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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1-18(은밀한 중에 의를 행하라)

by Mark Yang   08/16/2019   Matthew

Message


마태복음 제 8 강

은밀한 중에 의를 행하라

말씀: 마태복음 6:1-18
요절: 마태복음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5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천국시민으로서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고, 6장에서는 구체적인 생활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경건생활에 관한 말씀입니다. 경건생활은 구제와 기도와 금식의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이는 경건의 삼대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제는 이웃에게 선을 베푸는 생활이요,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의미하며, 금식은 육을 어거하는 생활입니다. 구제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금식은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행해지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런 경건생활을 어떤 자세로 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은밀성을 간직한 주님의 제자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1-8,16-18)

1절 말씀은 오늘 본문의 서론에 해당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본 받아 불의한 세상에서 의를 사모하며 의를 행하고자 애쓰는 자들입니다. 신앙생활은 한마디로 의를 행하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의를 행할 때 범하기 쉬운 과오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향은 잘못한 것은 할 수 있는 대로 숨기고 잘한 것은 할 수 있는 대로 나타내 보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본능적으로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람 앞에서 의를 행할 때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의 노예가 되어 거짓되고 위선적이 되어 버립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상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상을 얻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고 위선적인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상을 얻지 못하면 벌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일반적인 원리를 제시한 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구제(2-4): 구제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덕목입니다. 잠언 19:17절에 보면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구제는 최고의 의(義)였습니다. 구제의 본질은 희생과 봉사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제는 단순히 가난한 자에게 물질을 도와주는 것만을 뜻하지 않고 영적으로 도와주는 것도 의미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말씀을 가르치고 심방을 하고 카운셀링을 하는 것은 최고의 구제입니다. 이기적인 세상에서 귀중한 시간과 물질과 진심을 바쳐 형제를 돕고자 애를 쓴다는 것은 얼마나 선한 일입니까? 그런데 이런 선한 일을 할 때 나팔을 불기 쉽습니다. 나팔을 분다는 것은 자신이 이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공표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착한 일을 하고 있으니 나를 주목하시오. 내가 얼마나 선하고 자비로운 사람인가를 알아 주시오.” 이렇게 나팔을 부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얻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오늘날은 자기 P.R시대입니다. 사람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지 않으면 출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금만 착한 일을 해도 신문이나 T.V에 내고 자기를 과시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세상 사는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제할 때 나팔을 불지 말라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기우제 때 나팔을 불어 백성이 모인 곳에서 구제를 했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은 많은 사람이 모이는 회당이나 거리에 가서 나팔을 불어 보란 듯이 구제를 했습니다. 이렇게 나팔을 불게 되면 그는 이미 자기 상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서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구하는 순간 하나님께로부터 상을 놓치고 맙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자세로 구제해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오른손으로 차를 마실 때 왼손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구제할 때 다른 사람 뿐 아니라 자신조차도 의식하지 못하게 자연스럽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하려면 자주 함으로써 습관화시켜야 합니다. 대구 UBF 형제자매님들은 매달 자신의 수입의 1%를 구제사업에 드리고자 힘씀으로써 그 내면에 충만한 기쁨을 누리고 있다고 합니다. 가령 수입이 100만원인 사람은 매달 1만원을, 10만원인 사람은 천원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서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제를 생활화할 때 자연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알아 주든 말든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그분만을 사랑하며 그분만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구제에 힘써야 합니다. 그때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갚아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갚아 주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믿음이 있을 때 피해의식에 시달리지 않고 기쁨으로 의를 행할 수 있습니다. 의를 행한 후에 손해의식에 시달리고 눈에 보이는 보상을 받고자 하는 것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갚아 주신다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기도(5-8): 기도란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기도하기에 힘씁니다. 기도가 없는 신앙생활은 생명력을 잃은 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위대한 사람들은 다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도는 경건의 척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가장 경건하게 보입니다. 우리는 죠지 뮬러가 빵 한 조각을 놓고 기도하는 모습이나, 밀레의 만종에서 부부가 일손을 멈추고 기도하는 모습을 볼 때 한없이 경건한 모습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도에도 우리가 경계해야 할 무서운 적이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바벨론 포로기를 전후하여 경건한 유대인들은 아침, 점심, 저녁에 시간을 정해 놓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단6:10). 외출하다가도 그 기도 시간이 되면 길가에 서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외식하는 자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사람이 많이 모이는 회당이나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경건한 자세로 미사여구를 늘어놓으며 기도했습니다. 심지어는 일부러 기도 시간이 되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외출을 하여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는 사람들로부터 경건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는 자기 상을 이미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자세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까? 6절을 보십시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골방은 어떤 곳입니까? 골방은 세상으로 향한 문이 닫치고 하나님께만 문이 열린 은밀한 곳입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는 말씀은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조용히 나아가서 은밀하게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승리의 신앙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골방이 있어야 합니다. 골방은 어디든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골방에서도 헛생각할 수 있고 또 군중 속에서도 밀폐된 골방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골방은 장소적인 개념이라기 보다는 마음의 자세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골방에서도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시간을 의식하고 일을 의식하기 쉽습니다. 이때는 더 이상 그곳이 골방이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자기 자신조차 의식해서는 안되고 다만 하나님만 의식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칼 하임(Karl Heim)은 “우리는 마치 이미 죽어 땅 속에 묻히고 오직 영혼만 남아서 하나님과 단 둘이만 대면한 것 같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골방에서 기도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심령이 답답할 때 골방에 가서 기도하면 심령에 말할 수 없는 기쁨과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위로가 필요할 때 하나님의 위로를 덧입을 수 있고, 죄사함의 은혜가 필요할 때 사죄의 은혜를 덧입을 수 있고, 지혜가 필요할 때 하나님의 지혜를 덧입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지 못할 때 골방에서 기도하게 되면 영적 분별력을 주셔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밝히 알게 해 주십니다. 우리는 골방에서 기도함으로써 하늘나라의 신령한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성을 맺고 믿음의 비밀을 간직한 영적인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또 기도할 때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교도들은 주문을 외우면서 같은 말을 반복해서 기도했습니다. ‘남묘호랑개교’라는 종교는 동쪽을 향하여 무릎을 꿇고 ‘남묘호랑개교’라는 말을 반복해서 외우면 병이 낳는다고 가르칩니다. 신자들 중에도 방언기도를 한다고 하여 의미없는 말을 반복해서 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중언부언 기도하는 자들은 말을 많이 해야 하나님께서 들으실 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잘 아십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기도도 인격적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의 수를 헤아리지 않으시고 그 무게를 다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기도의 길이를 재지 않으시고 그 깊이를 재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마땅히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주기도문은 Ⅱ부에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셋째, 금식(16-18): 금식은 영적 목적을 위해서 음식을 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는 1년에 한 번 있는 대 속죄일에 행했습니다. 또 국가적인 재난이나 모임이나 개인의 특별한 기도제목이 있을 때 금식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따라 일주일에 두번씩 금식했습니다. 금식은 경건의 표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금식 자체를 금하신 것이 아니라 금식할 때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해서는 안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은 자신이 금식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얼굴을 흉하게 하고 인상을 썼습니다. 머리도 감지 않고 수염도 깎지 않고 얼굴에 재를 바르고 슬픈 모습을 하고 비실비실 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경건한 자라는 것을 나타내었습니다. 예수님은 금식할 때 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하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 보이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할 때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갚아 주십니다.

금식이란 단순히 음식을 금하는 것만이 아니라 영적 생활을 위해 육의 생활을 절제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육신과 감정대로 살아가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영적 생활을 위해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기에 힘씁니다(갈5:24). 잠을 절제하고 생각을 절제하고 시간을 절제하고 말을 절제합니다. 이는 자기와의 투쟁입니다. 이런 투쟁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해서는 안되고 하나님 앞에서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사람들의 인정이나 칭찬을 구하지 않고 은밀한 가운데서 순수하게 의를 행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본문 4,6,18절에는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는 말씀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비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모든 것을 다 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 뿐 아니라 마음의 생각, 무의식 세계의 깊은 곳까지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속일 수 있으나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눈은 피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눈은 피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139:1-4).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의식할 때 은밀한 중에 의를 행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상을 구해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순수하게 신앙생활을 해야지 치사하게 상을 바라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상급 없이는 순수하게 신앙생활 할 수 없습니다. 히11:6절은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분이심을 증거합니다. 신앙 선배들은 모두 하나님의 상급을 바랐습니다. 모세가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한 것도 상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사람의 인정이나 칭찬, 사람들로부터 어떤 보상을 바랄 때 비참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바랄 때 심령에 참 자유함을 누리며 기쁨으로 의를 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상급만을 바라고 의를 행할 때 은밀성을 간직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자의 내면은 아무리 물을 길어도 계속해서 신선한 물을 길을 수 있는 깊은 우물과 같습니다. 이런 자는 믿음의 비밀을 간직한 자입니다. 우리는 신자의 공동체 속에서 살기 때문에 그룹신앙을 중시하고 개인 신앙을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제자의 은밀성은 하나님 앞에서 개인 신앙을 가질 때 생겨납니다. 이때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영향력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귀히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Ⅱ. 주기도문(9-15)

9-15절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라고 해서 주기도문입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폐회기도용으로 아무 생각없이 기계적으로 외우기 쉽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주기도문처럼 학대를 받는 것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주기도문은 기도의 모형으로서 그 간결성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어거스틴과 루터는 성경전체에서 주기도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첫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는 호격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육신의 아버지와 구별하여 영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잠시 존재하지만 하늘의 아버지는 영존하시는 아버지가 되십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불완전하지만 하늘의 아버지는 온전하신 분이십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능력이 제한되어 있지만 하늘의 아버지는 그 능력이 무한하십니다. 하늘의 아버지는 우리 인생을 책임져 주시고, 모든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는 공급자가 되시고,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주시는 보호자가 되시고,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시는 인도자가 되십니다. 하늘의 아버지는 모든 현실세계를 초월해 계시는 초월성과 우리가 숨쉬고 살아가는 생활 속에 존재하시는 내재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our heavenly Father)"라고 부르면 두려움과 함께 친밀함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아버지에 대해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술만 마시면 처자식을 때리는 잔인한 아버지, 무기력하고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아버지, TV 채널을 놓고 아들과 다투는 속 좁은 아버지를 기억하고 하나님 아버지도 그런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육신의 아버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독생자까지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신 사랑의 아버지시요, 누구든지 믿음으로 나아 오기만 하면 용납해 주시는 은혜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보배피로 구속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 것은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롬8:14,15)

둘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것은 첫번째 기도제목입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거룩이란 구별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피조물과 구별됩니다. 또한 죄와 구별된 순결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이 가까이 할 수 없는 거룩한 분이십니다. 계시록 4:8절에서는 “우리 주 하나님이시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고 찬송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서 피조물로부터 마땅히 영광과 존귀와 섬김과 찬송을 받으셔야만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합니다(롬1:21). 그 결과 인간들은 금수와 버러지를 섬기는 우상숭배자가 되고 욕심과 정욕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롬1:23-27). 이런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인생들로부터 영광과 존귀와 찬송을 받으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수 있습니까?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수석을 하게 되면 부모에게 영광이 됩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실생활 가운데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는 생활을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부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되고, 또 직장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무엇보다 죄악된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거룩한 생활을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꼭 같이 욕심과 정욕대로 살아간다면 하나님을 욕되게 할 것입니다.

셋째,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믿는 자들의 궁극적인 희망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성경은 실락원과 복락원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를 상실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나라이 임하옵시며”는 “하나님께서 다스려 주옵소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다스려 주시고 가정을 다스려 주시고 우리의 모임을 다스려 주시고 이 나라와 전 세계를 다스려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타락 이후 사단이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사단이 다스리는 곳에는 온갖 죄악과 불의가 난무하고 사망권세가 지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에는 사랑과 평화와 공의가 차고 넘칩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다스리실 때 행복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이 살면서도 불행한 인생을 사는 이유는 사단의 다스림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인종과 문화가 다른 수많은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볼 때 크게 하나님의 나라와 사단의 나라로 나누어 집니다. 세상은 선과 악, 정의와 불의, 빛과 어두움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와 사단의 나라와의 싸움입니다. 우리는 사단에게 빼앗긴 영역을 되찾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거룩한 역사를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말씀은 이 땅위에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늘에서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땅에서는 죄로 말미암아 창조의 질서가 무너져 하나님의 뜻을 거스립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루 속히 만유가 회복되어 이 땅 위에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넷째,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넷째부터는 우리를 위한 기도입니다. 여기서 일용할 양식은 단순히 먹을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 속에 필요한 물질이나 학교 공부나 직장문제나 결혼문제, 건강문제, 자녀문제 등 모든 실제적인 것이 포함됩니다. 실제적인 문제를 간구함으로써 실제적인 믿음을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왜 달용할 양식이나 년용할 양식을 구하도록 하지 않으시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을까요? 이는 욕심을 부인하고 날마다 하나님을 겸손히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이 먹을 것이 많고 배가 부르면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신명기는 이를 염려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가서 잘 먹고 잘 살면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지 말라고 반복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실제적으로 내가 직장에 다니고 내가 일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먹이시고 키우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햇빛과 비를 주시지 않는다면 어찌 농사를 지을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물을 얻을 건강과 지혜와 능력을 주시지 않는다면 어찌 얻을 수 있겠습니까(신8:17,18a).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으며 하나님께로 돌아 갑니다.(롬11:36)

둘째는, 우리라는 사상입니다. 이는 이기주의를 배격하고 공동체 의식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개인 이기주의와 우리 모임만 잘 되면 된다는 집단 이기주의 사상이 나라를 망치고 국제사회를 망칩니다.

다섯째,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육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양식이 필요하듯이 영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죄사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분리시켜 결국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게 합니다. 죄는 또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우리는 육의 몸을 입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죄를 짓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죄사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죄사함을 간구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가장 큰 문제는 서로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의 상처를 주고 나에게 죄를 범한 자에게는 앙심을 품고 복수의 칼을 갈기 쉽습니다. 정신 질환의 주요 원인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데서 온다고 합니다. 반면 다른 사람을 용서할 때 건강해 진다고 합니다. 용서하는 데는 내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내적인 힘을 덧입을 수 있습니까? 이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덧입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14,15).

여섯째,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세상은 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의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벧전5:8). 우리는 연약하여 사단의 시험을 이길 수 없고 악의 세력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승리의 삶을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기도문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는 신앙고백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끝맺고 있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이 우리의 마음 가운데 늘 살아 있어 우리를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의를 행함으로 은밀성을 간직한 영적인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