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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by Mark Yang   06/26/2022   Revelation 14:1~20

Message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요한계시록 14:1-20

요절: 14:7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오늘날 코로나바이러스는 마치 저승 사자와 같습니다. 그것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슬기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나, 유명한 자나 무명한 자나, 나이 든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나 무차별적으로 공격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우리 자신의 생명조차 잃을 수 있는 것 때문에 염려하고 두려워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경제 침체와 장래의 안전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두려워합니다. 두려움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마비시키고, 우리의 삶의 양식에 영향을 미칩니다. 두려움에 마비될 때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어리석게 되고, 또한 두려움을 다른 사람들에게 퍼뜨리게 됩니다. 두려움은 우리를 비이성적이고 이기적으로 만듭니다. 우리는 이 두려움을 반드시 극복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어떻게 이 시련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복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2-13장에서 요한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세상 사이의 갈등의 배경에 말해 주었습니다. 갈등의 주 원인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람들을 자기의 종으로 만들려는 사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과 싸워야 하며, 싸우되 이 세상의 무기가 아닌 것으로 싸워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사탄의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고린도후서 10:5절은 말합니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우리의 공격 무기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과 모든 기도와 간구입니다(엡 6:17-18). 사탄과의 전투가 아무리 격렬할지라도 우리는 어린 양의 피와 증언의 말씀을 통해 승리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14장은 어린 양과 그의 백성들의 영광스러운 승리와(1-5), 믿지 않는 자들을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마지막 부르심(6-13)에 대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말에 있을 마지막 추수로 끝을 맺습니다(14-20).

첫째, 어린 양과 속량함을 받은 자들(1-5). 헬라어 원문에는 1절이 다음과 같이 시작됩니다. “그 때 내가 보니(looked), 보라(behold)…” “보라”는 말은 명령형 동사로서 경외심을 자아내는 어린 양의 모습을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13장은 하나님의 백성을 박해하는 두 무시무시한 짐승에 대해 서술했습니다. 두 번째 짐승은 거짓 선지자로 불리는 가짜 어린 양이었습니다(13:11; 16:13). 가짜 어린 양은 초자연적인 기적을 베풀어서 사람들을 속임으로, 첫 번째 짐승에게 경배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가짜 어린 양에게 속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요한은 우리에게 짐승의 숫자를 분별하도록 요구합니다(13:18). 주로 요한은 시온 산에 서 있는 어린 양을 주목하도록 합니다(1).

어린 양은 누구십니까? 지금까지 요한은 어린 양을 우리 죄를 위해 죽임당하신 분(5:6,9,12; 6:9; 13:8), 경배받으실 하나님으로서 영화롭게 되시고 높임받으신 분(5:8,12,13; 7:9-10), 그리고 그의 백성의 목자(7:17)로서 묘사했습니다. 이제 그는 예언을 완전히 성취하신 시온 산에 선 만왕의 왕이십니다(시 2:6; 행13:33). “시온 산”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시를 가리키며, 거기로부터 하나님께서 만물을 통치하십니다(히 12:22-23). 이 도시는 속량함을 받은 자들의 영원한 거처입니다. 거기에는 어린 양을 따르는 십사만 사천이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씌여 있었습니다(1b). 그 숫자는 완전함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여러 세대를 거쳐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대표합니다.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써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그들을 사심으로 그들이 그에게 속하였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또한 아버지의 이름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그가 그들을 자기의 자녀로 영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이름은 그들의 새로운 정체성을 상징하고 그들의 안전을 보장합니다. 대조적으로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은 마귀의 종이 되고 영벌에 처해집니다.

2절은 요한이 들은 바를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는데, 이는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았습니다. 그 소리는 강렬하고 우렁찼습니다. 대개 힘있게 쏟아지는 물소리와 큰 우렛소리는 두렵게 하고 위협적입니다. 그러나 이 소리는 하프 연주자가 하프를 연주하는 소리와 같았습니다. 그 소리는 감미롭고, 조화롭고, 의미가 있는 소리였습니다. 그 소리는 인간이 결코 흉내낼 수 없는 웅장하고, 장엄한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같았습니다. 그때 천상의 합창단이 부르는 새 노래가 울려퍼졌습니다. 셀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노래를 불렀지만, 그 노래는 흠이 없이 완전했습니다. 아무도 불협화음을 내지 않았고 삑사리도 없었습니다. 각 사람의 연주는 안드레아 보첼리의 최고의 작품보다 더 훌륭했습니다. 그들은 스피릿이 넘쳤고, 기쁨과 힘과 능력이 충만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승리감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들은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불렀습니다(3a). 이 새 노래는 시편의 새 노래들이 주님의 과거의 승리를 축하했던 것과 같이, 어린 양을 통해 이루신 죄와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를 축하하는 노래였습니다(시 96:1; 98:1; 144:9-10).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사람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었습니다(3b). 오로지 속량함을 받은 사람들만이 이 새 노래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충분히 음미할 수 있습니다. 이는 속량함을 받은 자들만이 갖는 특권입니다.

4-5절은 속량함을 받은 자들의 특징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순결합니다. 그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한 순결한 처녀였습니다(4a). 이는 신자들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헌신이 순결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우상숭배와 성적 부도덕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둘째로, 그들은 충성스럽고 희생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갔습니다(4b). 예수님이 그들을 위한 대속제물로 자기 생명을 드리신 것과 같이, 그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심지어 죽는 데까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자기 생명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렸습니다(롬 12:1). 그들은 대 수확의 전조로서 하나님과 어린 양께 드려진 처음 익은 열매를 나타냅니다.

셋째로, 그들은 진실하였습니다.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5). 그들은 항상 진리를 말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수많은 거짓과 소문들을 만들어서 다른 사람들을 파괴하기 위해 퍼뜨립니다. 그에 따르는 책임도 없고, 제약도 없는 것 같습니다. 거짓말이 하도 널리 퍼져서 사실을 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는 거짓의 아비가 되는 사탄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속량을 받은 사람들은 다릅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위선이나 가장이나 거짓 증언이나, 또한 뒤에서 중상모략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신뢰하고, 서로를 존경하며, 마음과 마음으로 소통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과 서로 앞에서 투명합니다. 그런 사회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것이 천국입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들이 그 마음 속에 어린 양과 속량함을 받은 자들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간직하기를 원하십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 천국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딤전3:15).

둘째, 천사가 영원한 복음을 선포하다(6-13). 이 부분에서 장면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옮겨갑니다. 세 천사들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에 앞서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마지막 부르심을 선포합니다. 첫 번째 천사가 영원한 복음을 선포합니다(6-7). 6절에서 요한은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면서 영원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선포는 어떤 장소나 민족에게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에 이르렀습니다. 이 복음은 “영원한 복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복음은 변하지 않고 영원히 유효합니다. 더욱이 그 결과도 영원합니다. 사탄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영벌을 받지만,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들은 영광 중에 영생을 얻습니다. 복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그 한쪽 면에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를 제공합니다. 즉, 죄 사함과 하나님의 자녀로 영접하는 것과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기업을 얻는 것입니다. 다른 면에는 죄와 모든 악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의 선언이 있습니다. 아마도 천사는 복음의 사법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7절은 복음에 대한 적절한 반응을 말해줍니다. 천사가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천사들의 메시지는 세 가지 명령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그를 경배하라” 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에게 영광을 돌리고 그를 경배하는 것의 기초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를 경배해야 합니까? 이는 그가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각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든지 혹은 사탄을 섬깁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경배를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경외(두려워)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입니다(전 12:13). “하나님을 두려워 하라”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두려워하다”라는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두려움”을 위험이나 벌을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연관시킵니다. 요한일서 4:18a절은 말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Louw-Nida 헬라-영어 사전은 “두려움”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임박한 고통이나 위험, 악, 또는 그러한 상황에 대한 착각에 의해 일어날 수 있는 것에 대한 지나친 관심으로 발생되는 극심한 스트레스의 상태다.” 이러한 두려움은 여러 모양으로 표현되는데, 예를 들어 고통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거절에 대한 두려움, 불확실에 대한 두려움, 버림받는 데 대한 두려움, 상실에 대한 두려움 등입니다. 궁극적으로 이런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기인합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을 괴롭히는 사탄의 도구입니다(히 2:15).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다”라고 말할 때 이는 다소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Louw- Nida는 이런 두려움을 “경외의 뜻이 함축된 신성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갖는 것으로—‘경외하다, 경배하다’”라고 정의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은 우리를 모든 각종 두려움에서 자유롭게 합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My Utmost for His Highest)”이라는 유명한 매일의 묵상의 저자인 오스왈드 챔버스(1874-1917)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에 관해 놀라운 사실은, 당신이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다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당신은 다른 모든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는 것이다.” 거룩한 두려움은 또한 우리에게 예수님을 증언할 평화와 용기를 줍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딤후 1:7).

2020년 3월 17일, 이탈리아 롬바디(Lombardy)의 한 병원에서, 의사들은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집단사망 때문에 너무나 무력하게 되어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을 생명을 구하는 자로 생각하지 않고, 단지 누가 죽을지 선택하는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 환자 중에 75세 된 한 목사님이 자신도 숨쉬기조차 힘든 상황에서, 예수님을 증언하고 다른 환자들에게 성경구절을 나누어 주기 시작했습니다. 병원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의사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목사님의 증언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과학만을 신뢰했었던 무신론자들이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다시금 환자를 돌볼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목사님이 돌아가셨을 때, 의료 종사자들은 하나님의 평안을 경험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신뢰하고, 목사님이 했던 대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데 자신의 삶을 드리기로 결단했습니다.1

7b절은 우리가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 하는지 말해 줍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아 시대에, 온 세상이 부패하고 강포가 만연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셨습니다(창 6:5). 그래서 하나님은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홍수로 창조한 모든 것을 쓸어버리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즉시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회개하기를 바라면서120년간을 참으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들었을 때 이를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반면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습니다(히 11:7). 노아는 우리에게 좋은 본이 됩니다. 우리는 가족이 함께 집에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함께 기도함으로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까요? 이는 그들이 하나님께 복종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배척하면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원하는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온갖 종류의 사악한 일을 행합니다. “그들은 악한 목적으로 서로 격려하며, 남몰래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하는 말이, 누가 우리를 보리요”라고 말합니다(시 64:5).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행한 대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요셉이 그랬던 것처럼, 악을 피하고 유혹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창 39:9). 실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잠 9:10).

두 번째 천사는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라고 말하면서 바벨론의 멸망을 선언합니다(8). 이는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선언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처음 독자들은 바벨론이 로마라고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바벨론은 여러 나라에 대해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영향력을 기만적으로 행사하는 우상 숭배의 세계제도를 상징합니다. 그들은 철저히 악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정신줄을 놓게 만들므로서 파괴를 퍼뜨립니다. 이 제도는 매우 강력하여 아무도 그들에게 도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완전히 심판하십니다.

세 번째 천사는 짐승 숭배에 대해 경고합니다. 그는 짐승을 숭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실 것이고, 불과 유황으로 영원토록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9-10). 그들의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갈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밤이나 낮이나 쉼이 없을 것입니다(11). 이는 지옥이 영원하다는 것과, 악인들이 죽으면 멸절되어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불과 유황으로 타는 고통과 번민이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이는 짐승을 숭배하는 자들의 최종 종착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과장된 협박에 불과하고 실제 실행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요한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인내할 것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12).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타협하지 않고 고난을 감당할 힘을 줍니다. 또한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기만을 피하고 짐승의 본성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줍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지킬 때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영원한 쉼을 누리는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요한은 하늘에서 나오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13a). 믿음으로 살다가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그 죽음이 순교이든 자연사이든 영원히 복 받은 자들입니다. 성령께서는 친히 이 축복의 확실성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십니다.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13b). 그들은 힘에 지나도록 수고했고, 고통스러운 싸움을 싸웠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들의 수고가 끝날 것이며, 주 예수님과 더불어 달콤한 쉼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행위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에 기초해서 그들에게 상급을 주십니다(히 11:6).

셋째, 땅의 추수(14-20).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 부르심이 있고 난 후, 최후 심판의 때가 옵니다. 하나님은 매우 자비로우셔서 완고하고 악한 사람들이라도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기만 하면 그들을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다. 그렇지만 이번은 마지막 기회이며 최후의 심판이 임합니다. 본문은 두가지 추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곡식 추수이고(14-16), 다른 하나는 포도 추수입니다(17-20). 이들은 각각 의인의 추수와 악인의 추수를 가리킵니다. 첫 번째 추수는 그 머리에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진 인자에 의해 행해집니다. “인자”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즐겨 쓰던 이름임을 상기시켜 줍니다(단 7:13). 15절에서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말하였습니다.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 만일 인자가 그리스도라면 그가 왜 하나님의 종인 천사로부터 명령을 받으시는 것입니까? 그 답은 이 천사가 하늘의 성전, 즉 하나님이 계신 바로 그 곳에서 나왔다는 것을 주목할 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셨을 때 자신도 최후의 심판의 때가 언제인지 모르신다고 하셨습니다(막 13:32). 그러나 이제 드디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때가 되었다”라고 선언하십니다. 말씀의 전달자 천사가 성전에서 나와 그리스도께 이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이 추수를 이행하십니다(16).

17-20절에서, 두 번째 추수는 포도나무에서 포도송이를 거두는 것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틀에 던져 짜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 밖에서 포도주 틀에 밟혔는데, 이는 모든 부정한 것과 속이는 것과 부끄러운 것들은 성 밖에 두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틀에서 피가 나와서 말 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습니다. 이는 대략 거룩한 땅의 남쪽에서 북쪽까지의 길이며, 철저하고도 완전한 전 세계적인 심판을 상징합니다.

이 추수들은 예수님의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와 일치합니다(마 13:24-30). 예수님은 곡식이 인자에 의해 씨가 뿌려졌다고 하셨습니다. 가라지는 악한 자, 곧 마귀에 의해 덧뿌려졌습니다. 이 둘은 추수 때까지 함께 자랐습니다. 추수 때가 왔을 때 인자가 그의 천사들을 보내어 그 나라에서 죄로 인해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뽑아 내실 것입니다. 천사들은 그들을 풀무 불에 던져 넣을 것이고, 그들은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입니다(마 13:36-43).

오늘날 말세의 징조들을 볼 때, 우리는 두려워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의 선하신 목적에 따라 모든 것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많은 것들을 두려워하기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예수님을 증언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며 그를 경배합시다.

  1. https://www.faithpot.com/atheist-doctor-finds-god-covid-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