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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Ⅱ 부:마가복음 11:1-19(나귀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

by Mark Yang   08/15/2019   Mark

Message


마가복음 Ⅱ 부 제 6 강


나귀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


말씀 : 마가복음 11:1-19
요절 : 마가복음 1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우리는 지난 강의에서 가장 높고 영화로우신 예수님께서 가장 낮고 천한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겸손과 온유로 인생들을 섬기신 것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특히 세상적이고 정치적이고 인간적인 야심이 강한 제자들을 오래 참으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쓰실만한 영적인 사람이 되기까지 온갖 해산의 수고를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종의 생활을 하시느라 그 모습이 마치 마른 넝쿨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전혀 다른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주(主)로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시고 또 많은 무리들의 환호와 찬양을 받으면서 왕으로서 영광스럽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또한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를 무섭게 저주하시고, 채찍을 휘두르시며 성전을 깨끗케 하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심정에 예수님을 주요, 왕으로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예수님의 승리의 입성 (1-11)

첫째, 만유의 주 예수님 (1-6)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정치적으로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군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구약의 예언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죄를 대속하고자 죽으시기 위해 입성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사단의 권세를 멸하시고 인간을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승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승리의 입성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시자 친히 입성을 준비하셨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 일행은 예루살렘에서 약 2마일 떨어진 감람산 동편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은 조그만 시골 동네였습니다. 베다니는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남매가 살고 있는 곳으로서 예수님께서 자주 들르셔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식사도 하신 곳입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상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너희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2). 남의 나귀를 주인의 허락도 없이 끌고 오라니 이것은 분명히 절도 행위입니다. 순진한 제자들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곧 그 이유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3). 예수님은 “주가 쓰시겠다”(The Lord needs it)라고 말하기만 하면 두말하지 않고 흔쾌히 허락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이때까지 자신을 ‘인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다니엘서에 예언된 메시야의 칭호로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시기 위해 스스로 부르신 칭호입니다. 그러나 11장부터는 공공연히 자신을 ‘주’(The Lord)라고 칭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왕으로서 입성하시고 또 성전을 깨끗케 하심으로 성전의 주인으로 행세하셨습니다. 12장의 포도원 농부의 비유에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하시고, 백성들에게는 다윗의 주가 되심을 가르치셨습니다(12:37). 13장에서는 큰 권능과 영광으로 재림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13:26). “주가 쓰시겠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바로 만유의 주이심을 가르쳐 줍니다. 제자들은 이때까지 머리 둘 곳이 없으실 만큼 가난하고 초라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본래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본래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유를 그 뜻대로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만유의 주가 되십니다. 요한복음 1:3절은 이를 잘 말해 줍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골로새서 1:16절은 말합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이 말씀에서 볼 때 예수님은 세상의 주인으로서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귀의 진짜 주인은 예수님이시고 나귀의 소유자는 청지기에 불과함을 알 수 있습니다. 나귀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물질 즉, 집이나 차, 옷 등이 다 예수님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명, 자식까지도 내 것이 아니라 다 예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후 인간으로 하여금 이 세상을 잘 관리하라는 청지기 사명을 주셨습니다(창1:28,2:15).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잘 관리하여 주인에게 유익을 남겨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원할 때는 다 내어놓아야 합니다. 청지기는 소유에 대해서 권리 주장을 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우리는 물질의 청지기, 생명의 청지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일정 기간 동안, 혹은 60년, 혹은 80년 동안 생명의 청지기로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과 재능과 능력을 다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다가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생명의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주님께로부터 왔다가 생명의 주인인 주님께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날 때 빈손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이것 저것을 누리다가 이 세상을 떠날 때도 빈손으로 가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에 불과함을 잘 말해 줍니다. 내게 있는 물질이나 시간, 생명은 다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주께서 쓰시겠다 하면 언제든지 기꺼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 시간이나 물질을 쓰면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지만 주님을 위해 쓰면 손해 의식에 시달릴 때가 있습니다. 이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자기 것인 양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볼 때 우리의 소유나 생명을 주님께 드려 주님께 쓰임 받는 것처럼 영광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역사상 하나님께서 쓰신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다 “주께서 쓰시겠다”하실 때에 자신의 소유와 재능과 전 생애를 기꺼이 주님께 드린 사람들입니다. 주님께 쓰임 받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말할 수 없는 은혜요 특권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나귀 주인은 나귀 새끼를 잠깐 빌려 드렸다는 것만으로도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또한 나귀 새끼는 나귀 역사상 가장 축복 받은 나귀가 되었습니다. 저는 올해에 목자 생활한지 만 20년이 됩니다. 저는 지난 20년동안 부족하지만 나의 청춘을 주님께 드려 주님께 쓰임 받은 것이 얼마나 복되고 가치 있고 영광스러운지 주님께 깊은 감사를 드릴뿐입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분들이 자신의 소유와 청춘을 기꺼이 주님께 드려 희생적으로 주님을 섬깁니다. 그러면서 그 내면에 기쁨이 충만합니다. 이는 주님께 쓰임 받는 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위해 쓴 것은 지내 놓고 보면 다 허무하고 하나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드린 것은 다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고 복되고 영광스럽습니다. 주님께 드린 것만이 우리의 면류관이 됩니다. 우리는 자신을 주님께 드릴뿐만 아니라 양들이나 자식도 주님께 쓰임 받도록 해야 됩니다. 이것이 그를 살리는 길이요 가장 잘 돕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은 두 제자는 이를 어떻게 수행했습니까? 사실 이 사명은 이해가 잘되지 않는 이상한 것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불합리한 것을 시킬 때 반발심이 생기고 마음으로부터 순종하기 힘듭니다. 또 이 사명에는 위험이 따릅니다. 제자들은 제자 경력 3년만에 나귀 절도범이란 낙인이 찍혀 쇠고랑을 차고 감옥에 갈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령관의 명령에 단순히 순종하는 잘 훈련된 군인과 같이 예수님의 명령에 단순히 순종했습니다. 4-6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담대하게 그것을 풀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호통을 쳤습니다. “왜 남의 나귀 새끼를 허락도 없이 풀어 가는 거요?” 제자들은 절도 현행범으로 꼼짝없이 붙잡혀 감옥에 가는 것이 아닌가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대답했습니다. “주께서 쓰시겠답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그들의 태도가 누그러지더니 “아! 그래요. 주께서 쓰시겠다니 그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어서 가져가세요.”하며 기쁨으로 허락했습니다. 제자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말씀에 단순히 순종했을 때 말씀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깊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머리로 알 수 없고 순종을 통해서만이 알 수 있습니다. 말씀에 단순히 순종할 때만이 우리는 믿음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고 영적인 깊은 세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상의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어떤 분이심을 보여 주셨습니까?
첫째로, 예수님의 전지성(全知性)입니다. 예수님은 맞은 편 마을에 가 보지도 않았는데도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도 아시고 주인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도 다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의 주가 되십니다. 제자들은 이때까지 예수님의 섬김과 사랑을 많이 받아 왔습니다. 그들은 언제까지나 예수님께로부터 사랑과 섬김을 받으려고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예수님의 주권을 믿고 주되신 예수님을 섬기고 경배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둘째, 나귀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 (7-11)

7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나귀 새끼를 예수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안장 대신 그 위에 걸쳐두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위에 타셨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카펫트 대신에 자기들의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폈습니다. 겉옷을 펴는 것은 왕에 대한 존경의 표시요, 종려나무 가지를 펴는 것은 왕에 대한 존경과 환영의 표시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면서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예루살렘성은 예수님을 찬양하는 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은 백성들로부터 찬송과 경배를 받으시며 왕으로서 영광스럽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왜 이렇게 열렬히 환영하는 것입니까?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그의 권세를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약속된 메시야”란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약속된 메시야로 믿었습니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란 다윗의 위를 물려받을 메시야 왕국을 말합니다(눅1:32). 이스라엘 역사상 다윗 시대가 가장 강성한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다윗 왕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들을 사랑하여 사랑과 평화로 다스렸습니다. 또한 공과 의를 행하여 정의 사회를 이루었습니다. 다윗 왕국은 장차 올 메시야 왕국의 표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메시야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백성들은 수세기 동안 다윗과 같은 메시야가 나타나서 그들을 다스려 주기를 갈망해 왔습니다. “오 왕 다윗의 열쇠여 이 고통의 길 그치고 저 하늘나라 문 열어 그 길로 인도합소서” “호산나”란 뜻은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란 뜻입니다 (시118:25). 여기에는 구원자를 애타게 갈망하는 그들의 절규가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의 압박으로부터 구원해 달라는 백성들의 탄식이었습니다. 그보다도 죄의 사슬로부터 풀어 주시고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해 달라는 영혼의 절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볼 때 현실의 어려움 때문에 고통하며 탄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소련의 양들은 겉으로 볼 때 경제적인 문제와 정치적인 체제 문제로 고통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귀를 기울여 보면 내면의 해결되지 않은 인생 문제와 죄 문제로 고통하며 탄식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알지 못해 허무에 시달리며 방황합니다. 어떤 사람은 정욕 문제로 고통하며 자신을 구원해 줄 메시야를 애타게 갈망합니다. “호산나!” 이는 사단의 지배 아래서 죄로 인해 고통하는 인생들의 영혼의 절규입니다.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인생들을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때까지 자기를 잘 드러내지 않으시고 조용히 일하셨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자신을 만천하에 드러내시고 무리들로부터 찬송과 경배를 받으시며 왕으로서 입성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자신의 죽음이 공공연한 죽음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은 정치적으로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군림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세상의 죄를 담당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죄 지은 자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무서운 고통을 당하시고 죽기 위해 입성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세상에서 가장 경이롭고 신비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눈길이 그에게 집중되도록 하셨고 많은 증인의 눈 앞에서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둘째로,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스가랴 9:9절은 메시야의 예루살렘 입성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곧 나귀 새끼니라.” 예수님은 이 예언의 말씀대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세상 왕들은 금면류관을 쓰고 백마들이 끄는 쌍두마차를 타고 위엄있게 입성합니다. 왕의 전후 좌우에는 무장한 경호원들이 접근을 하지 못하도록 경호합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므로 세상 왕들보다 더 위엄있고 화려하게 입성하셔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초라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만왕의 왕께서 초라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다니! 이는 겸손의 극치입니다. 오늘날은 지위에 따라 차의 종류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권세가 있고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벤츠나 그렌져와 같은 고급차를 탑니다. 포니 같은 차를 타고 다니면 관공서 수위들이 정문에서 조사를 하고 잘 들여보내 주지도 않습니다. 저는 문도 잘 안 열리는 강모세 목자님의 포니차를 볼 때마다 은혜를 받습니다. 오늘날로 하면 예수님께서 바로 이런 차나 티코와 같은 차를 타고 입성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은 실로 겸손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한없이 겸손하시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가까이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만인의 친구가 되시고 만민의 구주가 되십니다.

세상의 가치관은 지위가 높고 권세가 있고 가진 자가 큰 소리를 칩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겸손하고 내면성이 있는가를 따지기 보다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가 어떠하며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했는가를 따집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는 가난한 자와 겸손한 자는 무시를 받습니다. 이런 시대 분위기 가운데서 겸손하신 예수님, 가난하신 예수님을 배운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가치관은 세상 가치관과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갈등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겸손과 희생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행복하고 위대한 길임을 확신하고 끝까지 이 길을 가야겠습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왕일 뿐만 아니라 평화의 왕이 되십니다. 말은 전쟁을 상징하지만 나귀는 평화를 상징합니다. 이사야 9:6절은 예수님이 평강의 왕이심을 말해 줍니다. 세상 왕은 군대의 힘과 법과 제도로 사람을 다스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와 증오심을 남겨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과 평화로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십니다. 이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심령 깊은 곳에서 잔잔한 평화가 임하게 됩니다. 겸손의 왕, 평화의 왕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로마 대사관이나 헤롯 궁으로 쳐들어가지 않으시고 성전으로 가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니라 영적인 메시야이심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신 후 때가 이미 저물매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로 물러 가셨습니다.

Ⅱ. 성전을 깨끗케 하신 예수님 (12-19)

12절을 보십시오. 이튿날 아침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나와 예루살렘 성전으로 오시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새벽 기도를 하시느라 아침 식사를 못하셨는지 몹시 시장함을 느끼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멀리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혹 열매가 있는가 보셨으나 잎사귀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팔레스틴에서는 3월에 무화과 나무에 먹을 수 있는 조그마한 열매가 열렸고 뒤이어 4월에 크고 무성한 잎들이 나왔습니다. 이러한 작은 열매들은 무화과 철인 늦은 5월이나 6월이 되면 익어서 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때에(4월 중순) 무화과 때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먹을 수 있는 열매를 기대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에 아무런 열매가 없자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고 저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을까요? 배가 고프셔서 화가 나서 감정적으로 저주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이는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열매 없는 인생이나 모임, 민족은 반드시 심판 받는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시청각 교육으로 가르쳐 주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이는 14b절에서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는 말씀이 뒷받침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실 때는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속이 부패한 성전을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인생은 마치 한 그루 무화과 나무와 같습니다. 무화과 나무는 열매를 맺을 때 존재 가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생도 열매를 맺을 때 인생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있습니다. 열매를 맺는 것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사명이요 축복입니다 (창1:28). 인간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때 기쁨이 있고 사는 보람이 있고 행복을 느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인간의 위대성도 그 열매를 보고 측정하게 됩니다 (마7:15,16).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도 열매에 있습니다. 열매 없는 개인이나 모임이나 민족은 겉모양이 아무리 화려해도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 가셨을 때 그곳에는 말씀을 가르치는 소리, 기도 소리, 찬송 소리 대신에 짐승 우는 소리, 장사치들의 외치는 소리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분노의 불길이 치솟았습니다. 예수님은 채찍을 만들어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시고 온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좀처럼 분노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예수님은 무섭게 분노하셨습니다. 이는 불의에 대한 영적 분노였습니다. 이는 장차 예루살렘 심판에 대한 예표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평화의 왕이시지만 또한 죄를 무섭게 심판하시는 의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은혜가 충만한 분이시지만 또한 진리가 충만한 분이십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성전이 어떤 곳이 되어야 하는 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하나님의 집입니다. 성전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고 지성소 안에는 증거궤 곧 하나님의 말씀과 속죄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죄사함의 은혜가 있습니다. 성전은 말씀과 기도와 찬송이 삼위일체가 되어 차고 넘쳐야 합니다. 성전은 죄인들이 나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죄사함을 받는 곳입니다. 무엇보다 성전은 세계 만민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곳입니다. 성전에 말씀이 없고 기도가 없고 물질적이 되고 세속화될 때 더 이상 성전이라 할 수 없습니다. 특히 만민 구속 역사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 성전으로서의 존재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보셨을 때 마치 강도의 굴혈처럼 보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말씀 연구와 기도와 제자 양성과 세계 선교에 힘쓰기 보다 종교 정치하기에 바빴고 또 성전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이 사명을 잃고 물질화 되고 세속화될 때 주님의 준엄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의 종교, 정치, 사회, 문화의 중심이었습니다. 성전이 부패했다는 것은 곧 그들의 중심이 썩었다는 것입니다. 썩은 것은 과감히 도려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과감하게 메스를 가하심으로 성전을 깨끗케 하신 것입니다. 이는 영적 대 혁명이었습니다. 현재 눈에 보이는 성전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성전이 되십니다 (요2:20). 그러므로 우리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것이 우리의 중심에 있을 때 예수님은 무섭게 분노하십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종교 지도자들은 회개하기는 커녕 더욱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멸할까 궁리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두려워 예수님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저물자 제자들과 함께 성 밖으로 나가셨습니다(19).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유를 그 뜻대로 주관하시는 만유의 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가 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없이 겸손하셔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겸손의 왕, 평화의 왕이 되십니다. 이 시간 우리의 교만의 겉옷, 정욕의 겉옷, 이기심의 겉옷을 벗어서 주님 오시는 길에 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왕으로 임하셔서 영원토록 사랑과 평화로 다스려 주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