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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9:1-17(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by Mark Yang   08/16/2019   Matthew

Message


마태복음 제 13 강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말씀: 마태복음 9:1-17
요절: 마태복음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 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8장에서 예수님께서 문둥병자, 중풍병자 등 각종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광풍을 잠잠케 하시고 사나운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 주심으로 메시야의 권능을 나타내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모든 것의 원인이 되는 내면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심으로 사죄의 권세자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역사였습니다. 세상에는 육신은 멀쩡하지만 죄로 인해 병들어 고통하는 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병든 자들을 치료해 주시는 영적 의사가 되십니다. 이시간 영적 의사이신 예수님께 나아가 죄로 병든 내면을 치료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사죄의 권세자 예수님(1-8)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 건너편 가다라 지방으로 가셨다가 다시 가버나움으로 오셨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이르시자마자 용신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막2:1,2). 이때 어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침상에 누인 채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그들은 무리를 인하여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갈 수 없게 되자 남의 지붕을 뚫어 공수낙하를 했습니다(막2:4). 그러나 저자 마태는 이 모든 것을 생략했습니다. 대신에 저자는 헬라어 원문에 보면 2절에 ‘보라!’(?δο !)라는 감탄사를 넣었습니다. 이는 중풍병자를 침상채 데리고 예수님께 왔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하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오려면 영적 소원을 심어야 하고 들것에 실어서 데려 와야 하기 때문에 많은 노력과 정성이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포기치 않는 목자의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신 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유대 사회는 율법 사회로서 폐쇄적이고 경직된 사회였습니다. 율법 사회는 동기보다 결과를 중시하고 내면적인 것보다 외적인 것을 중시합니다. 이런 사회에서 그들의 행동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은 책망을 받고 정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신 관점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적인 눈이나 도덕적인 눈으로 보시지 않고 놀랍게도 그들 내면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람의 외모나 외적인 행동을 보시는 분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심을 말해 줍니다. ‘저희의 믿음’은 중풍병자의 친구들의 믿음 뿐만 아니라 들것에 실려서라도 예수님께 나온 중풍병자의 믿음도 포함됩니다. 친구들에게는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오는 믿음이 있었고 중풍병자에게는 끌려나온 믿음이 있었습니다. 어쨌든 그들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용납해 주시고 고쳐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죽은 믿음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행동하는 살아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2b).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소자야”(son)라고 부르셨습니다. 침상에 누워있는 중풍병자는 침을 질질 흘리고 팔다리를 부들부들 떨고 있어서 보기에 참으로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믿음으로 나아왔을 때 예수님은 그를 사랑스런 아들로 영접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안심하라” 하심으로 용기를 북돋아 주셨습니다. “안심하라”는 말씀은 “용기를 내라. 힘을 내라”(Be of good courage)는 뜻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나아왔지만 ‘예수님께서 자기와 같은 몹쓸 자를 받아 주실까’하는 불안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 당시 불치의 병은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내면은 늘 죄의식으로 인해 불안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마음의 불안을 보셨습니다. 그가 육신의 고통보다도 죄 문제로 인해 영혼이 더 고통하고 있음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소자야, 안심하라” 하심으로 그의 내면의 불안을 없이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몹쓸 죄인이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나아갈 때 사랑스런 자녀로 영접해 주시고 마음의 고통을 제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놀라운 선포를 하셨습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말씀에서 볼 때 중풍병자는 죄사함을 받아야 할 죄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어떤 점에서 죄인입니까? 중풍병은 여러가지 원인으로 뇌혈관이 막히거나 터져서 팔다리 등 신체의 일부가 마비되는 병입니다. 중풍병자는 정신은 멀쩡하여 조깅도 하고 싶고 탁구도 치고 싶지만 손발이 말을 듣지 않아 할 수 없습니다. 그는 박력있는 인생을 살고 싶지만 무기력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손발을 놀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위해 열심히 감당할 때 비로소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는 존재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인간 본연의 사명을 상실하고 무기력하게 누워 지낼 때 가장 비참합니다.

중풍병자의 문제는 겉으로 볼 때 중풍병이 근본 문제인 것처럼 보입니다. 중풍병만 낫게 되면 모든 인생 문제가 해결되고 행복한 인생을 살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내면의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중풍병이 낫더라도 그는 여전히 중풍병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인간은 자립적이고 개척적이고 생명력이 넘치는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의 뇌는 40개국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말할 수 있는 거의 무한대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범죄함으로 죄 때문에 무능해지고 무기력해졌습니다. 사람들이 환경과 시대를 탓하며 슬픈 생각, 운명적인 생각, 패배적인 생각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이유는 내면의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면의 죄 문제가 해결되면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감사하게 되고 자립적이고 생명력이 넘치는 능력있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송명희 시인은 나면서부터 뇌성마비로 팔다리를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남의 도움이 없이는 화장실도 갈 수 없었습니다. 글도 제대로 쓸 수 없어 기묘한 자세로 한 자 한 자 쓸 때마다 큰 고통을 느껴야 했습니다. 그녀는 이로 인해 인생을 저주하고 자기를 낳아 준 어머니를 원망하며 저주스러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예수님을 만나 죄사함을 받았을 때 그녀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녀는 육신의 고통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배우고 감사와 찬송과 감격이 넘치는 시를 지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를 못쓰게 만드는 것은 환경이나 인간 조건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 역사하는 죄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죄 문제만 해결되면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능력있는 인생을 살 수 있고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중풍병자는 무거운 죄 문제를 안고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선포입니다. 사람들은 죄는 즐길 만한 것이며 또 쉽게 다룰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럼없이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범하는 순간 죄의 덫에 걸려서 죄의 노예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사람이 죄를 범할 때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죄를 범합니다. 그러나 죄를 범한 후에는 죄가 그 사람을 붙잡고 마음대로 조종하기 때문에 모든 자유를 박탈당하게 됩니다. 사람이 죄를 범하면 그 죄는 무거운 짐이 되어 그 영혼을 짓누르고 마음의 행복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죄는 인간의 모든 고통과 고난의 원인이 됩니다. 죄는 인간의 모든 무기력과 무능력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능력있는 인생, 행복한 인생을 살려면 반드시 죄 문제를 해결함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죄 문제를 해결함 받을 수 있습니까? 죄 문제는 율법을 지키거나 선행이나 고행을 하는 등 인간의 힘과 의지와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죄 문제는 일방적으로 용서함 받을 때만이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빚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탕감을 받을 때만이 빚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일만 달란트는 약 3조원에 해당되는 돈으로서 노동자가 매일 하루도 쉬지않고 164,383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입니다. 이는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액수입니다. 인간은 이 빚에 짓눌리고 얽매이게 되고 이 빚 때문에 모든 행복을 상실하게 됩니다. 마침내는 이 빚으로 인해 파멸하게 됩니다. 파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빚을 탕감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를 괴롭히고 있는 모든 죄를 일방적으로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는 현재형으로써 현재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중풍병자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었지만 다만 믿음으로 나아갔을 때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이는 어떤 사람도 할 수 없는 새로운 역사였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사죄의 권세자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얽어매고 있는 죄의 사슬을 끊으시고, 그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죄의 짐을 일시에 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로부터 해방을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실로 위대한 해방선언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중풍병자와 같이 죄로 인해 무기력하고 무능력하게 되어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만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면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녀로 영접해 주시고 우리의 모든 죄의 기록들을 도말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십자가에서 보배 피를 흘려 주셨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어떤 서기관들이 이 말씀을 듣고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그들은 예수님이 엄청난 신성 모독죄를 범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도전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4-6a).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죄사함의 역사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그러자 그가 일어나 침상을 들고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당당히 집으로 돌아 갔습니다. 무리들은 이를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사함을 받는 역사는 결코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임을 보게 됩니다. 사죄의 역사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무기력하던 자를 박력있고 생명력이 넘치는 자로 변화시키고, 남을 의존하던 자를 자립적인 자로 변화시킵니다. 또한 원망과 불평을 일삼던 자를 범사에 감사하는 자로 변화시키고, 어둡고 운명적인 자를 밝고 긍정적인 자로 변화시킵니다. 이번 세계선교 보고대회에 모스크바에서 온 Alla 자매님은 죄로 인해 낮 12시까지 잠을 자던 무기력한 삶을 살던 자였습니다. 이로 인해 전과목 F를 맞아 퇴학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내면의 죄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불가능에 도전하여 재시, 삼시, 사시, 오시까지 시험을 보며 끈질기게 도전함으로 교수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진학하는, 모스크바 대학 사상 유례가 없는 역사를 창조했습니다. 죄사함을 받을 때 모든 연약함을 극복하고 능력있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죄사함을 받을 때 인생관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지고 인생목적이 달라지고 소망이 달라집니다.

Ⅱ.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9-13)

본문에는 중풍병자와 정반대인 세리 마태가 나옵니다. 당시 세리는 공인된 죄인이었습니다. 세리는 원수 나라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고통하는 백성들을 착취했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미움과 멸시를 받았습니다. 세리의 특징은 이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해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민족도 팔고 동족도 팔고 양심도 팔고 명예심도 팔고 인간의 고귀함도 팔았습니다. 먹고 살기 힘든 개인주의적인 사회에서는 이기적이 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던 간에 이기적으로 사는 것은 죄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또 이웃을 위해서 살도록 지음받았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또 이웃을 위해서 살 때 보람이 있고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이기적인 삶은 본래 인생 목적에서 빗나간 삶입니다.

마태는 이기적인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능력은 많지만 그 능력을 자신만을 위해 썼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과 재능을 이용해서 남을 속이고 해치고 괴롭혔습니다. 그가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이기적인 삶을 살았을 때 행복해야 했지만 오히려 정반대로 불행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고독했습니다. 그에게는 마음을 터 놓고 대화할 한 사람의 친구도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삶의 목적과 방향과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는 자아를 상실하고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마치 캄캄한 밤에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배와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세관을 지나가시다가 마태가 세관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볼 때 죽일 놈이라고 정죄했지만 예수님은 그를 긍휼과 자비의 눈으로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했지만 예수님은 그의 내면을 보시고 이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내면의 고통을 보셨습니다. 그가 고독과 죄의식으로 울부짖고 있음을 보셨습니다. 그가 절망 가운데서 빛을 찾고 있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긍휼과 자비의 눈으로 보실 뿐만 아니라 소망의 눈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변화되기만 하면 누구보다도 희생적이고 사랑이 풍성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가능성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문제가 방향문제인 것을 아시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좇으라” 이 말씀은 자기를 중심한 이기적인 삶을 청산하고 예수님께 목적과 소망을 두고 예수님을 중심한 제자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세리 마태에게 임한 은총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초청의 음성을 들은 마태는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는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세상에 대한 모든 미련도 버렸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용기였습니다. 이 믿음의 결단은 마치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결단과 같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불의한 생각 때문에 응답하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만 예수님만 바라보고 믿음으로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좇았을 때 그의 심령에는 천국 빛이 밝게 비취었고 생명과 평화가 차고 넘쳤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과 생명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잃었던 생명을 되찾은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이제 그에게 있어서 예수님보다 더 소중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마태는 지독한 구두쇠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자 아까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여 거액의 돈을 투자하여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는 같은 세리들을 초청했습니다. 마태의 집에서 아름다운 천국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세리들과 함께 어울려 맛있게 음식을 드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심으로 그들 내면의 모든 아픔과 상처를 위로하시고 싸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신 것은 새 역사였습니다.

천국잔치가 한창 무르익어 갈 때 냄새를 맡고 찾아온 종교 경찰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세리와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비난했습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그들은 율법주의자들로서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리들은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짤라 버렸습니다. 그들에게는 죄인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자신이 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가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바리새인들은 검사의 눈으로 죄인들을 보았지만 예수님은 의사의 눈으로 보셨습니다. 의사는 사람이 병들었다고 해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의사는 사람들 볼 때 병들어 쓸모 없게 되었다고 소망을 끊지 않습니다. 의사는 병만 치료해 주면 건강하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습니다. 의사의 사명은 병을 치료해 줌으로써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적 의사로서 죄인을 치료해 주심으로 살리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병든 자로 보셨습니다.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 죄인에게 구주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든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구주로 오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도 열심히 지키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도 하는 등 열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그들에게는 자기 의가 많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긍휼과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호세아 6:6절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배우도록 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13a). 우리도 긍휼을 원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할 때 자신도 모르게 바리새인이 되어 버립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13b).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사 치료하시고 귀히 쓰십니다. 예수님은 병들어 쓸모없게 된 세리 마태를 부르시고 제자 삼으사 3년 동안 그와 동고동락하시며 병든 그의 내면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사랑의 수고로 말미암아 세리 마태는 살아나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었습니다.

Ⅲ.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14-17)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옛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중풍병자가 죄사함을 받고 일어나 걷게 되고, 병든 세리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새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옛 것을 고수하고 새 역사를 인정치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도 옛 것에 얽매여 하나님의 새 역사를 보지 못하고 예수님의 사람들의 새로운 삶의 스타일을 의심하는 눈초리로 바라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규례를 따라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지 않고 매일 먹고 마신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신앙생활은 근엄하고 엄숙해야 되는데 제자들은 경건치 못하게 항상 히죽히죽 웃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 슬퍼할 필요가 없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신랑이요 그를 따르는 자들은 신부로 비유합니다(고후11:2). 신앙생활은 형식과 규례에 얽매인 심각하고 근엄하고 구태의연한 생활이 아닙니다. 금욕적인 생활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기쁨과 감사와 소망이 넘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옛 것과 새 것이 합할 수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고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자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둘다 못쓰게 되어 버립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될 수 있습니다(16,17). 여기서 새 포도주에서 ‘새’는 헬라어로 ‘네오스’(νεο )로서 원칙적으로 시간이 가도 변치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 부대에서 ‘새’는 ‘카이노스’(καιν )로서 시간을 따라 낡아지고 부패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새 포도주와 같이 힘이 있고 생명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죄를 사해주고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낡은 전통과 가치관을 파괴하고 새 역사를 창조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 복음은 아무리 시대가 변화되더라도 결코 변치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가 되십니다. 우리가 새 포도주되신 예수님을 영접하려면 새 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부대는 시간이 감에 따라 낡아지고 부패하듯이 우리 인간은 부패해지는 속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새 부대가 되기 위해서는 늘 회개하고 끊임없이 자기 개혁을 해야 합니다. 또한 현실에 안주하기보다 개척하고 정복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것은 낡은 가죽부대와 같이 굳어버리는 것입니다. 그 때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쓸모없게 되어 버립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날마다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믿음을 주셔서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사람으로 날로 변화되고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