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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Ⅱ 부:마가복음 13:1-37(기독교 역사관)

by Mark Yang   08/15/2019   Mark

Message


마가복음 II 부 제 11 강


기독교 역사관


말씀 : 마가복음 13:1-37
요절 : 마가복음 13:10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오늘날은 역사의식 부재의 시대입니다. 역사의식이 없을 때 개인주의와 신비주의에 빠져 역사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역사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역사적이어야 합니다.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기독교 역사관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시간 자기 문제에서 벗어나 주님께 귀기울여 봅시다.
오늘날은 정보 통신 혁명이 가져올 새로운 문명에 대한 기대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 전쟁은 사라졌지만 지구는 여전히 전쟁과 기근, 윤리의 타락으로 더더욱 어두워져만 갑니다. 과연 인류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이 시대를 바로 볼 수 있는 올바른 역사관과 이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을 배우고자 합니다.

Ⅰ. 말세의 징조 (1-23)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신 후 제자들과 함께 나가실 때였습니다. 이 때 제자 중 하나가 성전 건물에 감탄하며 말하였습니다. “와! 선생님 저 엄청난 돌들을 보세요. 저 웅장한 돌들을 보세요.” 성전은 헤롯 대왕이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지은 것으로서 성전 입구에는 12미터나 되는 그리이스산 대리석 기둥들이 서 있었고 건물 전체가 흰 대리석으로 세워져 있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틴 여행자들은 이 성전 하나만 봐도 여행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화려한 외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놀라운 예언을 하셨습니다.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성전 파괴는 유대인에게 있어서 이스라엘의 멸망이요 더 나아가 세상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A.D 70년 성전은 로마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는 끔찍한 예언을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겉모습에 현혹된 제자들과 달리 성전의 내면을 보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타락한 모습을 보셨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가장 큰 죄악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지자적 통찰력으로 예루살렘이 그 죄로 인해 철저하게 심판 받을 것을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성전이 내다보이는 감람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큰 쇼크를 받고 비로소 자기 문제에서 벗어나 인류의 장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종용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질문의 요지는 말세의 때와 그 징조입니다. 말세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말세의 징조를 말씀하시면서 역사의 중심된 흐름을 가르쳐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면 말세의 징조는 무엇입니까?

첫째,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입니다(5,6).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과 미혹은 첫 번째의 말세 징조이며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이들 거짓 메시야는 거짓 희망을 가르치며 사람들을 미혹하여 그 영혼을 파괴시키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거짓 그리스도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통일교, 애천교,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 노스트라다무스, 우주인의 선지자를 비롯하여 오늘날 활개치는 박옥수의 구원파 등은 대표적인 거짓 그리스도입니다. 김일성도 북한에서 신처럼 군림하며 거짓 메시야로 행세하고 있습니다. 또한 단일 세계 정부와 단일 세계 종교를 주장하는 새시대 운동(New Age Movement)도 거짓 그리스도입니다. 최근 50년 동안 세계 도처에 자칭 그리스도가 1,100명이 넘고, 한국에만 50명이 넘습니다.

둘째, 재난의 연속입니다(7,8). 말세에는 전쟁, 지진, 기근과 같은 무서운 재난이 연속적으로 일어납니다. 종말의 때에는 사랑이 식으며 인간성이 상실되어 이로 인해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실제로 지난 4000년 동안 전쟁이 없었던 시기는 불과 268년뿐이었으며 2차 세계대전 후 오늘날까지 전세계 20여개 지역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땅도 고통하여 지진과 기근이 처처에서 발생합니다. 이러한 지진과 기근은 해가 갈수록 그 횟수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16세기에는 258회, 17세기에는 378회, 18세기에는 640회, 19세기에는 2119회가 일어났습니다. 20세기에 이르러서는 더 많은 지진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지금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기근으로 죽는 수는 일분에 24명, 하루에 3만 5천명에 달합니다. 지난 5년 동안 기근으로 죽은 사람 수는 지난 150년간에 지구상에 일어난 모든 전쟁과 유혈 혁명 등의 사상자보다 더 많은 숫자라고 합니다. 이러한 재난은 교만하고 완악한 인간으로 하여금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시는 경고입니다.
그런데 이런 재난 앞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두려움입니다. 한 번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생각이 마비되고 방향을 잃어 실족하게 됩니다. 이 재난은 죄에 대한 심판이기도 하지만 우리 믿는 자에게는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순수케 하시는 하나님의 연단입니다. 무엇보다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이것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재난은 “The beginning of birth pain” 곧 ‘산고의 시작’으로서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는 전주곡입니다.

셋째, 핍박이 많아집니다(9-13). 우리가 진실되게 믿음으로 살고자 하면 반드시 핍박을 받게 됩니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핍박은 가정의 핍박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다는 한가지 이유 때문에 모든 사람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됩니다. 이런 핍박을 받을 때 우리는 타협하고 믿음을 잃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힘들다고 믿음을 지키지 못한다면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승리의 면류관은 끝까지 인내하는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예수님은 더 구체적으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말씀하십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멸망의 가증한 것이란 신성모독을 말합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거룩한 제단 위에는 돼지 머리가 놓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예루살렘에 순례하러 온 110만 명이 죽었습니다. 당시 최대의 도시 로마가 100만 명이 안 된 것을 볼 때 이 숫자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말씀대로 산으로 도망간 자들은 다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그날에는 재물에 미련을 둔 사람, 육신의 정욕대로 산 자들에게는 화가 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에는 역사적 의미와 종말론적 의미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관한 예언이 이처럼 역사적 사건으로 성취된 것과 같이 장차 있을 말세에 대한 모든 예언도 다 그대로 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Ⅱ. 기독교 역사관 (10)

말세의 징조가 가득찬 역사는 의미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두운 세상 역사 가운데 분명한 희망의 역사를 이끌어 가고 계십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우리는 여기서 분명한 기독교 역사관을 배울 수 있습니다. 역사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역사의 주관자와 역사의 의미, 목적입니다. 그러면 먼저 역사의 주관자는 누구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클린턴과 같은 정치 지도자, 로스차일드 같은 재벌, 또는 뛰어난 석학들이 역사를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민중이 역사를 움직인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많은 역사 학자들이 역사에는 인간이 좌지우지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세력이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헤겔은 절대 자유 이성이, 마르크스는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변증법적 힘이 인간을 움직인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세속사가인 토인비는 일찍이 인류 문명의 흥망성쇠를 연구한 결과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하는 깨어 있는 소수의 지도자에 의해 민족이 발전한다는 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현상 배후에 있는 본질에 대하여 질문을 던졌습니다. 역사의 도전은 어디서 왔는가? 깨어 있는 소수는 어디서 왔는가? 민족의 번영은 결국 무엇을 지향하는가? 이것을 설명하는 정치적, 경제적, 정신적 조건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조건은 어디서 왔다는 말입니까? 이런 질문을 해결할 수 없었던 그는 역사에는 ‘신이 있다’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와 같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근본을 추구하는 자는 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신이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성경은 역사의 신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모든 역사를 친히 섭리하십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나옵니다. 겉으로 보면 그가 페르시아를 부강케 한 장본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그 시대의 죄를 벌하는 심판의 도구로 세우시고 그 또한 교만해지자 다시 그와 그 나라를 심판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이 로마 황제도 쓰셔서 생명 구원 역사를 이루셨으며 또 고르비를 주관하셔서 이 시대에 러시아에 생명 구원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이 또한 김일성과 김정일도 쓰셔서 동토의 땅 이북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역사는 어디로 흘러가며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까? 다시 한번 1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여기서 ‘먼저’라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시간적으로 앞선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가장 가치 있는 것,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역사의 많은 가치들 중에서 이 복음 전파를 가장 중요시하시며 이것을 중심으로 역사를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타락 이후 즉시 복음을 계시하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복음을 준비하셨습니다. 때가 되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사 복음을 완성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만국 복음 전파에 전심전력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인간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류역사상 이 생명의 복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생명 구원의 역사는 역사의 주요한 흐름이며 역사의 의미입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 역사는 멸망하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때에야 비로소 종말이 옵니다 (마24:14).
반면 세상 역사가들이 중요시 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역사 철학자 칼 뢰비트의 ‘역사의 의미’에 의하면, 19세기 전반은 자유주의 시대, 19세기 후반은 민족주의 시대, 20세기 전반은 제국주의 시대로 부릅니다. 이는 그 시대가 가장 추구했던 가치들에 따른 구분입니다. 이것을 가만히 보면 세속사가 추구하는 가치는 결국 정치 군사적, 경제적 번영이나 자유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각자 자기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구현하는 사건이나 인물, 그것에 관련된 사항을 세세히 연구해서 그것을 꿰매어 역사를 만듭니다. 예를 들면, 자유의 이념을 추구하는 자는 프랑스 혁명이 아주 획기적인 사건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인간의 죄와 죽음 문제를 무시합니다. 자유는 좋지만, 죄문제로 고통하는 자에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또 민족이 번영해도 죽음으로 고통하는 자에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역사의 의미를 알려면 인간의 근본 문제를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영적인 무지로 인해서 역사의 분명한 흐름과 그 의미를 제시해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미혹의 영이 난무할 때, 전쟁과 기근이 발생할 때, 그들은 미혹되고 절망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세속적 역사관은 우리에게 분명한 사명을 가르쳐 주지 못합니다. 해결되지 않는 인생 문제를 안고 자유를 위해, 민족을 위해 투쟁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또 얼마나 자신의 신념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대부분 좌절하고 현실을 살아가는 생활인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세속적 역사책을 보면 무언가 많이 배운 것 같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하나도 얻지 못해 허탈해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태초부터 종말까지 분명한 역사의 시작과 끝을 제시하며 생명 구원 역사라는 역사의 중심을 분명히 제시해 줍니다. 또 말세의 험악한 시대의 본질을 이해하고 두려움을 극복케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시대에 감당해야 할 분명한 사명을 제시해 줍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역사관입니다. 이것은 마치 태평양의 심해 저류와도 같습니다. 표면은 바람에 따라 요동합니다. 그러나 결국 보이지 않는 심해 저류의 방향을 따라 표면은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생명 구원 역사는 이와 같이 보이지는 않지만 인류역사를 움직이는 진정한 중심입니다.

하나님은 생명 구원 역사를 위해서 모든 것을 쓰십니다. 때로는 정치 지도자도 쓰시고 때로는 문명의 이기도 쓰십니다. 심지어는 인간의 탐욕까지 쓰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세계 선교 명령을 영접한 믿는 자들을 통해서 역사를 섭리하십니다. 1세기 때는 사도들을 통해서 구원 역사를 이루시고 그들을 통해 전유럽에 복음이 증거 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이 종말을 고할 때 야만인들에게 복음과 문명을 전수해 준 자들은 선교사들이었습니다. 유럽에서 성숙된 복음은 주와 복음을 위해 자신을 헌신한 선교사들 곧 프랑케, 진젠도르프, 윌리암 케리, 케임브리지 Seven, 저드슨, 언더우드 등을 통해서 18세기부터 전세계로 확장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선교의 역사는 무역 전쟁, 제국주의 전쟁, 산업 혁명, 공산 혁명 등 역사의 표면 깊은 곳에서 면면히 흐르고 있는 역사입니다. 기독교 역사관의 관점에서 우리 나라를 바라볼 때 참으로 소망이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20세기 말세지말에 한국을 제사장 나라로 쓰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가난과 전쟁을 통해서 그 동안 한국 민족을 연단하셨습니다. 우리는 성실하고 겸손하며 파이팅 스피릿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성경을 사랑하는 성경 선생의 나라로 세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통일을 통해서 명실상부한 제사장 나라로 세워 주실 것입니다. 특히 말씀대로 살아보고자 하는 순수한 소원으로 시작된 우리 모임을 통해서 하나님은 많은 세계 선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선진국 선교는 안된다고 했지만 현재 미국, 독일, 러시아에서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고자 하는 목자들이 배출되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이것은 믿음의 기적입니다. 우리는 이번 여름에 1000번째 선교사를 파송할 것입니다. 이 세기가 지나가기 전에 187개국을 개척코자 기도하고 있습니다. 세계는 아직 자기들의 언어로 된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은 종족이 무려 22,000에 이릅니다. 배고픈 아프리카, 혼란한 남아메리카, 타락하는 유럽, 미국, 러시아, 세계 영혼들은 굶주리고 갈하여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리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시오” (행16:9). 하나님은 탄식하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생명의 복음이 그들에게 속히 전파되기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은 아무런 타이틀도 없이 세상에서 무시 받을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 역사 창조의 주역들입니다. 이념이 사라진 오늘날은 물질주의,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시대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복음 전파보다도 자기 공부, 취직, 자동차, 좋은 생활 조건을 더 앞세우기 쉽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개인주의, 신비주의로 빠질 때 역사에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팽개치고 복음 전파만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복음 전파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계획하고 공부하고 직장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세계 선교는 우리만의 구호가 아닙니다. 세계 선교는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이요 역사의 필연적 요구입니다.

Ⅲ. 역사의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 (24-37)

예수님께서 각종 환난 후 마지막 날에 있게 될 더 무서운 일을 말씀하십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그 때는 세상 만물이 일시에 와르르 무너지게 됩니다. 해가 어두워져 온 지구가 혼돈과 흑암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님의 얼굴 같던 달도 떨어지고, 밤하늘을 수놓은 아름다운 별 볼 일도 없어집니다. 하늘의 모든 권능은 흔들려서 행성과 행성들이 자기 궤도를 벗어나 서로 충돌합니다. 이 때 곳곳에서 교만한 인간의 바벨탑이 무너질 것입니다. 63빌딩도 무너지고, 컴퓨터도 박살이 날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이 때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로 혼란 중에 곤고하며 사람들은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다가 너무 무서워 기절하게 됩니다 (눅21:25,26). 이것은 지진이나 태풍 정도가 아닙니다. 만유인력이 없어지고 지구가 화성과 충돌합니다. 어디 피할 곳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차라리 기절해서 죽고자 합니다. 바로 이 절망의 순간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십니다.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예수님께서 인생들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구세주로 오실 때는 아무도 모르게 말구유간에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재림하실 때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십니다. 그 때 칠흑같이 어두운 공간에 큰 구멍이 열리고 그 속에서 엄청난 빛들이 일시에 쏟아져 나옵니다. 그 빛이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가고 천군 천사들의 우레와 같은 나팔 소리가 울리면 천사장이 예수님의 재림을 알리는 호령 소리가 들립니다. “Jesus is coming” 이 때 예수님께서 수많은 천군 천사들을 대동하고 가슴에는 황금빛 금띠를 띠시고 가시면류관 대신 금면류관을 쓰시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부터 내려오십니다. 영광의 주, 심판의 주, 왕의 왕께서 이 땅에 오십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범우주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어느 한 구석에서 어떤 사람들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이 일시에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입니다. 그날에는 심판의 기준이 지식이나 돈이나 타이틀이 아니라 오직 ‘믿느냐 믿지 않느냐’ 입니다. 이것은 부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믿음이 없다는 것은 예수님의 주권과 그 통치를 거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날에는 의사, 교수, 사장, 검사의 타이틀도 소용없고 억만금의 재산도 소용없고 오직 믿음이 전부입니다. 그 날에는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그 날에는 수없이 보았던 재시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충분한 기회를 주셨지만 그들 스스로가 세상 쾌락과 안일과 두려움 때문에 결국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날은 성도들에게는 승리와 영원한 안식의 날이 됩니다.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이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읍니다. 성도들은 새로운 몸으로 변화됩니다. 그리고 휴거하여 공중으로 들려 올려지게 됩니다. 생로병사의 번뇌가 사라집니다. 무엇보다 우리들의 구세주 예수님을 대면하여 볼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중에서 우리를 맞으시며 “잘 하였도다. 착한 종이여” 칭찬하십니다. 이 땅에서 남 몰래 흘렸던 슬픔의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의와 사랑으로 영원히 우리를 다스려 주실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재림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재림의 희망으로 사는 자들이 이 땅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될 것인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무화과 나무 가지가 연해지고 그 잎사귀가 무성해지면 삼척동자도 여름이 가까운 줄 압니다. 마찬가지로 이런 말세의 징조를 보면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한 것을 깨닫고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늘에 있는 천사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십니다. 어떤 사람은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근거로 재림의 날짜를 계산합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을 볼 때 모두 엉터리입니다. 33-37절에는 “깨어 있으라”는 말이 4번 반복되어 나옵니다. 이것은 13장의 결론적 권고의 말씀입니다. 주께서 이처럼 역사를 이끌어 나갈 것이니 너희는 깨어 믿음을 지키고 복음 역사에 충성하라는 말씀입니다. “깨어 있으라” 이는 특별한 제자들에게만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인류 구속 역사를 중심으로 역사를 섭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온 백성을 구원하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이러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이 시대를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