 쏟으시다(6:1-17). 우리는 세상이 모든 면에서 점점 더 나아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은 말세의 징조와 그의 재림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세상은 점점 악화되어 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4장, 막 13장, 눅 12:5-36). 말세에는 거짓 평화를 선포하는 거짓 메시아들이 나타납니다. 곳곳에서 전쟁과 전쟁의 소문과 지진과 전염병과 기근이 있을 것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이런 징조들 중 하나인데 전 세계에 퍼져 많은 사람들을 공포에 빠뜨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원인을 알 수 없는 재앙이 발생했는데 이는 동아프리카를 휩쓴 2천억 마리가 넘는 메뚜기 떼들이 홍해를 건너 남중국까지 이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메뚜기 재앙으로 인해 소말리아는 국가 긴급사태를 선포했습니다. 최근 강력한 토네이도가 내쉬빌 시를 강타하여 25명의 사망자를 내었고 건물들이 처참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상황을 새 생명이 태어나기까지 점점 더 견디기 힘든 해산하는 여인의 산통에 비유하셨습니다. 이러 모든 징조들은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에 앞서 일어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이 최후의 심판이 어린 양께서 인을 하나씩 하나씩 떼시면서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건들은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예언하신 패턴을 따릅니다.
5장에서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은 두루마리를 취하시고 그 인을 떼시기에 합당하시며,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모든 피조물로부터 경배받기에 합당하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6:1-8:5에서 이 어린 양이 일곱 인을 하나씩 하나씩 떼십니다. 예수님은 지상에 계실 때 우리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셨습니다. 이제 이 어린 양은 모든 피조물을 심판하시는 심판주가 되십니다. 그가 심판을 집행하실 때 하늘에서 지상으로 우리의 관심이 옮겨집니다. 어린 양께서 첫째 인을 떼실 때 생물 하나가 흰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을 “오라”고 부르셨습니다. 그 말을 탄 자는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였습니다(1-2). 아마 그는 정치 지도자나 혹은 군부 지도자나 사탄의 세력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기만과 거짓 평화로 세상을 정복하려고 합니다. 둘째 인을 떼시자 붉은 말이 나왔습니다. 그 말을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였습니다. 그는 큰 칼을 받았습니다(3-4). “그”는 수많은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는 전쟁을 상징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전쟁과 전쟁의 소문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한 것과 상응합니다(막 13:7-8a).
셋째 인을 떼실 때 검은 말이 나왔습니다. 그 말을 탄 자는 손에 저울을 가졌습니다(5). 저울은 상거래를 상징합니다. 밀 2파운드(한 되)로 한두 덩이 분량의 빵을 만들 수 있습니다. 밀 2파운드(한 되)를 사기 위해서는 하루 품삯이 필요합니다. 밀과 보리의 비싼 가격은 전쟁으로 인한 기아를 가리킵니다(6). 넷째 인을 떼실 때에 넷째 생물이 청황색 말을 불렀습니다.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었으며 음부가 그 뒤를 따랐습니다 (7-8a). 그들은 전쟁(검)과 기근과 역병과 땅의 들짐승들을 가지고 세상 사람 사분의 일을 죽일 권세를 받았습니다(8b). 검(붉은 말)과 기근(검은 말)과 재앙(청황색 말)에 의한 심판은 함께 일어나고 점점 더 악화되어 갑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인해 진노를 다 쏟지 않고 누그러뜨림으로 땅의 사분의 일만이 멸망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첫 네번의 인들을 떼자 나오는 사나운 말 탄 자들은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어린 양의 통치 아래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 탄 사람들은 어린 양의 대리자인 생물들에 의해 부름을 받습니다. 사실 어린 양은 땅에 임할 모든 심판을 주관하시는 주권자가 되십니다.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과 태풍이나 지진, 그리고 전 세계 유행병은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죄로 인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우리는 이런 심판에 대해 놀라서는 안되고, 주권자 되신 어린 양 예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다섯째 인을 뗐을 때 왜 땅에 심판이 임하게 되었는가 하는 이유가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기 위함입니다(9). 우리는 신자들이 로마의 통치 하에서 박해와 심지어 순교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증거를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그리스도의 편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역사 이래 수많은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증언함으로 인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들을 죽인 사람들은 다시는 그들을 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신자들은 호소할 곳도 없이 불의와 잔학함의 희생자들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은 울부짖습니다.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10).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참되십니다. 하나님은 불의를 한없이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당장 그들의 억울함을 갚아 주지 않으시지만, 그의 시간표에 따라 반드시 갚아 주실 것입니다.
그들은 각각 흰 두루마기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승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들은 좀 더 기다리되 동료 종들과 형제들이 그들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11). 이는 하나님께서 순교자의 피를 통해서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시는 거룩한 계획을 갖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 사마리아와 안디옥에 복음이 전파되었고, 또한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한 사도 바울이 회심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요즈음 북한과 중국과 회교권에서 믿음을 지키고 있는 많은 형제 자매들이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라고 울부짖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때에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고난을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복의 근원으로 삼으실 것입니다.
여섯째 인을 떼시자 큰 지진이 있었습니다. 그때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졌습니다(12-14). 이는 예수님의 재림 바로 이전에 나타나게 될 세상의 종말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막13:24-26). 요즈음 많은 거짓 메시아들이 나타나서 고난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거짓 희망을 심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적을 행하며, “내가 재림한 메시아다”라고 주장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속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오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우리는 많은 대격변의 징조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세상의 종말이 될 것입니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을 것입니다. 그들은 산들과 바위에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15-17).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은 견디기 힘듭니다. 그때는 아무도 그 앞에 설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 전이나 후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가볍게 생각하고 심판을 농담으로 여깁니다. 그들은 “친구들도 모두 나와 함께 지옥에 있을 거야. 우리는 함께 재미있게 지낼 수 있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심판의 메시지를 농담으로 여긴 롯의 사위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유황과 불이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릴 때 멸망을 당했습니다(창 19:14,24-25). 사도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 3:10-12a).
둘째, 어린 양은 그들의 목자가 되실 것입니다(7:1-8:5). 우리는 6장 마지막 부분에서 “누가 어린 양의 진노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7장은 오직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만이 감당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7장은 하나님의 심판 사이에 등장하는 세 가지 막간계시(interludes) 중 하나인데(7:1-17; 10:1-11:14; 20:1-6), 이는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중에 요한은 천사들이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았습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구속함을 받은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을 받기까지 땅의 사방의 바람(심판)을 붙잡아 두고 있었습니다(1-3).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은 그의 종들의 이마에 있었습니다. 이 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말합니다. 성령께서는 그들을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로 표시하십니다. 성령께서는 구속의 때까지 자기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고후 1:22; 엡 1:13; 4:30).
4절에서 요한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에서 인침을 받은 수가 144,000이라고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숫자가 믿는 유대인들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숫자가 “참 이스라엘”, 즉 교회를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어린 양의 피로 속량함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144,000이라는 숫자는 14:1-4에도 나오는데, 그 숫자는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 숫자는 상징적입니다. 이 숫자는 12족장에 12사도를 곱하고 거기에 1,000을 곱한 숫자로 전 세계적으로 속량함을 받은 백성들의 수가 무수히 많다는 것을 상징합니다(7:9; 21:12,14).
5-8절에는 이스라엘 지파의 목록이 나옵니다. 이 목록은 구약의 것과 상당히 다릅니다. 그것은 출생 순서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장자인 르우벤 지파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메시아가 나온 유다 지파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단은 생략되어 있고, 에브라임 대신에 요셉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마 단과 에브라임은 우상숭배를 좋아했기 때문에 생략된 것 같습니다(삿 18장; 암 8:14; 호 4:17). “…지파 중에”라는 말이 반복되어 나오는데, 이는 정복전쟁을 위해 군사를 조직하기 위한 이스라엘의 인구조사에서 나타난 표현을 상기시킵니다. 참이스라엘, 즉 교회는 하나님을 위해 전투할 준비가 된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통해 승리하신 지도자요 왕이신 어린 양이 싸우신 것과 같이 싸울 것입니다. 그들은 고난을 통해 믿음을 지키고 증인의 삶을 살므로 그들의 대적과 마귀와 그의 무리들을 이길 것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입니다(14:4)2.
9절부터는 장면이 지상에서 천국으로 바뀝니다. 요한은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를 보았는데, 그들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왔고, 보좌와 어린 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상에 있을 때 교회의 전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극심한 고난 가운데에서 믿음을 지켰고 예수님을 증언했으며, 사탄의 세력과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이제 그들은 순결과 승리를 상징하는 흰 두루마기를 입고 하늘에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어린 양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10). 천사들과 장로들과 생물들이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일곱 송영으로 경배하였습니다.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11-12).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은 백성들은 우리 하나님과 구원의 근원이신 어린 양께 찬송과 감사를 드리고, 모든 피조물들은 우리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장로 중 하나가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13) 요한이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였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모든 지식의 궁극적인 근원이 되심을 고백했습니다. 그때 장로가 말했습니다.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14). 비록 그들은 죄로 더럽고 얼룩져 있지만 단순히 예수님을 믿었을 때 그들의 죄가 예수님의 피로 씻겨졌습니다. 그들은 깨끗한 흰 옷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믿음 때문에 큰 환난을 겪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두려움이나 고난을 피하기 위해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붙잡았습니다. 그들은 주와 복음을 위해 기꺼이 자기 목숨을 드리고자 했고, 마침내 승리의 모습으로 등장했습니다(막 8:35).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서 하늘 성전에서 밤낮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특별한 특권을 부여받았습니다(15a). 하나님은 친히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고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실 것입니다(15b-16). 그들은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1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여기서 놀라운 것은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자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지상에서 예수님의 주된 사역은 목자로서 잃어버린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휴식시간을 갖기 위해 외딴 곳으로 배를 타고 갔습니다. 그때 5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떠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가시고자 하는 곳으로 달려가서 예수님보다 앞서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참 부담스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자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막 6:30-44). 예수님은 이렇게 수많은 무리들을 섬기신 후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하늘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주권자 하나님으로서 보좌 가운데 계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전히 자기 백성들의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그는 우리를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셔서 우리를 충만히 만족시키십니다.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고백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진실로,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우리 인간은 어릴 때이든, 나이가 들든, 심지어 하늘에 있든, 목자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로 지금 그리고 항상 예수님의 손을 붙잡아야 합니다. 마더 사라 베리는 종종 “예수님은 나의 목자이십니다. 저는 인생 끝날까지 예수님의 손을 붙잡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곤 합니다. 우리 모두 인생 끝날까지 예수님의 손을 붙잡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어느 누구도 우리를 예수님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습니다.
8:1-5절에서 어린 양이 일곱째 인을 떼셨습니다. 그때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하였습니다. 최후의 심판은 너무 무시무시하여 하늘의 모든 것들이 정적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 앞에 일곱 천사가 서 있어 일곱 나팔을 받은 것을 보았습니다(2). 이는 하나님께서 다음 단계의 심판을 베풀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이 겪는 불의에 대한 반응으로서 다섯째 인이 열린 후에 일어났던 것과 비슷합니다. 일곱째와 다섯째 사이의 차이점은 다섯째 인은 순교자들의 기도를 말하는 것인 반면, 여기서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기도를 사용하셔서 심판을 시행하신다는 것입니다(3-5). 이런 이유로 인해 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눅 18:1).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어린 양은 심판주가 되시고 또 목자가 되십니다. 요사히 우리는 세상에 만연하고 있는 질병과 흔들리는 경제와 정치적 격변과 자연 재해를 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심판의 시작입니다. 최후의 심판이 올 때 아무도 그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대의 종말의 징조를 경고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은 어린 양께서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시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보존하여 주십니다. 이는 우리가 고난을 면제받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고난이 오는 것은 우리를 정화하기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피하기 위해 죄악된 문화와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죽기까지 복음 진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어린 양께서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보좌로 이끄시며,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을 영원히 경배하고 섬기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