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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Ⅱ 부:마가복음 12:13-27(산 자의 하나님)

by Mark Yang   08/15/2019   Mark

Message


마가복음 Ⅱ 부 제 9 강


산 자의 하나님


말씀 : 마가복음 12:13-27
요절 : 마가복음 12:27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본문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기 위해 대조적인 두 종류의 종교 지도자인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 넣고자 묘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혜로 그들을 여지없이 K.O패시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대답 가운데서 심오한 영적 비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지혜와 총명의 신, 모략과 재능의 신이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사11:2).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의 이중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국가와 하나님께 대해 가져야 할 자세가 무엇인가를 배우고자 합니다. 또한 사두개인들에게 가르쳐 주신 부활의 진리를 통해서 우리가 어떤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가를 배우고자 합니다.
Ⅰ. 세금에 관한 논쟁 (13-17)
예수님께서 부패한 성전을 깨끗케 하시자 종교 지도자들은 큰 도전을 받고 예수님을 없이 하고자 여러 가지 궤략을 꾸몄습니다. 그들은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기 위해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냈습니다. ‘책잡는다’는 말은 덫을 가지고 짐승을 사로잡을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는 그들의 방법이 정정당당하지 못하고 얼마나 정치적이고 사단적인가를 보여 줍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충실한 유대 주의자들로서 이방의 지배를 거부하며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반면 헤롯당원들은 세속주의자요, 친로마파로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을 적극 지지하였습니다. 이들은 평소 서로 혐오하고 경멸하며 상종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없이하는데 있어서는 마음을 같이 하여 연합 전선을 폈습니다. 이와 같이 율법주의자들과 세속주의자들은 복음주의의 원수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멸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도를 숨기고 먼저 진지하게 예수님께 아첨의 말을 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오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그들은 마음에도 없는 아첨의 말을 했지만 이는 사실 예수님께 합당한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말 가운데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예수님께서 복음역사를 어떻게 섬기셨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참되신 분이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인격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거짓을 모르시는 진실하시고 의로우시고 순결하신 분이십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리 완전하게 보이는 자라 할지라도 흠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털면 먼지 나지 않을 자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으로서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온전한 분이십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리켜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벧전1:19). 또 사도 요한은 예수님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시요 (요1:14), 진리 그 자체가 되심을 증거했습니다 (요14:6). 예수님은 참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을 수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외모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고 진리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시 세례 요한은 바른 말을 한다고 해서 투옥 당하고 목베임을 당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진리를 말씀하셨기 때문에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고 끝내는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오늘날도 진실을 말하면 사회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로 취급하고 핍박합니다. 이 사회는 진실을 말하는 자는 인기가 없고 적당히 거짓말을 하고 처세술에 능한 자가 인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진리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허탄한 이야기를 좋아하며 귀가 가리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둡니다 (딤후4:3,4). 신자들조차도 은혜와 사랑과 축복의 메시지는 좋아하지만 회개와 자기 부인과 사명의 십자가와 같은 복음적인 메시지는 싫어합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사람들의 인기를 잃지 않고자 이 시대와 타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시대와 타협치 않으시고 진리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심문하는 빌라도 앞에서 이렇게 증거하셨습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요18:37b).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이 시대와 타협하지 말고 진리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도를 가르쳐야 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아첨의 말을 한 것은 예수님이 묵비권을 행사하지 않고 진실되게 말하게 함으로써 꼬투리를 잡고자 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추켜세운 뒤 덫이 있는 정치적인 질문을 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이 질문은 어는 쪽으로 대답하든 걸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식민지 백성들에게 인두세를 부과시켰는데 유대 백성들은 이에 대해 늘 반항적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세금을 바치라고 하면 백성들의 비난거리가 되어 백성의 인기를 잃게 됩니다. 그러면 여론을 근거로 예수님을 체포할 수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하면 로마에 대한 모반을 선동하는 죄로 헤롯당에 의해 즉각 체포 당하게 됩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진퇴양난입니다. 그들은 이제야말로 예수님이 꼼짝없이 걸렸다 생각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곧 그들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고 그 외식함을 아셨습니다(15a). 그들이 아무리 겉으로 진실한 척 해도 예수님을 속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게 하여 이 화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데나리온은 로마의 작은 은화로 제국의 세금 납부를 위해 사용된 화폐였습니다. 당시 황제는 디베료 가이사 아구스도(A.D 14-37)였는데 동전 앞면에는 월계관을 쓴 가이사의 흉상과 “가이사 디베료, 신성한 아구스도의 아들, 만민의 주”하는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는 로마 제국의 황제 숭배를 위하여 고안되었습니다. 데나리온에 가이사의 초상과 글이 있다는 것은 그것이 가이사의 것임을 말해 줍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가이사의 것이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그들은 예수님께 대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K.O패를 당하고 물러갔습니다.
그러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첫째,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 이는 한 나라의 시민으로서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라는 것입니다. 국가에 대한 의무로는 납세의 의무, 병역의 의무, 교육의 의무, 근로의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한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탈세를 한다거나 병역을 기피한다거나 일을 하지 않고 불로소득을 취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로마가 무력으로 유대를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가이사에게 세를 바쳐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이유를 로마서 13: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국가의 권세 잡은 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권세를 위임 받은 하나님의 사자로서 악을 행하는 자들을 심판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심판 때문에 권세에 굴복할 뿐만 아니라 양심을 인하여 해야 됩니다. 우리는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 할 자를 두려워하고 존경할 자를 존경해야 합니다(롬13:4-7). 이 때 우리는 건전한 시민으로서 이웃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예수님은 한 나라의 시민으로서 국가에 대한 의무만 강조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적인 것에 관심이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더 중요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실 그들은 가이사에게도 안 바치고 하나님께도 바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둘 다 적극적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우리가 마땅히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은 소득의 십일조입니다 (신12:11).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 됩니다 (말3:8,9). 또 첫 열매도 주님의 것이므로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출23:19, 신26:2,10). 무엇보다 안식일은 주의 날이기 때문에 이 날을 다른 날과 구별하여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직장에서 주일에도 나와서 근무하도록 요구할 때 결코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은 황제를 신성시하는데 대한 경고의 말씀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황제는 자기 몫을 마땅히 받아야 하지만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경배와 찬송과 영광과 충성을 결코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국가가 국가에 대한 의무 이상의 신적인 것을 백성들에게 요구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모든 만물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신10:14). 특히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하나님의 화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창1:27).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물질이나 생명이나 자녀까지도 다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Ⅱ. 부활에 관한 논쟁 (18-27)
바리새인들이 K.O패를 당하고 물러가자 이제는 머리를 잘 돌리는 사두개인들이 묘한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유다의 소수파로서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귀족계급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주로 사두개파에서 많이 나왔습니다. 이들은 세상 정치에 눈이 밝아 정치적이고 현세적이었습니다. 이들은 성경도 모세 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했습니다. 이들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행23:8). 그들은 영생이나 장차 올 심판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왜 부활을 믿지 않았을까요? 이는 부활을 믿으면 심판도 믿어야 되고 그러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마음대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인 줄로 생각하는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19-23절에는 슬픈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명기 25:5-10절에 보면 형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하여 대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어떤 가정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이 다 후사가 없이 죽었습니다. 여자도 후사를 낳지 못하는 악몽에 시달리다가 최후로 죽었습니다. 그 집안은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활 시에 있었습니다. 일곱 사람이 모두 동일한 한 아내를 취하였으므로 부활 시에는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형제끼리 아내 쟁탈전을 벌이는 비극이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실제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이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 질문을 하는 것은 만일 부활이 있다면 더 큰 비극이 발생할 것이므로 부활은 있을 수 없고 또 있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해괴한 질문으로 부활의 진리를 파괴하고자 했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부활을 파괴하게 되면 기초가 무너져서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됩니다 (고전5:12-19).
예수님은 먼저 그들이 해괴한 질문을 하는 근본적 오류가 무엇인가를 지적해 주셨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첫째로, 그들은 성경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모세 오경에 부활에 관한 교훈이 없다고 해서 부활의 진리를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출애굽기 말씀 가운데서 부활의 진리를 말씀하였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지식적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속에 숨어 있는 깊은 진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깊은 바다와 같아서 겉으로 볼 때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조금만 깊이 들어가 보면 무궁무진한 영적 보화로 가득차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기 때문에 이성적으로는 숨은 비밀을 깨달아 알 수 없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을 때만이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딤후3:16, 벧전1:21).
둘째로,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이 세상의 연장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부활 시에는 차원이 달라집니다. 부활하게 되면 우리는 천사와 같이 불멸의 영적인 존재가 되어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을 하지 않게 됩니다. 이 세상은 죽음이 지배하기 때문에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필요하지만 부활하게 되면 죽음이 정복되므로 그런 일이 필요가 없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하게 되면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기 때문에 더 이상 죄의 소욕에 시달리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분이시요,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능히 살리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썩고 욕되고 추하고 연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썩지 아니하고 신령하고 영화롭고 강한 몸으로 부활시키사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살 수 있게 하십니다 (고전15:42-44). 하나님은 능력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능히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의 문제는 하나님을 이성의 세계에 가두어 놓고 그 능력을 제한시킨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출애굽기 3:6절 말씀을 인용하여 부활의 진리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망명생활 40년에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있는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고 계시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시제가 모두 현재형으로서 하나님은 항상 현재 살아계신 분이심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영존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시대나 이삭 시대나 야곱 시대나 모세 시대나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항상 현재 살아 계신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벌써 죽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활시키사 현재 그들도 살아서 하나님과 함께 계심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고 말씀하실 때 하나님은 개개인의 삶에서 역사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시요, 장구한 역사 속에서 세상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는 역사의 하나님이시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언약을 기초로 역사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심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사두개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이 비인격적이고 기계적이고 관념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이고 우리의 삶과 역사 속에서 살아서 역사하시는 역동적인 분이시요, 약속하시고 때가 되면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요 모세의 하나님이시요 바로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불신 세상에서 믿음으로 산 믿음의 조상들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이 땅에서는 나그네임을 자처하며 믿음으로 장막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살다가 죽어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부활의 새 생명을 주셔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부활의 새 생명을 주셔서 영생을 누리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년수는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으로서 때가 되면 육신은 죽어 흙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만일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부활이 없고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난다면 우리의 생이 얼마나 허무하고 비참하겠습니까? 인생에 아무런 소망이 없기 때문에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는 쾌락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 영광스러운 부활의 새 생명을 덧입혀 주셔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사랑하는 우리 주님과 함께 살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나그네의 인생을 살 수 있으며 또한 주님을 위해 기쁨으로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27절에서 결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죽은 자란 사두개인들과 같이 부활의 믿음이 없는 자입니다. 이런 자는 믿음이 없어 늘 생각이 부정적이고 운명적입니다. 이들의 말은 죽어 있고 생각도 죽어 있고 표정도 죽어 있고 행동도 죽어 있습니다. 이들은 안 된다, 힘들다, 불가능하다, 허무하다, 해도 소용없다, 무의미하다, 절망적이다, 될 대로 되라는 등의 부정적인 단어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늘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의심하고 불신합니다. 이들은 살았으나 죽은 자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니체 said “God is dead”, But God said, “니체 is dead” 하나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사고 방법을 가진 니체가 죽은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을 만나 볼 수도 없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반면 산 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이 부족하지만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부활을 믿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새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주요 부활의 주이심을 믿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위로부터 하나님의 생명을 덧입고 살아가기 때문에 늘 생명력이 넘칩니다. 이들의 말은 살아 있고 생각도 살아 있고 행동도 살아 있습니다. 이런 자들의 삶에는 죽음의 요소가 없습니다. 항상 밝고 긍정적이고 생동감이 넘치며 희망찹니다. 이런 자들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산 자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이 믿음으로 살므로 말미암아 산 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