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Ⅱ 부 제 13 강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말씀 : 마가복음 14:27-72
요절 : 마가복음 14:36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생애 중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절망스러운 시기입니다. 여기에는 십자가를 앞에 두고 고뇌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진실된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될 지경에 이르시기까지 고뇌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나아가 기도하심으로 모든 슬픔과 절망과 연약함을 극복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미 겟세마네 기도로 승리하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배웁시다.
Ⅰ. 기도로 결단하신 예수님 (27-42)
27-31절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과 나눈 대화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위기의 순간에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갈 것을 아셨습니다. 심혈을 기울여 자식처럼 돌본 양이 도망갈 것을 안다는 것은 목자로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때는 그 양에 대해 더 이상 애정이 가지 않고 소망을 끊어 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도망갈 것을 아시면서도 그들에 대한 소망을 끊지 않으시고 변함없이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이 큰 시련을 견딜 만큼 강하지 못함을 아시고 스가랴 13:7절 말씀을 기초로 그들의 실족을 예언하셨습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양들은 목자만 있으면 마음에 행복을 느끼며 맛있게 꼴을 먹고 포동포동 은혜의 살이 찝니다. 그러나 목자가 없으면 부모 없는 고아와 같이 슬프고 외롭고 불안하며 방향을 잃고 헤매게 됩니다. 전쟁에서 지휘관이 죽으면 장병들은 흩어지듯이, 목자 되신 예수님이 체포당하면 양들은 자연히 흩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애로운 어머니와 같이 그들을 이해하시고 품고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실로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히3:15).
예수님은 말씀을 기초로 그들의 연약함을 이해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도망가더라도 근본적으로 실족하지 않고 일어설 수 있도록 부활의 소망과 함께 분명한 방향을 주셨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제자들은 잠시 큰 슬픔과 절망에 빠지지만 곧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그들은 큰 기쁨과 희망에 넘치는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겸손하게 자신들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실족하지 않도록 깨어 기도로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수제자로서의 자존심이 상했는지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29). 그는 다른 사람은 도망갈지 몰라도 자신은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에게는 예수님께 대한 남다른 충성심이 있었습니다. 또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충성심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인간적인 의리에 기초한 것이어서 언제든지 쉽게 무너질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더 충격적인 예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은 베드로가 자신을 아는 것보다 베드로를 더 잘 아셨습니다. 후에 베드로는 이 말씀 때문에 돌이킬 수 있었습니다 (14:72).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는 목에 힘을 주고 더 강도있게 예수님께 대한 충성을 다짐했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그러자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자신을 믿어 주지 않고 충성심을 인정해 주지 않는 것에 대해 몹시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보다 자신을 더 믿었습니다. 그는 사단의 역사가 얼마나 강한지 영적인 세계를 잘 몰랐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기도할 수 없었고 결국 실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겟세마네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겟세마네’는 올리브를 으깨어 기름을 짜는 틀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자신의 피와 땀을 으깨어서 기름을 짜듯이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혈과 육의 싸움을 싸우지 아니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기도의 싸움을 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의 기도할 동안 여기 앉았으라 말씀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심히 놀라고 슬퍼하시며 세 제자들에게 기도 부탁을 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예수님은 이때까지 이렇게 연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광풍이 휘몰아치는 위기 가운데서나 살기가 등등한 원수들 앞에서도 조금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항상 의연하시고 위엄과 영적 권위로 충만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예수님답지 않게 왜 이렇게 놀라고 슬퍼하시는 것입니까? 소크라테스는 죽을 때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히 독사발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렇게 죽음 앞에서 죽는 소리를 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보통 인간의 죽음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보통 인간의 죽음은 자신의 죄로 인한 개인적인 죽음이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인류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는 대속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이란 육체적 고통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죄와 불법의 이루 말할 수 없는 무게에 짓눌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가 지은 모든 죄로 말미암아 대신 저주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높이 달려 만민의 비방의 표적이 되실 뿐만 아니라 일시적으로나마 하나님께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셔야만 하셨습니다. 이것은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서 우리가 당해야 할 모든 육체적, 정신적, 영적 고통을 감당코자 하실 때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될 지경에까지 이르신 것입니다. 저는 매주 한편의 메시지를 쓰는 것만 해도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인하여 괜히 머리가 아프고 잠을 편히 못 자고 부담감에 짓눌릴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성냥개비 십자가를 지고도 그러한데 온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우주 만한 십자가를 져야 하시는 예수님의 정신적인 고통이 어떠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한 인간으로서 이런 고통을 맛보셨기 때문에 인간들의 모든 고뇌와 갈등과 고통을 깊이 이해하시고 능히 도와 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히4:15). 사람들은 아무리 이해심이 깊다 할지라도 내가 겪고 있는 마음의 번민과 고통과 고독과 슬픔을 근본적으로 이해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근본적으로 이해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번민과 연약함과 실패를 다 아시고 깊이 동정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히4:16).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세 제자들에게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보여 주시며 기도 부탁을 하셨을까요? 이는 그들이 깨어 기도함으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비록 영적으로 어리지만 기도의 동역자로 삼으시고 기도 부탁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려울 때 어떻게 영적 투쟁을 해야 하는가 하는 좋은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기도하셨습니다. 땅에 엎드렸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복종과 겸허한 자세를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필사적으로 기도의 싸움을 싸우기 시작하셨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인간적인 갈등만 하고 영적인 투쟁을 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기만 하면 위로부터 영적 힘을 덧입고 놀라운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심히 놀라고 슬퍼하시는 중에서도 조금 나아가사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 제목이 무엇입니까? 35b,36절을 보십시오.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예수님의 사랑과 깊은 신뢰심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자 하실 때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을 품고 그 사랑을 의심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사랑과 신뢰의 관계는 깨어지고 진실된 기도를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된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어린 아이가 부모를 사랑하고 신뢰하듯, 하나님 아버지를 절대적으로 사랑하고 신뢰하셨습니다.
`이 때’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때를 말하고, ‘잔’이란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할 수만 있으면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십자가의 쓴 잔을 마시지 않고 인류 구속 역사를 이루어 주시도록 간구했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쓴 잔을 회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괴로운 심정을 토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의 번민과 고통을 하나님께 진실되게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에 머물지 아니하시고 한 걸음 더 나아가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러나’ 이는 위대한 전환입니다. 자기 뜻에서 하나님 뜻에로의 전환이요, 육에서 영으로의 전환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기쁘시게 하기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자기를 하나님의 뜻에 쳐 복종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십자가를 회피하고자 한 기도가 아니라 오히려 이를 적극적으로 감당코자 몸부림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쳐 복종시키는 영적 투쟁이었습니다. 기도란 자기 생각, 자기 고집,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의 생각과 뜻을 더 앞세웁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원대로 마옵시고 내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찾고 순종하고자 하기 보다, 내가 하나님께 바라는 것만 일방적으로 청구합니다. 그리고 그 청구한 것이 빨리 응답되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랑을 의심합니다. 이런 자는 어린 아이와 같이 유치한 자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소원이 이루어져야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신앙적인 것같이 보이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의 소원보다 자기 소원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장래 방향을 정하는 문제나 결혼 문제에 부딪히면 자기 원대로 합니다. 우리의 소원은 좁고 자기 중심적이고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원대하고 완전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우리에게 유익하고 가장 좋고 확실합니다. 사람이 자기의 원대로만 하고자 할 때 영적 세계의 비밀을 알 수 없고 또 영적으로 전혀 성장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과 자기 뜻을 부인하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놀라운 영적 세계의 비밀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이 쓰실 만한 영적인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예수님의 순종의 삶의 결정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살펴볼 때 철저히 자기 뜻을 부인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본래 그 본체가 하나님으로서 하늘나라의 영광과 권세와 존귀로 옷입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이 땅에 비천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되 십자가에 죽기까지 철저히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순종의 십자가요 예수님의 삶은 순종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순종하시기 위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히5:7,8절은 이를 잘 말해 줍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고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영적인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자기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3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기도하신 후 제자들에게 돌아오사 엎드려 자는 것을 보셨습니다. 베드로는 아예 코를 골며 자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왜 잤을까요? 유월절 식사 때 떡을 너무 많이 먹고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셨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예수님께서 전과 달리 자꾸 십자가를 말씀하시자 부담감과 슬픔에 짓눌려 피곤했기 때문이었을까요? 대개 십자가가 부담스럽고 마음이 슬프면 잠을 많이 잠으로써 현실을 도피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깨우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37b,38).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깨어 기도해야 하는 절대적인 이유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첫째로, 사단의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함입니다. 사단은 우리보다 훨씬 강하고 또 간교하기 때문에 우리의 힘과 지혜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영적 분별력을 잃고 사단의 시험에 들게 됩니다.
둘째로, 육신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말씀은 육신이 약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육신이 약하기 때문에 더욱 깨어 기도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강하면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약하기 때문에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깊이 인정하는 사람은 순간 순간 기도로 주님을 의지하며 문제가 생길 때마다 겸손히 주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이런 자는 매사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승리의 인생을 삽니다.
기도는 아무리 그 중요성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압니다. 그러나 잘 알지만 실제 생활에서 하기 힘든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힘든 영적 투쟁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 투쟁 없이는 영적 승리도 없는 것입니다. 깨어 기도할 때 우리는 마음 속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인간적인 생각과 죄의 소욕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깨어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반발심과 불순종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뜻에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깨어 기도할 때 위로부터 영력을 덧입고 어떤 십자가도 능히 질 수 있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후에 이 말씀을 깊이 영접하고 깨어 기도함으로써 연약함을 이기고 많은 십자가를 지는 능력있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핍박으로 인해 흩어진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벧전 4:7)
39절과 41절을 볼 때 예수님은 동일한 기도를 세 번이나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마음으로 깊이 영접하고 앞으로 모든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할 영적인 힘을 덧입으시기까지 세 번이나 반복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눅 22:2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셨는지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심으로 모든 슬픈 생각, 연약한 생각을 다 물리치시고 적극적으로 십자가를 질 힘을 얻으셨습니다. 기도하기 전의 예수님의 모습은 마음에 번민과 고통과 슬픔과 두려움으로 죽게 될 지경이셨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신 후의 예수님의 모습은 확신과 용기와 담대함으로 충만하셨습니다. 42절을 보십시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담대히 일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투쟁에서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Ⅱ. 공회 앞에서 자기를 증거하신 예수님 (43-72)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곧 열 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공회에서 파송된 무장한 군인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왔습니다. 유다는 이미 약속한 신호대로 예수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입을 맞추는 것은 사랑과 신뢰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유다의 경우는 배반의 키스였습니다. 이 때 곁에 섰는 자 중 한 사람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서 떨어뜨렸습니다. 요한 18:10절에 보면 이는 베드로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예수님께 대한 충성을 표시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간적인 충성심은 예수님께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또 그가 검을 빼어 혈기로 대항한 것은 그의 내면에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는 깨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면의 두려움을 이길 수 없었고 감정적이 되었습니다. 그는 정말 싸워야 할 적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마태 26:52절에 보면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에게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한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검을 사용치 않으신 것은 검을 사용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그 크신 능력을 포기하신 것입니다.
48,4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자신을 체포하러 온 자들에게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왔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는 바로 성경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강도와 같이 잡히시고 강도 대신 형을 받으시고 강도들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강도와 같은 흉악한 범죄자의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사53:12). 예수님은 제자들이 도망가는 것이나 자신의 체포 당하시는 것이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것 등 모든 것을 성경을 기초로 생각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십자가의 모진 고통 가운데서도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내가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최후로 ‘다 이루었다’하시며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경 말씀을 기초로 생각하시고 행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반면 제자들은 위기의 순간에 모두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52,52절에 나오는 한 청년은 저자 마가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이런 방법으로 자신이 예수님이 체포당하신 것을 본 목격자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고 있다가 예수님이 체포당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일어나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러다가 무리에게 잡히자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있는 공회 앞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도망가다가 자신이 큰 소리친 것이 생각나서 되돌아 왔습니다. 그러나 두려움 때문에 멀찍이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이 때문에 결국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는 하지만 일정한 간격을 두고 멀찍이 따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주님께 헌신하면 모든 것을 다 잃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따르는 것도 아니고 안 따르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따라갑니다. 그러나 이런 자는 결국 사단의 시험에 들게 되고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 가까이서 좇아가야 합니다.
공회는 백성을 두려워하여 야간 불법 집회를 열고 예수님을 심문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죽이고자 결정해 놓고 증거만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짓 증거조차 서로 합하지 아니했습니다. 예수님은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과 같이 입을 열지 아니 하셨습니다. 대제사장은 꼬투리를 잡기 위해 물었습니다.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그러자 예수님은 이 때는 분명히 대답하셨습니다. 62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승천하사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장차 심판의 주로서 재림하실 것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권세자들 앞에 서면 할 말도 제대로 못하고 벌벌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심문을 받고 있지만 오히려 이들에게 부활의 소망과 재림의 심판에 대해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요 심판주로서 당당히 말씀하셨습니다. 조금 전만 해도 놀라며 슬퍼하며 두려워하던 예수님께서 이렇게 담대해질 수 있었던 것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결국 옷을 찢으며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그리고 얼굴에 침을 뱉고 손바닥으로 치며 조롱했습니다.
반면 베드로는 어떠했습니까? 그는 담대하게 적의 소굴에 들어왔으나 그의 속은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군대의 협박이나 무자비한 고문에 의해 예수님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한 연약한 계집종의 말에 의해 힘없이 무너졌습니다. 그가 세 번 예수님을 부인했을 때 닭이 두 번 울었습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그후 베드로는 일생 동안 닭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또 닭이 울 때마다 예수님의 구속의 사랑이 생각나서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실패한 이유는 자기를 믿고 깨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십자가를 앞에 두고 먼저 기도의 싸움을 싸우셨습니다. 기도의 싸움에서 승리하신 예수님은 진정한 승리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문제가 있을 때 인간적인 갈등만 할 것이 아니라 겟세마네 동산으로 나아가 기도의 투쟁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십자가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의 용사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