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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1-30(내게로 와서 쉬어라)

by Mark Yang   08/16/2019   Matthew

Message


마태복음 제 16 강

내게로 와서 쉬어라

말씀: 마태복음 11:1-30
요절: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 리라.”

본문에는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와(1-19),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인생들에 대한 예수님의 초청이 나옵니다(20-30). 현대인들은 쉼이 없는 방랑자와 같이 피곤하고 지친 인생을 살아갑니다. 우리에게는 참 쉼이 필요합니다. 이 시간 예수님의 초청의 음성을 듣고 참 쉼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예수님과 세례요한(1-19)

10장에서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선교 현장에 내 보내어 추수할 일군으로 훈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하실 뿐만 아니라 친히 여러 동네로 돌아 다니시며 말씀을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1). 제자 훈련과 말씀을 가르치시는 것을 통해 복음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났습니다. 세례 요한은 옥에서 예수님을 통해 왕성하게 일어나고 있는 복음역사를 들었습니다. 이때 그는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물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백전노장 세례 요한답지 않게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요한은 비록 하나님의 역사에서 특이한 인물이었으나 초 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요한은 어두운 감옥에 갇혀서 세상과 차단 당하고 간간이 들려오는 단편적인 정보들을 통해서 바깥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그는 예수님께서 메시야라면 헤롯과 같은 악한 자들을 멸하시고 자기를 헤롯의 손에서 구원하여 주실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헤롯은 여전히 불의를 행하고 시대는 부정부패가 성행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기를 구원해 주기는 커녕 심방도 한번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메시야가 악을 극복하고 죄를 심판함으로 의로운 메시야 왕국을 건설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의 메시야관은 종말론적인 메시야관이었습니다. 요한은 마음의 의심을 해결하기 위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문제가 믿을만한 증거의 부족에 있음을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 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예수님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놀라운 역사를 듣고 본대로 요한에게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으로 메시야의 신임장이었습니다(사35:5,6, 사61:1). 이를 통해 예수님은 요한에게 자신이 바로 구약에서 예언한 약속된 메시야임을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종말론적인 메시야관을 바로 잡아 주시고 성경적인 메시야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메시야 사역의 특징은 정치적이거나 사회 개혁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입니다. 또한 죄를 심판하는 것보다 죄를 용서함으로써 구원을 베푸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는 생명을 살리는 재 창조의 역사라는 것을 배웁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사회가 개혁되고 민주주의가 건설되는 등 정치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죄로 인해 병든 영혼이 치유함을 받고 죽은 영혼이 살아나는 생명을 살리는 재 창조의 역사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위로의 말씀과 동시에 경계의 말씀도 주셨습니다. ‘누구든지’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누구든지 실족할 가능성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요한과 같이 주님을 위해서 죽도록 충성했는데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고 결과가 좋지 않을 때 회의를 품고 실족하기 쉽습니다. 특히 예수님을 믿으면 병도 낫고 성적도 좋고 사업도 잘 되고 만사 형통하게 된다는 구복적인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을 때, 기대에 어긋나면 회의를 품고 실족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내가 원하는 메시야관 보다도 성경이 말하는 메시야관을 가져야 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후 예수님은 무리들이 요한에 대해 잘못 평가하기 쉬운 것을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 7-9절에는 세 종류의 인간상이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사람입니다. 갈대는 뿌리가 깊지 못하고 연약합니다. 그래서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요란하게 소리를 내며 흔들립니다. 이와 같이 갈대와 같은 사람은 분명한 인생관이나 가치관이 없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쉽게 요동합니다.

둘째는, 부드러운 옷입은 자입니다. 옛날에는 부드러운 옷이 부와 권세의 상징이었습니다.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세상의 부와 권세와 명예를 좇아 사는 세속적인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인생 문제나 시대 문제에 관심이 없고 자신의 출세와 행복에만 관심이 있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텅 비어 있고 악취를 풍깁니다. 요한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자도 아니요 또한 부드러운 옷입은 자도 아니였습니다.

셋째로,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이들은 시대와 구별된 생활을 하고 진리를 좇아 사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시대의 죄악과 싸우며 그 시대의 영향을 받기보다 영향을 끼치고 그 시대를 이끌어 나가는 시대의 파숫군들이요, 시대의 등불입니다. 이런 자는 세상에서 인기가 없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 위대한 자입니다.
요한은 바로 선지자였습니다. 아니 그는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였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기록된바 보라, 내가 네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구약의 선지자들은 멀리서 그리스도를 예언했으나 요한은 가까이서 그를 친히 보고 그의 길을 예비했습니다. 그의 위대성은 그가 맡은 역사적 사명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자라고 칭찬하셨습니다(11).

11b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이 말씀은 복음을 영접하고 주와 복음을 위해서 사는 신약시대의 사람이 구약시대의 사람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은 오실 메시야를 멀리서 바라보며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요한은 구약과 신약의 분기점에서 메시야의 길을 예비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구약에 속한 자로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죄사함과 부활의 영광,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의 사람들은 극히 작은 자라도 이 모든 것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에 저보다 위대한 것입니다. 이는 순전히 예수님 때문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과거 천국은 불가침의 영역이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까다로운 율법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천국을 가로막는 죄와 사단의 세력을 멸하시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영생의 길을 활짝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로써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부터 천국은 침노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세리와 창기와 같은 죄인들도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게 되고, 무시받던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침노하는 것은 힘센 자가 강력한 힘으로 습격하여 물건을 탈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불타는 영적 소원을 가지고 열심히 찾는 자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영적 소원도 없고 소극적인 자들의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열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찾는 자들의 것입니다. 천국은 포기할 줄 모르고 끈질기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의 것입니다. 한마디로 천국은 극성스러운 자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세대가 어린아이와 같이 얼마나 유치하고 자기 중심적이고 감정적인가를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세대는 마치 어린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노는 것과 같았습니다. 장터에서 이이들이 혼인예식을 훙내내어 한편에서 피리로 결혼 행진곡을 불면 나머지는 그 가락에 맞추어 흥겹게 춤을 추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피리를 부는데도 춤을 추지 않았습니다. 장례식 놀이는 한편에서 “아이고 아이고” 하며 애곡을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가슴을 치며 슬퍼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슴을 치기는 커녕 청승맞게 울지 말라고 비난을 했습니다. 아이들은 자기중심적이어서 역정을 부리고 토라지기를 잘합니다. 그 세대 사람들은 이런 어린 아이들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늘 비판적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와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면 가슴을 치며 회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경건한 생활을 하며 절제 생활을 하자 그들은 요한이 귀신들렸다고 비난했습니다(18). 또 예수님께서 영적 의사로서 죄인들의 병든 내면을 치료하시기 위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자 이제는 먹기를 탐하는 자요, 포도주를 즐기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사람들에 의해 판단받지 아니합니다. “지혜는 그 행한 일 자체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느니라”(19b). 지혜는 하나님의 진리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행한 일 자체로 인하여 옳음이 증명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된 자들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진리임을 증명한다는 것입니다.

Ⅱ. 예수님의 초청(20-30)

20-24절은 회개치 않는 고을들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입니다. 고라신과 벳세다와 가버나움은 예수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곳입니다. 그들은 이를 통해 회개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은혜만 즐기고 회개치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보고도 왜 회개치 않았을까요? 이는 회개하면 안일하고 죄악된 삶의 스타일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들이 회개치 않는 근본 원인은 교만입니다. 그들이 회개치 않을 때 소돔 땅이 그들보다 더 견디기 쉬울 만큼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지 않는 영적인 죄가 도덕적인 죄보다 훨씬 더 크고 무겁고 심각합니다.

예수님은 교만하고 마음이 완악한 자들로 인하여 마음이 몹시 상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바라보고 큰 힘과 위로를 얻으시고 감사기도를 하셨습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다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반면 ‘어린 아이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어찌하든지 배우고자 하는 겸손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눈을 밝히사 영적 세계를 알게 하십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특권이요 축복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교제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 자체가 바로 영생입니다(요17:3). 하나님을 알 때 우리는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고 참 쉼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적 무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아무리 풍요한 물질문명을 누리며 산다 할찌라도 참 행복이 없고 영혼의 참 쉼을 누릴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영혼의 참 안식을 누리려면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해 주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간의 지식과 지혜로는 알 수 없습니다. 이는 오직 위로부터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해야 알 수 있습니다(엡1:18). 지혜와 계시의 영은 예수님께서 겸손한 자에게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제 피곤하고 지친 인생들을 초청하십니다. 28-30절을 보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짐은 가벼움이라.” 이 말씀에는 참된 쉼을 얻을 수 있는 세가지 조건이 나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수고를 많이 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인간은 범죄함으로 얼굴에 땀을 흘리며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겨우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루 밥 세끼 먹고 살기 위해 일생동안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합니까? 저주받은 세상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자체가 큰 수고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사할 때도 “수고하십시요” 라고 합니다. 경상도에서는 “욕보이소” 라고 인사합니다. 사람들은 짜여진 제도 속에서 생존경쟁을 하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늘 피곤하고 지친 인생을 살아갑니다. 수고 하더라도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을 하면 덜 피곤할 텐데 무가치하고 헛된 일을 위해 수고해야 되기 때문에 더 피곤합니다. 다람쥐 채바퀴 돌리듯이 매일 무의미한 일을 반복하는 데서 오는 권태는 정말 견디기 힘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누구나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자고 뛰노는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들을 보면 아무 짐도 지지 않고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어린 아이는 어린 아이대로 고민이 있고 짐이 있습니다. 학생들에게는 공부가 참으로 무거운 짐입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살아갑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좋은 직장에 취직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늘 짓누릅니다. 거기에다 부모님들의 기대와 소망이 더욱 나의 어깨를 짓누릅니다. 취직을 하고 나면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근무해야 하는 직장 일이 무거운 짐입니다. 결혼을 하면 좋을 것 같지만 실상은 본격적으로 무거운 짐을 지게 됩니다. 인간의 삶은 실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쉼이 없는 방황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짐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짐은 죄짐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마음의 평안을 상실하고, 죄의식이 무겁게 짓누르게 됩니다. 죄가 주는 고통과 갈등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죄에는 반드시 벌이 따릅니다. 이는 양심의 고발로 인한 고통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죄를 지으면 누가 쫒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마음이 불안하고 두려움에 시달리게 됩니다. 잠도 편히 자지 못하고 악몽을 꾸게 됩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에 대한 시기심을 다스리지 못해 그를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는 보기 싫은 아벨을 죽이면 모든 것이 끝나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벌을 내리셨고 그는 쉼이 없는 방랑자(a restless wanderer)가 되었습니다. 가인은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가인의 고백은 바로 현대인들의 고백입니다.

사람들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사람들은 피곤하고 스트레스가 쌓이면 잠을 많이 잡니다. 또 전자 오락을 하기도 하고 고스톱을 칩니다. 좀 고상한 사람은 등산을 하거나 음악 감상을 하거나 운동을 합니다. 또 일에 미친듯이 몰두하기도 합니다. 요사히는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심으로 마음의 고통을 잊고자 합니다. 더 나아가 괴로운 현실 세계를 도피하기 위해 마약을 피웁니다.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몰래 음란 비디오를 보다가 정욕의 노예가 되어 방황하게 됩니다. 음란 비디오는 정신 세계를 황폐하게 만들어 사람을 못쓰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쉼을 얻고자 하는 과정에서 죄를 짓고, 죄짐으로 인해 피곤한 인생을 살아 갑니다. 인생들에게는 참된 쉼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생들을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은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이는 참으로 은혜스러운 초청입니다. 세상에는 참 쉼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참 쉼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중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품에 안길 때 비로소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수많은 방황 끝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참된 평안을 얻을 수 없다.” 우리가 참 쉼을 얻으려면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갈 때 죄사함의 은혜를 베푸사 무거운 죄짐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영혼의 참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멍에를 메어야 합니다. 멍에란 달구지나 쟁기를 끌 때에 소나 말의 목에 가로 얹는 구부러진 막대를 말합니다. 이것은 소나 말이 제멋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순종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또 소가 쟁기나 달구지를 끌 수 있도록 힘을 받쳐주는 역할을 합니다. 멍에가 좋으면 소가 힘을 잘 쓰고 편안히 밭을 갈 수 있고, 명에가 좋지 않으면 불편하고 고생을 많이 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어떤 멍에를 메는가에 따라 힘을 얻을 수도 있고 고생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 멍에를 메면 그 멍에는 우리에게 큰 고통을 주고 무겁게 짓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멍에는 가볍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목수로서 가벼운 멍에를 잘 만들기로 유명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사명의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사명의 십자가는 안일하고 죄를 사모하는 우리의 본성을 제어시켜 주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합니다. 사명의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정렬을 쏟아서 의미있는 일에 힘을 쓸 수 있게 합니다. 만일 사명의 십자가가 없다면 우리는 그 많은 정렬을 헛된 일이나 죄 짓는 일에 다 쏟아부어 낭비할 것입니다. 또한 사명의 십자가는 실제 생활에서 하나님을 기뻐시게 하는 의의 열매,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우리는 때로 사명의 십자가를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사명의 십자가 없이 신앙생활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명의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단지 먹고 살기 위한 삶의 십자가를 지게 됩니다. 삶의 십자가는 무의미하기 때문에 우리를 비참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사명의 십자가는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니라 가장 가벼운 것입니다.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을 때 심령에 기쁨이 있고 생명력이 넘치게 됩니다. 저에게는 말씀파는 것과 제자양성하는 것과 세계선교의 사명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것은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이 사명의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생명력이 있고 심령에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본성대로 사는 것이 자유롭고 편안하지만 실제로는 우리를 더 얽어맵니다. 성경은 본성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여야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롬8:13).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육신을 쳐 복종시키고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때 영혼에 참 쉼을 얻게 됩니다.

셋째로,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들이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서도 참 쉼을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사명의 십자가를 무거운 짐으로 느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그토록 많은 일을 하고도 조금도 피곤해 하지 않고 오히려 감옥에서도 기쁨이 충만할 수 있었던 비결은 어떤 형편 가운데서든지 예수님을 배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빌3:10,11).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배워 나갈 때 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임하게 되고 참 영혼의 쉼을 얻게 됩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마음의 쉼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의 쉼은 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습니다. 이는 오직 예수님께 나아가서 주님이 주시는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배울 때만이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참 쉼을 주시는 예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