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제 11 강
우리 연약함을 담당하신 예수님
말씀: 마태복음 8:1-17
요절: 마태복음 8: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 지셨 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예수님은 4장에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후 본격적으로 복음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천국복음을 전파하신 후 곧 이어 5-7장에서 천국시민의 헌장을 선포하셨습니다. 그후 예수님은 8,9장에서 메시야로서 실제 권능을 행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문둥병과 중풍병과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시고 더 나아가 많은 귀신들린 자와 병든 자를 고쳐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에는 병든 인생들에 대한 메시야의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의 모든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을 괴롭히는 모든 고통과 악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없이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 병든 내면을 치료 받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신 예수님(1-4)
예수님께서 주옥과 같은 산상보훈의 말씀을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시자 허다한 무리가 좇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깊은 감동을 받고 좇았습니다. 이때 한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이 문둥병자는 눅5:12절에 보면 온 몸에 문둥병이 들린 자였습니다. 수많은 병 중에서 문둥병처럼 사람을 추하게 만드는 병은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걸작품으로서 모든 피조물 중에서도 가장 멋있고 아름답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동물과 달리 거울을 바라보며 자신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문둥병자는 너무나 추하고 흉하여 거울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문둥병은 만성질환으로 조직과 신경을 파괴하여 살을 썩게 하는 무서운 병입니다. 몸의 말초부에 결절이 생기다가 결절이 터지면 궤양이 고름이 되어 흐르게 됩니다. 나균은 피부 뿐만 아니라 연골 조직도 부식시키기 때문에 심하면 손가락과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코가 문들어집니다. 또한 눈썹도 빠지고 눈도 상하게 하여 눈을 멀게 합니다.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신경을 마비시키기 때문에 칼로 찔러도 아픈 줄 모르고, 찬 것 더운 것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무감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문둥병자는 온 몸이 궤양 투성이고 거기에서 고름이 샘물 같이 흘러 나왔을 것입니다. 또 눈썹은 다 빠지고 코가 문들어지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 흉한 짐승의 몰골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의 몸에서는 송장 썩는 냄새가 진동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육신의 고통보다도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정신적인 고통입니다. 문둥병은 상처난 부위를 통해 접촉으로 생기는 병이기 때문에 문둥병자는 격리시켰습니다. 문둥병에 걸리면 사랑하는 가족과도 생이별을 하여 격리된 장소에서 무기징역을 받은 죄수와 같이 고독을 씹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문둥병은 부정한 병으로서 하나님께 저주받은 병으로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옷이 찢어지면 꿰매 입고 머리는 단정히 빗기에 힘씁니다. 그러나 문둥병에 걸리면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윗입술을 가리우고 “부정하다, 부정하다”하며 외쳐야 했습니다(레13:45). 그는 문둥병 때문에 인간 폐업을 해야 했습니다. 그에게는 아무런 삶의 희망이 없었습니다.
환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낫고자 하는 소원입니다. 낫고자 하는 소원이 강하면 약도 잘 들고 빨리 낫게 되지만, 낫고자 하는 소원이 없으면 약도 잘 들지 않습니다. 그는 온 몸에 문둥병이 걸렸기 때문에 나을 가망이 없으므로 자포자기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 가운데서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들었을 때 믿음으로 낫고자 하는 소원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소식은 그에게 삶의 희망을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낫고자 하는 소원은 가졌지만 예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사람들 앞에 보여야 했기 때문에 자의식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또한 무리들로부터 돌에 맞아 죽을지 모르는 두려움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 나아가면 과연 자기와 같이 추한 자도 받아 주시고 깨끗케 해 주실까 하는 의심과 불신도 극복해야 했습니다. 그는 나아오기 힘든 절망적인 상황에서 다만 예수님만 바라보고 믿음으로 나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과 사랑을 믿고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의 크신 긍휼과 자비를 믿고 나아왔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나아온다는 것은 그 자체가 큰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2).” “원하시면”(If you are willing)이라는 말은 자신의 의지를 그리스도께 온전히 복종케 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당신은 메시야이시므로 무조건 나를 고쳐주셔야 합니다.”라는 식으로 일방적으로 간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겸손하게 주님의 은총과 자비를 구하며 자신의 전존재를 주님의 주권에 맡겼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의지가 그리스도의 의지에 온전히 복종케 될 때 비로소 주님께서 그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위해 무엇을 하셨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 진지라.” 예수님은 말씀만으로도 그를 고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먼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습니다. 이는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는 것은 율법에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율법을 초월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내면의 깊은 고독을 아셨습니다. 그의 슬픔을 아셨습니다. 그의 마음의 깊은 상처를 아셨습니다. 무엇보다 그가 사랑에 굶주린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민망히 여기시고 손을 대셨습니다. 예수님의 손길은 긍휼과 자비의 손길이었습니다. 은혜와 사랑의 손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내가 원하노니”(I am willing), 이는 병든 한 영혼을 향한 예수님의 간절한 의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추한 그의 몸을 깨끗케 해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몸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과 영혼도 깨끗케 해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되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졌습니다. 그의 몸 뿐만 아니라 마음도 깨끗해지고 영혼도 깨끗해졌습니다. 그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어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다만 그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가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예물을 드려 건강 진단서를 받도록 하셨습니다(4).
성경은 문둥병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문둥병은 죄와 그 증상이 흡사합니다. 문둥병이 사람을 추하고 더럽게 만들듯이, 죄도 사람을 추하고 더럽게 만듭니다. 문둥병이 살을 썩게 하고 신체 조직을 파괴시키듯이, 죄도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부패시키고 인격을 파괴시킵니다. 문둥병이 모든 관계성을 단절시키듯이, 죄도 하나님과 인간, 인간 상호간의 관계성을 단절시킵니다. 고독, 불안, 두려움, 절망, 우울증, 정신분열 등 현대인들이 많이 앓고 있는 모든 정신 질환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성 단절에서 생긴 것입니다. 문둥병은 처음에는 고통을 느끼다가 조금 지나면 신경 조직이 파괴되어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무감각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죄도 처음에는 죄의식을 느끼며 고통하지만 조금 지나면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가장 심각한 문제는 부정부패가 있다는 것보다도 너무 오랫동안 부정부패가 만연되어 있다 보니 죄를 죄로 느끼지 못하는 불감증 환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문둥병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죄로 인해 아름답고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추한 문둥병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이 병은 인간의 힘으로는 치료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보배 피만이 우리를 죄로부터 깨끗케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본문에 나오는 문둥병자와 같이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갈 때 주님께서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영접해 주시고 십자가의 보배 피로 정결케 해 주십니다.(요한1서 1:9,10)
Ⅱ. 백부장의 믿음을 축복하신 예수님(5-13)
예수님은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신 후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습니다. 이때 한 백부장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백부장은 100명의 군대를 거느린 로마 군대의 지휘관입니다. 백부장은 사병에서부터 올라왔기 때문에 군대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베테랑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군인들은 강포하기로 유명했습니다. 당시 로마 사회에는 “긍휼과 자비는 영혼의 질병이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은 가버나움 주둔 지역 사령관이요, 반면 하인은 노예로서 살아있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종은 주인이 마음대로 취급할 수 있는 재산의 일부였습니다. 종이 병들어 쓸모없게 되면 고물차를 폐차시키듯이 버리거나 죽여 버렸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군인들이 생명의 존엄성이나 사랑을 소유한 인격자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에게는 인간애가 있었습니다. 백부장은 종을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종은 부려먹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였습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소유나 지위나 신분이나 타이틀 여하에 따라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종을 한 인격체로 보고 귀히 여겼습니다. 백부장은 하인을 아들과 같이 사랑했습니다. 하인은 이런 주인에게 마음을 바쳐 충성했습니다. 너무 충성스럽게 일을 하다가 중풍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중풍병은 불치의 병이므로 나을 가망조차 없었습니다. 하인은 완전히 쓸모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쓸모없게 되면 더 이상 사랑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백부장의 사랑은 하인이 건강할 때보다 병들어 쓸모없게 되었을 때 더 잘 나타났습니다. 백부장은 하인의 문제를 들고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했습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이 말씀에서 볼 때 백부장은 하인의 괴로움에 동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백부장은 하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영접하고 함께 괴로와 하고 함께 고통했습니다. 그리고 하인의 문제가 바로 자신의 문제인 것처럼 하인의 문제를 들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는 실로 선한 목자였습니다. 백부장의 이 마음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백부장과 같이 인간애를 소유한 인격자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믿는 것과 인격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이원론적인 사고를 가진 신자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그 인격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오히려 불신자들 보다 더 못된 짓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자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당합니다. 우리는 백부장과 같이 인간애를 소유한 인격자로 성장해야 합니다.
백부장의 위대함은 이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예수님은 그의 목자의 심정에 감동을 받으시고 이방인의 집이라도 조금도 개의치 않고 가고자 하셨습니다. 이때 백부장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주여, 내 집에 들어 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 인간적으로 보면 백부장은 지배국의 지역 사령관이요, 예수님은 피지배국의 초라한 시골 전도인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인간적인 눈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을 보는 영적인 눈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창조의 권능을 가지신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이 얼마나 엄청난 분이신가를 발견했을 때 동시에 자신이 얼마나 비천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발견할 때 비로소 자신의 참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바리새인으로서 자기 의가 가득찬 매우 교만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신은 죄인 중에 괴수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을 우주의 총사령관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심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지극히 겸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를 믿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면 하인의 병이 낫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 이는 실로 놀라운 믿음입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경외심이 있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있었습니다. 노아는 홍수로 온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믿고 경외심으로 구원의 방주를 예비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불합리한 명령에도 절대적으로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밤이 맟도록 수고하였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실의와 낭패 중에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인간적으로 도저히 순종할 수 없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습니다. 이때 그는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고 깊은 믿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눅5:5,6). 백부장은 이방인이었습니다. 이방세계는 지극히 인본적이고 상대적이었습니다. 특히 군인세계는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믿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런 위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을까요? 백부장의 믿음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철학적 기초를 갖고 있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그는 군대 사회와 노예 사회에 살면서 명령의 본질을 깊이 이해했습니다. 명령의 본질은 순종입니다. 명령은 군대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힘입니다. 군대에서 상관의 명령은 절대적입니다. 상관의 명령이 불합리할지라도 무조건 순종해야 합니다. “가라!하면 가야지 “왜 가야 합니까?” 물을 수 없습니다. 군대에서 명령 불복종은 가장 큰 죄로 다루며 전시에는 총살감입니다. 백부장은 로마 군대의 장교로서 많은 훈련을 통해 자존심과 반발심을 꺾고 상관에게 절대 순종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때 그는 어떻게 명령하는 법도 알게 되었습니다. 순종을 배워야 명령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를 통해 명령에 권세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명령의 본질을 예수님께 그대로 적용시켰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말씀 한 마디만 하시면 병마조차 복종할 것을 믿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순수하고 단순하고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는 군인정신이 충만한 자였습니다.
믿음은 곧 순종입니다. 믿음의 세계는 순종을 배울 때만이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죄의 속성은 불순종과 반항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죄가 시작되었고 가인이 하나님의 주권에 반발함으로 살인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속에는 아담의 불순종의 피와 가인의 반발심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믿음보다 불신이 자연스럽고, 순종보다는 불순종과 반발이 자연스럽습니다.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자는 어딘지 어리석고 모자란 자 같이 생각됩니다. 그러나 순종은 어리석은 자가 하는 것이 아니요 진정으로 지혜롭고 겸손한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순종하시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절대적으로 순종하셨습니다(빌2:8). 이로써 예수님은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히5:8,9). 우리가 믿음의 세계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자존심과 반발심과 자기 생각을 부인해야 합니다. 자존심이 강하고 반발심이 많고 자기 생각이 강한 자는 아무리 말씀을 많이 공부하고 세월이 오래 간다 하더라도 믿음의 깊은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어린 아이와 같이 얕은 세계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순종을 배운 자는 백부장과 같이 빨리 믿음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백부장 하면 현재 육사 교수로 계시는 동교 센타의 김아브라함 목자님이 생각납니다. 이 분은 육사 생활과 군대 훈련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기 때문에 빠른 시일내에 믿음의 비밀을 깨닫고 거목으로 성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백부장과 같이 실 생활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순종을 배움으로 주님께서 쓰실 만한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예수님은 좀처럼 놀라지 않으시지만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놀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이방인인데도 믿음에 대한 깊은 이해력을 가지고 있는 것에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통하여 장차 이방인들 가운데 일어날 믿음의 역사를 보셨습니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게 될 비젼을 보셨습니다(11). 그러나 나라의 본 자손들은 불신으로 인해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이를 갈며 슬피 울게 될 것입니다(12).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조건에 관계없이 누구든지 믿음의 사람만이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기뻐하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그러자 그 시로 하인이 나았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통해 그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Ⅲ. 많은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14-17)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심방가셨을 때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셨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왜 열병에 걸렸을까요? 아마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 다닌다고 가정을 잘 돌보지 않자 화병이 나서 열병에 걸렸는지 모릅니다. 장모의 열병은 원인을 알 수 없는 FUO(Fever of Unknown Origin)였습니다. 이 열병은 그 어떤 약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병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전능하신 손으로 만지셨을 때 열병은 순식간에 떠나고 건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즉시 일어나서 맛있는 생선 찌개로 점심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해가 저물자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들을 불쌍히 여기사 일일이 영접하시고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쳐 주셨습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 지셨도다.”함을 이루려 하심이었습니다(17). 예수님이 행하신 권능의 역사는 예언의 빛 아래서만 해석할 수 있습니다. 메시야에 관한 예언은 이사야서에 가장 잘 나타납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점진적으로 발전해 나가다가 여호와의 종이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고난 받으시는 곳에 이르러 절정에 달합니다. 이곳이 바로 구속(救贖)의 장인 이사야 53장입니다.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 지셨도다.”(He took up our infirmities and carried our diseases.)라는 말씀은 이사야 53:4절에 있는 말씀으로써 메시야가 인간의 고통과 불행의 근본 원인을 없이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담당하셨다는 것은 가져갔다, 치웠다는 뜻으로 근본적으로 없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우리 인간들을 괴롭히는 모든 고통과 불행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치유하시는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연약함 때문에 발생합니다. 순결한 인생을 살기를 원하지만 연약하기 때문에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짓고 추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또 승리의 인생을 살기를 원하지만 연약하기 때문에 패배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젊기 때문에 연약함을 인정하기 싫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근본적으로 연약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인간의 본질을 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 나아가 우리의 병든 내면을 치료 받을 수 있고 또 죄로 병든 연약한 양들을 이해하고 돌봐 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은 죄에서부터 왔습니다. 본래 인간은 범죄하기 전에는 연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후 인간은 연약해졌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없고 선을 행할 힘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사도바울은 한 법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선을 행하고자 하는 선의지는 있지만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그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탄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사 우리 연약함을 담당해 주셨습니다. 세상에서는 연약한 자는 정죄하고 무시하고 짓밟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연약함을 정죄치 않으시고 이해하고 섬겨 주셨습니다. 마침내는 십자가에서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근본적으로 없이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병든 우리의 내면을 근본적으로 치료하사 건강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행복은 건강한 삶에서 나옵니다. 건강한 몸, 건강한 마음, 건강한 사고를 가져야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해 주심으로 건강한 삶을 살게 하시는 예수님을 찬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