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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9:18-38(믿음을 축복하신 예수님)

by Mark Yang   08/16/2019   Matthew

Message


마태복음 제 14 강

믿음을 축복하신 예수님

말씀: 마태복음 9:18-34
요절: 마태복음 9:29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시름시름 죽어가고 있는 혈루증 앓는 여자를 고치시고, 흑암 상태에 있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귀신의 세력에 사로잡혀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시는 놀라운 사건들이 나옵니다. 이는 왕되신 예수님께서 행하신 권능의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이 권능의 역사는 모두 믿음을 기초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은 모두 절망적인 상황에서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왔으며,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를 기뻐하시고 축복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시간 주님께서 우리를 깊은 믿음의 세계로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8-26)

1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낡은 전통과 관습에 얽매여 있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새 역사가 도래했음을 상기시키시고 새 포도주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려면 새 부대가 되어야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직원이 와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간청했습니다. “내 딸이 방장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마가복음에서는 딸이 죽게 되었다가 오는 도중에 죽었다고 하였으나 마태복음에서는 딸이 방금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같은 사건이라 할지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견해가 다르듯이 이 사건에 대한 저자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야이로에게 부활의 믿음을 심는 것을 강조하고 있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야이로의 믿음을 축복하사 죽은 아이를 살리시는 메시야의 권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한 직원은 마가복음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를 가리킵니다. 일반적으로 유대 회당장은 율법적이고 자존심이 강하여 예수님을 잘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야이로에게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외동딸을 잃은 슬픔과 절망과 비통 가운데서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와 절을 하며 죽은 딸을 살려 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 그는 딸이 방금 죽었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기만 하면 살아날 것을 믿었습니다. 그에게는 부활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의 간구를 열납하시고 일어나 함께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 도중 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은 여자가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진 것입니다. 혈루증은 일종의 부인병으로서 원인을 알 수 없는 고질병입니다. 열 두 해 동안 병을 앓았으니 그 모습이 어떠했겠습니까? 마가복음 5:26절에서는 그 상태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여인은 병을 고치기 위해 용하다고 하는 의사는 다 찾아 다니고 몸에 좋다는 약은 다 먹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의사가 용하면 얼마나 용하겠습니까? 여인은 돌팔이 의사들로부터 많은 괴로움만 받고, 있던 재산만 다 허비하고 병은 점점 더 중하여 갔습니다. 1,2년도 아니고 12년 동안 병을 앓은 여인의 모습이 어떠했을까요? 여인들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아름다워지기 위해 열심히 화장도 하고 머리도 꾸미고 귀걸이 목걸이 등 장신구도 달고 옷을 입는데 많은 신경을 씁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여인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상실하고 얼굴은 창백하고 피골이 상접하여 마치 해골과 같았을 것입니다. 또한 늘 피를 흘렸기 때문에 심하게 냄새가 났을 것입니다. 그 보다도 내면의 모습이 더욱 황폐했을 것입니다. 여인은 의사에 대한 깊은 불신 때문에 모든 사람에 대해 불신하고 적대감을 가졌을 것입니다. 또한 생에 대한 깊은 좌절과 절망으로 인해 운명의 노예가 되어 자학했을 것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유출병은 부정한 병으로서 그가 앉았던 자리나 누운 상이나 몸에 닿는 것은 다 부정하였습니다(레15장). 여인은 복의 근원이 아니라 부정의 근원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여인은 자의식과 수치심과 죄의식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인을 멀리하고 여인도 사람들을 멀리했습니다. 질병은 여인에게서 아름다움과 꿈과 희망과 행복을 앗아갔습니다. 여인은 사회적 신분과 재산과 건강을 다 상실하고 시름시름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기쁜 소식이 임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이 문둥병자도 깨끗케 해 주시고 중풍병자도 일어나 걷게 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여인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을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여인은 인간 의술에 절망하고 사람에게 절망하고 자기 자신에게 절망했습니다. 사람에 대한 절망이 컸던 만큼 예수님께 대한 희망도 컸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여인이 마음 속에서 말한 것은 미완료 과거형으로서( ?λεγεν) 반복해서 다짐한 것을 말합니다. 이는 영적 투쟁을 통해서 흔들릴 수 없는 믿음의 확신을 갖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여인도 처음에는 예수님께 나아가면 아무도 고칠 수 없었던 고질병을 과연 나음 받을 수 있을까 하는 불신과 회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이 심어주는 불신과 부정적인 생각과 필사적으로 싸움으로 마음 속 깊은 곳에 흔들릴 수 없는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여인은 행동하기 전에 먼저 마음에서 믿음의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와 그 겉옷을 만지는데는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늘 무리들에 의해 둘려 싸여 있기 때문에 무리들을 뚫고 예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혹시 무리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또한 여인은 만지는 것마다 부정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면 예수님을 부정케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죄의식과 자의식도 극복해야 했습니다. 여인은 다만 믿음으로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예수님께 나아와 겉옷에 살짝 손을 대었습니다. 이는 믿음의 터치였습니다. 저자는 이 믿음의 터치가 놀라와 ‘보라!’(?δο )는 감탄사를 넣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여인이 믿음으로 예수님께 손을 대었을 때 놀라운 능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무리들 가운데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자가 많았습니다. 손을 대는 정도가 아니라 몸을 비벼대는 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주목하지 않으셨고 또 이들에게는 아무런 능력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손을 댄 여인에게만 주목하셨고 능력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딸아 안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율법을 어기고 부정한 손으로 몰래 손을 대었다고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사랑스러운 딸로 영접해 주셨습니다. 여인의 겉모습은 결코 사랑스럽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인이 믿음으로 나아왔을 때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딸의 신분으로 영접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불안과 두려움과 자의식과 죄의식과 수치심으로 가득한 그 마음에 참 평강을 주시고 힘과 용기를 북돋아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축복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은 여인을 육신의 질병에서 고쳐주실 뿐만 아니라 정신적 영적 질병으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는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구원이 아니라 완전한 구원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고질병이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 손을 대기만 하면 나음 받을 수 있음을 배우게 됩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고질병이 있습니다. 육신의 고질병도 있고 정신적인 고질병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자의식으로 인해 사람들 앞에 나가면 손발이 떨리고 말문이 막혀 버립니다. 또 어떤 분은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정욕의 고질병이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조금만 힘든 일이 있어도 무조건 드러눕고 보는 중풍병의 고질병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고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남몰래 신경정신과에 가기도 하고 자의식을 고침 받기 위해 “배짱으로 삽시다”라는 책을 읽기도 합니다. 그러나 얼마 동안 되는 듯 하다가 다시 용수철과 같이 옛날로 되돌아가 버립니다. 이러한 고질병은 인간의 힘으로 고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고질병은 죄로 인한 증상들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예수님만이 어떤 고질병도 고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문제를 들고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갈 때 주님께서 그 크신 권능으로 치료해 주십니다. 우리 가운데는 이런 고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분들이 많습니다. 김용혁 목자님은 과거 소심하고 연약하여 조금 힘들면 드러누워 원망하고 자학을 잘하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갔을 때 고침을 받고 이제는 누구보다도 능력 있고 책임성 있고 충성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박사과정의 무거운 공부를 하면서도 서초 양무리들을 품고 기도하는 믿음의 거목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고질병이 있으면 자포자기해 버리고 마음이 완악해져서 예수님께 나아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고질병이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나음을 받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가시자 집에는 피리 부는 자들과 훤화하는 자들이 슬픔을 조장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의 권세에 굴복당하여 슬피 우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보시고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 되신 예수님께는 죽음이 없습니다. 이때까지 야이로의 집은 죽음으로 인해 슬픔과 절망과 허무 등 죽음의 권세가 지배하였습니다. 아무도 그 분위기를 바꿀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희망과 생명의 분위기로 바뀌어졌습니다.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이 얼마나 희망찬 말씀입니까? 그리스도가 없는 자는 살았으나 죽은 자이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영생을 맛보며 살아갑니다. 죽는 것은 이 땅에서 수고를 그치고 평안히 쉬는 것입니다. 계14:13절은 말합니다.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잠은 피곤을 풀어주고 에너지를 저축해 주고 안식을 줍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잠을 사모합니다. 자는 것은 깨어날 소망이 있지만 죽는 것은 깨어날 소망이 없습니다. 깨어날 수 있다는 것과 깨어날 수 없다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사람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음 앞에 절망하고 슬피 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것은 잠자는 것으로써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새 삶을 위한 시작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게 되면 항상 잠이 부족함을 느끼고 마음껏 잠을 자 보았으면 소원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날에는 실컷 잠자다가 깨어 나면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에 있게 됩니다. 우리에게 이런 비밀스러운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죽음 앞에서도 슬퍼하지 않고 기쁨으로 주의 일에 힘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시자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내보내심으로 영적 환경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그러자 죽은 아이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아이를 살리신 것은 어머니가 늦잠 자는 아이를 깨우는 것보다 더 쉬웠습니다. 메시야의 능력의 손이 닿자마자 죽은 소녀가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관하시는 생명의 주인이 되십니다. 사람은 본래 흙으로 지음 받아 육체 덩어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생명을 부여받아 살아 있는 생령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죽음이란 영이 육체를 떠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로서 육체에 영을 불어넣어 주시는 생명의 수여자가 되십니다. 누구든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과 접촉되고 그 음성을 듣게 되면 죽은 생명이 살아나게 됩니다. 요한복음 5:24,25절은 말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Ⅱ. 너희 믿음대로 되라(27-34)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가실 때 두 소경이 따라오며 이중창을 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들은 소경으로서 어두움의 세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불쌍한 사람도 많이 있지만 소경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자연의 4계절의 변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감을 줍니다. 봄이 오면 죽은 듯한 가지에서 파릇파릇 싹이 나고, 여름이 되면 꽃이 만발하고 신록이 우거지며, 가을이 되면 한 잎 두 잎 낙엽이 지고, 겨울에는 소복소복 눈이 내림으로 온 세상은 온통 하얗게 뒤덮이게 됩니다. 소경은 이러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또한 사랑하는 부모님의 얼굴, 애인의 얼굴도 볼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흑암입니다. 육신의 소경이 불쌍하듯이 영적 소경도 불쌍합니다. 영적 소경은 영적 세계를 보지 못합니다. 생명의 세계, 은혜의 세계, 믿음의 세계, 부활의 세계를 보지 못합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세계를 보지 못합니다. 영적 소경은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인 줄 생각하고 영적 무지와 흑암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이런 자는 육적 소경보다 더 불쌍합니다.

소경들은 흑암의 세계에서 빛을 보고자 열망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눈을 뜨고자 하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소원이 있어야 모든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야로서 자기들의 눈을 뜨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긍휼을 구하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는 이들에게서 주님께 어떤 자세로 나가야 하는가를 배웁니다. 우리는 영적 눈을 뜨고자 하는 영적 소원을 가지고 주님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긍휼을 구하였으나 예수님은 못들은 척 하시고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소경은 보지 못하기 때문에 오해를 잘하고 편견이 많습니다. 또한 감정이 예민하여 쉽게 상처를 받고 자기 연민에 빠져 슬퍼합니다. 소경들은 필사적으로 간구했으나 아무 응답이 없었을 때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무시한다고 생각하고 슬픈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소경들은 절망하지 않고 집에까지 따라왔습니다. 그들에게는 포기치 않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내가 능히 이 일할 줄을 믿느냐?” 질문하심으로 그들의 믿음을 테스트하셨습니다. 이에 소경들은 확신있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그러하오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29). 그러자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들은 밝고 환한 세계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의 눈도 밝아지고 영적인 눈도 밝아졌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믿음대로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배우게 됩니다. 보통 사람들은 믿음도 좋지만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으려면 인간적인 능력과 타이틀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믿음을 배우기보다 인간 조건 개선에 힘을 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인간 조건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귀히 쓰신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은 보잘 것 없는 시골 할아버지에 불과했지만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인류가 흠모하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도 보잘 것 없는 갈릴리 어부들에 불과했지만 믿음이 있었을 때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역사 창조의 일꾼들이 되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자기 부정과 하나님은 능히 하실 수 있다는 하나님께 대한 긍정이 포함됩니다. 능력이 많고 재능이 많아서 자기 힘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나, 사회적인 지위와 권세와 부가 있어서 무엇인가 믿는 것이 있는 자들은 자기 부정을 하기 힘들기 때문에 믿음을 갖기 힘듭니다. 우리가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자기 부정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생명은 꽃병의 꽃과 같고 나의 능력과 지혜와 나의 모든 것이 제한되어 있다는 자기 부정이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의 자원은 제한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자원은 무한하다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긍정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을 공급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통로를 통해서 그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믿음의 통로의 크기에 따라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능력도 달라집니다. 우리는 이를 저수지와 이에 연결된 파이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마치 태평양 바다와 같은 큰 저수지와 같습니다. 우리는 이 저수지에서 얼마든지 무한정 물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수지에 연결된 파이프의 크기에 따라서 공급받을 수 있는 양이 달라지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믿음의 크기에 따라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는 분량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시 81:10절에는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입을 벌리는 정도에 따라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능력도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체험하고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기를 원한다면 믿음의 분량을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보시고 믿음의 통로를 통해서 역사하시는데 만일 믿음의 통로가 막히거나 끊기면 아무런 역사를 하실 수 없게 됩니다. 믿음의 통로를 막는 것은 의심과 불신과 두려움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 보면 더러운 귀신들린 아이를 가진 아버지가 예수님께 나왔으나 마침 예수님이 안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하였으나 능히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아이의 아버지의 마음에 의심이 생겼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께 간구할 때도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불쌍히 여기사 도와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반신반의하는 믿음을 책망하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소경을 고치신 후 메시야의 사역이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엄히 경계하사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조금만 일을 해도 떠 벌리기를 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들레지도 아니하시고 조용히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들은 너무 기뻐서 나가서 예수님의 소문을 온 에 전파했습니다. 그들이 자기 나름대로 순종했을 때 복음 역사를 방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32,33절에는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벙어리된 자를 고쳐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나아올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이끌려 나아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예수님은 그를 귀신의 세력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이때 무리들은 “이스라엘 가운데 이런 일을 본 때가 없다”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분명한 증거를 보고도 악의에 찬 비평을 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삐딱하게 보았습니다. 그들은 눈도 삐뚤어지고 마음도 삐뚤어지고 생각도 삐뚤어지고 가치관도 삐뚤어졌습니다.

Ⅲ.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35-38)

35-38절은 이때까지의 역사를 요약하고 앞으로의 새 역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35절은 예수님께서 복음역사를 섬기신 방법과 내용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어디를 가시든지 항상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그 가르침의 내용은 천국복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심어주셨습니다. 또한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심으로 메시야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36절에는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신 동기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민망히 여기셨다는 것은 무리들이 처해 있는 슬픔과 고통과 고뇌를 함께 느끼고 동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여기시고, 그들의 고뇌와 고통을 자신의 고뇌와 고통으로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민망히 여기신 것은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들이 아무 목적이나 방향이 없이 오랫동안 방황하다가 기진맥진한 상태가 된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대학생들이 불쌍한 것은 그들에게 먹을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때를 따라 생명의 꼴을 먹여 주고 나아가야 할 분명한 인생방향과 목적을 가르쳐 줄 참된 목자가 없기 때문에 불쌍합니다. 우리는 이들의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 부탁을 하셨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37,38). 예수님의 눈으로 볼 때 세상은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과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를 가나 추수할 일꾼들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추수할 일꾼만 있으면 얼마든지 추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기도를 부탁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두신 예수님의 소원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리고 부족하지만 그들을 추수할 일꾼으로 키우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키우사 그들을 통해 온 세상을 먹이기를 원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 나아 온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궁핍에 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상한 자들이요, 살 소망이 없는 자들이요, 낙심하고 소외당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에 대해 절망하고 세상에 대해 절망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필요도 다양하고 예수님께 나아온 방법도 다양했습니다. 야이로는 딸의 문제로 공개적으로 나아왔고, 여인은 자신의 병이 너무 수치스러워 비밀히 나아왔습니다. 소경은 눈을 뜨고자 하는 소원으로 시끄럽게 나아왔고, 벙어리 귀신들린 자는 스스로 나아올 수 없어 사람들에게 이끌려 나아왔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공통점은 그들은 하나 같이 믿음으로 나아왔으며 또한 힘을 다해 나아왔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믿음으로 나아왔을 때 그들의 필요는 조금도 지체치 않고 즉각 충족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망권세를 파하심으로 새 생명을 주시고, 고질병을 치료해 주심으로 건강한 삶을 살게 하시고, 흑암의 상태에서 빛을 주시고, 귀신의 세력에서 자유함을 주셨습니다. 이로써 재창조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날에는 겉은 멀쩡하지만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많습니다. 또한 심한 고질병을 앓고 시름시름 죽어가고 있는 자들이 많습니다. 영적으로 눈먼 소경이 많고 귀신들려 신음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고침을 받을 수 있습니까? 이는 자신의 영적 상황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는 기뻐하시고 그 믿음을 축복하시고 재창조의 역사를 이루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