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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26-2:3(심히 기뻐하신 하나님)

by Mark Yang   08/14/2019   Genesis

Message


창세기 제 2 강


심히 기뻐하신 하나님


말씀: 창세기 1:26-2:3, 2:7
요절: 창세기 1;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우리는 제 1강에서 천지 만물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으며, 또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배웠습니다. 오늘 제 2강에서는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해 공부해 보고자 합니다. 인간 창조는 엿새 동안의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절정으로서 가장 오묘하고 아름답고 신비로운 역사입니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걸작품으로서 창조의 면류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인간 본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Ⅰ. 인간의 지위(1:26)

하나님은 엿새 동안 인간이 거주할 수 있도록 모든 역사 환경을 만드시고 맨 나중에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자신의 모든 신성과 능력과 예술성을 다하여 친히 빚어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는 다른 피조물과 달리 특별한 뜻을 두셨습니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1:2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여기에 나오는 ‘우리’라는 복수형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또한 형상과 모양은 같은 뜻으로서 그 뜻을 강조하기 위해 반복해서 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두신 뜻은 내적으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는 것이요, 외적으로는 만물의 영장으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여섯째 날에 동물과 함께 흙으로 지음 받았으므로 동물의 차원에 있었습니다. 인간은 힘이나 크기나 속도나 자립심을 보면 다른 동물에 비해 보잘 것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시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심으로 인간을 만물 위에 높이셨습니다(시8:4-8). 인간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 지위가 높아졌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인간-만물의 창조의 질서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위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며, 아래로는 만물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중간자적 위치에 있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란 참으로 묘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신도 아니요, 동물도 아닙니다. 진화론자들은 인간을 아메바에서 진화된 원숭이의 후예라고 주장함으로써 인간을 동물의 차원으로 끌어내렸습니다. 유물론자들은 물질을 제 1차적, 근본적인 실재로 생각하고 신의 존재를 부인함으로서 인간을 물질적 차원으로 전락시켰습니다. 또 인본주의자들은 인간이 하나님께 예속되는 것을 거부하고 인간 고유의 존엄성과 가치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는 인간의 현실은 로마서 1;21-23절에 나오는 대로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서 결국 우상 숭배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날 때 그 본래의 지위를 상실하여 만물에 예속되거나 동물의 차원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있을 때 그 앞에서 위대하고 고귀하고 가치있는 존재가 됩니다. 세익스피어는 ‘햄릿’에서 인간의 위대성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인간이란 어찌 이다지도 기막힌 걸작인가! 슬기롭고 고귀한 이성, 무한한 재능, 적절하고 훌륭한 형체와 동작, 행동은 천사와 같고 이해력은 신과 같이, 세계의 미요, 만물의 영장이니라.“ 인간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비로소 만물의 영장으로서 그 지위를 지킬 수 있습니다.

Ⅱ. 인간은 영의 소유자(2:7)

2: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이 말씀은 인간의 구조가 무엇인가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흙으로 빚어 만드셨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수소, 탄소, 산소 등 14가지의 중요한 화학적 원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흙의 요소와 동일합니다. 인간은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로서 그 본체가 흙에 속한 자입니다(고전 15:47). 흙이란 먼지(dust)입니다. 인간은 티끌과 같이 보잘 것 없는 존재입니다. 또 인간은 흙에서 취함을 입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잘 깨어지고 부스러지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깊이 인정할 때 교만해 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강철로 만들지 않으시고 흙으로 지으신 이유는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함입니다.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후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러자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 이는 살아서 움직이는 영이라는 뜻입니다. 육신을 가지고 살아서 움직이는 영은 사람 뿐입니다. 천사는 영을 가진 존재이나 육신이 없고, 동물은 육체는 가지고 있으나 영은 없습니다. 개나 돼지나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할 수 없습니다. 또 동물은 육신만 있기 때문에 육신의 본능을 좇아 행하고 그 본능이 충족 되었을 때는 만족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영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고 또 육신의 것을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영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Ⅲ.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의 소유자(1:27)

1:2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의 내면적 속성을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성적이며 도덕적이며 영적 존재로 지으셨음을 뜻합니다. 에베소서 4:24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또 골로새서 3:9,10절은 말합니다.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라”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동물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뛰어난 존재가 되었습니다.

지적으로는 인간이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추리하고 분석, 종합할 수 있으며, 지식을 축적하여 후대에 전달할 수 있습니다. 또한 문자를 가진 언어로 의사 소통을 할 수 있습니다. 동물은 수천 년이 지나도 문화를 창조하지 못하지만 인간은 창조적 지성을 발휘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냅니다. 예를 들어 여우는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굴에서 삽니다. 그러나 인간은 움막에서 시작하여 100층이 넘는 고층 빌딩과 화려한 호텔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의 집을 짓습니다.

또 동물은 도덕 관념이 없기 때문에 길거리에서 교미를 해도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을 모릅니다. 그래서 고상하고 순수하고 진실된 삶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돼지가 고상한 뜻을 품고 높은 이상을 소유하고 성스러운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도덕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죄를 지으면 수치심을 느끼고 기자들이 사진을 찍을 때 얼굴을 가립니다. 아무리 흉악한 도적이라도 그 마음에는 양심이 있기 때문에 자식만은 올바르게 진실되게 살기를 원합니다. 인간이 고상한 뜻을 품고 순수하고 진실되게 살 수 있는 것은 양심을 지닌 도덕적인 존재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 인간은 영적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우리 인간에게도 영이 있습니다. 영은 불멸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죽어서 썩어 흙으로 돌아갈지라도 영은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한1서 4:8). 이 사랑은 진리에 기초한 거룩한 사랑이요, 희생적인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우리의 내면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육신적인 사랑에 만족하지 못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분이십니다(계4:8). 그래서 우리의 내면에도 불의를 보고 분노하는 마음, 거룩함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이 고귀하고 존엄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창9:6). 우리가 사람을 죽이거나 고문을 하거나 형제를 미워하거나 저주해서는 안 될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사람을 존귀히 여기는 기준은 물질이나 권세나 타이틀입니다. 또 국적이나 피부 색깔에 따라서 사람 대우가 달라집니다. 백인들은 흑인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은 이런 것들에 의해 좌우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부자든 가난한 자든, 식자든 무식자든, 강대국 백성이든 약소국 백성이든, 백인이든 흑인이든 관계없이 인간이면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존귀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은 인간은 육체가 되어 동물과 같이 되어 버렸습니다(창6:3). 인간은 음란하고 불의하고 부패하고 강포해졌습니다. 이로 인해 도둑질, 사기, 살인, 강도, 인신매매도 서슴없이 자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원인이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인간성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사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를 속량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생활을 하게 하심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게 하셨습니다(롬8:29). 신앙생활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는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상실된 인간성이 회복되어 완전한 인간으로 세움 받게 되는 것입니다(골1:28, 엡4:13). 우리의 복음 전파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되찾는 인간성 회복운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보통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 인간성이 말살되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인간성이 회복됩니다. 어느 정도까지 회복하게 됩니까? 예수님같이 거룩하고 의롭고 진실되고 사랑이 풍성한 완전한 자로 회복됩니다. 이기적인 자가 희생적인 자로, 거짓된 자가 진실된 자로, 지저분한 자가 거룩한 자로 변화됩니다. 그때는 우리의 이름 앞에 성(Saint)자가 붙습니다. 모두가 성자, 성녀가 됩니다.

Ⅳ. 인간은 사명의 소유자(28-30)

2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르시라”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많이 낳으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많이 맺으라는 것입니다. 열매 맺는 것은 과목이나 짐승이나 인간에게 축복의 상징입니다. 귤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을 때 나무로서의 존재 가치가 없는 것과 같이, 인간이 열매를 맺지 않을 때 인간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은 복음을 전파함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 자녀를 많이 나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 자녀를 많이 낳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기쁨이 충만한 복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요15:8,11)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은 자연을 개간하고 개척하라는 뜻입니다. ‘정복한다’는 말은 원어로 ‘카바쉬( )’라고 하는데 이것은 ‘발로 밟다’, ‘주무르다’를 뜻하는 것으로 점유하거나 사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땅을 정복한다는 것은 인간의 유익을 위해 자연을 개발하여 적절히 사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자원 개발, 농경, 채광, 지리적 발견, 과학적 발명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은 자연 환경을 극복하고 과학을 발전시키는 역사를 창조하게 했습니다. 일찍이 복음이 들어간 서구에서는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고 개척하고 정복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들어가지 못한 동양에서는 자연을 숭배의 대상으로 보고 자연을 두려워하여 섬기고 자연에 정복당해 왔습니다. 산신령이나 용왕을 섬기고 고목나무 앞에서 절을 하거나 집구렁이를 보면 제물을 바쳤습니다. 이로 인해 운명의 노예가 되어 슬픈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은 인간적인 야심을 가지고 남의 땅을 침략하라는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이는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건설적인 것입니다.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이 한 개인에게나 사회, 국가에 미치는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사람이 정복 정신, 개척 정신을 가질 때 그 삶은 살아있고 생명력이 넘치게 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성장, 발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정복 정신, 개척 정신을 잃고 안주하고자 할 때 내적으로 병들게 되고 부패하게 됩니다. ‘자기를 잃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되고 소심하고 무기력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안주하게 될 때 심령이 부패하여 망하게 됩니다. 이 원리는 개인이나 모임이나 국가나 모두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가 살 길은 정복하고 개척하는 것입니다. 안주하는 것은 우리의 큰 적입니다. 안주하면 망하고 개척하면 삽니다.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씀은 세상을 창조의 섭리대로 잘 관리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욕심 때문에 자연을 파괴하는 주범이 되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이 말씀을 볼 때 축복이 바로 사명임을 보게 됩니다. 이 사명은 적극적이고 진취적이고 도전적입니다. 또 이 사명을 생각해 볼 때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사명의 소유자임을 보게 됩니다. 인간은 단지 먹고 살기 위해 사는 일차원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먹고 살기 위해 공부하고, 먹고 살기 위해 직장에 다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인생이 허무하고 비참합니까? 그러나 인간은 사명의 존재입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위대하게 하는 것은 부나 권세나 타이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입니다. 인간이 사명을 열심히 감당할 때 인생을 사는 보람을 느끼게 되고, 생명이 약동하는 힘찬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입니까? 이는 “사람을 취하는 것”입니다(눅5:10). 죄로 인해 죽어가고 있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사람을 살리는 것이요,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땅 끝까지 나아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아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행1:8, 마28:18,19). 우리가 이 사명을 좇아 살 때 가장 복되고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29, 30절은 사람이 사명을 감당할 때 먹는 문제도 친히 해결해 주심을 가르쳐 줍니다. 사람들은 흔히 먹고 살아야 사명인의 인생을 살 수 있지 않느냐고 하며 사명보다 생활을 앞세웁니다. 그러나 생활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고 사명인의 인생을 살고자 하는 자는 평생 사명인의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먼저 사명을 감당할 때 주님께서 친히 생활 문제도 해결해 주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이것은 신실하신 주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Ⅴ. 인간은 하나님의 심히 기뻐하시는 존재(31)

1:3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소감 발표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섯째 날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는 흠이 없고 아름답고 조화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창조의 걸작품인 인간이 들어갔을 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인간의 존재의미: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하셨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심히 기쁜 존재임을 말해 줍니다. 도자기 공이 온 심혈을 다해 도자기를 만들어 불후의 작품이 되었을 때 도자기 공은 그 도자기를 심히 기뻐할 것입니다. 그 때 그 도자기는 도자기 공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존재가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만드시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없어서는 안 될 고귀하고 가치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타락했을 때 독생자까지 내어 주시고 하나님 나라까지 유업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 나를 귀하게 여기고 기뻐하면 행복을 느낍니다. 나는 내 자신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데 목자님이 나를 기뻐하시고 나의 존재를 귀히 여길 때 이상하게 힘이 나고 살 맛이 납니다. 하물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시고 심히 기뻐하실 때 어떠하겠습니까? 우리는 무한한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기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크다 말았을까? 내 코는 왜 이렇게 납작할까? 내 턱은 왜 사각으로 생겼을까? 나는 왜 이렇게 민주형으로 생겼을까? 내 눈은 왜 이렇게 나쁜가? 나는 왜 이렇게 머리가 잘 안 돌아갈까? 내 성격은 왜 이렇게 괴팍할까? 나는 왜 이렇게 부족할까? 자신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자신의 존재를 무가치하게 여기고 자학하는 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자신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 자아발견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지으시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이유는 나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기가 낳은 자식은 우가 뭐라고 해도 가장 이쁘고 귀엽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나를 지으셨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생겼든 개의치 않으시고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키가 크든 작든, 코가 납작하든 우뚝하든, 눈이 쌍꺼풀이 졌든 안 졌든, 황새눈이든 핍새눈이든, 개방형으로 생겼든 민주형으로 생겼든 상관치 않으시고 Very Good! Wonderful!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남과 비교해서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인격적으로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 최고입니다. No.1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학대하고 운명의 쇠사슬에 얽매여 울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 안에서 자아발견을 하지 못하고 상대적인 인생을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자아발견을 할 때 남과 비교하여 자의식과 열등감에 시달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인 인생을 살게 됩니다. 또한 슬픈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 밝고 힘찬 섭리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둘째, 인생의 근본 목적: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하신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음을 말해 줍니다(사43:7).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신 근본 목적은 그 능력과 신성과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인생은 나의 것인데 내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행복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또 가족을 위해서, 가문을 위해서, 좀 더 나아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사는 것이 가치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내 자신이나 가족이나 가문이나 나라는 결국 썩어 없어질 것으로서 불멸의 가치있는 것이 되지 못합니다. 인생의 근본 목적은 불멸의 가치있는 것이라야 합니다. 세상에는 불멸의 가치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이 썩어지지 아니하는 영원불멸의 가치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딤전 1:17절에서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공부를 하든지 직장에 다니든지, 양을 치든지, 결혼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합니다. 그때 뜻이 있고 기쁨이 있고 참 자유함이 있고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Ⅵ. 인간은 안식일의 소유자(2:1-3)

하나님은 엿새 동안 천지 만물과 인간을 다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이 이르자 안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쉬신 것은 피곤해서 쉬신 것이 아니라, 엿새 동안의 창조의 역사를 기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안식일’하면 쉬는 날, 잠자는 날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날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입니다. 출20: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창조역사를 하시고 제 칠일에 쉬셨고, 또 그 날을 복되게 하여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출20:11).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은 다른 날과 구별하여 성스러운 하나님의 날로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안식일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 주의 날, 곧 주일의 그림자로서 사도행전 시대에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모인 주일이 안식일로 확정되었습니다(행20:7, 계1:10).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을 거룩히 구별하여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 날은 엿새 동안 세상에서 하던 일을 중단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며 성도와 거룩한 사귐을 가지고 선한 일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영혼의 참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영혼의 안식을 누릴 때 우리는 육신의 피곤도 극복하고 진정한 쉼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킬 때 생활의 리듬이 생기고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참 안식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갖고 하나님께 순종할 때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육신적으로 아무리 쉬어도 피곤을 느끼고 곤고한 것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기 때문입니다. 시107:10, 11절은 말합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히4:3-11).

결론: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인간의 본래 모습이 어떠한가를 공부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자아발견을 함으로 의미있는 복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