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 View


마가복음 Ⅱ 부:마가복음 11:20-25(하나님을 믿으라)

by Mark Yang   08/15/2019   Mark

Message


마가복음 Ⅱ 부 제 7 강


하나님을 믿으라


말씀 : 마가복음 11:20-25
요절 : 마가복음 11: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오늘 본문은 저주받은 무화과 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놀라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믿음을 심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능력있는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분명한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태산을 옮기는 능력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산을 옮기는 믿음 (20-23a)
제자들에게 있어서 지난 이틀 동안은 놀람과 두려움이 교차되는 극적인 사건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을 위해 예수님께서 두 제자들에게 남의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오너라고 명하셨을 때 제자들은 놀랐습니다. 또 두 제자들이 나귀 새끼를 풀 때 “주께서 쓰시겠다”라고 말하자 호통을 치던 나귀 주인이 갑자기 태도가 바뀌어지더니 흔쾌히 허락하는 것을 보고 더욱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초라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는 데도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열렬히 환영하는 것을 보고 흥분과 함께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귀에는 아직도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외치는 무리들의 환영 소리가 귀에 쟁쟁하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 베다니를 떠나 성전으로 갈 때에 잎이 무성한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배가 고프신 예수님께서 따 먹을 열매가 없다는 이유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은 놀랐습니다. 그보다도 성전에 가셔서 서슬이 시퍼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있는데도 장사하는 자들을 다 내어쫓으시고 성전을 깨끗케 하시는 것을 보고 그들은 충격을 받을 만큼 놀랐습니다. 이 모든 사건들은 제자들에게는 실로 충격적인 사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지난 이틀 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케 하신 후 베다니로 물러나셨다가 이튿날 아침에 성전으로 오는 길이었습니다. 이 때 제자들은 전날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나뒹굴어져서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서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외쳤습니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랐나이다. 와!” 그 싱싱하고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무화과 나무가 예수님의 한 마디 저주의 말씀에 하루 밤 사이에 뿌리로부터 말라서 비참하게 나뒹굴어져 있는 것을 본다는 것은 베드로에게 있어서 놀랄 만한 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에 놀랐습니다. 특별히 저주의 권세에 놀랐습니다. 한편으로 나무에 대해서 불쌍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 죄 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너무하신 것이 아닌가? 불쌍한 무화과 나무!”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시는 행동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과 함께 두려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케 하심으로 종교 지도자들에게 정면으로 도전하신 것은 너무 무모한 행동이 아닌가?” 그는 예수님의 이런 행동이 앞으로 지상 메시야 왕국을 건설하는데 악재(惡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베드로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였습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입이 커서 큰 소리는 잘 치지만 권세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말씀의 권세가 있다면 야고보와 요한이 그에게 도전도 하지 않고 모든 제자들이 그의 말에 순종을 잘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가 한 번 메시지를 전하기만 하면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가 부러웠습니다. 그런 권세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 비결을 알고 싶었습니다. 베드로 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어떻게 도와 주셨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자립적인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고 의지하는 자립적인 믿음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의 문제는 인간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배후에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이러한 의존심은 그들을 무기력하게 하고 나약하게 하였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세 제자들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 한 아버지가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와서 제자들에게 고쳐 달라고 하였습니다. 아홉 제자들은 예수님이 안 계시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들은 식은땀만 흘리며 망신만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능력 많으신 예수님이 영원토록 자기들과 함께 있어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곧 십자가를 지신 후 부활하사 하나님 나라로 가셔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보이는 예수님 보다도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고 의지하는 자립적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눈에 보이는 사람이나 물질이나 권세를 의지하고 살기 쉽습니다. 어떤 사람은 목자를 의지합니다. 그래서 목자가 구체적인 방향을 주고 할 일을 주지 않으면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돈을 벌고자 안간힘을 씁니다. 이 때문에 영적 소원도 잃고 영적 분별력도 상실하고 영적으로 꽉 막혀 전혀 영적 성장도 없습니다. 이처럼 의존심은 사람을 못쓰게 만들고 비참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마음 가운데,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 가운데 살아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립적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이나 물질이나 권세는 우리의 의지할 대상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을 믿고 의지하고 살 때 반드시 실망하고 결국에는 의지하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패망하게 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믿고 의지할 대상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뿐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이 말씀은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할 때 비로소 한 인간으로서 자립적인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때 내면이 성숙해지고 강해지고 능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싱싱하던 무화과 나무를 뿌리째 마르게 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말씀 한 마디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태초에 흑암이 온 땅을 뒤덮었을 때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자 모든 생명체에 에너지를 불어 넣어 주는 찬연한 빛이 생겨났습니다 (창1:3).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사라의 마른 태에서 새 생명을 탄생시키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반석에서 샘물이 나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지만 실제로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는 여전히 무기력하고 무능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내가 믿음으로 덧입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엄청난 저수지와 같습니다. 이 저수지의 물을 마시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파이프가 집까지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능력이 구체적으로 나에게 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음이라는 통로가 있어야 됩니다. 파이프가 굵으면 굵을수록 많은 양의 물이 흐르듯이, 믿음의 통로가 굵으면 굵을수록 주님의 능력을 많이 덧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어느 정도 큰 일을 할 수 있는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23a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오늘날은 포크레인으로 산을 바다에 옮겨서 바다를 메꿉니다. 이렇게 기계의 힘으로 가능하지만 말로서 산을 바다에 던지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산은 그 특징이 요지부동입니다. 유사이래로 많은 사람이 산의 요지부동에서 오는 고고함과 장엄함과 불변함 때문에 경외심을 가지고 산에 대해 많은 글을 썼습니다. 모하멧에 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한번은 모하멧이 그의 추종자들이 보는 앞에서 산을 움직이는 기적을 보여 주고자 산에게 명했습니다. “산아 나에게 오라!” 그러나 산은 전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네가 오지 않으면 내가 가겠다”라고 하며 일어나 갔다고 합니다. 그의 말에는 산을 움직일 수 있는 권세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추종자들은 단지 그의 임기응변에 놀라 그를 계속해서 따랐습니다. 말로서 산을 바다에 던지게 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을 때 불가능한 일이 가능케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믿음의 능력이 얼마나 큰가를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실 때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여 위대한 일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증거 하다가 감옥에 갇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늙고 지치고 쇠약해졌습니다. 감옥에서 아무도 의지할 데 없는 외롭고 슬픈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슬픈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연약함과 슬픔과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세계 선교 명령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로마를 정복코자 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믿음으로 불가능한 일에 도전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쇠고랑을 차고 로마에 갔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셋집에서 위대한 1:1역사를 시작했습니다. 후에 그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고백했습니다 (빌4:13). 하나님께서는 이런 바울의 믿음대로 거대한 로마를 복음화시키시고 로마를 통하여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게 하셨습니다. 바울의 믿음은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 새 역사를 창조했습니다.
사도 바울만이 믿음으로 큰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종교개혁을 한 마틴 루터, 믿음으로 아프리카 전도여행을 한 David Livingstone, 믿음으로 인간 조건을 극복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돌이킨 D.L.무디, 믿음으로 약소 민족의 슬픈 운명을 극복하고 세계 지성계 복음역사를 이룬 이사무엘 선교사님 등 하나님을 믿음으로 큰 일을 한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름난 위대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한 모퉁이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믿음으로 불가능에 도전하여 복음역사를 섬기는 무명의 믿음의 용사들이 곳곳에 많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여 위대한 역사를 이룬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UBF 복음운동이 시작된 지 올해 만 30년이 됩니다. 이 모임을 창설하시고 이날까지 희생적으로 이 복음역사를 섬기신 이사무엘 선교사님의 연세도 올해 10월 9일이면 만 60세 회갑이 되십니다. 지난 30년 동안 이사무엘 선교사님을 통해 우리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루신 복음역사는 경이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이사무엘 선교사님을 생각할 때 이 분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분을 가까이서 살펴 보면 아주 평범한 분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다른 사람이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뛰어납니다. 이 분은 이날까지 믿음으로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여 위대한 역사를 창조했습니다. 광주에서 서울을 개척코자 할 때 특히 서울대학을 개척코자 할 때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지방은 몰라도 서울대학은 불가능하니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러나 이 분은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믿음으로 도전하였을 때 서울 개척역사가 놀랍게 일어났습니다. 또한 1971년에 약소 민족 한국 사람이 콧대 높은 선진국 미국이나 독일을 선교한다 특히 지성인들을 믿어 순종케 하여 제자로 삼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요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이 일에 도전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기적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또한 1985년에는 당시에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소련 선교를 위해 믿음으로 기도제목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줄기차게 소련 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도전했을 때 5년 후에 기도제목은 현실화 되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불가능을 가능케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full-time 목자는 큰 일을 할 수 있지만 평신도 목자는 큰 일을 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또 일반 대학은 몰라도 의대생들은 공부가 너무 많기 때문에 숫적으로 많은 복음역사를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서제임스 목자님은 믿음으로 이러한 모든 고정관념들을 깨뜨리고 평신도로서 의대생들 가운데 놀라운 복음역사를 창조해 나가고 계십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고자 할 때 그 일을 불가능케 하는 상황을 생각하고 그 상황에 굴복 당하고 주저앉아 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불가능하게 보이는 상황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태산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에게는 아무리 말씀을 전해도 변화되지 않는 양이 태산처럼 생각됩니다. 세계 선교를 하고자 할 때 어학 정복이 태산처럼 생각됩니다. 임모세 선교사님은 사우디에서 복음역사를 섬길 때 모슬렘이 태산처럼 느껴진다고 하였습니다. William Kim 선교사님은 인도 역사를 섬기면서 인도의 힌두이즘이 태산으로 생각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산들에 부딪칠 때 우리는 절망하고 좌절하고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태산 앞에 낙심하고 자포자기해 버리고 엎드러져 버립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믿음으로 불가능에 도전합니다. 엎드러졌다가 믿음으로 일어나서 도전하고 또 엎드러졌다가 믿음으로 다시 일어나서 도전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결코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될 때까지 믿음으로 도전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도전 정신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으로 역사를 창조한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특출난 사람이 아니라 모두 평범한 자들이지만 믿음으로 큰 일을 했습니다. 누구든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Ⅱ. 의심을 물리치는 믿음 (23b-24)
이때까지 우리는 믿음으로 태산을 바다에 던지는 큰 일을 할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적으로 극복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23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예수님은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내적으로 싸워야 할 대상이 무엇인가를 말해 줍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을 것같이 큰소리를 치다가도 조금이라도 마음에 의심이 생기면 태산은 고사하고 손가락 하나, 팔다리 하나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하게 되어 버립니다. 마음에 의심이 생기면 온갖 부정적인 생각과 연약한 생각, 운명적인 생각, 패배적인 생각, 두려움이 엄습하여 나의 몸과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아 버립니다. 그러다가 마음이 완악해져서 말씀공부 하기를 거부하고 결국 믿음을 잃고 실족해 버리게 됩니다.
이러한 의심은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내 마음에 찾아옵니다. 이러한 의심들이 왜 생기는 것입니까? 이것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심리현상이 아니라 사단이 우리의 마음에 심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사단이 에덴동산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아담과 이브의 마음에 의심의 독화살을 쏘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마음에 무서운 파문이 일어나 마침내는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의심의 독화살이 마음에 꽂히게 되면 어떤 영웅이나 천하 장사도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간 순간 사단이 심는 의심과 싸우는 영적인 투쟁을 해야 합니다. 의심은 우리가 싸워야 할 가장 큰 적입니다. 믿음으로 큰 일을 한 사람들을 보면 한 사람도 예외없이 모두 마음에서 일어나는 의심과 불신과 부정적인 생각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마음의 의심을 물리칠 수 있습니까? 이는 믿음으로 사단을 대적해야 됩니다. 순간 순간 찾아오는 부정적이고 불신적인 생각들을 믿음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성과 같습니다. 사단은 강하기 때문에 우리의 힘과 의지로는 마음의 성을 지킬 수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무장할 때만이 사단의 공격을 막을 수 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계속해서 기도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 되리라.” 예수님께서 믿음의 능력에 대해 말씀하신 후 기도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믿음의 능력은 곧 기도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기도는 바늘과 실과 같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는 믿음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우리는 기도로 마음 속에 파고드는 의심과 불신과 두려움과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을 수 있습니까? 이는 하나님을 믿을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하는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의 기도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 기도를 다 응답해 주십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사도 요한과 같이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요한1서4:14,15)
Ⅲ. 용서하는 믿음 (25)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용서하는 믿음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기도할 때 가장 걸리는 문제는 죄 문제입니다.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사죄의 은혜를 받아야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이 맺어지고 그때 비로소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로부터 사죄의 은혜를 덧입으려면 반드시 형제와 걸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에게 혐의가 있는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한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이는 태산을 바다에 던지는 것같이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죽으면 죽었지 형제를 용서 못하겠다고 합니다. 형제 자매님들의 인생 반생기를 들어보면 가정을 파괴한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으로 괴로워하는 사람, 어릴 때 성폭행을 당해 마음에 깊은 상처를 안고 복수심에 우는 사람 등 복수심으로 불행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또한 영웅들의 전기를 읽어 보면 정복 정신이 충만하여 외적으로는 큰 일을 행하였지만 내적으로는 다른 사람의 허물과 실수를 용서하지 못하여 잔인하게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일생 동안 복수의 한을 품고 살다가 자식들에게 “원수를 갚아 달라”는 유언으로 복수심을 대를 물려 줍니다. 이는 다른 사람의 허물과 실수를 용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잘 말해 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의 허물과 실수를 용서하지 않을 때 기도가 막히고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깨달아 알 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로부터 자신의 죄도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형제를 용서할 때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용서의 사랑을 덧입을 수 있게 되고 우리의 심령에 사죄의 은혜가 차고 넘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형제의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까? 이는 우리의 의지나 본성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의 사랑을 덧입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23:34a). 우리는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몇 조원) 빚진 자이지만 형제가 우리에게 죄 지은 것은 백 데나리온(몇 십만원)에 불과함을 알고 중심에서부터 형제의 허물을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18:21-35).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우리가 태산을 옮기는 능력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으로 불가능에 도전하여 새 역사를 창조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시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