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Ⅱ 부 제 8 강
포도원 농부의 비유
말씀 : 마가복음 11:27-12:12
요절 : 마가복음 12:6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오늘 본문은 유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는 인간들의 죄악된 본성과 죄악된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구속의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비유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주신 것이지만, 넓게는 모든 인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가져야 할 자세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Ⅰ. 종들을 보내신 하나님 (11:27-12:5)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동기는 11장 27-33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할 성전이 종교 지도자들의 사리사욕으로 말미암아 물질화, 세속화 되어 있는 것을 보시고 무섭게 분노하시고 성전을 깨끗케 하셨습니다. 그러자 종교 지도자들은 심하게 반발하며 예수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 이 질문은 네가 도대체 누구관대 무슨 신분으로 이런 일을 하는가? 또 그 권세의 근원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종교적인 권세는 공회에 있으며 공회가 인정하지 않는 권세는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고 질문하심으로 역공격하셨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왔다고 하면 하나님의 사자를 거부한 불신의 죄에 빠지고, 동시에 세례 요한이 증거한 예수님의 영적 권위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또 만일 요한의 세례가 사람에게로서라고 하면 백성들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백성들이 두려워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절대적인 진리가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거짓되고 정치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을 통해서 자신의 권세가 하늘로부터 왔음을 암시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심을 계시하시고 그들의 죄악을 폭로하셨습니다.
12:1절은 하나님과 그의 택하신 백성과의 관계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을 두르고 즙짜는 구유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포도원은 어떤 형태의 농경보다 섬세한 보살핌이 필요하기 때문에 가꾸기가 까다롭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심히 기름진 산에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도둑과 짐승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울타리를 치고, 포도즙을 저장하기 위해 즙짜는 구유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즙짜는 구유는 단단한 바위를 파서 역청을 발라 만들기 때문에 만들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 주인은 포도원을 적군의 침입으로부터 파수하기 위해 망대를 세웠습니다. 주인은 포도원을 위하여 더 이상 할 것이 없을 만큼 모든 역사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사5:1-4). 주인은 포도원을 아름답게 꾸민 후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습니다. 당시에는 실업자들이 많아서 장터에서 할 일이 없어 빈둥빈둥 놀고 있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마20:3-7). 그들은 하루 한끼 먹기도 힘든 매우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주인에게 택함을 받아 아름다운 포도원에서 일할 수 있게 된 것은 말할 수 없는 은혜였습니다. 또 주인이 가까이 살면서 감독을 하고 일일이 간섭하면 힘든데 주인은 먼 타국에 갔습니다. 그들에게는 소유권은 없지만 경영권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자유롭게 창조적으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거지가 하루 아침에 왕자가 된 것 같이 말할 수 없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은혜와 축복을 감당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 농부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좀 더 넓은 의미로는 포도원은 세상을, 농부는 인간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 광야와 같은 세상을 개척하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하여 전혀 부족함이 없는 아름다운 에덴 동산을 창설하시고 이를 다스리며 지키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창2:16,17). 인간은 이 축복된 환경 가운데서 영적 질서를 지키며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여기에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민 구속 역사를 위해 많은 민족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 사명을 잘 감당하여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모든 환경을 마련하여 주셨습니다. 로마서 9:4,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영적 축복이 열거되어 나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양자로 삼으시고 영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거울과 같은 율법과 보배로운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또한 온 세계가 우상 숭배의 죄에 빠져 있을 때 참 하나님을 섬기고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예배제도를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다윗 등 그들이 배우고 본 받을 수 있는 위대한 조상들을 많이 허락하셨습니다. 육신적으로 하면 온 세상의 구주가 되시는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탄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엄청난 축복을 주신 것은 그들이 제사장 나라로서 사명을 잘 감당하므로 그들을 통해 세상 만민을 구원코자 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포도원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모든 환경을 마련하여 주셨습니다. 에너지의 원천인 햇빛과 이른 비와 늦은 비, 비옥한 땅, 신선한 공기 등 모든 환경을 마련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여 많은 열매를 맺어 소출 얼마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고 축복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특별히 아름다운 캠퍼스 포도원을 맡겨 주셨습니다. 이 포도원에는 진리를 사랑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샛별과 같은 젊은이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또한 해마다 새롭게 들어오고 나감으로서 흐르는 물과 같이 늘 신선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나이는 먹지만 젊은이와 같이 늘 생동감이 넘치는 힘찬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캠퍼스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캠퍼스 포도원은 세계 각곳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캠퍼스는 아름답고 광활하며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인력 저수지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세상에는 영적으로 갈급하여 성경말씀을 공부하고 싶지만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성경교제가 희귀합니다. 또 말씀의 뜻을 풀어서 가르쳐 줄 성경선생과 생명의 길로 인도해 줄 목자가 없어서 유리방황하는 자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는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체계적으로 말씀을 공부할 수 있는 성경 교재와 또 이를 가르칠 수 있는 유능한 성경선생들과 양들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고 섬길 수 있는 목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본래 이방인들로서 이 포도원에서 일할 자격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택하심을 받아 예수님의 보배피로 죄 사함의 은혜를 받고 동시에 사도의 직분을 받게 되었습니다 (롬1:5). 이것은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포도나무는 심은지 2-3년 후에 가서야 열매를 맺습니다. 여기서 때는 쌍방이 약속한 지정된 때를 말합니다. 주인은 때가 되자 농부들에게 소출 얼마를 받고자 종을 보내었습니다. 대개 소작료는 5:5나 6:4,아주 후한 주인인 경우라야 7:3 정도로 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소득의 10분의 1만 바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소출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고 영적 질서를 지키도록 하는 데 있었습니다. 만일 소출을 바치지 않으면 영적 질서가 깨어지고 관계성이 파괴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대접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소출을 요구하시는 것은 창조주로서의 당연한 권리요, 인간이 하나님께 소출을 바치는 것은 피조물로서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그 보다도 인간이 하나님께 소출을 바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포도원에서 계속해서 은혜와 특권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비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소출은 단지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갖추어야 할 내면성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과 사랑과 의입니다 (마23:23). 뿐만 아니라 제사장 나라로서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출19:5,6).
농부들은 주인이 보낸 종을 극진히 대접하고 소출 얼마를 세로 바치기만 하면 아름다운 포도원에서 얼마든지 행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종을 어떻게 대했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져 보내었거늘” 이것은 전혀 예기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종이 소출은 커녕 얻어 맞고 왔을 때 주인은 당장에 군대를 보내어 농부들을 벌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참았습니다. 그리고 종이 농부들에게 무례하게 굴어서 그런 모양이다 생각하고 이번에는 겸손 훈련을 많이 받은 인턴 종을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얼마나 심하게 때렸는지 머리에 붕대를 감고 목발을 짚고 왔습니다. 주인은 이번에도 참았습니다. 주인은 농부들이 죄를 범한다고 당장에 심판하지 않으시고 오래 오래 참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택한 사람을 쉽게 짜르거나 포기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희생을 치루고서라도 농부들과 바른 관계성을 맺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오히려 불쌍히 여기시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계속해서 다른 종을 보내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이번에는 그를 죽이고 그외 많은 종들도 혹은 때리고 혹은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래도 참으셨습니다. 이는 우리 인간의 머리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인내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인내하시는 사랑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롬2:4). 하나님은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비유에서 종은 선지자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줄기차게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대사로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백성들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자를 비웃고 말씀을 멸시하고 선지자들을 능욕하고 죽였습니다 (대하36:16, 마23:37). 그런데도 하나님은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그들의 죄를 참으시고 그들에게 두신 소망을 포기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내하시는 사랑을 찬양합니다.
농부들은 주인의 인내하시는 사랑을 멸시하고 계속해서 악을 행했습니다. 그들은 점점 완악해지고 포악해졌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된 근본 원인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교만입니다. 그들은 포도원 주인이 아니라 세로 든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마땅히 주인을 주인으로 대접하고 공경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오랫동안 포도원을 열심히 가꾸다 보니 포도원에 대한 애착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포도원 주인보다 포도원을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또 포도원 주인은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자신들이 포도원 주인인 양 착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주인의식이 너무 지나쳤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분수를 알지 못하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습니다. 이는 부요해지자 마음이 교만해졌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교만해지자 주인을 우습게 생각하고 주인의 주권에 정면으로 도전했습니다. 마음이 교만해지면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어리석게 되어 버립니다. 로마서 3:21-23절은 인간이 타락하게 된 근본 원인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둘째로, 감사치 않은 것입니다. 농부들은 처음에 포도원을 맡게 되었을 때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가자 이를 당연히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내가 쓸만하기 때문에 택함받았다는 생각을 하기까지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축복을 많이 받았을 때 더욱 힘써 감사해야 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살전5:18). 감사치 않을 때 불평하고 원망하게 되고 결국에는 사단의 밥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나에게 맡겨 주신 포도원을 남과 비교하여 불평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겨 주신 포도원은 가장 아름답고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기초로 나에게 가장 좋은 포도원을 주신 것을 감사해야 됩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굳게 붙들 때 생겨납니다. 과거에 내가 죄로 말미암아 얼마나 비참하고 쓸모없는 자였는데 주님께서 은혜로 불러 주셔서 사죄의 은혜를 덧입혀 주시고 복된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하셨는가 그 은혜를 늘 기억하고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늘 기억하고 굳게 붙들었습니다 (딤전1:13). 이 때문에 그의 심령에는 감사와 기쁨이 솟아나는 샘물과 같이 늘 흘러 넘쳤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치 않을 때 결국 배은망덕하는 몹쓸 자가 되어 버립니다.
셋째로, 욕심입니다. 농부들이 포도원 농사가 잘 안되었더라면 겸손해져서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농부들이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 또 마음을 쓰고 머리를 써서 신종개발을 하여 소출이 풍성하게 되자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주인에게 소출을 드리는 것이 아까운 생각이 들고 손해보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자기 것을 꾸리고자 하는 욕심은 눈덩이와 같이 점점 커져서 마침내는 포도원을 자신들의 소유로 삼고자 아들까지 죽이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게 됩니다 (약1:15).
Ⅱ.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 (6-9)
하나님의 사랑은 수많은 선지자들을 희생하면서 인간들의 죄악을 참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독생자를 보내시기까지 인간들을 향한 지극한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주인에게는 최후로 사랑하는 아들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로서 유업을 이을 유일한 상속자였습니다. 이런 귀한 아들을 포악한 농부들에게 보낸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농부들을 믿었습니다. 주인은 농부들이 주인의 포기치 않는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 하해와 같은 그 넓고 깊은 사랑에 감복하여 마음으로부터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원했습니다. 주인은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면서 한가지 희망을 가졌습니다.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주인은 그들이 아들을 영접하기만 하면 지난 날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고자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까지도 아끼지 아니하고 자기를 대적하는 농부들에게 내어 주신 것은 사랑의 극치입니다.
비유에서 아들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는 인간들의 죄악을 심판하기 위해 보내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보내셨습니다 (요3:17).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위해 하실 수 있는 최고의 사랑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한1서 4:9,10).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요한1서 4:8). 우리가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죄를 위한 희생제물로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그 사랑에 감복하여 회개치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농부들은 이제 지난 날의 모든 죄를 회개하고 사죄의 은혜를 덧입고 새 인생을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이 기회를 어떻게 이용했습니까? 7.8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아들을 보자 서로 의논했습니다.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그리고 아들을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어 던져 버렸습니다. 그들은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종들을 능욕하고 죽이는데도 주인이 아무런 대응이 없는 것을 보고 주인은 아무 힘이 없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죽이면 포도원이 영원히 자기들의 것이 될 줄로 생각했습니다. 이는 큰 착각이었습니다. 이에 주인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주인은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9).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으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공경하지 않았습니다. 공경하기는 커녕 함부로 대하고 무시하고 배척했습니다. 마침내는 잡아 공회에서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에게 넘겨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예루살렘 영문 밖으로 던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최후로 사랑하는 독생자까지 보내심으로 인생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셨습니다. 이제 아들마저 배척하면 그들에게 남은 것은 심판 뿐입니다. 하나님은 무한정 참으시는 무골호인이 아니십니다. 결국에는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롬2:6-8).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배척한 죄로 역사적으로 무서운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A.D 70년 로마군에 의해 멸망당한 이래 각 나라에 흩어져서 만 백성의 저주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졌던 제사장 나라로서의 축복과 특권도 빼앗기고 그 축복이 은혜를 감당할만한 믿음있는 이방인에게로 넘어 갔습니다. 축복을 감당하는 비결은 열심히 일하여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께 가장 귀한 것을 소출로 드림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고 영적 질서를 지키는 것입니다.
Ⅲ. 모퉁이의 머릿돌 (10-12)
예수님은 비유의 결론으로 시편 118:22,23절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10,1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 이루고자 하신 만민 구속 역사는 그들이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으로 실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실패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건축자들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생각하고 쓸모없다고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을 주어다가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셨습니다. 옛날에는 모퉁이의 머릿돌이 집을 짓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돌이었습니다. 이 돌을 중심으로 벽돌이 쌓이고 이곳에 건축자의 이름이 새겨졌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님을 살리사 만민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기이한 역사입니다. 인간은 실패했지만 하나님은 결코 실패치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구속역사를 포기치 아니하시고 그 놀라운 지혜로 이를 이루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구속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롬11:33)
예수님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면 낙심하고 절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절대적으로 믿고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사 만민의 구주로 세우실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는 부활 신앙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부활신앙으로 십자가의 모진 고초를 감당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신 줄 알았으나 회개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더 완악하여져서 예수님을 잡고자 하였으나 무리가 두려워 잡지 못했습니다(12).
사랑하는 독생자를 내어 주시기까지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구속의 사랑을 찬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