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제 7 강
너희도 온전하라
말씀: 마태복음 5:17-48
요절: 마태복음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우리는 지난 강의에서 어떤 자가 진정으로 복 있는 자인가를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소유해야 행복한 자인가를 가르쳐 주시지 않고 어떤 존재가 되어야 행복한 자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가져야 할 내면성에 대해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부담스러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온전해질 수 있단 말입니까? 이는 우리가 육의 몸을 입고 있는 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를 얽어매기 위해 율법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어느 정도까지 성장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두신 소원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율법의 완성자 예수님(17-20)
17-20절은 오늘 본문의 서론에 해당되는 말씀으로서 일반적인 원리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온전케 하려 함이로라.”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동이나 가르침을 통해 예수님이 이 땅에 새로운 법을 선포하고 구약의 율법을 폐하러 온 혁명가로 오해하기 쉬웠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시 성경선생인 서기관과는 달리 신선하고 생명력이 넘쳐서 죄인들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권세있는 새 교훈이로다” 하며 놀랐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병을 고치시며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이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할 때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늘 잔치를 하셨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당시 대표적인 죄인인 세리 레위를 그의 제자로 부르신 사건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지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고의로 율법을 무시하고 폐하러 오신 것 처럼 보였습니다. 규례와 전통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이단자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이나 선지자, 곧 구약성경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율법을 완성하셨습니까?
첫째로, 예수님이 오심으로 구약의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구약의 중심 사상은 메시야 사상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범죄 이후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할 메시야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대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는 구절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이는 예수님의 일거수 일투족이 구약의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는 것임을 말해 줍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심으로 완성하셨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법도입니다. 인간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지킬 힘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인간은 율법의 저주 아래 있게 되고 심판 받아 멸망할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사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율법 아래 나시고 또 일생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심으로써 율법을 온전히 지키셨습니다. 마침내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다 치루셨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성경의 권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18). 일점일획은 히브리어 중에 가장 작은 점과 글자를 말합니다. 이는 구약성경의 한 말씀이라도 세상이 끝나기 전에는 절대로 폐하여지지 않고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10:35절에서 성경은 폐하여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성에 비추어서 성경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함으로써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권위는 여전히 절대적입니다. 볼테르는 100년 후에 성경은 없어질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100년 후에 볼테르의 집은 성경을 파는 집이 되었다고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절대적이고 완전무결합니다. 여기에 우리 인간이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성경의 영적 권위가 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여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지극히 작은 계명 하나라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듣기에 좋고 잘 받아들이는 축복이나 사랑과 같은 은혜스러운 말씀은 귀히 여기고 순종하고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나 회개, 심판, 재림, 부활, 훈련과 같은 말씀은 부담스럽기 때문에 경히 여기고 양들에게도 가볍게 가르치기 쉽습니다. 그렇게 할 때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로 대접을 받게 됩니다. 천국에서 큰 자로 인정 받으려면 어떤 말씀이라도 경외심을 가지고 순종하고 말씀 그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의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십니다(20). 서기관은 율법을 연구하는 성경학자들이요 바리새인들은 철저히 율법대로 살고자 애쓰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 세부적인 규례를 만들었습니다. 또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우리의 의가 이들보다 더 나아야 된다면 일주일에 세 번씩 금식기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의 의는 의식적이고 소극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 나타난 행위는 중요시했지만 내면은 등한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외적인 것보다 내면 세계, 결과보다는 동기를 중요시하셨고, 문자보다는 정신을 실천하도록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바리새인의 의는 행위에 기초한 의이지만 제자들의 의는 믿음에 기초한 의입니다. 예수님은 21절부터 우리의 의가 어떠해야 되는가를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Ⅱ. 온전한 의(21-48)
21-48절에는 살인, 간음, 이혼, 맹세,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과 원수 사랑에 관한 여섯 가지 구체적인 실례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옛 사람에게 말한바 …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구절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유대인들은 수 세기 동안 랍비들에 의해 시대시대마다 모세의 율법을 새롭게 해석해 왔습니다.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 율법을 해석하여 전통과 규례로 삼았습니다. 이것을 모은 것이 탈무드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구전으로 전해 온 장로들의 유전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율법과 동등하게 지켰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그릇된 해석을 시정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로서 율법의 참 뜻을 보여주시고자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을 만드신 분이 어떤 정신으로 율법을 기초하셨는가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첫째, 살인에 대한 계명(21-26): 살인에 대한 구약의 계명은 “살인치 말라”(출20:13),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출21:12). 살인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창9:6절에서 사람이 피를 흘려서는 안될 이유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빈부귀천, 인종, 신분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한 가지 사실 때문에 고귀하고 존엄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이러한 인간의 존엄성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옛 사람들은 실제로 살인만 하지 않으면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에수님은 형제에 대해서 감정적으로 화를 내거나, 골빈 놈, 바보 멍청이라고 욕을 하거나, 미련한 놈이라고 하며 상대방의 인격을 무시하고 정죄하는 것도 살인 행위와 동일하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겉으로 나타난 행위보다 내면의 숨은 동기를 더 중요시 하셨습니다. 살인의 동기는 미운 감정입니다. 사도 요한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요한1서 3:15).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도 동생을 시기하여 미워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형제를 미워하는 감정이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말과 행동이 거칠어지고 상대방의 장점보다 약점을 찾아내어 비판하게 됩니다. 반면에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어떻게 생겼든지 사랑스럽게 보이게 됩니다.
살인이란 단순히 육체의 생명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인격을 파괴하고 영적 생명을 파괴하는 것도 살인 행위입니다. 상대방의 인격을 무시함으로써 마음에 상처를 주고 기를 죽이는 것도 살인 행위요, 불신과 회의에 찬 말을 함으로써 상대방의 믿음을 흔들어 놓거나 실족케 하는 것도 살인 행위인 것입니다. 이런 자는 살인자와 동일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들을 대할 때 기본적으로 사랑을 가지고 인격적으로 대해야 합니다. 또한 부정적인 말보다 긍정적인 말을 함으로써 상대방의 용기를 북돋아 주고 믿음을 심고 덕을 세우기에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은 형제를 미워하지 않는 소극적인 자세에서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형제와 화목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 말씀은 우리가 형제와 불화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결코 받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기 전에 형제와 조금이라도 거리끼는 문제가 있으면 먼저 그것부터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급히 화목하라고 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25,26). 우리는 언제 인생 길을 마치고 죽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지 알지 못함으로 급히 형제와 화목해야 합니다.
둘째, 간음에 대한 계명(27-30): 27,28절을 보십시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 하였느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간음치 말라’는 계명을 육체의 간음 행위에만 국한시켰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간음 행위만 하지 않으면 계명을 잘 지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성을 바라볼 때 인격체로 보지 않고 정욕의 대상으로 바라본다면 마음으로 간음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으로, 상상으로 죄를 범하는 것조차 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행위를 낳게 하는 마음을 지킴으로 원천봉쇄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마음을 지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도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도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하였습니다(잠4:23). 마음은 성과 같습니다. 성을 방비하지 않으면 원수들이 쳐들어와 점령하게 됩니다. 특히 봄이 되면 사방에서 강한 정욕귀신이 공격해 옵니다. 이때 우리는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정욕적인 생각은 사람의 인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마음에 음욕을 품게 되면 죄의식에 사로잡혀 고통하게 되고 또 자의식으로 인해 소심해지게 됩니다. 또한 정신 세계가 황폐하게 되어 건전한 생각을 못하게 됩니다. 건전한 생각을 해야 사람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데 건전한 생각을 못함으로 전혀 성장하지 못합니다. 정도가 심하면 이성으로 제어할 수 없게 되어 미치게 됩니다. 정신 병자의 80-90%가 정욕에서 온다고 합니다. 이처럼 정욕적인 생각은 사람을 병들게 만들고 못쓰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죄를 범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만일 네 오른눈이 너를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더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29,30)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눈과 손이 성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 해석의 주요 원리 중 하나는 전후 문맥의 뜻을 살피는 것과 성경 전체 사상에 비추어서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눈을 빼고 손을 찍어 버리라는 것은 성경 전체 사상에 위배됨으로 이는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영적 생명을 위해서 죄와 타협하지 말고 철저히 다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가 보편화 되어 문화가 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죄를 가볍게 생각하고 차 마시듯이 죄를 짓기 쉽습니다. 그러나 죄는 어떤 경우에든 철저히 다루어야 합니다. 오른눈과 오른손은 우리 몸에서 아주 중요한 지체입니다. 아무리 소중한 지체라도 그것이 죄의 원인이 될 때 제거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하는 모든 요인들을 제거해야 됩니다. 음란한 영화나 음란 비디오와 같이 정욕을 유발시키고 자극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할 때 죄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불이 있습니다. 불을 가지고 기름에 가까이 가면 불이 붙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기름에 가까이 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청년 시절에 육체의 정욕을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요셉은 보디발 여사가 음심이 가득 찬 눈으로 끊임없이 유혹할 때 그를 피하고 함께 있지도 않았습니다. 옷을 붙잡고 늘어질 때는 옷을 벗어 던지고 도망쳤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죄 짓기를 두려워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청년이 어떻게 정욕을 이길 수 있을까 하는 명제로 고민하다가 다음과 같은 해답을 얻었습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시119:9). 우리가 잠시 죄의 쾌락을 누리다가 영원한 지옥불에 들어간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영혼이 구원받는 것이 유익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옥이 얼마나 무서운 줄을 모르기 때문에 죄 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지옥에 가서 견디는데 난들 못 견디겠는가 말합니다. 그러나 지옥은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지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지옥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말씀하셨습니다(눅16:19-31). 한 부자가 이 땅에서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며 살다가 죽어서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그는 불꽃 중에서 너무 고통스러워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그의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우리가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할 것을 생각하면 함부로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셋째, 이혼에 대한 계명(31,32): 31,32절은 이혼에서 생기는 간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법을 이용하여 합법적으로 간음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서는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증서를 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 당시는 여인들을 천시하여 남자들이 별 사유도 없이 함부로 아내를 버렸습니다. 이는 정욕 때문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이혼을 방지하고 여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오히려 이러한 법을 이용하여 이혼증서만 써 주고 이혼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이혼하면 간음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음행은 근본적으로 결혼을 파괴하는 행위이므로 이혼 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음행한 연고 없이 이혼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9:4-6)
오늘날 사람들이 함부로 이혼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결혼하지 않고 정욕을 좇아 자기 원하는대로 함부로 결혼하기 때문입니다. 결혼이 신성시 되지 않고 상대화 되었기 때문에 이혼도 상대화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이 점점 몰락해 가는 이유 중의 하나는 높은 이혼율에 있습니다. 미국의 이혼율은 60%에 달합니다. 우리나라도 점점 이혼율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8쌍이 결혼하면 1쌍이 이혼한다고 합니다. 이혼하게 되면 본인에게 뿐만 아니라 자녀들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어 비뚤어지고 반항적이 됩니다. 오늘날처럼 건전한 가정이 절실히 필요한 때는 없습니다. 건전한 가정에 아이들이 건전하게 자라나게 되고 건전한 사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넷째, 맹세에 대한 계명(33-37):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33). 모세 율법의 주된 의도는 사람이 과장된 말이나 거짓말을 하기 쉬운 것을 억제함에 있었습니다. 당시 백성들은 노예근성 때문에 거짓말을 잘하고 또 사실이 아닌 것을 진실인 것처럼 과장해서 말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회는 혼란되고 어느 것이 진실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중요한 것만 맹세하고 또 맹세한 것은 반드시 이를 지키도록 함으로써 거짓을 방지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조차 악용하여 하늘이나 예루살렘이나 자신의 머리(생명)를 두고 맹세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교묘히 합리화하여 지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거짓된 본성을 아시고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대신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고 진실되게 이야기 하라고 하십니다.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진실이요, 용기입니다.
다섯째, 눈은 눈으로(38-42):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38,39).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은 반드시 그렇게 복수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율법의 목적은 분노와 복수심을 통제하는데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사소한 논쟁 끝에 이를 부러뜨렸을 경우에, 상대방은 분노와 복수심 때문에 그를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피해자의 이가 부러졌으면 상대방의 이만을 부러뜨릴 수 있도록 공평의 원리를 적용하여 복수심을 통제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대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속옷을 가지고자 하면 겉옷까지 주며 억지로 오리를 가고자 하면 십리를 동행하라고 하십니다(39b-42). 이 말씀은 정말 감당키 어려운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항상 뺨만 맞고 늘 억울한 일만 당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오른편 뺨을 치면 무조건 왼편 뺨을 돌려 대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 앞에서 심문 받으실 때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님을 쳤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고 하셨습니다.(요한18:23)
우리는 뺨을 맞지 않지만 크리스챤으로서 모욕과 조롱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또 신자이기 때문에 부당한 요구를 받거나 선을 강요당할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자기 방어가 생겨 어떤 모양으로든지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기 쉽습니다. ‘어디 두고 보자’ 하며 마음에 칼을 갑니다. 당대에 복수하지 못하면 자식에게 복수해 달라는 한 맺힌 유언을 합니다. 본래 눈은 눈으로 갚으라는 말씀은 그들 중에 악을 제하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할 때 악의 문제가 해결되기는 커녕 악순환만 계속됩니다. 악을 악으로 대항하게 되면 꼭 같은 악인이 되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악은 악인에게서 나기 때문입니다(삼상24:13). 교만은 겸손으로만이 이길 수 있는 것과 같이, 악은 선으로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롬12;21)
여섯째, 원수 사랑(43-47): 43,44절을 보십시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고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본능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겠느냐고 하십니다. 세리나 세상 사람들도 이같이 합니다. 예수님의 사람은 세상 사람과 무엇인가 달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람은 이기적인 사랑을 넘어서서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의 비범한 내면성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나를 미워하여 비방하고 헐뜯고 나를 죽이려고 하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이는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인간적이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신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동일하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골고루 내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좁은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유익과 복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넓은 분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반 은총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적함에도 불구하고 파멸해가는 우리 영혼을 불쌍히 여기사 사랑하는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고 내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특별 은총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이로써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나타내셨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을 때만이 사랑할 수 없는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덧입을 때 스데반은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고(행7:60), 손양원 목사님은 사랑하는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아들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가정을 불행하게 만든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고통하다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덧입고 복수의 칼을 놓고 사랑으로 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은 복수의 칼을 놓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원수조차도 사랑하게 하고 우리를 성숙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빚어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였습니다(롬13:10).
예수님은 이제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8). 이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어느 정도까지 성장해야 하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속담에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과 같이 아들은 아버지를 닮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신 품성을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으면 바리새인과 같이 되어 쓸모없게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영적투쟁을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도 품고 섬길 수 있는 하나님의 황태자요 황공주다운 내면성을 지닐 때까지 끊임없이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영적으로 성장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된 인생,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흠도 없고 티도 없는 온전한 자로 세우고자 하시는 우리 주님의 크신 사랑을 찬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