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제 19 강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말씀: 마태복음 13:1-23
요절: 마태복음 13: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13장에는 여덟 가지의 천국 비유가 나옵니다. 천국은 너무나 신비스러운 것이어서 비유가 아니면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천국 비유는 그 간결성과 단순성과 사실성과 심오함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비유는 문자적으로 ‘비교’를 나타내는 것으로 “사물을 나란히 배치한다”는 뜻입니다. 비유는 세상의 어떤 친밀한 현상을 천국의 어떤 신비한 현상과 나란히 놓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의 우리의 이해 방법을 사용하여 천국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비유는 천국의 의미를 담은 지상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천국 비유들은 현실 세계에 이루어지는 천국의 모습들을 여러 가지로 말해 줍니다. 오늘 본문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사람이 어떻게 하면 많은 열매를 맺어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Ⅰ. 씨 뿌리는 자의 비유 (1-9)
1, 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집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다가 너무 더워서 시원한 바닷가로 나가셨습니다. 그러자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들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배에 올라가 앉으사 윈드서핑을 하시면서 천국 복음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른 아침, 아름답고 잔잔한 갈릴리 바다에 예수님의 낭랑한 음성이 조용히 파고를 일며 울려 퍼졌습니다. 무리들은 숨을 죽이고 말씀을 듣고 있었고, 헤엄치다가 지친 물고기들도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고자 바다 위로 얼굴을 쭈욱 내밀었습니다. 이 장면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집에서나 들에서나 바닷가에서나 그 어디에서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쉬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인생들에게 생명을 주며 모든 인생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저희에게 여러 가지를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천국 비유 중 가장 기본이 되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쌔(3b, 4a)” 이는 천국은 말씀의 씨를 뿌리는 것에서 시작됨을 말해 줍니다. 말씀의 씨를 뿌리지 않으면 천국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렸는데 각각 네 종류의 밭에 떨어졌습니다. 더러는 길가에 떨어졌습니다. 여기서 길가는 밭과 밭 사이의 작은 길을 말합니다. 이 씨는 딱딱한 땅을 뚫고 들어갈 수 없어 굴러다니다가 배고픈 참새에게 먹혀 버렸습니다. 더러는 흙이 있는 얇은 돌밭에 떨어졌습니다. 이 씨는 뿌리를 깊이 내려 충분한 수분과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밭은 돌밭이라 더 이상 뿌리를 내릴 수 없었습니다. 그 씨는 뿌리가 없기 때문에 태양으로부터 오는 열을 견디지 못하고 타져서 말라 죽고 말았습니다.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졌습니다. 그 씨는 싹이 나고 뿌리도 깊이 내려 수분을 빨아 올렸습니다. 그러나 가시가 함께 왕성히 자라나 그 씨의 영양분을 뺏아 버렸습니다. 이 씨는 잘 자라는 듯 하다가 가시떨기의 기운에 막혀 성장하지 못하고 비실비실 하다가 결국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 씨는 싹을 내고 뿌리를 깊이 내리고 햇빛을 받아 탄소 동화작용을 하며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때로는 비바람이 몰아쳤으나 그때마다 더 깊이 뿌리를 내리고 성장했습니다. 때가 되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풍성한 결실을 하였습니다
이 비유에서 씨가 어디에 뿌려졌는가가 중요함을 배웁니다. 열매를 맺고 못 맺는 것은 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밭에 있습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고 밭은 말씀을 듣는 자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씨는 그 자체에 생명력이 있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씨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영양분이 많은 부드러운 흙, 일정한 수분, 알맞는 온도, 햇빛 등 적절한 환경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생명력이 있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지만 말씀을 받는 우리의 마음 밭이 준비되어 있지 아니하면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영적 귀를 의미합니다. 영적 귀가 없는 자는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마음에 깨달음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시는 목적은 진리를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호기심을 자극시켜 생각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영적 귀가 없는 자는 말씀을 한 쪽 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흘려 버립니다. 인생에 대한 문제의식도 없고 말씀에 대한 영적 소원이 없기 때문에 말씀을 들을 때 꾸벅꾸벅 좁니다. 그러나 영적 귀가 있는 자들은 겸손하고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경청합니다. 영적 소원을 가지고 천국 보화를 캐내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습니다. 이로 인해 마음에 깨달음이 있고 날로 영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Ⅱ. 비유를 말씀하신 목적 ( 10-17 )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자 무리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돌아갔습니다. “오늘 이야기 참 재미있는데” “재미있기는 뭐가 재미있어. 너무 당연한 이야기잖아. 예수님의 말씀도 때로는 너무 싱겁단 말이야.” 그러나 제자들은 무리들과 달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가 하는 문제의식이 있었습니다. 문제의식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의 뜻을 알고자 하는 문제의식이 있어야 말씀 가운데 담긴 보화를 캐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예수님께 배우고자 하는 구도자의 자세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기뻐하시고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왜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다고 하셨을까요? 천국 비밀을 아는 특권이 주어지고 안 주어지는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되는 것일까요? 이는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진 자는 천국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예수님께 대해 닫친 마음을 가진 자는 말씀을 듣지만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께 대해 닫힌 마음을 가진 자들은 고의적으로 천국의 왕이신 예수님을 배척하는 교만한 자들입니다. 천국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결코 이해력의 부족이나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믿음의 부족 때문입니다. 천국은 극히 값진 진주와 같이 아주 귀하기 때문에 소중히 다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 가치를 알고 영적 소원이 있는 소수의 믿음이 있는 사람들을 통해 전수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이 말씀은 격언적 진리로서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는 더 받아 넉넉하게 되고, 깨닫지 못하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는 말씀을 통해 힘을 얻고 은혜가 충만한 생활을 합니다. 이런 자의 심정에는 늘 감사와 찬송이 차고 넘칩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자는 심정이 점점 메말라 곤고하게 됩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는 얻든지 잃든지 둘 중의 하나이지 중립은 없습니다. 영적인 세계를 알아나가는 자는 더 알게 되고 영적인 거목으로 자라나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 소원이 없는 자는 알고 있는 영적 지식마져 빼앗기고 결국에는 믿음의 세계에서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성취됩니다. 그들은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합니다. 이는 그들이 보지 않으려고 의도적으로 눈을 감았고, 듣지 않으려고 의도적으로 귀를 막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여 회개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왜 마음이 완악하여 회개치 않을까요? 이는 회개하면 자기 중심적인 죄악된 삶에서 예수님을 중심한 새 생활을 해야 되는데 자기 중심적인 죄악된 삶의 스타일을 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말씀대로 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는 목적은 단순히 성경 지식을 쌓고 고상한 인간이 되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는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하나님께로부터 고침을 받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말씀 공부를 통해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죄와 죄악된 습관을 깨닫고 이를 회개함으로써 거듭나서 새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사람에서 영적인 사람으로 변화되고, 세속적인 사람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고,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16,17절은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이 얼마나 복된 자인가를 말해 줍니다. 구약의 많은 선지자와 의인들은 그리스도를 보고 그의 음성을 듣고자 열망했지만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영적 눈을 뜨고 예수님을 가까이서 보고 그의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가장 복됩니다.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축복 중에서 가장 큰 축복입니다. 인간이 불행한 것은 그 마음에 천국이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천국의 왕이신 예수님을 영접할 때만이 소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깊고 신비로운 분이십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2:9),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골2:3). 우리가 이 예수님을 알고 그를 믿고 그의 말씀을 듣는 것은 가장 복된 것입니다.
Ⅲ. 비유에 대한 해석 (18-23)
예수님은 이제 비유에 대한 뜻을 설명해 주셨습니다(18). 여기서 네가지 종류의 밭은 네 종류의 마음 밭이 아니라 네 종류의 마음 밭을 가진 사람을 가리킵니다.
첫째, 길가. 19절을 보십시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길가와 같은 마음 밭을 가진 자는 말씀을 들으나 전혀 깨달음이 없는 자입니다. 이런 자에게는 천국의 말씀이 아무런 의미가 없이 울리는 꽹과리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자는 1:1 말씀 공부도 하고 주일 메시지도 듣지만 말씀이 그 마음에 아무런 역사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말씀이 그의 실제 생활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10년 동안 이곳에 다니며 말씀을 공부하였지만 형식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말씀이 그 마음에 전혀 역사를 하지 못하고 근본적으로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말씀을 마음에 받아들이면 옛 자아가 죽은 아픔도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자아가 태어나는 영적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길가와 같은 마음 밭을 가진 자는 전혀 이런 영적 기쁨을 맛보지 못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영접치 않을 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자, 곧 마귀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아 가 버립니다. 마귀는 우리가 말씀을 깨닫고 영접하는 것을 가장 싫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 있기 때문이 이를 깨닫고 영접하기만 하면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영원한 파멸로 치닫는 영혼이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마귀는 이를 싫어하여 사람들이 말씀을 영접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씨가 있는 곳에 새가 있듯이 말씀이 있는 곳에 마귀의 역사가 있습니다.
둘째, 돌밭. 20, 21절을 보십시오.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돌밭과 같은 마음 밭을 가진 자의 좋은 점은 말씀을 즉시 기쁨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는 말씀을 듣고 자기 혼자 은혜를 다 받은 것처럼 기뻐합니다. 이런 자들은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자처럼 보이기 때문에 목자는 오랜만에 마음 밭이 좋은 양을 만났다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이런 자들은 자세히 살펴보면 감정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쉽게 정열적이 되었다가 쉽게 얼음과 같이 차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흙이 얇은 돌밭과 같이 그 내면이 얇고 피상적입니다. 감정적인 자들은 기분이 좋은 때에는 열심히 일하지만 기분이 나쁠 때는 하던 일도 다 팽개치고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이런 자들은 말씀의 은혜도 알고 천국의 기쁨도 압니다. 말씀이 말하는 그 주장에 동의하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그 주장에 자기 자신의 인생을 걸거나 거기에 뿌리를 박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주는 은혜는 즐기지만 말씀에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투자하지는 않습니다. 천국의 말씀이 그 생에 변화를 주고자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하면 힘들어 하고 넘어져 버립니다. 이런 자는 뿌리가 없기 때문에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날 때 곧 넘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고 말씀대로 살게 되면 반드시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딤후3:12절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핍박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지만 신앙 성장에 매우 유익합니다. 6절을 보면 환난이나 핍박을 해에 비유했습니다. 해가 식물 성장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 불가결한 요소인 것과 같이, 환난과 핍박도 신앙 성장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환난이나 핍박은 영적으로 깨어 투쟁하게 하고, 또 세상의 헛된 소망을 털어 버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갖게 합니다. 환난이나 핍박은 말씀에 믿음의 뿌리를 더 깊이 내림으로 개인 신앙과 부르심을 더욱 굳게 합니다. 온실의 나무는 크게 자라날 수 없고 또 연약합니다. 그러나 비바람을 맞고 자란 나무는 거목으로 자라고 튼튼합니다. 그러므로 환난이나 핍박이 문제가 아니라 뿌리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말씀에 뿌리를 내려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5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6,7절에서 이 사상을 더 발전시켰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라.” 뿌리를 내리는 것은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과 깊은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는 개인 신앙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사명을 기초로 분명한 부르심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인 신앙이 없고 부르심이 없는 자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려움이 생기면 이를 견딜 수 있는 내적 힘이 없기 때문에 넘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깊은 인격적인 관계성을 가지고 구원의 은혜와 부르심이 분명한 자는 어디를 가더라도 열매맺는 생활을 할 수 있고 역사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뿌리를 내리는 것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소홀히 하기 쉽지만 이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말씀에 뿌리를 내릴 때만이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거목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창12:2절 말씀에 뿌리를 내림으로 온 인류가 흠모하는 믿음의 조상이요,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롬 13:12-14절 말씀에 뿌리를 내려 전무후무한 기독교 사상가가 되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롬1:17절 말씀에 뿌리를 내려 종교 개혁의 역사를 창조하고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뿌리는 내리는 데에는 마음의 돌을 깨는 영적 투쟁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숨은 죄악이나 좋지 못한 습관이나 강한 자아와 같은 숨은 돌이 있습니다. 이러한 돌들이 드러날 때 우리는 회개의 망치로 깨고 돌을 들어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셋째, 가시떨기, 22절을 보십시오.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 밭을 가진 자는 자기 안에 생명을 주는 원리를 가지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자는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써 어느 정도 뿌리도 내립니다. 그러나 심중 깊이에서 세상을 등지고자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우리가 열매 맺는 신앙생활 하고자 할 때 반드시 세상을 향하여 철저하게 등을 돌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는 속세를 떠나서 산속에 들어가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크리스챤은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요 세상에서 택함을 받아 예수님께 속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애매하게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요15:18,19).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그리스도께 속한 자이기 때문에 세상을 등지고 세상의 죄악과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 밭을 가진 자는 어느 정도 자라지만 가장 중요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씨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비극입니다. 그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가시떨기가 말씀이 주는 생명력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가시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세상 염려의 가시입니다. 세상 염려는 결핍에서 오는 것입니다. 먹고 사는 염려, 취직에 대한 염려, 건강에 대한 염려, 장래 염려, 결혼에 대한 염려, 자녀 교육에 대한 염려 막연한 염려도 있습니다. 염려의 가시에 찔리면 얼굴이 어두워지고 신앙생활의 기쁨과 생명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런 염려는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지 못하는 불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불신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우리 인생을 전폭적으로 의뢰하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세상 염려의 가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재리의 유혹의 가시입니다. 이것은 부에서 오는 시험입니다. 재리의 유혹은 재물에 대한 욕심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가난할 때는 재물만 있으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다가, 부요해지면 좀 더 부요하다면 만족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욕망의 늪은 아무리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유혹은 고생하고 싶지 않고 세상에서 편히 살고 싶은 마음에서 생깁니다. 사람이 재물에 대한 욕심을 갖게 되면 사명의 십자가가 부담스럽고 인색하게 되어 자기 것을 꾸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게 시험과 올무에 빠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부하려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했습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9, 10). 우리는 재물이 있을 때 재리의 유혹의 가시에 찔리지 않도록 주와 복음을 위하여 더욱 희생적인 생활을 해야 합니다.
넷째, 좋은 밭, 23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홀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자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입니다. 본문에는 ‘깨닫다’는 단어가 무려 5번이나 나옵니다. 이는 말씀을 깨닫는 것이 중요함을 말해 줍니다. 그러면 말씀을 깨닫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는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써 말씀을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론적으로 깨달아 알 수 없고 말씀을 순종함으로써만이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6: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은 머리로는 도저히 깨달아 알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실 생활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순종해 볼 때 체험적으로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 말씀이 내 안에서 세력을 얻어 내 안에 역사하는 모든 어두움의 세력을 물리치고 열매맺는 생활을 하게 해 줍니다. 마음 밭이 좋은 자는 말씀을 사랑하고 사모하여 말씀을 가까이 하고 주야로 말씀을 묵상함으로 말씀의 영양분을 받기에 힘씁니다. 이런 자는 말씀 앞에 겸비하여 어린 아이와 같이 말씀을 순수하게 영접하고 회개하기에 힘씁니다. 이런 자는 말씀으로 인해 인격이 변화되어 온유하고 겸손하고 진실되고 희생적인 사람이 됩니다. 무엇보다 사랑이 풍성한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내면의 열매를 맺게 되면 자연히 외적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런 자는 백배, 육십배, 삼십배의 풍성한 열매를 맺어 그 삶이 풍성하고 인생이 풍요롭게 됩니다. 결국 말씀으로 인해 그 내면에 천국을 맛보며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 인생은 열매를 맺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창1:28). 열매를 맺을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사람들에게 복의 근원이 되며 자기 자신에게는 기쁨이 됩니다. 우리의 마음 밭을 잘 가꾸어서 100배, 60배, 30배의 풍성한 열매를 맺는 복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