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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3:1-7(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by Mark Yang   08/16/2019   Matthew

Message


마태복음 제 3 강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말씀: 마태복음 3:1-17
요절: 마태복음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오늘 말씀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에 관한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백성들이 메시야를 영접할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세례요한은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가장 가치있고 위대한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7:28). 오늘날에는 세례요한과 같은 사명인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이 시대에 세례요한과 같은 사명인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숨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심령에 천국을 소유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주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1-12)

첫째, 세례 요한의 메시지(1-3). 2장과 3장 사이에는 약 30년이라는 공백기간이 있습니다. 때는 예수님께서 사생애를 마치시고 본격적으로 인류 구속 역사를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왕이 행차하게 되면 사전에 이를 치밀하게 준비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와같이 왕되신 예수님이 나타나기 직전에 이를 준비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이는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말씀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1). 하나님의 역사는 화려한 성전에서 시작되지 않고 거친 광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가 전파한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2). 이 말씀에는 강력한 권면과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요한은 먼저 회개에의 촉구를 하였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은 아름답고 부드러운 말씀이 아니라 듣기에 거부감을 일으키는 말씀입니다. 특히 현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를 영접하는 자에게는 가장 은혜스러운 생명의 말씀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 식민통치와 헤롯의 독재 하에서 착치를 당하며 많은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그들을 동정하여 따뜻한 위로의 메시지를 전해 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그러면 ‘회개’란 뜻이 무엇입니까? ‘회개’란 “생각을 달리한다”는 뜻으로서 적극적인 방향전환을 의미합니다. 이는 세상으로 향한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이요, 자기를 중심한 생활에서 하나님을 중심한 생활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회개란 도덕적인 차원에서 죄를 뉘우치는 것이나 제도적인 개혁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는 천국의 왕이신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말씀을 듣고 마음이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 예수님을 대적하고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는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고 이제는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회개입니다. 세례 요한은 백성들에게 이러한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백성들을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그들이 천국 시민이 되도록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회개는 성경 전체의 중심 메시지입니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의 메시지의 핵심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첫 메시지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4:17).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였습니다. 마가복음 6:12절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도 전도할 때 사람들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전파하였습니다. 사람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망하게 됩니다. 회개는 멸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세례 요한은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희망을 제시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이 말씀은 사람이 회개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를 말해 줍니다. 사람이 회개해야 할 이유는 천국이 가까왔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가까왔다는 말씀은 메시아가 오셔서 세상을 통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 중 가장 비극적인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 사단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단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의 삶은 늘 불만과 신경질이 충만하고 욕심과 정욕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좋은 차를 타고 다니고 부족함이 없이 산다 할지라도 마음에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단의 통치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은 그 자체가 지옥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면 사단의 지배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게 될 때 비로소 천국이 임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의 백성을 겸손과 온유, 사랑과 평화로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 개인이나 가정은 행복으로 가득차고 넘치게 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신혼 여행 첫날 밤에 아내를 때렸습니다. 그는 고시에 합격하여 인간적으로 부족함이 없었지만 사단의 다스림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에 전혀 행복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말씀공부를 통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게 되자 이제는 아내를 끔찍이 사랑하고 귀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가정에는 사랑과 평화가 차고 넘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마음에 천국이 없기 때문에 원치 않게 처자식을 괴롭히고 또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자신을 학대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천국을 소유하려면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우리가 영원한 파멸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그러면 이렇게 광야에서 홀로 말씀을 전파하는 요한은 과연 어떤 자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세례 요한은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야의 선구자였습니다. 메시야가 오시기 전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는 광야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불신하였습니다. 그리고 교만과 불순종과 반발심으로 인해 내면이 깊이 병들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광야와 같이 완악하고 메말라서 메시야를 영접할 마음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때 세례 요한이 나타나 회개의 메시지를 전파함으로써 백성들의 마음을 준비시켰습니다. 대통령이 어떤 곳을 방문하게 되면 사전에 미리 가서 모든 것을 점검하고 길을 예비합니다. 이와 같이 세례 요한은 만왕의 왕 메시야가 오셔서 일할 수 있는 역사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는 말씀을 볼 때 높은 마음과 낮은 마음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높은 마음은 교만한 마음입니다. 이는 자기가 무엇이나 된 양 자기를 내세우고 남을 무시하는 마음입니다. 교만한 마음은 절대로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기 때문에 낮추어야 합니다. 또 낮은 마음은 불의를 주장하고 자신을 학대하는 마음입니다. 패배의식과 운명주의에 빠져 자신을 쓸모없는 자라고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얼핏 보기에 겸손한 것 같지만 실상은 교만한 마음과 같습니다. 이런 자의 특징은 마음이 완악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은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족한 부분을 메꾸어야 합니다. 높은 마음과 낮은 마음 뿐만 아니라 삐뚤어지고 반항적인 마음도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무조건 반발하고 모든 것을 삐뚤어지게 봅니다. 말씀을 들을 때도 겸손하게 듣지 않고 반발심을 갖고 듣습니다. 목자의 사랑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혹시 이렇게 하는 데에는 흑심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합니다. 이런 마음들은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고 겸손한 마음만이 영접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백성들이 메시야를 영접할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준비시켰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이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했습니다. 소리란 뜻과 사상을 전하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또 소리란 의미만 전달하면 곧 사라져 버립니다. 이와 같이 세례 요한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메시야의 선구자의 사명을 감당하다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면 그는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진정으로 위대한 자가 되었습니다.

둘째, 세례 요한의 삶의 스타일(4). 그러면 이 사명을 감당하는 그의 생활은 어떠했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오늘날 약대 털옷은 고급 옷이요, 메뚜기도 값나가는 음식에 속하고 석청은 구하기 힘든 보약입니다. 그러나 당시 약대 털옷은 가공되지 않은 것으로써 광야에서 이불 삼아 입는 옷이었고, 메뚜기와 석청은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모습은 마치 엘리야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그의 생활은 단순하고 검소했습니다. 이런 그의 생활에서 생명력이 넘치는 메시지가 나왔습니다. 그의 생활은 사명에 합당한 생활이었습니다. 생활인은 생활을 중심으로 살아가지만 사명인은 사명을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말은 청산유수 같이 잘 하지만 생활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그 말에 힘이 있고 신빙성이 있으려면 반드시 그에 합당한 생활이 뒤따라야 합니다. 생활은 바로 산 메시지입니다. 1950년대 6.25후에 많은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욌습니다. 그때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언덕 위에 집을 짓고 문화생활을 하며 선교사 생활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다 그들을 손가락질하며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배사라 선교사님은 한국 사람과 같이 김치를 먹으며 똑같이 생활했습니다. 서울 개척 당시에는 단칸방에 기거하면서 오는 양들을 다 영접하고 맛있는 커피를 대접하셨습니다. 이러한 생활 자체가 살아있는 메시지였습니다.

셋째, 백성들의 반응(5,6). 세례 요한이 회개의 메시지를 전파하자 백성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모두 도망갔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그에게 나아와 생명력이 넘치는 그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5). 그리고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며 애통히 회개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6). 놀라운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에는 말라기 선지자 이후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참된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아 백성들은 영적으로 심한 기갈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때 세례 요한이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자 사방에서 그에게 몰려온 것입니다. 백성들은 미사여구가 담긴 아름다운 말보다도 단순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습니다. 백성들은 시대 문제나 경제나 정치적인 문제로 고통하는 것 같았지만 그보다도 실상은 죄문제로 고통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복음적인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양들을 도울 때 듣기 좋은 말보다도 내면의 죄문제와 싸우고 하나님 앞에서 죄문제를 해결하고 복음을 믿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진정으로 양을 살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양이 혹시 도망가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죄 문제를 말하기를 꺼려하고 좋은 관계성만 유지하고자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할 때 좋은 관계성도 유지할 수 없고 결국에는 잃게 됩니다. 양을 살리는 길은 내면의 죄 문제와 싸우는 것입니다.

넷째, 회개에 합당한 열매(7-12). 백성들이 요한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자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데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서로 전혀 다른 주장을 하는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에 엄격하고 내세와 부활을 다 믿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그들은 독선에 빠져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두개인은 내세를 부인하고 천사나 영이나 부활도 부인했습니다. 이들은 정치와 결탁하여 부와 영광을 누리는 세속적인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과 같이 죄를 회개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나아오지 않고 이중 마음을 품고 나아왔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그들을 사정없이 책망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독사는 겉모양은 아름답지만 속에는 생명을 죽이는 무서운 독을 품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들은 겉으로는 긴 가운을 입고 의롭고 경건한 척 했지만 실상은 백성들의 영혼을 파멸시키는 무서운 악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마23:13,15).

세례 요한은 그들을 책망만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방향을 잡아 주었습니다. 8,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그들이 임박한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는 헛된 자부심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들이 열매맺는 생활을 하는데 가장 큰 장애요인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이었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조금이라도 자기 의에 기초한 속교만이 있으면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평가하는 기준은 아브라함의 자손과 같은 혈통이나 인간 조건이 아니라 열매입니다. 하나님은 돌들로도 능히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개척자라는 타이틀 때문에 또 10년 이상 신앙생활 했다는 신앙경력 때문에 막힙니다. 또 목자나 선교사라는 타이틀 때문에 막히기도 합니다. 속으로 인간 조건을 자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열매맺는 생활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속에 숨은 교만과 자기 의와 헛된 자부심을 벗어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죄인의 모습으로 서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임을 배웁니다. 진정한 회개는 열매로 나타납니다. 인격이 변화되고 가치관이 달라지고 생활에 변혁이 일어납니다. 부정적이고 운명적인 삶을 살던 자가 매사에 긍정적이고 밝고 힘찬 섭리의 삶을 살게 됩니다. 정욕적인 삶을 살던 자가 하나님 앞에서 순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갑니다. 교만하던 자가 겸손하게 됩니다. 자기 문제만을 생각하던 자가 다른 사람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돌봐주는 목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렇게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 때 우리의 삶은 기쁨과 감사가 충만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다는 말씀은 심판이 임박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사람들은 심판이 멀리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자행자지합니다. 그러나 심판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항상 임박합니다. 우리는 가까이서 암이나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소식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이는 남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나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최후 심판의 날이 언제 올지 알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언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더라도 부끄러움이 없도록 좋은 열매 맺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할 때 나무로서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상실하게 됩니다. 이와같이 우리 인생도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을 떄 비로소 삶의 기쁨과 행복을 맛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회개하고 참 포도나무되신 예수님 안에 거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요한은 그들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를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역사가 일어나면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백성들은 요한이 혹 그리스도가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그의 인기가 올라갔습니다. 이때 분수를 알지 못하고 자신이 무엇이나 된 양 생각하면 사정없이 아래로 추락하게 됩니다. 그러나 요한은 한창 인기가 올라갔을 때 자신을 낮추고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능력 많으신 예수님에 비하면 예수님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할 만큼 비천한 자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은 백성들을 회개케 하기 위해 물세례를 주지만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인간 내면의 죄를 정결케 하고 거듭나 새 사람되게 하는 성령세례를 주시는 분이심을 증거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는 심판주이심을 증거했습니다(12). 요한은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분수를 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백성들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과 관계성을 맺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는 실로 위대한 사명인이었습니다.

II.요한에게 세례받으신 예수님(13-17)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 받고자 하셨습니다. 이때 요한은 이분이 그리스도이신줄 알고 당황하여 이를 말렸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터인데 당신이 내게 오시나이까?” 요한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무 죄가 없는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예수님에게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아야 함을 잘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자신이 세례받는 것은 백성들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받는 것은 죄씻음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 ‘모든 의를 이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로, 세례 요한 때까지 이루어 오신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이어 받으시는 계승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새롭게 구속역사를 시작하실 수 있었지만 겸손하게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계승하셨습니다.

둘째는, 인류 구속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범죄함으로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에수님은 이런 인간의 죄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세례 받으심으로부터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복종하셨습니다.

셋째로, 죄인들과 함께 세례를 받으심으로 죄인의 입장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여기에는 백성들과 동일시 하시는 예수님의 놀라운 겸손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넷째로, 예수님은 메시야의 사역을 공적으로 선포하시기 위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이 모든 의를 이루시기 위해 자신을 비우시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로 겸손의 본체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수님을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그의 위에 임했습니다(16).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원어에는 그 앞에 ‘보라!’라는 감탄사가 있습니다. 이는 새 역사가 전개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인간의 죄로 인해 하늘이 닫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중보자 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죄의 벽이 허물어지고 진정한 화해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성품과 그의 하실 사역의 성격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비둘기는 온유와 겸손, 순결과 평화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하고 순결하시고 평화로우신 분이십니다. 또한 그의 사역도 힘으로 누르고 권위로 위협하는 역사가 아니라, 온유와 겸손으로 섬기는 역사요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는 역사입니다.

메시아의 사역은 성령 강림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사61:1,2). 복음 역사는 악령과의 싸움이기 때문에 악령의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예수님은 위로부터 성령을 충만히 덧입으셔야만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성령세례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힘과 지혜로 되지 아니하고 위로부터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인류 구속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자신을 한없이 낮추시고 희생하신 예수님을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치심을 받으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죄많고 패역한 이 시대를 좇아 살 것이 아니라 정말 심령으로 숨은 죄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심령에 천국이 임할 것입니다. 또한 세례 요한과 같이 이 시대의 죄와 싸우고 회개의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많은 방황하는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