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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Ⅱ 부:마가복음 12:28-44(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by Mark Yang   08/15/2019   Mark

Message


마가복음 II 부 제 10 강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말씀 : 마가복음 12:28-44
요절 : 마가복음 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오늘 말씀은 첫째와 둘째 계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첫째 계명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입니다. 이 두 계명은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으로 모든 계명을 요약한 핵심적인 계명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할지라도 이 두 계명을 실천하지 않을 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두 계명은 우리에게 부담을 주는 계명이 아니라 행복을 주는 계명입니다. 이 두 계명을 실천해 나갈 때 우리의 삶은 참 기쁨과 만족과 행복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오늘은 두 계명의 뜻을 묵상해 봄으로써 우리의 신앙생활을 새롭게 점검해 보고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첫째 되는 계명 (28-30)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지혜로 사두개인들을 여지없이 K.O패 시키시는 것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단순한 대답이 아니라 심오한 영적 진리를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그 지혜에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는 예수님의 지혜로운 답변을 듣고자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인가 물었습니다. 그가 이런 질문을 한 것은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과 같이 예수님을 시험코자 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믿음의 확신을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613가지의 계명이 있는데 당시에 이를 여러 가지로 분류하고자 하는 시도가 많이 있었습니다. 613가지 계명 중 적극적 계명과 소극적 계명으로 분류하기도 하고, 무거운 계명과 가벼운 계명으로 구분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전체의 율법을 단 하나의 계명으로 요약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고, 어느 것이 근본적이고 어느 것이 부차적인 것인지 끝없이 논쟁하였습니다. 그래서 서기관은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인가 예수님의 답변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첫째 되는 계명은 모든 계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우리가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계명입니다. 이는 우리의 영적 생명에 관계되는 중요한 계명입니다. 우리가 첫째 되는 계명을 잘 지킬 때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고 영적 질서를 지킬 수 있습니다. 첫째 되는 계명은 신앙의 근거일 뿐만 아니라 인생의 기초요, 지표가 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예수님은 첫째 되는 계명을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고 말씀하실 때 이는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이고 유일무이한 경배의 대상이 되심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인생들로부터 경배와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참 신이시며 다른 신들은 다 헛것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상 숭배를 배격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점에서 유일한 주가 되십니까?
첫째로,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가 되십니다. 이사야 37:16절은 말합니다.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조성하셨나이다.” 참 신과 거짓 신을 구별하는 유일한 방법은 이 세상을 누가 창조하였는가 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과 우리 인간을 그 뜻대로 지으신 창조주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능력과 지혜가 무한하신 전능하신 분으로서 지금도 살아 계셔서 능력으로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고 인생들의 생사 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속하신 구속자가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린 양의 피로 바로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신 것과 같이, 예수님의 보배 피로 우리를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사 하나님의 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를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요 구속주이시기 때문에 유일한 주가 되십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가 무엇입니까? 30절을 보십시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이 말씀은 우리가 최우선적으로 사랑해야 할 대상이 무엇이며, 또 어떻게 사랑해야 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첫째, 우리가 최우선적으로 사랑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할 대상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나를 낳으시고 기르시고 교육을 시키시느라 온갖 희생을 아끼지 않으시는 부모님을 사랑합니다. 또 부모는 자기가 낳은 자식을 끔찍이 사랑합니다. 또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사랑합니다. 또 결혼하지 않은 젊은 남녀들은 이성을 그리워하고 사랑합니다. 또 고상한 사람은 학문이나 예술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합니다. 현실적인 사람은 권력이나 타이틀을 사랑합니다. 지저분한 사람은 돈을 사랑하다가 돌기도 합니다. 우리 인간은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살 수 있지만 또 사랑할 대상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기만 하고 사랑할 대상이 없을 때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 중에서 가장 최우선적으로 사랑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결코 앞설 수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보다도 다른 것을 더 사랑할 때 그때부터 불행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정말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마음 첫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을 최우선적으로 사랑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나를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또 나를 죄 가운데서 구속하사 당신의 소유로 삼으신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둘째, 하나님을 사랑하되 전인격적으로, 전심전력하여 사랑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마음(heart)이란 “지정의의 움직임 또 그 움직임의 근원”으로서 인격의 중심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중심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른데 빼앗기고 몸으로만 하나님을 사랑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할 때 마음에 기쁨이 없고 스피릿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을 바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심령에 기쁨이 생기고 스피릿이 충만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을 원하십니다. 부족하지만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목숨(soul)이란 육신의 생명 또는 성품을 말합니다.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육적 생명과 개성과 재능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뜻(mind)이란 우리의 지성, 사고를 말합니다. 이는 우리의 생각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힘(strength)은 육체적인 능력으로 우리의 젊음과 정열, 에너지를 뜻합니다. 젊은 사람에게는 힘이 넘칩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그 넘치는 힘을 어디다 쓸지 몰라서 죄 짓는데 다 허비해 버립니다. 만일 우리의 활화산 같이 넘치는 정열을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쏟아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위대한 역사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고 총체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전 인격적으로, 전심전력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는 하는데 미지근하게 적당히 사랑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적당히 사랑할 대상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할 대상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100%를 원하시지 99%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부를 원하시지 부분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우리의 모든 것을 요구하십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는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전폭적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전폭적인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를 얽어매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과 만족과 자유와 행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할 때 자신도 모르게 세상을 사랑하게 되어 타락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전심전력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어떤 축복을 받게 됩니까? 가장 먼저 하나님과 연합하게 되어 온전한 사랑의 관계성이 맺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뜨겁게 사랑하시는데 우리는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않는다면 사랑의 관계성이 맺어지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도 이를 기뻐하시고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비결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사랑만 받고자 하고 사랑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이런 자는 철없는 어린아이와 같이 지극히 자기 중심적입니다. 우리가 전심전력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위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임하게 되어 내 마음에 있는 모든 어두움과 미움과 증오심과 세상 염려와 두려움이 사라지게 됩니다. 또한 메마른 나의 심령에 사랑의 샘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맛볼 수 없는 참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맛볼 수 있게 됩니다. 인생들의 문제는 결국 따지고 보면 사랑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사랑을 먹고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해 줄 대상을 찾아 방황합니다. 형제들은 자매님의 사랑을, 자매님은 형제의 사랑을 받으면 행복할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은 아무리 채워도 밑빠진 독에 물붓기와 같아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또 인간의 사랑은 사람을 병들게 하고 못쓰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을 근본적으로 살리고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줍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육간에 축복하사 모든 것이 풍족하게 차고 넘치게 하십니다. 전심전력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행복의 비결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현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양무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말씀을 사랑하지 않고 형제를 미워하고 또 하나님의 양무리를 먹이지 않을 때 이는 거짓말하는 것이 됩니다 (요한1서3:10, 4:7,8).

II. 둘째 계명 (31-34)

31절을 보십시오.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첫째 계명은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을 다하여 무제한적으로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둘째 계명은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제한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하는데 있어서는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내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사랑해야 됩니다. 만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면 이는 우상 숭배가 되고 맙니다. 우리 인간은 이렇게 전폭적으로 사랑을 받을 대상이 못됩니다. 이웃은 우리가 내 몸을 사랑하는 것 만큼만 사랑해도 충분합니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기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건강과 안전과 행복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건강에 좋다고 하면 뱀이나 곰발바닥이나 지렁이나 지네나 무엇이든 다 먹습니다. 또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 약을 먹고 병원에 갑니다. 또 사람들은 자기를 귀히 여기고 존중하는 자존심(self respect)이 있습니다. 자존심을 조금만 건드려도 화를 냅니다. 또한 사람은 자기를 기쁘게 하고자 애를 씁니다. 이렇게 자기를 사랑하는 것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건강과 안전과 행복에 관심을 갖는 것과 같이 이웃의 건강과 안전과 행복에 관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귀히 여기고 존경하는 것 같이 이웃을 귀히 여기고 존경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쉬운 것 같지만 실천하고자 할 때 어렵습니다. 여기에는 자기 부인과 희생이 요구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때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휴머니즘에 기초한 이웃에 대한 사랑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할 때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여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웃은 영육간에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세상에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가까이는 가족이나 친구나 직장 동료로부터 시작해서 멀리는 외국에 수많은 영혼들이 있습니다. 특히 공산권에 있는 수많은 영혼들이 우리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특징 중의 하나는 이기주의입니다. 사도 바울은 딤후 3:1-5절에서 말세의 특징으로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말세 중의 말세로서 이러한 현상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 믿는 자들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이웃 사랑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불신자들에게 이웃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러지 않을 때 우리는 그들로부터 원망을 듣게 됩니다. 가장 큰 이웃 사랑은 말씀을 가르쳐 주고 기도해 줌으로써 그 영혼이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받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32,3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서기관은 큰 은혜를 받고 이렇게 응답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되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신앙의 본질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단지 예배를 잘 드리고 봉사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이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네가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도다”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 후에는 아무도 감히 묻는 자가 없었습니다.

III. 예수님의 여러 가지 교훈들 (35-44)

첫째, 다윗의 주되신 그리스도 (35-37). 예수님은 성전에서 가르치시면서 먼저 서기관들의 그릇된 메시야관을 시정해 주셨습니다. 서기관들은 성경 선생들로서 백성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으로 다윗의 줄기에서 탄생하셨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알지 못하고 인성만 강조 한데 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임을 강조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다윗과 같이 모든 원수들을 물리치고 지상 메시야 왕국을 건설할 것이라는 민족적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장차 인류의 가장 큰 원수인 죽음을 정복하시고 부활 승천하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온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심판주로 강림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문제를 해결하는 민족적 메시야가 아니라, 인생들의 근본 문제인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시는 세상의 구주가 되십니다.

둘째, 서기관들의 외식에 대한 경계 (38-40).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서기관들의 악영향을 경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은 풍채를 더하고 위세를 가장하기 위해서 긴 옷을 입고 다녔으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했으며, 과부를 도와준다는 명목 아래 재산을 탈취하였으며, 자신이 경건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내기 위해서 미사어구를 써서 마음에도 없는 말로 길게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이중생활을 하고 거짓되었습니다. 외식은 인간이 지을 수 있는 모든 죄 중에서 가장 큰 죄입니다. 서기관들이 이렇게 된 근본 원인은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이 받을 판결은 더욱 중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실되어야 합니다.

셋째, 참된 연보 (41-44). 예수님은 성전에서 연보궤에 대하여 앉으사 무리들의 헌금하는 것을 통해 제자들에게 참된 연보가 어떤 것인가 바른 가치관을 심어 주셨습니다. 여러 부자는 100만원 짜리 수표를 연보궤에 넣으면서 사람들이 보란 듯이 자랑스럽게 넣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난한 과부는 두 렙돈 200원을 동전이라 소리가 날까 봐 조심스럽게 넣었으나 안타깝게도 땡그랑하는 소리가 나고 말았습니다. 과부는 연보가 너무 부족하여 상하고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넣었습니다. 사람들은 부자들이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을 보고 믿음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과부가 헌금하는 것을 보고 그것도 헌금이냐고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치관은 달랐습니다. 43,4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가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가장 많이 넣었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부자들은 다 풍족한 중에서 넣었지만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질보다 양을 보고 상대적으로 평가하였지만 예수님은 양보다 질을 보시고 절대 평가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친 양보다 바치는 자의 능력과 바치는 동기를 중시하셨습니다. 참된 연보는 여인과 같이 우리의 진심을 드리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8장에 나오는 마게도냐 성도들은 참된 연보에 대해 우리에게 좋은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들은 힘대로 할뿐만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하였습니다. 또 그들은 억지로 하지 않고 자원함으로 하였습니다. 그들은 먼저 자신들을 주께 드렸습니다. 이러한 헌금은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한 향기로운 재물이었습니다.

한 가난한 과부가 희생적으로 헌금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할 때 주님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기쁨과 감사함으로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므로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