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제 15 강
열 두 제자를 내어 보내신 예수님
말씀: 마태복음 10:1-42
요절: 마태복음 10:1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 내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 는 권능을 주시니라.”
예수님께서 복음역사를 감당하실 때 세상은 어둡고 절망적이었습니다. 백성들은 각종 질병과 귀신에 들려 신음하였으며 무엇보다 죄로 인해 고통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목말라 하였고 하나님의 사랑에 갈급하였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방황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절망적인 시대에 무엇을 하셨습니까? 본문에서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을 세상에 내어 보내어 전도 훈련을 시키십니다.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두신 크신 뜻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나에게 두신 크신 뜻을 발견하고 어두운 이 시대를 섬기는 영적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제자의 사명(1-15)
첫째, 부르심(1-4). 9:37,38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시대는 추수할 일꾼들이 많이 필요했으므로 예수님은 당연히 많은 일군들을 키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은 소수의 택하신 열 두 제자들을 불러 훈련하기 시작하셨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예수님은 많은 숫자보다 소수의 정예부대를 양성하고자 방향 잡으셨습니다. 열 두 제자들은 장차 그 시대를 감당할 영적 지도자요,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이어 받을 계승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부르신 후 먼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웅변술이나 사람을 다룰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사단과의 영적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영적 무기를 주시고, 양들의 실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하셨습니다. 이런 권능은 자기 광을 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고통하는 양들을 잘 돌보라고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람을 부르시고 사명을 주실 때 동시에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권능을 주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실 때도 사명을 주시고 동시에 능력의 지팡이를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복음 역사를 능력 있게 감당하려면 인간적인 능력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능력과 지혜로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혈과 육에 속한 싸움이 아니라, 죄와 사단과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단과 싸우려면 위로부터 영적 권세를 덧입어야 합니다.
2-4절에는 열 두 제자의 이름이 나옵니다. 저자는 이들을 ‘사도’라 불렀습니다. ‘사도’란 문자 그대로는 ‘보내심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사도란 예수님의 전권대사라는 뜻입니다. 이는 세상에 보냄을 받은 그들의 위치를 말해 줍니다. 제자들을 살펴 보면 인간적으로는 별 볼 일 없는 보통 사람들에 불과했습니다. 큰소리 잘 치는 베드로, 멍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점수를 잘 따는 안드레, 야심이 많은 야고보, 사랑을 받는 데는 천재적이고 사색적인 요한, 머리에 계산기가 있는 빌립, 순진무구한 바돌로매(나다나엘), 의심의 대가 도마, 이기적인 세리 마태, 운동권 출신 시몬, 있으나마나 한 다대오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응큼한 가룟 유다, 이들은 모두 인간적으로 보잘 것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도로 세우심을 받았을 때 그들은 시대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위대한 영적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열 둘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가리키며 더 나아가 세계 만민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12제자를 부르신 데에는 그들을 이방의 빛으로 삼아 세계 만방에 보내어 온 세상을 구원코자 하시는 원대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이는 28:19절에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 가운데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보잘 것 없는 우리를 부르사 제자 삼으시고 소원을 두고 키우시는 것은 장차 이방의 빛으로 삼으사 만민 구원 역사에 귀히 쓰시고자 하심입니다.
둘째, 잃어버린 양(5,6). 5,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들을 보내시면서 이방의 길이나 사마리아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이는 먼저 택한 백성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방법 때문이요 또한 어린 제자들이 문화권이 다른 이방에 가서 사명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사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고 그들을 통해 온 세상 만민을 구원코자 하셨습니다(출19:6).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원대한 뜻을 저버리고 현실 문제로 마음이 좁아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하나님을 떠나 잃어버린 양과 같이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코자 하셨습니다. 여기에 택한 백성들에 대한 우리 주님의 크신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인간은 다 잃어 버린 자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5장에서 인간을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 잃어버린 아들에 비유하셨습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고귀한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 잃어버린 자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품에 돌아가 하나님 안에서 자기를 찾은 바 될 때 비로소 안정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찾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의 할 일도 하나님의 품을 떠난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셋째, 천국이 가까왔다(7). 7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가면서 전파해야 할 메시지는 “천국이 가까왔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백성들에게 천국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자들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천국을 찾습니다. 인간의 모든 투쟁은 한마디로 천국을 소유하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사람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나 열심히 돈을 버는 것이나 명예와 권세를 얻고자 애쓰는 것도 천국을 소유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피나는 노력을 하여서 세상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얻었다 할지라도 마음에 천국이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고 죄와 사단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단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은 아무리 몸부림치는 투쟁을 해도 천국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마음에 천국을 소유하려면 죄 문제를 해결함 받고 하나님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사단의 세력을 멸하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하여 천국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천국이 가까왔다.” 이는 죄와 사단의 권세로 신음하는 인간들에게 임한 가장 기쁘고 희망찬 메시지입니다.
넷째, 병든 자를 고치며(8). 8절을 보십시오. “병든 자를 고치시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케 하며 귀신을 쫓아 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 말씀은 잃어버린 양들이 세상에서 당하고 있는 고통이 어떠한가를 잘 말해 줍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면 자유롭고 행복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죄로 인해 내면이 병들고, 사망권세에 시달리며, 내면은 문둥이와 같이 추하고 더러워지고, 귀신들려 자아를 상실하고 울부짖게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살았으나 죽은 자와 방불한 자들이 많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거룩한 진리의 말씀과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병든 내면을 싸매어 주고 사람을 살리는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귀한 일입니다. 또한 영혼에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주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선한 일을 할 때 보상을 바라기 쉽습니다. 보상을 받지 못하면 손해의식에 시달리다가 실족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비참한 상태에 있을 때에 아무 값없이 다만 은혜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사랑을 받고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양들에게 아무 값없이 은혜로 거저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수하게 사명을 감당할 때 심령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있고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대가를 바라거나 이기적인 마음으로 할 때 심령이 부패하게 되고 기쁨을 잃게 됩니다.
다섯째, 하나님만 의지할 것(9-15). 여행을 위해서는 물질과 의복과 신발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행에 필요한 기본 필수품도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들이 물질을 의지하지 않고 매사에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추상적이고 막연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입니다. 먹는 것, 입는 것, 공부하는 것, 취직하는 것, 결혼하는 것 등 매사에 모든 것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어느 정도 물질이 있어야 되지 않는가 생각하기 쉽습니다. 양들을 잘 섬기려면 1:1을 할 때 최소한도 양들 먹을 것을 사 줄 돈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돈이 없으면 스피릿을 잃고 1:1도 잘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믿음의 동역자가 없으면 복음역사를 감당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물질을 의지하고 또 사람을 의지하는 마음이 있을 때 스피릿을 잃고 무기력하게 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능력 있게 복음역사를 감당할려면 전능하신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힘써 복음역사를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그들이 대접을 받을 때 조금도 자의식이나 미안한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느 곳에 가든지 그 중에 믿음이 있는 합당한 자를 찾아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러야 합니다. 잠자리가 불편하고 반찬이 별로 좋지 않다고 해서 이집 저집 옮겨서는 안됩니다.
그들이 집에 들어갈 때는 평안을 빌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들이 화평의 복음을 전하는 평화의 사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구에게든지 평안을 비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이는 결코 손해보는 일이 아닙니다. 평안을 빌었을 때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그 평안이 거기 임하게 되고,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됩니다. 또 사람들이 우리를 영접지 않고 말도 듣지 않을 때 마음에 상처를 받고 낙심하기 쉽습니다. 내가 잘못해서 그런가 생각하고 불의에 빠져 자학하거나 또 복음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회의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는 불의에 빠져 자학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임할 심판의 표시로 발의 먼지를 털어버려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전권대사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서 털지 말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털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영접지 않는 자는 소돔 고모라가 받은 심판보다 더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됩니다(15).
Ⅱ. 제자의 자세(16-42)
본문은 앞으로 일어날 박해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제자의 양면성(16-23). 16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이 말씀은 제자들이 대적이 심한 세상에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어린 제자들을 세상에 내 보내시는 예수님의 심정은 마치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리와 같습니다. 이리는 간사하여 잘 속이고 해칩니다. 세상은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합니다. 강자는 약자를 짓밟고 해칩니다. 사람들은 힘든 세상에 살면서 살아남기 위해 악해지고 이리와 같이 됩니다. 사람들은 서로 속고 속이고 이용해 먹고 이용당합니다. 반면 제자들은 양과 같이 순진하고 진실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자들을 밥으로 생각하고 이용해 먹고 핍박하고 괴롭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런 험한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마음의 상처를 받고 힘들어지지 않을까 염려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들을 품에 품고만 있지 않고 세상에 내 보내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이리와 싸우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담대한 복음의 투사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양 같은 제자들로 하여금 이리와 같은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시는 우리 주님의 믿음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뱀의 지혜와 비둘기의 순결을 가질 수 있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뱀은 지혜롭지만 간사합니다. 반면 비둘기는 순결하지만 어리석습니다. 뱀은 어떤 점에서 지혜롭습니까? 뱀은 상황분석이 정확하고 순발력이 뛰어납니다. 먹이를 발견했을 때는 소리 없이 접근하였다가 상대방의 약점을 파악하여 기회가 포착되면 순식간에 공격하여 쓰러뜨립니다. 이러한 뱀의 지혜는 창세기 3장에서 여자를 유혹하는데서 잘 나타났습니다. 뱀은 여자가 홀로 달을 보고 고독에 잠겨 있을 때 친구처럼 접근하여 부드럽게 속삭였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렇게 의심의 씨를 심어 놓은 다음에 여자의 약점을 간파하여 순식간에 넘어뜨렸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뱀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신자라고 해서 순진하게 이용만 당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뱀의 지혜를 배우다 보면 세상과 타협하여 진실함과 순결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하셨습니다. 비둘기는 알을 낳아도 두 개 밖에 낳지 않고, 또 결혼해서 하나가 죽으면 일생동안 재혼하지 않고 슬피 울며 순결을 지킨다고 합니다. 순결은 신자의 생명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핍박이 있고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순수 복음신앙을 저버리고 타협해 버린다면 맛 잃은 소금과 같이 쓸모없게 되어버립니다. 신자의 영향력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는데 있습니다. 뱀의 지혜와 비둘기의 순결을 가질 때 우리는 이리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능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그 좋은 예입니다. 다니엘은 소년 시절에 바벨론 포로로 잡혀왔습니다. 이방 문화 속에 살면서 믿음의 순결을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처음부터 믿음의 순결을 지키고자 결심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심으로 이방 땅에서 불신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치는 믿음의 거목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이 받게 될 종교적인 핍박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공회에 넘겨 주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게 됩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사도행전에서 이런 핍박을 받았습니다. 또 그들은 총독과 임금과 같은 세상 권세자 앞에 서게 됩니다. 이는 그들에게 복음이 증거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핍박은 우리를 깨어있게 하고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들이 이런 핍박을 받을 때 무엇을 어떻게 말할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할 말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21절에서 예수님은 가정 핍박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가정의 핍박은 우리가 사랑하는 부모와 형제로부터 핍박을 받기 때문에 견디기 힘듭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게 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미워하는 것은 실상은 하나님을 미워하고 예수님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빛을 미워하기 때문에 빛된 생활을 하는 제자들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회적인 핍박과 가정의 핍박,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때 현실과 타협하고 중도에서 신앙생활을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포기해 버린다면 구원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구원은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고귀한 것입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그 영혼이 구원 받지 못한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 모든 것을 다 잃는다 할지라도 영혼이 구원 받게 되면 모든 것을 다 얻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23절은 핍박을 받을 때 무조건 당하지만 말고 때로는 도망도 가야 함을 말해 줍니다.
둘째, 두려워하지 말라(24-33). 예수님께서도 핍박을 받으셨는데 그의 제자된 우리가 핍박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집 주인을 마귀의 왕이라고 비난하였는데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핍박 받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로써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때 주님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핍박으로 인해 흩어진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2,13)
핍박을 받을 때 제자들은 핍박자를 두려워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저희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26,28,31절에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 세 번 반복되어 나옵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세 가지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진리가 결국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26절은 진리는 진리대로 드러나고, 불의는 불의대로 드러남으로써 결국 진리가 승리함을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님께로부터 사적으로 받은 말씀을 두려움 없이 공적으로 선포해야 합니다(27).
둘째는, 핍박자들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28). 핍박자들은 우리를 영원히 파멸시킬 것처럼 위협하지만 실상 그들은 죽으면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던져 멸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 할 때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의 주관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참새와 같은 하찮은 생명도 하나님이 허락지 아니하시면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참새보다 얼마나 더 귀합니까? 제자들은 그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될 만큼 하나님께서 섬세히 보호하고 아끼십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리빙스톤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까지는 절대 죽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핍박하는 자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이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움츠러들고 소극적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현실과 타협하게 됩니다. 결국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32,33).” 예수님께서 마지막 심판의 날에 나를 부인하면 끝장입니다. 우리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승리의 면류관을 씌워 주실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환난과 핍박 중에서도 믿음의 중심을 잃지 않고 예수님을 시인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도 요한의 수제자 폴리캅은 86세 때 화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사형 집행관은 그의 인격에 감화를 받아 예수님을 부인하겠다고 한 마디만 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습니다. 이때 폴리캅은 “86년 동안 내가 주님을 섬겼지만 내 평생 주님께서 한번도 나를 부인하신 적이 없는데 어떻게 내가 주님을 부인하겠는가”하며 기쁨으로 화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할 때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셋째, 예수님께 합당한 자(34-42). 성경은 역설적인 진리를 이야기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는 “내가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자식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와 시어미가 불화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네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가정에 화목이 다 깨지고 불화가 생겼다는 비난의 소리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이는 이때까지의 거짓 평화를 깨고 예수님을 중심한 참된 평화를 형성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는 참된 평화를 위한 분쟁입니다. 우리는 외부의 원수와는 잘 싸울 수 있지만 내부의 원수와는 싸우기 힘듭니다. 가족은 혈연의 정으로 깊이 맺어져 있기 때문에 이를 끊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입니다(36). 37,38절을 보십시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이 말씀에서 핵심 단어는 ‘나’ 곧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을 사랑하고 자식들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이들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보다 부모님을 더 사랑하거나 자식을 더 사랑할 때 영적 질서가 깨어져서 행복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모님이나 자식보다 예수님을 조금 더 사랑할 때 영적 질서가 생겨 마음에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고 가정에 참된 평화와 행복이 깃들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중심한 분명한 가치관을 확립해야 합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님을 위해서 자기 목숨도 내어놓을 만큼 절대적인 자세를 요구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고귀한 목숨을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할 때 결국 모든 것을 얻게 되고 영생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에서 핍박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을 귀히 여기고 존경하고 영접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제자들을 영접하는 자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고,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게 됩니다. 이와 같이 제자의 이름으로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합니다.
이상을 살펴볼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얼마나 큰 소원을 두고 계신가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키우시되 연약하게 키우시지 않으시고 대적이 심한 세상에서도 복음역사를 능히 섬길 수 있는 복음의 투사로 양성하셨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큰 소원을 두시고 우리를 연단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온실의 나무가 되기를 원치 않으시고 거친 비바람을 맞으면서 이 시대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거목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리들이 득실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믿음의 순결을 지닌 영적 지도자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이 시대의 영적 지도자로 뜻 두시고 키우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