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제 9 강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말씀: 마태복음 6:19-34
요절: 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는 지난 강의에서 구제와 기도와 금식 곧 제자의 경건 생활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제자의 경건 생활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 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못쓰게 되고 맙니다. 경건 생활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물질 생활입니다. 본문은 제자의 물질 생활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자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지만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며 세상 사람들과 꼭 같이 의식주 생활을 영위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물질 생활을 어떻게 영위할 것인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성서적 물질관을 확립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19-24)
19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미래의 안전과 행복에 깊은 관심을 갖습니다. 이를 위해 저축을 하고 부동산을 사고 증권에 투자합니다. 사람들은 믿을 것은 보물 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 땅에 보물을 쌓고자 애를 씁니다. 여기서 보물은 단순히 돈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보물은 우리가 아끼고 귀히 여기고 소망하고 사랑하는 것으로서 명예나 권세가 보물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땅에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것에는 썩고 쇠하는 부패과정이 있습니다. 좀과 동록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우리가 아끼는 보물을 부패하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도적이 안전을 해칩니다. 세상에는 애써 쌓아 놓은 보물을 탈취해 가는 약탈자들이 많습니다. 불이 나서 막대한 재산을 잃기도 하고 사업에 실패하여 하루 아침에 거지 신세가 되기도 합니다. 질병이나 교통사고로 인해 그동안 애써 벌어 놓았던 재산을 병원에 다 바치기도 하고, 전쟁이 나서 모든 것을 잃기도 합니다. 요사이는 개혁의 바람에 부정으로 쌓아 놓았던 모든 것을 잃고 감옥에 가기도 합니다. 마침내는 죽음과 함께 일생동안 쌓아 놓았던 보물은 와르르 무너지고 맙니다. 이러한 약탈자들은 전혀 예기치 않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처럼 땅에 보화를 쌓아두는 것은 안전하지 못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예수님은 우리 자신을 위해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곳은 가장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하늘 나라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벧전1:4). 그곳에는 도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도적이 그곳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보물을 땅에 쌓는 것과 하늘에 쌓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까? 보물을 땅에 쌓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 사는 생활입니다. 이런 자는 자기와 자기 가족만을 위해 삽니다. 삶의 중심이 자기요 삶의 목적도 자기입니다. 심지어 신앙생활도 자기의 행복이나 자아완성을 위해서 합니다. 반면에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은 주와 복음을 위해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자는 주와 복음을 위해 자기를 희생합니다. 주와 복음을 위하여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꿈을 드리고 청춘을 드립니다. 보물을 땅에 쌓는 자는 땅에 소망을 두고, 하늘에 쌓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둡니다. 소망이 다르기 때문에 생각하는 바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고 삶의 양식도 다릅니다.
우리가 왜 보물을 하늘에 쌓아야 되는 것입니까? 이는 우리의 보물이 있는 그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기 때문입니다(21). 보물과 마음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물질을 어떻게 쓰는가를 보면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아낌없이 물질을 쓰지만 복음역사를 위해 드리는 것은 아까워하고 인색한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는 그 마음이 하나님께 있지 않고 자기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쓸 것을 아껴서 주님께 희생적으로 드립니다. 이는 그 마음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보물과 마음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효과가 당장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손해본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생을 거시안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결산할 때는 자기를 위해서 쓴 것은 하나도 남지 않고 주와 복음을 위해 쓴 것만이 남게 됩니다. 죠지 스위팅(George Sweeting)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 날, 내 생이 끝나는 최후의 여정에서 ‘내가 얼마나 벌었는가?’하는 것은 전혀 중요한 질문이 될 수 없다. 그때 중요한 질문은 ‘나는 얼마나 주었는가?’ 또는 ‘나는 얼마나 드렸는가?’ 즉 ‘가치있는 사역과 참다운 목적을 위해 얼마나 드렸는가?’ 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좋은 것이 많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기 쉽습니다. 특히 물질이 많아질수록 마음에 탐욕이 생겨 물질에 마음을 뻬앗기고 주님의 역사에 인색하기 쉽습니다. 부해질수록 영적으로 타락할 위험성을 많이 안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해질수록 보물을 하늘에 쌓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물질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물질을 가치있게 써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부한 자들에게 이렇게 권면하도록 하였습니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6:17-19).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은 결코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가장 안전한 투자입니다. 또한 실제 삶에서도 윤택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잠언 11:24,25절은 말합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자기에게 부요하고 하나님께 인색한 자는 지혜로운 자 같으나 어리석은 자요, 자기에게는 인색하지만 하나님께 부요한 자는 어리석은 자 같으나 지혜로운 자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눈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눈은 몸에 등불과 같습니다. 눈이 좋으면 모든 것이 밝게 보이고 눈이 나쁘면 모든 것이 어둡게 보입니다. 우리에게는 마음의 눈이 있습니다. 마음의 눈이 좋은 자는 영적인 눈을 뜨고 무엇이 가치있고 귀한가를 알기 때문에 보물을 하늘에 쌓기에 힘씁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이 어두운 자는 영적 상태가 좋지 않아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별력이 없습니다. 이런 자는 세상 욕심과 정욕과 이기심으로 인해 영적인 눈이 어두운 자입니다. 이처럼 마음의 눈의 상태가 인생 전체를 좌지우지합니다. 우리는 내 마음의 눈이 어떤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보물을 땅에 쌓느냐? 하늘에 쌓느냐? 하는 문제는 결국 어떤 주인을 섬길 것인가 하는 문제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사람들은 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하나 뿐이기 때문에 결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섬기면 재물을 가지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면서 동시에 재물을 우상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재물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섬기는데 필요한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재물은 맘몬(Mammon)인데 이는 재물의 신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과 맘몬은 다 신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절대 복종, 절대적인 헌신을 요구합니다. 우리에게 부분을 요구하지 않고 전부를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물질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성서적 물질관을 배웁니다. 물질은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물질을 경시하거나 중시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은 물질을 가장 가치있는 곳에 쓰도록 가르쳐 줍니다. 사람들은 물질을 버는 연구는 많이 하지만 쓰는 연구는 별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말 어렵고 중요한 것은 물질을 어떻게 쓰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질은 가치있게 쓰면 귀한 것이지만 잘못 쓰면 패가망신 하게 됩니다. 요사이 사정의 칼날에 짤리는 사람들을 보면 물질을 잘못 쓴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물질의 청지기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물질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물질의 관리인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관리인으로서 주님께 유익을 드려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유익을 드리게 되면 결국 그 유익이 다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됩니다.
Ⅱ.염려하지 말라(25-34)
예수님은 이제 세상을 살아 나가면서 갖기 쉬운 염려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잘 아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을 하게 되면 보물을 하늘에 쌓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때 그들의 마음에는 생활에 대한 염려의 먹구름이 엄습해 오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만을 섬기면 실제적으로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늘 나라에 보화를 쌓는다고 하다가 저축 한푼 못하여 지금은 괜찮지만 노년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괜찮지만 처 자식은 어떻게 될 것인가? 믿음으로 살다가 세상에서 낙오되지나 않을까? 이런 염려가 생기면 은혜와 기쁨이 사라지고 얼굴은 시커멓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25). 목숨이나 몸은 존재요 음식이나 의복은 소유입니다. 존재가 소유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존재보다 소유를 더 중하게 여깁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뉴욕의 길거리를 거닐고 있는데 강도가 나타나 칼을 목에 들이대면서 말했습니다. “돈을 내 놓겠느냐? 목을 내 놓겠느냐?” 그러자 그 사람은 “나는 목을 내 놓겠다. 왜냐하면 돈은 내 노후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은 현명한 것 같지만 어리석습니다. 목숨이나 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귀한 생명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서 어찌 이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음식이나 의복을 공급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를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예를 들어 말씀해 주셨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십시오.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합니다. 그런데도 공중의 새는 먹고 삽니다. 이는 천부께서 기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각종 곤충과 벌레를 예비해 놓으시고 섬세하게 배려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목숨을 위해서 염려하는 것은 아무 쓸데 없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우리가 염려함으로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으면 키 작은 사람은 열심히 염려할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하면 오히려 키가 쫄아듭니다. 또 ‘키’란 헬라어로 생명의 길이를 의미합니다. 이는 염려한다고 해서 목숨을 한 시간이라도 연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염려하게 되면 오히려 목숨이 단축됩니다. 염려하게 되면 위장병, 신경쇠약, 심장병, 암 등 각종 질환이 생기게 되어 일찍 죽습니다. 염려는 만병의 근원입니다. 염려는 분열을 의미합니다. 염려는 사람의 마음을 찢어 놓아 일을 제대로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의복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생각하여 보라’는 말씀은 ‘보다 깊은 차원에서 고찰하여 보라’ 는 뜻입니다. 백합화는 들에서 아무렇게나 자랍니다. 그러나 그 꽃의 형태와 무늬, 짜임새와 바탕과 색깔, 그 우아함과 향기는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 입은 옷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납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완전 무결하고 신비스럽습니다. 하나님은 그 전능하신 솜씨로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아름답게 입히십니다. 그런데 하물며 그의 사랑하는 자녀를 입히시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시요 또 창조하신 만물을 보존하시는 보존자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지으신 피조물을 귀하게 여기시고 아끼시고 돌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반섭리입니다. 인간은 어떤 피조물보다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존재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제자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로서 더욱 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다 아시고 공급해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염려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줄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염려가 생깁니다. 현재 먹고 입고 살면서도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염려합니다. 건강에 대한 염려, 공부에 대한 염려, 취직에 대한 염려, 결혼에 대해 염려가 있습니다. 결혼한 분들은 자녀 교육을 염려하고 진급을 염려하고 주택을 염려하고 노후 대책을 염려합니다. 늙게 되면 묘자리를 염려합니다. 결국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염려합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염려하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30b절에서 “믿음이 적은 자들아”하고 책망하셨습니다. 염려하는 근본 원인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능력을 믿지 못하고 스스로 해결하고자 하기 때문에 염려가 생기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부모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게 되면 염려하지 않게 됩니다. 염려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길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내 인생을 전폭적으로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손에 맡길 때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하나님은 가장 신뢰할 만한 분이십니다. 베드로는 핍박으로 인해 흩으진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5:7). 또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우리는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 비유에서 하나님이 친히 기르시고 먹이시고 입히시니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했지 일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중의 나는 새를 보라고 하셨지 가만히 앉아서 놀고 있는 새를 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공중의 새는 먹이를 구하기 위해 부지런히 날아 다닙니다. 그러나 곤충이나 벌레를 제공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들의 백합화도 탄소동화작용을 하기 위해 열심히 일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씨를 뿌리고 가꾸고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살후3:10).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기도하고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31,3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예로 드신 후에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이방인들은 세상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세상 사람들은 먹고 마시는 걱정을 많이 합니다. 먹고 사는 염려는 없는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사람도 합니다. 사람들은 현재 먹고 사는 것으로 만족할 줄 모르고 상대적인 빈곤에 시달립니다. 그래서 좀 더 잘 입을 수 없을까? 좀 더 편히 안락하게 살 수 없을까? 염려합니다. 사람들은 일생 동안 먹고 마시는 일에 얽매여 걱정 근심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구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3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우리가 마땅히 구해야 할 바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전파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번영하기를 바라야 됩니다. 또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에 힘써고, 불의한 세상에서 주님의 공의가 바로 서도록 바라야 합니다. ‘구한다’는 말은 열렬하게 구한다, 그것을 위해 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되 열렬하게 적극적으로 온 힘을 다해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큰 것들을 구할 때 작은 것들이 우리에게 더하여지고, 하늘의 것들을 구할 때 땅의 것들도 우리에게 더하여집니다.
여기서 또 ‘먼저’라는 말은 순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일에 가장 우선적인 가치와 절대성을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살아 가는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들이 무엇입니까? 공부입니까? 결혼입니까? 복지국가 건설입니까?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가장 우선적인 가치와 절대성을 둘 성질의 것은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살도록 인생 방향과 목적을 바로 잡아 주셨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만이 우리의 온 생애를 바쳐 감당할만한 절대적인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이는 신실하신 우리 주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믿고 산 사람을 한번도 실망시키신 적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주시는 분이십니다(엡3:20). 이 말씀은 이론적으로 알 수 없고 실제 체험으로만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이 말은 사족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주는 뜻은 큽니다. 염려는 대개 현재보다 미래에 대한 것을 염려합니다. 내일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내년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나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염려합니다. 염려는 왕성한 상상력을 갖고 있어 온갖 류의 가능성을 상상해 냅니다. 예측도 못할 것을 기발하게 상상해 내어 염려하고 두려움에 빠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염려의 공장장이 되어 갖가지 염려를 창조해 냅니다. 그리고 그 염려에 압도당하여 신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아니 한 시간 앞의 일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내일 일은 내일 스스로가 염려하도록 하고 우리는 오늘에 충성하면 되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킴피스는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라”고 하였습니다. 장래를 하나님께 맡기고 오늘 일에 충성하면 주님께서 한 걸음 한 걸음씩 친히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는 오늘이 있는 동안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인생은 가장 값지고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