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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8:18-34(권세자 예수님)

by Mark Yang   08/16/2019   Matthew

Message


마태복음 제 12 강

권세자 예수님

말씀: 마태복음 8:18-34
요절: 마태복음 8: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 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 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우리는 지난 강의에서 우리 연약함을 담당하신 예수님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연약함을 깊이 이해하시고 죄로 병든 내면을 근본적으로 치료해 주심으로 건강한 삶을 살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실로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권세자 예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에게 최고의 우선권을 요구하시고, 또 노도하는 광풍을 말씀 한 마디로 잠잠케 하시며, 사나운 귀신들린 자를 고쳐 주시는 절대 권세자가 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권세자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순종함으로써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18-22)

예수님께서 인생들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병든 자들을 고쳐 주시자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의 끊임없는 요구를 피하여 제자들과 조용한 시간을 갖고자 저편으로 가기를 명하셨습니다. 이때 한 서기관이 무리를 헤치고 예수님께 나아와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그가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좇고자 한 것을 보면 훌륭한 제자 지망생처럼 보입니다. 더구나 서기관으로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한 것을 보면 영적 소원이 대단한 사람 같이 보입니다. 서기관은 율법에 능통한 성경 학자를 가리킵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 이전까지는 선지자의 역할이 컸지만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에는 서기관의 역할이 컸습니다. 이스라엘이 포로 생활에서 돌아 오자 가장 시급한 문제는 오랫동안 이방 문화에 젖어 이교화 된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해 줌으로써 선민으로서의 자세를 바로 잡는 일이었습니다. 이 사명을 감당한 것이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연히 사회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가지게 되었고 랍비(선생)라 칭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공회원들 중에 서기관들이 많았습니다. 서기관이 되려면 5세 때부터 교육을 받기 시작하여 13세 때는 “배움의 아들”(bar-mitsvah)이라 불리우는 고등교육을 받고 30세 때 비로소 가르치기를 시작했습니다. 서기관이 된다는 것은 명예요 특권이요 자랑이었습니다. 그들은 초기에는 에스라와 같이 말씀에 대한 열심과 영적 소원이 대단하여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나 후에는 율법주의자들이 되어 예수님께로부터 책망을 많이 받았습니다. 예수님 당시 서기관들은 바리새인들과 함께 예수님을 대적하고 복음 역사를 방해하는 적대 세력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서기관은 달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 일어나고 있는 놀라운 역사를 인정하고,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고자 하는 열성이 있었습니다.

그가 왜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을까요? 그는 산상보훈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교수법에 매료되었는지 모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많은 병든 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 주시는 것을 보고 그 능력에 놀랐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형식적인 서기관의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공허한 마음을 채우고자 예수님을 따르고자 결심했는지 모릅니다. 어쨌든 그의 눈에 비췬 사명인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고 멋있게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무리들에 의해 둘러 싸여 있고 어디를 가시든지 존경과 사랑과 섬김을 받았습니다. 그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자연히 뭇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과 섬김을 받고, 안정된 가운데서 멋있는 목자 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겉에 나타난 영광만 보고 그 이면에 있는 고난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사명인의 삶을 이상적으로만 생각하는 이상주의자였습니다.

사회적인 높은 지위와 신분을 가진 서기관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한다니 얼마나 환영할만한 일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환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추수할 일꾼을 간절히 원하셨지만 지원한다고 다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올바른 동기를 가진 자만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문제를 꿰뚫어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예수님은 그에게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세상에서의 안정을 버리고 어떤 고난도 각오해야 함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짐승 중에서도 가장 안정되지 못한 여우에게도 쉴 수 있는 안식처가 있고 또 날아다니는 공중의 새에게도 보금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으셨습니다. 사람에게는 안식처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안식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센타도 없이 주로 산이나 들이나 바닷가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또 일정한 거처가 없어서 이집 저집 다니시고 때로는 산에서 밤새도록 기도하며 지새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삶을 사신 것입니까?

첫째로,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로서 가장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해 이땅에 가장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비천한 마굿간에 태어나시고, 가난한 목수 생활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생동안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이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바울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8:9)

둘째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키 위함이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막1:38). 예수님은 이땅에 오셔서 복음 전파의 사명에 충성하셨습니다.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쉬임없이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구속의 사명을 감당키 위해 자신의 전생애를 온통 희생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명인의 삶과 세상에서의 안정된 삶은 결코 양립할 수 없음을 배웁니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 삶이 안정되어야 사명인의 인생을 살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명보다도 삶의 안정을 구할 때 자신도 모르게 스피릿을 잃고 심령이 부패하게 됩니다. 사명인의 인생을 산다는 것은 스피릿 있는 인생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피릿입니다. 예수님은 육의 양식에 얽매여 삶의 안정을 추구하는 무리들에게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The Spirit gives life; the flesh counts for nothing)고 말씀하셨습니다(요6:63). 영(Spirit)만이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다. 스피릿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고귀한 것입니다. 스피릿을 잃게 될 때 사람은 육체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스피릿을 잃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개척하고 정복하는 사명인의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지만 흐르는 물은 언제나 신선합니다. 우리 인간은 사명의 소유자로 지음을 받았으므로 사명인의 삶을 살 때 비로소 참 만족과 보람과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사명인의 삶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희생과 아픔이 따릅니다. 희생과 아픔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 하옵소서.” 이 말은 누가복음 9:59절을 참조해 볼 때 예수님께서 “나를 좇으라”라고 부르신 초청의 말씀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경우는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데 부친의 문제가 걸렸습니다. 우리는 그의 말이 부친이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을 치루고 난 후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부친이 돌아가시거나 또는 죽음이 임박한 것이 아니라 부친을 두고 떠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담 스미스 박사가 한 아랍 청년을 안내자로 삼아 지금까지 여행자들이 자주 가 보지 못한 지방을 여행하려고 그를 설득했습니다. 그 여행은 적어도 수개월이 소요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청년은 고민하다가 각별한 예절을 갖추어 성경에 나오는 꼭 같은 말을 했습니다. “선생님, 먼저 나로 하여금 아버지를 장사하게 해 주십시오.” 그런데 그 청년 옆에는 건강하게 보이는 그의 아버지가 근엄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의 말은 부친이 돌아가시기 전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말은 인간의 행동 규범으로 볼 때 효자로서 아름답고 칭찬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왕되신 예수님에게는 합당치 않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부친을 섬기는 일보다 예수님께 최고의 우선권을 두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0:37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의 생명의 구주가 되시고 온 세상을 그 뜻대로 주관하시는 만왕의 왕이 되십니다. 왕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최고의 우선권을 요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사명인의 인생을 살고자 할 때 아버지보다도 어머니 문제로 갈등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연민의 정 때문에 제자의 삶을 결단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어머니에 대한 연민의 정 때문에 고민하다가 돈을 벌어서 어머니께 500만원을 해 드리고 그 후에 사명인의 인생을 살겠다고 생각하고 사명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어머니도 잘 모시지 못하고 아파서 어머니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암으로 고생하다가 소천했습니다. 그는 나에게 예수님께 최고의 우선권을 두지 않고 사명을 버린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5:4-6절에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핑계 아래 부모에 대한 의무를 등한히 하는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부모를 공경하고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부모님을 섬기는 것이 예수님을 섬기는 것보다 앞설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최고의 우선권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부모님을 인간적으로 섬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부모님을 위해 기도하고 기회 있는대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모님을 복음의 동역자로 삼아서 내가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효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자들입니다. 사실 영적 생명을 살리는 일처럼 시급하고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Ⅱ. 광풍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23-27)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이 좇았습니다(23). 제자들은 오랜만에 사랑하는 예수님을 모시고 봄나들이 여행을 가게 되자 신이 났습니다. 그들은 배를 저으며 흥이 나서 산타루치아를 불렀습니다. 배는 순풍에 돛 단듯 잔잔한 갈릴리 바다를 미끄러지듯이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그들이 바다 한 가운데 왔을 때 전혀 예고도 없이 바람이 불고 파도가 높이 일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하늘이 캄캄하여지고 쉬-쉬 무서운 소리를 내며 광풍이 대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거센 파도가 사정없이 뱃전을 때렸습니다. 배는 일엽편주와 같이 되었고 배 안에는 물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실로 예기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수면이 지중해 수면보다 약 207m나 낮고 또 헬몬산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이 요단강 기슭을 통해 갈릴리 바다로 들어올 때 요단강 기슭이 굴뚝 역할을 하여 세게 불게 됩니다. 이때 찬 공기가 갈릴리 바다의 더운 공기와 부딪히게 되면 기압의 차이로 인해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일어나 무섭게 광풍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바다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가는 것을 인생 항로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평소에는 순풍에 돛을 단듯 아무 문제없이 평탄한 인생 길을 갑니다. 그러다가 전혀 예기치 않게 갑자기 광풍을 만납니다. 암과 같은 질병의 광풍을 만나기도 하고, 교통사고와 같은 불의의 사고의 광풍을 만나기도 합니다. 또 유혹의 광풍을 만나 인생을 표류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인생 항로에는 예기치 않은 광풍이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광풍이 대작할 때 제자들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들이 수십 년 동안 익혀 온 노련한 기술도, 바다에 대한 지식도, 그들의 힘과 지혜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절망 가운데 빠졌습니다. 광풍이 대작할 때 그들의 마음 가운데도 광풍이 일어났습니다. 두려움의 광풍, 의심의 광풍이 대작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예수님은 편안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루종일 말씀을 가르치시고 양무리들의 연약함을 감당하시느라 얼마나 피곤하셨는지 배를 타시자마자 깊은 잠에 빠지셨습니다. 예수님은 광풍이 대작하여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는데도 평안히 깊은 잠을 주무셨습니다. 광풍이 평안히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울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광풍 소리는 자장가 소리에 불과했습니다. 이처럼 단잠은 사명인의 삶을 사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현대인들 가운데는 불면증에 시달리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밤을 잊은 그대에게” 라디오 프로그램이 인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명인은 단잠을 잡니다. 너무 잠을 잘 자서 문제입니다.

제자들은 위기 가운데서 최선을 다하다가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그들은 우리가 죽게 된 상황에 빠졌는데도 어찌하여 잠만 주무시는가 예수님을 원망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왜 우리의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시는가 사랑을 의심했습니다. 우리도 평소에는 믿음이 좋은 것 같이 큰 소리치지만 광풍을 만나면 금방 죽을 것처럼 요동하며 두려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도와 주지 않는다고 주님을 원망하고 목자를 원망하며 사랑을 의심합니다. 이는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광풍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요한 웨슬레의 회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가 미국에서 선교 활동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오는 중 풍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심한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안절부절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꼭 같은 상황인데도 배 안에 타고 있던 모라비안 교인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찬송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여기서 자신이 거듭나지 못한 사실을 깨닫고 회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외적인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을 때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 부딪히더라도 두려워하거나 원망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기도하고 찬송할 수 있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잠에서 깨신 후 제자들을 위로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너무 곤하여 정신없이 잠만 잤구나. 정말 미안하다.” 예수님은 이렇게 위로하기는 커녕 오히려 제자들을 사정없이 꾸짖으셨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 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짖으심으로 그들 마음에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사실 외적인 광풍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일어나는 내적인 광풍이 더 문제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두려움의 광풍이 일어날 때 마음이 오그라들어서 사명인의 인생을 사는 것이 부담스럽게 여겨지게 됩니다. 또 의심의 광풍이 일어날 때 원망과 불평이 생기고 마음이 딱딱해지게 됩니다. 이런 광풍들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사단이 우리 마음에 심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런 내적 광풍과 싸워야 됩니다. 내적 광풍이 일어날 때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대개 광풍이 일어나면 말씀을 놓아 버립니다. 우리가 광풍 중에 주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 때 말씀이 내 마음 속에 일어나는 광풍을 잠잠케 해 주십니다.

제자들은 전능하신 예수님께서 배에 함께 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신뢰하고 예수님을 의지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의지하고 신뢰할 때 어떤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마음의 평안을 잃지 않고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세상 끝날까지 나의 인생 항로에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와 항상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까지 가장 안전한 운행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을 때 광풍이 일어나면 오히려 윈드서핑(wind surfing)을 즐기면서 멋있게 인생항로를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짖으신 후 곧 일어나사 이제는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러자 노도하던 광풍이 순식간에 아주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미쳐 날뛰던 광풍은 순식간에 잠잠케 되고 갈릴리 바다에는 깊은 정적이 찾아왔습니다. 제자들은 너무 놀라 감히 숨도 크게 쉴 수 없었습니다. 아니 그들은 놀랐다기 보다는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기이히 여겨 서로 말했습니다.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이 사건을 통해 그들은 예수님께 대한 깊은 경외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풍을 꾸짖으실 때 사실은 그 배후에 역사하는 사단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사단은 예수님이 잠드신 중에 광풍을 이용하여 예수님과 제자들을 바다에 수장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인류구속역사는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사단이 결코 인류구속역사를 방해할 수 없습니다. 광풍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이십니다. 그가 태초에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자 30여 만 가지나 되는 찬란한 빛이 생겨났습니다.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지으신 모든 만물을 지배하시는 권세자가 되십니다. 이 예수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Ⅲ.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신 예수님(28-34)

예수님이 타신 배는 마침내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도착했습니다. 이 곳은 이방인들이 사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배에서 내리자마자 무덤에서 총알같이 튀어나와 반발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귀신들린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보자 두려워 떨며 소리 질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믿은데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나 귀신은 즉각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귀신은 예수님께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믿고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이지만, 사단의 속성은 불순종하고 반발하고 대적하는 것입니다. 귀신은 자기들이 때가 되면 멸망할 것을 알면서도(계20:10)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반발하고 대적합니다.

또 귀신들린 자의 특징은 관계성을 맺기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돕다보면 “제발 나를 괴롭게 하지 말고 상관하지 말아 달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것은 그 속에 귀신이 역사하여 예수님과 관계성을 맺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그 사람의 말을 듣고 관계성을 끊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귀신들린 자들의 반발에 개의치 않으시고 상관하셨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을 쫓아낼 것을 알고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허락하셨습니다. 돼지들은 귀신들려 춤을 추기 시작하더니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로 다이빙을 하여 익사했습니다. 돼지는 물질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물질을 희생하심으로 생명을 귀신의 세력에서 구출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영계를 지배하는 권세자가 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그 동네 사람들은 물질에 대한 손해의식 때문에 영적인 눈이 꽉 막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 지방에서 나가 주기를 간구했습니다.

광풍을 우리 인간의 힘으로 물리칠 수 없는 것과 같이 귀신의 세력도 우리의 힘으로 물리칠 수 없습니다. 귀신의 세력을 물리치려면 그보다 더 강한 세력이 필요합니다. 귀신보다 더 강한 세력을 가지신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에게 최고의 우선권을 요구하실 수 있고, 자연계도 지배하시고, 영계도 다스리시는 절대 권세자가 되십니다. 세상 권세는 부분적이고 영원하지 못합니다. 한때 권력의 황태자라 불리웠던 박철언 씨는 구속되기 전에 “세상 권세는 강한 것 같지만 약하고, 긴 것 같지만 짧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세상 권세는 한계적이고 영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세는 영원하고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참된 권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 되십니다(마28:18). 이 권세자 되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순종할 때 인생항로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한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권세자 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