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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23(왕으로 나신 예수님)

by Mark Yang   08/16/2019   Matthew

Message


마태복음 제 2 강

왕으로 나신 예수님

말씀: 마태복음 2:1-23
요절: 마태복음 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 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오늘날 세상에 여러가지 많은 문제가 있지만 가장 절실하고도 심각한 문제는 참된 지도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참된 지도자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목자없는 양과 같이 유리방황합니다. 사람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자신을 사랑과 평화와 공의로 다스려 줄 참된 지도자를 갈망합니다. 그래서 자신은 비록 허물이 많다 할찌라도 지도자의 허물과 부정은 용납하지 못하고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세상에는 참된 지도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의 참된 지도자는 예수님 뿐이십니다.

예수님은 왕, 곧 다스리는 자로 탄생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 왕들과 같이 군림하는 자로 오지 않으시고 목자와 같이 사랑으로 섬기는 자로 오셨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이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경배하기 위해 먼 곳에서 찾아 왔습니다. 우리는 동방 박사들을 통해 진리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배웁니다. 무엇보다 박사들이 그토록 찾고 경배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배웁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진리의 왕 예수님을 찾고 경배함으로 심령에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왕을 찾는 박사들(1,2)

1a절을 보십시오. “헤롯 왕 때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헤롯 왕은 헤롯 대왕으로서(B.C 37-A.D 4) 성품이 간교하고 잔인하고 의심이 많은 독재자였습니다. 그는 왕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면 아내와 두 아들과 장로와 대제사장도 모두 죽여버렸습니다. 본문에서는 순진한 아기들도 무자비하게 죽였습니다. 이런 지도자 밑에 사는 백성들은 늘 불안과 두려움에 떨었고 슬픔과 고통이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시대에 베들레헴이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조용히 탄생하셨습니다. 약속된 메시야시요, 인생들을 죄에서 구원할 구원자시요, 임마누엘 예수님께서 한 아기로 오셨습니다. 장차 온 세상을 다스리실 만왕의 왕께서 연약한 한 아기의 모습으로 말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나 자기 백성들은 이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먹고 사는 현실 문제에 얽매여 깊은 영적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인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경배하기 위해 먼 길을 찾아 왔습니다.

1b,2절을 보십시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유대인의 왕이란 메시야의 칭호입니다. 유대인의 왕이란 지리적으로 유대를 통치하는 왕이나 또는 유대인들만을 다스리는 왕이란 뜻이 아니라 유대인을 통해서 나신 메시야란 뜻입니다. 이는 메시야의 정통성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하신대로 유대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탄생하셨고 또 유대인의 왕으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마27:37).

동방 박사들은 바사의 성자들로서 별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시대의 징조를 찾고 미래를 예견하는 대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천문학, 철학, 의학, 자연 과학에 능한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왕의 탄생을 알고 왕을 찾아 먼 길을 찾아 왔습니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이 왜 이렇게 먼 길을 찾아 온 것입니까? 그들이 찾아온 유대인의 왕이란 어떤 왕입니까? 그들은 헤롯 왕을 만나러 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헤롯 왕과 같은 자들은 만날 일고의 가치도 없는 왕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정치적인 왕과는 다른 특별한 왕을 기대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장차 태어날 메시야에 대해서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라”(렘23:5). 또 스가랴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9:9). 또한 이사야 선지자는 한 아기로 태어날 통치자를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시요, 평강의 왕으로 묘사하였습니다(사9:6). 성경은 이렇게 오실 왕이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한 평강의 왕이심을 증거합니다. 세상 왕들은 처음에 군림할 때는 정의 사회 건설, 부정부패 척결 등 그럴듯한 구호를 내걸지만 얼마 못가서 거짓과 탐욕이 드러나서 백성들에게 실망을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 왕은 속성상 완전할 수 없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이미 세상 권력을 맛본 자들로서 세상 왕들의 한계를 잘 알았을 것입니다. 또한 세상 권력의 허무함도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생들을 다스려 줄 참된 왕을 사모했습니다. 영원토록 변치 않는 진리의 왕,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는 공의의 왕, 권위를 부리지 않고 겸손하게 낮아져서 섬기는 겸손의 왕, 백성들을 사랑과 평화로 다스리는 사랑과 평강의 왕, 우리를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구원의 왕을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런 왕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다윗 왕도 불완전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의 후손 가운데 보내신 예수님은 인성과 신성을 지니신 완전한 왕이십니다.

박사들이 어떻게 왕의 탄생을 알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당시 동방제국에는 유대에서 온 세상을 다스릴 참된 왕이 탄생할 것이라는 전설이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동방 전역에 퍼져 있었던 유대인들을 통해 성경을 알게 되고 성경을 면밀히 연구함으로써 성경에서 예언한 유대인의 왕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민수기 24:17절 말씀을 통해 왕의 별이 나타날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낮에는 직장에 다니면서 직무를 보고 밤에는 깨어서 끊임없이 왕의 별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현실 문제에 얽매여 땅만 바라보고 땅의 일만 생각하고 있을 때 그들은 하늘을 바라보고 위엣 것을 찾았습니다. 이 일은 비생산적이고 헛일 같이 보였지만 그들은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그들을 현실 감각이 없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비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왕, 사랑의 왕, 구원의 왕을 사모하는 열정은 이 모든 것을 삼켜버렸습니다. 그들은 비록 나이가 많았지만 그들의 눈은 반짝거렸고 스피릿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들은 진리에 대한 열정으로 충만한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 주목하셨고 때가 되자 그들에게 진리의 별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보여 주신 왕의 별은 세상에 메시야가 탄생하셨음을 알리는 하늘의 징조요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이는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진리의 왕을 간절히 찾는 자들에게 임하는 하늘의 계시였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왕의 별을 찾기 위해 상아탑에서 연구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그 별의 주인공을 만나 경배하기 위해 즉시 순례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즉시 직장에 휴직서를 내고 정성스럽게 보배합을 준비하여 떠났습니다. 그들은 왕이 어디서 탄생했는지 정확한 위치도 몰랐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별의 인도함을 따라 무조건 순례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위해서는 자신들을 아낌없이 투자할 줄 아는 참으로 용기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넜습니다. 추위와 더위를 당하고 강도와 짐승의 위험과 질병의 위험을 겪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포기치 않았습니다. 아니 결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진리의 왕을 만나고자 하는 열정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들은 왕을 만나기 위해 시간과 물질과 정열을 바쳤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왕도인 예루살렘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물어보았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그들이 왕을 만나고자 하는 목적은 순수했습니다. 이런 순수함이 그들을 힘있게 하였고 생명력이 넘치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동방 박사들을 통해 진리의 왕을 만나고자 하는 불타는 열정을 배웁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쉽게 피곤을 느끼고 조그만 일에도 쉽게 신경질을 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진리의 왕을 사모하는 열정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다고 불평하고,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데모하고,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헤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순수하게 진리의 왕을 만나 경배하고자 하는 열정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진리의 왕을 만나 경배하고자 하는 순수한 열정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기쁨과 감사함으로 순례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Ⅱ. 이스라엘의 목자 예수님(3-8)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을 찾았을 때 예루살렘에는 대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박사들의 진리에 대한 열정은 영적인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예루살렘 사람들을 깨웠습니다. 헤롯 왕은 나이가 70인데도 왕위를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인해 소동하였고, 백성들은 메시야를 맞이할 마음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소동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초림 때에 사람들이 소동한 것과 같이, 예수님의 재림 때에는 더 큰 소동이 일어날 것입니다. 초림 때에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감당해 주실 구속주로 오셨으므로 소동하더라도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있지만, 재림 때에는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오시기 때문에 돌이킬 수 있는 기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예수님이 오실지라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헤롯은 소동만 하고 있지 않고 공회를 소집하여 그리스도가 어디서 탄생하는지 알아보았습니다. 그들은 즉시 미가서 5:2절을 읽었습니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실 분이 어떤 분이신가를 배웁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실 분은 택한 백성의 목자가 되십니다. 본문에서 한 다스리는 자와 목자는 동격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야는 자기 백성을 다스리되 목자 같이 다스림을 말해 줍니다. 여기서 볼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지도자 상은 목자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상 하나님께서 쓰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목자상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모세는 하나님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율법을 전수한 자요, 노예백성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한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위대함은 이런 외적인 데에 있지 않고 그의 목자의 심정에 있었습니다. 한번은 노예백성 이스라엘을 품고 섬기기가 너무 힘들어 주님께 불평을 털어 놓았습니다. “내가 이 모든 백성을 잉태하였나이까? 내가 어찌 그들을 생산하였기에 주께서 나더러 양육하는 아비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 주께서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민 11:12-15). 그는 백성들을 품고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 앞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이때 하나님께서 그가 신광야 가데스의 므리바에서 신경질적으로 반석을 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해서 가나안 땅을 바라만 보고 죽어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모세는 얼마나 섭섭했겠습니까? 그는 너무 섭섭하여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이렇게 간구했습니다.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컨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으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민27:16,17). 이런 그의 목자의 심정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고 그를 위대하게 하였습니다.

다윗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만큼 위대하게 된 것은 그의 목자의 심정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양을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였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상한 목자의 심정으로 충만했습니다. 그의 목자상은 그가 애매하게 사울에게 쫓겨 피난 갈 때 잘 나타났습니다. 한번은 그가 아둘람 굴로 도망하였을 때 환란 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 약 400명 가량이나 그에게로 모여들었습니다. 이때 다윗은 자신도 감당하기 힘든 처지에 그들의 목자가 되어 섬겼습니다.(삼상22:1,2)

그러나 모세나 다윗은 장차 오실 참 목자되시는 예수님의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선한 목자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왕, 곧 다스리는 자로 오셨지만 위에서 군림하지 않으시고 목자와 같이 인생들을 돌보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나는 선한 목자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세상에 감히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는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점에서 선한 목자가 되십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때를 따라 말씀의 꼴을 먹이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말씀의 꼴을 맛있게 풍성하게 먹여야 합니다. 말씀의 꼴이 없을 때 양들은 영혼이 메마르고 굶주리고 주리다가 영양실조에 걸려 죽게 됩니다. 그러나 맛있는 말씀의 꼴이 풍성할 때 양들의 영혼은 살이 통통하게 찌고 무한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쉬임없이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를 통해 영적으로 굶주리고 피폐해진 영혼들이 맛있는 생명의 꼴을 먹고 그 영혼이 살아나고 무한한 행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도구로 삼지 않고 목적으로 삼으셨습니다. 세상 지도자들은 겉으로는 백성을 위한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백성을 자신의 출세의 수단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시고 마침내는 고귀한 목숨까지도 희생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이 쓸모없게 된 자들은 가차없이 잘라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고 어찌하든지 살리는 분이십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매사에 양들에게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말은 하기 쉽지만 본을 보인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한 두가지에 본을 보일 수는 있지만 매사에 본을 보인다는 것은 더 더욱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 발자취를 좇아 가도록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시고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은 낮아져서 우리를 섬기시기 위해 오시고, 희생하시기 위해 오시고, 마침내는 죽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생들의 선한 목자가 되어 다스리심으로 죄로 인해 상처 받고 시름시름 죽어가던 인생들이 새 생명을 얻고 살아났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메시야상은 목자상입니다. 이는 가장 참된 지도자상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 위에 선한 목자, 곧 참된 지도자가 없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독생자 예수님을 참된 지도자로 보내신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어느 곳에 가든 참된 지도자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가정이나 캠퍼스나 직장이나 나라도 목자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가정에 목자가 없기 때문에 자녀들은 불행하고 끝내는 파탄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캠퍼스에 목자가 없기 때문에 학생들은 방황합니다. 직장에 목자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마지 못해 직장을 다닙니다. 장막에 목자가 없기 때문에 장막이 안식처가 되지 못하고 불평과 인간적인 갈등의 근원이 됩니다. 사람들은 참된 지도자를 애타게 갈망합니다. 예수님을 닮은 목자가 있을 때 가정이나 캠퍼스나 직장이나 어떤 모임이라도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행복이 창조됩니다. 한분 한분이 예수님을 닮은 목자로 성장하여서 우리가 처한 처소에서 참된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7,8절을 보십시오. 헤롯은 그리스도가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사실을 알자 박사들을 가만히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물었습니다. 그리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자기도 경배할 터이니 아기를 찾거든 알려 달라고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자연스럽게 하였습니다. 그의 말은 거짓과 살인을 품고 있는 사단적인 것이었습니다. 사단은 헤롯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였으나 이런 악인의 도모가 설 수 없는 것입니다. 박사들은 후에 꿈에 지시하심을 받고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갔습니다(12).

Ⅲ.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는 박사들(9-12)

박사들은 헤롯의 말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이때 문득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나타나 그들을 아기 있는 곳까지 인도해 주었습니다. 그의 별은 메시야의 탄생을 알려 줄 뿐만 아니라 메시야에게로 인도하는 인도자였습니다. 그 별은 그들을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습니다. 이때 그들의 심정은 어떠했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이 기쁨은 3중 4중으로 기쁨이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보면 보통 기쁨이 아닌 최상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들은 너무 기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고생한 만큼 예수님을 만난 기쁨도 컸습니다. 이 기쁨은 내면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영혼의 참된 기쁨이었습니다.

기쁨에도 여러 종류의 기쁨이 있습니다. 말초적이고 감각적인 육신의 기쁨이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이런 기쁨을 얻고자 몸부림칩니다. 그러나 이런 육신의 기쁨은 순간적이고 또 반드시 그 뒤에는 죄의식과 허무가 그림자처럼 따라 다닙니다. 이런 육신의 기쁨은 사람을 병들이고 못쓰게 만듭니다. 또 기쁨에는 정신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이는 학문을 한다거나 어떤 것을 애써 노력하여 성취 한다거나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는 등 정신적인 만족을 얻는 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쁨도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진정한 기쁨은 영혼의 기쁨입니다. 이는 순수한 영적 기쁨이요, 하늘 나라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이런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는 우리 인생들의 영혼의 목자되신 예수님을 만날 때 만이 얻을 수 있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예수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원했고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들은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기쁨을 찾아 방황하였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 치울 만큼 육신의 기쁨을 좇았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쾌락은 그녀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허무와 절망만을 안겨 주었습니다. 이런 그녀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녀의 심령에서는 하늘나라의 기쁨이 영생의 샘이 되어 흘러 넘쳤습니다. 예수님은 참된 기쁨의 근원이 되십니다. 우리가 순수하게 예수님 자체를 목적으로 하고 예수님을 만날 때 참기쁨이 생깁니다. 그러나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무엇인가 얻기를 바랄 때 기쁨이 사라집니다. 우리가 순수하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참된 영적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동방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이 계신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사람 사는 곳이 아니라 동물들이 사는 마굿간이었습니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생각을 했더라면 기쁨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영적으로 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님에게서 성육신 하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말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님에게서 깊은 겸손과 온유함과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넙죽 엎드려 아기께 경배했습니다. 경배란 사람에게 쓰는 단어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야 할 존귀와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경배란 자신의 몸과 마음과 진심과 순결과 애정 등 자신의 전부를 왕께 드리는 것입니다. 경배란 왕께 자신을 드리는 헌신이요 복종입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영접하고 경배했습니다. 예수님은 인생들로부터 경배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계5:12)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할 뿐만 아니라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변치 않는 만왕의 왕이시요,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하시는 대제사장이시요,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실 구주가 되심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하고 보배합을 드리고 기쁨이 충만하여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제 그들의 마음에는 영원토록 지워지지 않는 진리의 별이 생겼습니다. 이 별은 영원히 그들의 마음에서 빛날 것입니다. 그들은 일생동안 이 진리의 별을 증거하는 증거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Ⅳ. 말씀을 이루시는 아기 예수님(13-23)

동방 박사가 떠나간 후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헤롯을 피하여 잠시 애굽으로 피난가도록 하셨습니다(13). 이에 요셉은 밤중에 일어나 아기와 마리아를 데리고 애굽으로 갔습니다. 이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었습니다. 이에 헤롯은 박사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유래없는 대 유아학살을 하였습니다.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두살 이내의 사내 아이를 모두 죽였습니다. 이때 그 부모들의 슬픔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들은 대성통곡했습니다. 저자는 이 사건이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진 것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헤롯은 영원토록 살 것처럼 악을 행했으나 결국 때가 되자 죽었습니다. 그는 악한 짓을 많이 하여 악질에 걸려 죽었습니다. 그가 죽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아기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도록 했습니다. 이에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아켈라오가 헤롯의 뒤를 계승했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할 때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지만 나사렛 지방에서 자라나시게 되었습니다.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었습니다(23). 예수님의 생애는 일거수 일투족이 구약의 말씀을 성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동방 박사들과 같이 순수하게 예수님을 만나 경배하고 우리의 물질과 진심과 꿈과 청춘과 모든 것을 드려 헌신함으로써 심령에 참된 영적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