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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4:1-11(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

by Mark Yang   08/16/2019   Matthew

Message


마태복음 제 4 강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

말씀: 마태복음 4:1-11
요절: 마태복음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 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사람은 누구나 승리의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이를 위해 무엇인가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자 애써 노력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아무리 큰 일을 하고 위대한 일을 한다 할찌라도 마귀의 시험을 이기지 못하면 근본적으로 패배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승리의 인생을 살려면 마귀의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마귀의 시험이 무엇이며, 예수님께서 이를 어떻게 이기셨는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유혹이 많은 봄학기를 이기고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1-4)

1절을 보십시오.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이 말씀은 예수님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데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음을 말해 줍니다. “시험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페이라조”(πειρ?ζω)인데 이는 두 가지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하나는 템테이션(Temptation) 즉 유혹이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테스트(Test)입니다. Temptation은 사람을 그릇된 길로 빠뜨리는 것이지만, Test는 사람을 연단하여 좋은 결과를 주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후자의 뜻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욕심에 끌려 사단에게 미혹되지만(약1:14),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미혹을 받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은 세상의 구주로서 메시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넘어야 할 과정이었습니다. 아담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감으로 실패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둘째 아담으로서 반드시 실패를 만회하셔야만 하셨습니다.

마귀는 시험하는 자로서 중상자, 고소자, 대적자, 유혹자입니다. 사단의 시험은 유혹입니다. 그의 유혹은 너무나 달콤하여 분별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보통 마귀의 시험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마귀의 최대의 기술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도록 하면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세상에 마귀는 없다. 나는 마귀의 시험에 걸리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실제로는 물질의 시험에 들고, 정욕의 시험에 들고, 명예심의 시험에 들어 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승리의 인생을 살려면 반드시 배후에 역사하는 마귀의 정체를 알고 마귀의 시험을 물리쳐야 합니다. 마귀는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것 같이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아담은 에덴 동산에 있었지만 예수님은 거친 광야에 계셨습니다. 아담은 부족함이 없는 가운데서 시험을 받았지만, 예수님은 극한 굶주림 가운데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모세는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기 위해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가졌습니다. 이와같이 예수님께서도 인류 구속역사를 섬기시기 위해 40일 동안 금식기도 하시며 영적 준비를 하셨습니다. 사람이 사흘만 굶어도 기진맥진하여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 모든 것이 먹을 것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속담에도 사흘 굶어 담 넘어가지 않을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40일을 굶주렸으니 광야의 모든 돌이 떡덩이로 보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극한 상황에까지 처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마귀는 간교하여서 언제나 약점을 이용하여 공격합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배고픈 약점을 이용하여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말씀은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됨을 부인하기 위해 회의를 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사용하여 먼저 배고픈 육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유혹하는 것입니다. 이 유혹은 배고픈 자에게는 너무나 달콤하고 합리적이어서 이기기가 힘듭니다. 사람이 배고픈 것처럼 서럽고 슬픈 일은 없습니다. 사람이 예술을 추구하고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것도 배가 부를 때 할 수 있습니다. 배가 고프면 사람이 비굴해지고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게 됩니다. 그만큼 먹는 문제는 사람에게 절실한 문제입니다.

예로부터 빵 문제는 인류에게 절실한 인생 문제가 되어 왔습니다. 빵 문제는 좀 고상한 표현을 쓰면 경제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경제 문제가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시급하고 절실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경제적인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어야 사명인의 인생을 살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사명인의 인생을 사는 것이 좋은 줄은 알지만 일생 가난하게 살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명인의 인생을 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빵 문제는 삶의 안정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로 만족하지 못하고 좀 더 나은 생활, 좀 더 안정된 생활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은 밑 빠진 독에 물붓기와 같아서 끝이 없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일생동안 먹고 사는 문제에 얽매여 살아갑니다. 빵 문제가 이렇게 심각한 인생문제가 된 것은 인간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창3:19). 저주받은 인간은 하루 세끼 먹고 살기 위해 밤낮으로 염려하게 되었습니다. 한창 비젼에 불타야 할 젊은이들조차도 장래 먹고 사는 문제로 근심한 나머지 애늙은이가 되어 버립니다. 마귀는 밤낮으로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우선 먹고 살아야 할 것이 아니냐. 먼저 삶의 안정부터 해결해야 할 것이 아니냐.” 마귀는 사람의 행복이 소유에 있는 것처럼 소유를 위해 인생 전부를 매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행복은 결코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위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우리를 먹고 사는 문제에 얽매이게 하여 물질의 노예로 만들어 동물의 차원으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마귀의 말대로 돌을 떡덩이로 만들어 배고픈 문제를 해결하셨다면 경제적인 메시야는 될 수 있을지언정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영적 메시야는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유혹을 어떻게 물리치셨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인간은 육신과 함께 영혼의 소유자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육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이 단순히 육체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영혼의 존재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고 영혼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인간관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육신 뿐만 아니라 영혼을 가진 고귀한 존재로 보셨습니다. 인간이란 얼마나 고상하며 가치 있고 위대한 존재입니까? 인간의 위대성은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을 멈추고 육의 양식만을 위해 살 때 동물의 수준으로 사정없이 전락해 버리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경제라는 미명 아래 육의 양식만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생을 보실 때 심히 슬퍼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6:27)

둘째로, 사람의 생명의 원천이 빵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빵에 생명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로서 먼저 빵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말씀은 신명기 8:3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 40년 동안 만나로 먹이시고 육신의 생명을 돌봐주신 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 때 육신의 양식까지도 하나님께서 친히 공급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것은 하나님께 간구하지만 육신의 양식은 내가 노력해서 얻어야 한다는 이원론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직장에 다니며 열심히 노력해서 돈을 벌었기 때문에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명기 8:17,18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을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과 지혜와 능력을 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고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롬11:36). 인간은 빵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극한 굶주림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심으로 사람은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기서 산다는 것은 단순히 목숨을 유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런 의미없이 목숨을 유지하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존재하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인간답게 산다, 의미있고 가치있고 행복하게 산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 때 의미있고 가치있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Ⅱ.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5-7)

마귀는 1차 시험에서 여지없이 KO패 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쉽게 물러가지 않고 새로운 전략을 가지고 공격을 시도했습니다. 제 2차 시험이 시작되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웠습니다. 성전 꼭대기는 높이가 180feet(약 54m)요, 또 예루살렘 도시가 해발 2,500척(약750m) 고지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성전 꼭대기에서 밑을 내려다 보면 현기증을 느끼고 시선은 밑에까지 도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사람들이 천하 각곳에서 몰려오고 성전 꼭대기는 모든 사람이 다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여기서 마귀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 내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즉시 시편 91:11, 12절 말씀을 인용하여 네가 뛰어 내리기만 하면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시므로 천사를 보내어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시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했기 때문에 그 속에 숨은 궤계를 파악하기 힘든 시험이었습니다.

첫번째 시험이 물질에 대한 시험이라면 두번째 시험은 명예심에 관한 시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할 때 밥맛을 잃고 더 나아가 인생 살 맛을 잃게 됩니다. 인정 받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의 본능에 속한 것입니다. 마귀는 이 명예심을 자극시켜 자신을 군중 앞에 나타내도록 한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그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렸는데 조금도 상하지 않는다면 당장에 슈퍼맨이 되어 사람들로부터 당장에 메시야로서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의 두번째 시험에는 명예심 이상의 교묘한 궤계가 숨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말씀 자체를 시험해 보도록 한 것입니다 시편 91:11,12절 말씀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피난처가 되셔서 모든 재앙에서 지키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 말씀을 이용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기 때문에 무슨 위험한 일을 하더라도 그 크신 능력과 사랑으로 보호해 주실 것이니 말씀을 믿고 뛰어내려 보라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시험하는 것이요 더 나아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마귀는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사랑의 신뢰의 관계를 파괴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궤계가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파악하시고 신명기 6:16절 말씀으로 단호히 물리치셨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7)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자세가 어떠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결코 시험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우리는 그의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시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그의 절대주권에 대한 도전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나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독생자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나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사랑하고 감사하고 순종하고 경배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심으로써 마귀의 궤계를 파하셨습니다.

Ⅲ. 다만 그를 섬기라(8-10)

마귀는 2차 시험에서도 패하자 이제는 좀더 고차원적인 문제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비디오로 보여 주었습니다.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이라! 이는 실로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한 나라의 통치자만 되어도 그가 누리는 영광은 대단합니다. 하물며 천하 만국의 왕이 누리는 영광은 얼마나 엄청나겠습니까? 사람들은 세상 영광을 얻기 위해 목숨을 내놓고 투쟁합니다. 그런데 마귀는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기만 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쉽고 편합니까?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무서운 계략이 숨어 있습니다.

첫째로, 경배 문제입니다. 경배는 단순히 절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쳐 헌신하고 섬기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경배하는가에 따라 그의 종이 되어 그에게 예속되게 됩니다. 마귀는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미끼로 자신에게 엎드려 경배하게 함으로써 결국 마귀를 섬기도록 하고자 한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를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분리시킨 다음 결국에는 사단을 경배하고 섬기도록 합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고 자유를 줄 것처럼 달콤하게 속삭이지만 이에 넘어가면 결국 사단의 종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을 잘 믿다가도 세상 영광과 권세와 물질 때문에 세상과 타협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이는 결국 사단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쉬운 방법으로 영광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 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의 가시밭길을 가셔야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달리사 모진 고초를 받으시고 죽으셔야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 두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는 실로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그렇게 힘들게 십자가를 질 필요없이 쉽게 이를 성취하도록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얼마든지 쉽게 할 수 있는데 반드시 이렇게 십자가를 지고 힘들게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회의가 들 때처럼 유혹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사단이 우리에게 제안하는 것은 언제나 십자가를 빼고 쉽고 안일하게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없는 신앙은 그 자체가 죽은 신앙입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은 편한 것 같지만 조금 지나면 더 심한 괴로움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면 힘들 것 같지만 막상 지고 나면 생명력이 차고 넘치게 됩니다. 십자가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마귀에게 명하셨습니다.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사단과 대화하시거나 그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단과 조금도 타협하지 아니하시고 단호히 대적하셨습니다. 대개 사단의 시험에 빠지는 사람을 보면 사단이 심어주는 생각을 영접하고 남몰래 깊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단이 심는 것은 생각할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만이 경배의 대상이 되심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위치에 설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은 사명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고자 결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만왕의 왕으로서 영광을 얻고자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외롭고 고통스러울찌라도 예수님은 십자가를 사랑하시고 십자가를 굳게 붙드셨습니다. 이 십자가는 영광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단을 대적하시자 마귀는 물러갔습니다. 그러나 눅 4:13절에 보면 잠시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사단은 틈만 있으면 찾아옵니다. 예수님께서 사단의 시험을 이기시자 천사들이 나아와 수종들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시험 받으실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를 물리치셨습니다. 아담이 사단의 시험에 넘어간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경외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심으로 사단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사단의 궤계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 뿐입니다(엡6:17). 우리는 우리의 경험과 지혜로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다는 자만심을 갖기 쉽습니다. 바쁘면 그동안 축적된 힘으로 능히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말씀 공부를 소홀히 하다가 시험에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자신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신갑주를 입으시고 사단의 궤계를 물리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사단의 시험을 이기신 것은 무슨 뜻이 있습니까? 아담이 에덴의 행복을 상실하고 타락한 것은 결국 사단의 시험에 졌기 때문입니다. 아담 이후로 모든 인간은 그 허리 안에 있어 사단의 시험에 져서 사단의 종노릇을 하여 왔습니다. 이로 인해 인간들은 사단이 주는 두려움과 불안, 사망권세에 시달리다가 멸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간들을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받는 시험을 꼭 같이 받으시고 이를 이기심으로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셨습니다. 예수님 한 분의 승리는 인류의 승리입니다. 아담 한 사람의 패배로 그 허리 안에 있던 모든 인류가 패배자가 된 것 같이, 예수님 한 분이 승리하심으로 그 안에 있는 모든 자가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친히 사단의 시험을 받으심으로 자비롭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시험 받는 연약한 우리 인간을 이해하시고 능히 도우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히2:17,18). 우리는 연약하여 잘 넘어지고 실패할지라도 시시때때로 주님의 긍휼하심을 덧입고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히4:15,16)

따스한 봄에 유혹이 많듯이 인생의 봄인 청년 시절에 유혹이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함으로 사단의 달콤한 유혹을 이기고 진정으로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