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II 부 제 14 강
십자가의 구속의 사랑
말씀 : 마가복음 15:1-47
요절 : 마가복음 15:34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사람은 누구나 때가 되면 죽습니다. 이 인간의 죽음은 죄의 결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보통 인간의 죽음과는 달리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고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인류 역사상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비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저주스럽게 돌아가셔야만 하셨습니까? 그가 받으신 고난과 죽으심은 우리 인생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십자가의 구속의 사랑을 깨닫고 사죄의 은혜를 충만히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진리의 증거자 예수님 (1-15)
14장에서 예수님은 체포당하시고 공회에서 철야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 죄로 몰아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로마 식민 통치하에 있었으므로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의 법을 빌어 예수님을 죽이고자 새벽에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습니다(1). 그들은 공회에서는 예수님을 신성모독 죄로 정죄했으나, 빌라도에게는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하여 가이사를 반역한다는 정치적인 명목을 내세워 고소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기 시작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 질문은 유대인들의 고소가 사실인가 아닌가를 알아보는 것으로서 이를 시인한다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네 말이 옳도다.” 예수님은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심을 분명히 시인하셨습니다. 유대인의 왕은 메시야의 칭호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고소에는 침묵으로 일관하셨으나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나타내실 때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시고 분명히 증거하셨습니다 (막14:62).
베드로는 자신의 목숨을 구원하기 위해 계집 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은 목숨이 위태로운 위험한 순간에도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진리를 증거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야가 되심은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진리 그 자체가 되십니다 (요14:6). 진리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증거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 재판을 받는 죄수로서가 아니라 진리의 증거자로서 서셨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가 진리를 알고 구원받기를 원하셨습니다.
빌라도가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자신은 로마인의 피에 서반아의 피가 섞여 흐르는 혈통을 지닌 사람으로서 두려움 따위의 유약한 감정은 모르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 섰을 때 자신이 마치 형사범처럼 사지를 떨었다고 하였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일이 각본대로 되어가자 신이 나서 여러 가지로 거짓 고소를 했습니다 (눅23:2).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하기도 힘들지만 억울한 일을 당하여 변명하지 않고 침묵한다는 것은 더욱 힘든 일입니다. 플라톤은 자기 스승의 죽음이 너무 억울하여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는 책까지 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마디도 변명 없이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자 하시는 순종의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사53:7).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해 본 결과 예수님에게 아무 죄가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대제사장들이 시기심 때문에 예수님을 넘겨준 줄 알았습니다(10). 대제사장들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를 영접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기심 때문에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는 큰 악을 행하였습니다. 빌라도의 보고서에 의하면 그들은 자신의 벼슬과 호사스러운 생활을 위하여는 그들의 어머니라도 배신할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구하는 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가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이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석방코자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무리들이 예수님께 많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예수님을 놓아 달라고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로부터 이미 돈 봉투를 받은 무리들은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빌라도는 의외의 반응에 놀랐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는 내가 어떻게 하랴?” 그러자 백성들은 피를 본 야수와 같이 외쳤습니다.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죽여라,죽여!.” 노도와 같은 백성들의 외침 소리로 인해 빌라도에게 두려움이 엄습하였습니다. 이 때 그는 공적인 재판관으로서 양심에서 들려 오는 정의의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민란이 날까 두려워서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겨주었습니다. 그는 법률과 정치학을 공부한 엘리트였지만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양심을 속인 졸장부가 되었습니다. 그는 손을 씻으며 이 판결에 대해서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였으나 (마27:24), 역사는 그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장본인임을 준엄하게 심판하고 있습니다. 그는 세상 지위와 안정을 놓지 않고자 진리를 버렸습니다. 그 결과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이 비극의 순간을 잊지 못하여 그로부터 수년 후에 유배를 당하여 고심하다가 자살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목숨의 위협을 무릅쓰고서라도 진리 편에 설 것인가? 빌라도와 같이 자기 유익을 위해 진리를 버리고 현실과 타협할 것인가? 어느 한편에 분명히 서야 합니다.
Ⅱ.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16-27)
16절을 보십시오. 군병들은 예수님을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로 끌고 갔습니다. 15절에서 예수님은 이미 빌라도의 지시대로 무자비한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로마 군병들의 채찍은 여섯 가닥 정도의 가죽 띠를 묶은 것으로서 가죽 끝에는 날카로운 쇳덩이나 뼛조각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채찍에 맞으면 피가 튀기고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고 합니다. 채찍에 맞다가 갈비뼈가 부러지고 내장이 파열되어 죽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채찍질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시해 행위와 같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래서 로마법은 로마인에게는 채찍질하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려 120대나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나무틀에 묶었습니다. 옷은 사람의 품위와 자존심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광채를 입으셔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최소한의 체면과 자존심마저도 유린당하셨습니다. 군병 두 사람이 양쪽에서 무자비하게 채찍질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채찍이 허공을 가르며 예수님의 등을 후려쳤습니다. 고통스런 신음 소리와 함께 예수님의 등에 골이 패이고 피가 흐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피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또 다른 채찍이 예수님의 가슴에 피멍을 들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유혈이 낭자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채찍질의 고통과 충격 때문에 잠시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러면 군병들은 물을 끼얹어서 정신을 차리게 한 후 더 세게 채찍질하였습니다.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무자비한 채찍에 맞으신 것입니까? 사도 베드로는 처음에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지만 후에 그 의미를 깨닫고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얻었다”고 증거 했습니다 (벧전2:24b). 예수님은 나의 허물과 죄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씻어 주시기 위해 내 대신 무자비하게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군병들은 채찍질이 끝나자 이제는 예수님을 희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왕이 입는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면류관을 씌웠습니다. 그리고 갈대로 쳤습니다. 그러자 날카로운 가시가 예수님의 이마를 뚫고 들어갔습니다. 고개 숙인 예수님의 얼굴에는 한줄기 두줄기 피가 흘려 내렸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라고 조롱하며 머리를 치고 침을 뱉었습니다. 그리고 꿇어 엎드려 절하며 히히덕 거렸습니다.
예수님은 만신창이가 된 몸에 이제는 십자가를 져야 했습니다. 죄수들은 자기가 못박힐 십자가를 지고 모든 사람들에게 경계가 되도록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가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70kg이나 되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기 시작하셨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뼈마디가 쑤시고 어깨는 으스러지는듯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마에서는 피와 땀이 뒤섞여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비틀거리며 언덕을 오르시다가 쓰러지셨습니다. 그러면 군병들의 채찍이 예수님의 등을 내리쳤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일어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 쓰러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몇 번이나 일어나 쓰러지고 또 쓰러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 그 길은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이었습니다. 골고다의 거친 언덕 길, 그 길은 예수님의 피와 땀과 눈물이 얼룩진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명 주시길 그렇게도 원하셨던 길이었습니다. 일찍이 세례요한은 이 예수님을 보고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수님은 수없이 쓰러지신 후 더 이상 일어설 기력조차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러자 군병은 옆에 있던 구레네 사람 시몬을 끌어다 대신 십자가를 지게 하였습니다. 그는 억지로 십자가를 졌지만 이로 인해 후에 그와 그 집안이 다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쓰임받는 놀라운 은혜를 덧입게 되었습니다 (롬16:13).
마침내 예수님은 해골이라는 골고다 언덕에 이르렀습니다. 군병들은 마취제인 몰약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님은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받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다 받고자 하셨습니다. 이때 군병들은 고통하는 예수님을 세워 둔 채 예수님의 옷을 누가 가질 것인가 제비를 뽑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물질의 노예가 되어 무정하고 무자비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마침내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십자가형은 인류가 만들어 낸 형벌 중에서 가장 악독한 것입니다. 로마의 역사가인 타키투스조차도 십자가형이야말로 가장 야비한 형벌이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면 당장에 죽지 않고 2,3일 동안 처절한 고통을 맛보다가 피를 다 쏟고 기아와 갈증으로 죽게 됩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십자가에 못박힌 후 죽기까지 1000번 이상 까무러친다고 합니다. 사형수에게 베풀어지는 유일한 자비는 두 다리를 부러뜨려 빨리 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의 양 손과 두 발에 길이가 18cm, 두께가 7cm나 되는 굵은 대못을 박았습니다. ‘쾅! 쾅! 쾅!’ 망치 소리가 골짜기에 메아리 쳤습니다. 손목과 발목에는 모든 신경과 혈관이 모여 있기 때문에 신체 중 가장 예민한 곳입니다. 대못이 예수님의 손목을 관통하여 나무에 박힐 때 혈관이 터져 피가 쏟아졌습니다. 신경들이 자극을 받자 온몸이 전율하였습니다. 몸에서 피와 물이 빠져나가자 갈증 때문에 입천장이 갈라지고 목구멍이 바싹 바싹 타서 숨쉬기조차 힘들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그 고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습니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시22:14,15).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시고 참 생명과 자유와 평강을 주시기 위해서 모든 고통을 다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좌우편에는 강도들이 함께 못박혔습니다. 예수님은 흉악한 강도 중 하나 같이 여김을 받으셨습니다 (시53:12).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고난받으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53:5,6). 예수님은 바로 나의 죄 때문에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무서운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바로 나의 교만과 정욕의 죄 때문에 침 뱉음을 당하시고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나의 반항심과 불순종의 죄가 예수님의 손과 발에 굵은 대못을 박고 피흘려 돌아가시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상하고 찢긴 우리의 심령을 치료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의 쓴잔을 말없이 마시셨습니다. 우리의 죄가 아무리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갈 때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흰 눈보다 더 희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의 마음의 슬픔과 운명의 장막을 걷고 밝고 희망찬 새 인생을 살게 해 주십니다.
Ⅲ. 자기를 구원치 않으신 예수님 (28-32)
29절을 보십시오. 지나가던 자들은 머리를 흔들며 모욕하였습니다.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시편 22:6절은 조롱 받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이니이다.”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벌레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성한 벌레가 아니라 피투성이 벌레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벌레는 ‘토라’라는 벌레인데 당시 유대인들은 토라를 많이 잡아서 으깨 가지고 그 피로 옷에 주홍빛 물감을 들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죄의 주홍빛 옷을 입히시기 위해서 으깨진 벌레가 되셨습니다.
대제사장들도 예수님을 모욕하였습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를 구원할 수 없도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를 보고 믿게 할찌어다.” 이것은 예수님의 감정을 건드려서 십자가를 지지 못하도록 하는 사단의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남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기를 구원하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역대에 많은 왕과 영웅들이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무고한 백성들을 희생시켰습니다. 히로히토 천황은 태평양 전쟁 때 어린 학생들을 가미가제 특공대로 내보내서 천황을 위해 꽃다운 청춘을 희생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라크의 후세인 대통령은 아랍의 패권을 잡아 바벨로니아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무고한 백성을 희생시켰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짓밟고서라도 자기는 살고자 합니다. 조금 선한 사람은 남도 살리고 자기도 살고자 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가서는 자기를 위해 남을 희생시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구원치 않으시고 남을 구원코자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온전한 희생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희생이 없는 곳에서는 아무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희생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생명 구원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남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희생의 십자가입니다.
Ⅳ. 버림받고 죽으신 예수님 (33-36)
33절을 보십시오. 제 6시 곧 낮 12시가 되자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9시 곧 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하늘도 슬퍼하고 땅도 슬퍼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여섯 시간 동안 말할 수 없는 큰 고통을 당하신 후 큰 소리로 절규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를 볼 때 예수님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육체적 고통보다도 버림받는 아픔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버림받는 아픔보다 더 큰 아픔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시고 빌라도와 군병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제자들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그들만이 예수님을 버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제멋대로 살아온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세상 정욕에 눈이 멀어서 육신의 쾌락을 추구해 온 내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남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자학하여 무기력하게 누워서 고귀한 인생을 허비한 내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은혜를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고 세상 욕심을 좇아 사는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순간적으로나마 하나님께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러면 예수님은 왜 하나님께로부터 버림 받으시면서 까지 십자가에 못박혀 모진 고통을 당하셔야 하셨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첫째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가 얼마나 무섭고 지독한가를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성품상 죄를 용납하실 수가 없습니다. 죄는 반드시 그 댓가를 요구하는데 이는 죽음입니다. 또 죽은 후에도 무서운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죄 짓는 것을 마치 차 마시는 정도로 가볍게 생각합니다. 죄에 대해서 불감증에 걸려 있습니다. 죄를 짓고도 별로 양심의 고통도 없습니다. 그러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죄가 심각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문둥병과 같습니다. 문둥병에 걸리면 손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지만 결국에는 죽게 됩니다. 죄는 또한 암세포와 같습니다. 처음에 암세포는 작고 미미하지만 점점 세포 조직을 파괴시켜 죽게 합니다. 이처럼 죄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영혼을 부패시키고 인격을 파괴시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암 환자가 처절한 고통 속에서 죽어 가는 것처럼 죽음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제가 아는 어떤 고대 법대생은 정욕의 죄를 짓고 그 죄의식 때문에 자주 발작 증세를 보였습니다. 어느 날 새벽 그 가족들은 파출소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고 달려갔더니 그 학생은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죄는 개인을 병들이고 가정을 파괴시키고 사회 전체를 망하게 합니다. 우리가 정말 양심대로 우리의 죄 값을 치르려면 죄를 지은 수만큼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매달려 우리의 더러운 피를 다 쏟고 죽어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을 볼 때에 나의 죄가 얼마나 무섭고 지독한가를 깨닫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자신이 그 동안 지은 죄로 인해 애통해 하며 회개하게 됩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을 나타내 줍니다. 하나님은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극진히 사랑하신다고 해서 죄를 용납하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사랑하는 독생자에게 다 뒤집어 씌워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속의 은혜요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입니다.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끔찍이도 사랑합니다. 만일 그 귀여운 자식을 누가 데려가 버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세상에 누가 자기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사형장으로 보내고 흉악한 죄인들을 살려낸단 말입니까? 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한1서 4:10절은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우리는 누구나 죄로 인한 마음의 상처와 고통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정욕의 죄로 인해 악몽에 시달리며 수치심으로 괴로워합니다. 파괴된 가정으로 인한 상처로 남몰래 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가 이들의 죄 문제와 인생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어떤 고상한 철학과 예술이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 줄 수 있겠습니까? 이는 오직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인도에 가신 William Kim 선교사님은 어린 시절 너무 가난하여 밀가루 죽에 무우를 썰어 넣어서 불려서 먹고살았습니다. 그는 자신과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를 증오하며 눈에 핏발이 서기까지 공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그 마음에 임했을 때 맺혔던 응어리가 풀리고 그 마음에 사랑이 샘솟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인도 8억 영혼을 품고 섬기는 열국의 아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죄사함을 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마음의 상처를 깨끗이 치료해 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원의 십자가요 사랑의 십자가요 은혜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그 보혈 흘렸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찬 138장)
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37-47)
3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마침내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이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휘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의 장벽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의 장벽이 허물어졌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온전한 성전이 되시고, 인간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이 되셨습니다 (히10:19,20).
3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죽으심을 지켜 본 백부장은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데 지휘한 잔인하고 무정한 군인이었습니다. 또 강대국 로마인으로서 교만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은 그의 무정한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이 말은 백부장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리스도를 가르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겸손하게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치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은혜와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감동만 받고 가버리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신앙고백이 있어야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롬10:9,10). 막달라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등 많은 여인들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참으로 충성스러운 믿음의 여인들이었습니다.
43절에서 아리마대 요셉은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은혜를 받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던 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시체를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두었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완전히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묻히시므로 우리의 죄도 함께 죽고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롬6:4).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나아가 죄짐을 풀고 죄사함의 은혜를 덧입고 자유와 평강이 넘치는 복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뿐만 아니라 일생 십자가의 증인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