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제 21 강 김 아브라함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말씀: 마태복음 14:1-36
요절: 마태복음 14:16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오늘 말씀에는 두 가지 표적이 나옵니다. 하나는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물위로 걸어가신 사건입니다. 두 표적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의 절정기인 시점에서 이루어진 의미 있는 사건입니다. 이들을 통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신의 권능을 나타내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 예수님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가 이 시대 방황하는 양무리들을 위해서 무엇을 주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오병이어가 무엇인가?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 이 시대 양무리들의 좋은 목자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그리하여 고대와 전세계 방황하는 지성인들을 먹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오천명을 먹이신 예수님(1-21)
1,2절을 보십시오. 분봉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서 자기가 죽인 세례 요한 때문에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는 악몽에 시달렸던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은 갈릴리 전역에 12제자를 전도 여행 내보내셨습니다.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이 하신대로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파하며 병든 자들을 고쳤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의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었습니다. 이 소문이 왕궁에 있는 헤롯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헤롯은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들었을 때 기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큰 충격을 받고 정신 분열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받고 세례 요한의 망령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너무 괴롭고 두려워 신하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죽인 세례요한이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권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 도다” 그는 의인 세례 요한을 목베어 죽인 이후로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렸습니다. 밤마다 피가 뚝뚝 흐르는 세례요한의 머리가 꿈에 나타나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는 마치 의인 아벨을 죽인 후에 죄의식과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가인과 같았습니다. 그는 왕으로서의 권세와 물질과 아름다운 아내 등 모든 것을 소유했지만 악을 행했기 때문에 전혀 행복이 없었습니다. 또한 자신만 괴롭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헤롯은 그 시대에 엄청난 악영향력을 끼쳤습니다.
3-12절까지에서는 헤롯이 요한을 죽이게 된 배경을 거슬러 올라가 설명하므로 그 시대 배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헤롯의 첫 아내는 아라비아의 아래다 왕의 딸이었습니다. 그런데 파티 석상에서 칵테일을 마시는 도중 자기의 동생인 빌립의 아내와 눈이 맞았습니다. 그러자 무조건 그녀를 아내로 취하였습니다. 정말로 있을 수 없는 파렴치한 일입니다. 이로 인해서 그의 첫부인은 친정으로 도망 갔습니다. 그후 그는 헤로디아를 취하여 죄의 쾌락을 즐겼습니다. 헤롯은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백성들에게 미치는 악영향은 컸습니다. 그러나 그가 왕이기 때문에 그의 하는 일이 옳지 않다고 아무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를 책망했습니다. “여보시오 헤롯,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소” 그는 그 시대의 양심수요 어두운 시대를 비추이는 등불이었습니다. 헤롯은 요한의 책망을 듣고 회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요한의 입을 틀어 막기 위해 그를 잡아 옥에 가두고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므로 두려워 죽일 수 없었습니다. 또한 이 때부터 여우같은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죽일 기회만 노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기회가 왔습니다. 헤롯이 자기 생일을 당하여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초청하여 큰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백성들은 민생고에 허덕이는데 그의 생일 잔치는 산해진미의 음식과 고가의 양주술과 노래로 흥청대었습니다. 그는 왕궁 뜰에 호화로운 안가를 짓고는 사치스럽고 방탕한 연회를 즐겼습니다. 헤로디아의 딸은 잔치석상에서 요사스런 삼바춤을 추었습니다. 헤롯은 그 춤에 매료가 되어 취중에 맹세까지 하여 무엇이든지 달라는대로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큰 실수였습니다. 사단은 재빨리 이를 이용했습니다. 헤로디아의 딸은 어미의 시킴을 듣고 말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 헤롯은 귀여운 소녀가 그런 끔찍한 요구를 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미에 그 딸” 이었습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근심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의 위신과 체면 때문에 그 요구를 허락했습니다. 마침내 세례 요한의 목이 피가 흐르는 채로 쟁반에 담겨져 소녀에게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헤로디아는 공주와 같은 딸을 이용하여 복수심을 채우는 무서운 여자였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님께 고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지도자 한 사람이 그 시대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도자는 원튼 원치 않튼 영향을 끼치기 마련입니다. 특히 정치 지도자는 그 시대의 얼굴로서 백성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사람들은 지도자를 비판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그 영향을 받습니다. 정치 지도자가 음난하고 불의할 때 그 음란과 불의는 사회 전반에 누룩과 같이 무섭게 번져 퇴폐적인 문화를 형성하게 됩니다. 5공화국이 들어서며 우리 사회는 불의와 향락 문화가 보편화되고 부정 부패가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6공 들어서는 아주 미화 되었습니다. 이는 불의한 지도자 한사람의 영향이 컸습니다. 갖가지 의혹 사건과 부패의 현장이 얼마나 심하고 많은지 요즈음은 들어도 잘 놀래지도 않습니다. 지도자는 무엇보다도 도덕성이 있어야 합니다. 헤롯이 헤로디아를 취하여 죄의 쾌락을 즐길 때 그 결과가 어떠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죄의 쾌락을 즐긴 대가는 엄청났습니다. 그는 죄의 소욕을 따라 음란한 생활을 함으로써 고통하는 백성들에게 더욱 고통을 주었습니다. 의롭게 살고자 하는 의인의 소망의 싹을 짓밟았습니다. 의인들을 절망케하여 엎드러지게 했습니다. 의로운 자들대신 불의한 자들이 득세하고 소수의 사람들이 배를 불리고 대부분의 백성들은 배고품과 절망과 혼돈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는 지도자로서 무책임하였습니다.
의인 세례 요한의 죽음이 그 시대에 미친 영향력이 어떠했을까요? 백성들은 깊은 좌절과 실의 속에 빠졌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의인이 목베임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시는가 하는 회의와 불신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헤롯과 헤로디아에 대한 분노로 치를 떨었을 것입니다. 백성들은 마치 불만 붙이면 폭발할 수 있는 화약고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백성들은 예수님이 거사를 일으켜 헤롯 독재를 타도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내어 보내시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셨습니다. 그후 헤롯이 괴로와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예수님은 여전히 정치적인 행보를 걷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복음 전파와 제자 양성에 전념하셨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헤롯에 관한 이야기를 들이신 후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로 가셨습니다. 전도 여행을 하고 돌아온 제자들과 잠시 조용한 시간을 갖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어느새 알았는지 무리가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왔습니다. 왜 이렇게 많은 무리들이 빈 들에라도 예수님을 좇았을까요? 이는 그들이 얼마나 괴롭고 굶주려 있는가 잘 말해 줍니다. 무책임하고 불의한 헤롯 밑에서 얼마나 고통하고 있는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따뜻한 목자의 사랑을 맛보았습니다. 이 때문에 무리들은 아무 약속이 없는데도 무조건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조금의 여유도 갖는 것을 허용치 않았습니다. 이렇게 염치없는 그들을 무한정 영접한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제자들은 이들을 보자 “벼룩도 낯짝이 있는데 이 낯짝도 없는 놈들!”하고 외면해 버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있는 그대로 영접하셨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그들을 조금도 부담스럽게 여기거나 귀찮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뜨겁게 영접하셨습니다. 피곤함도 모르시고 시간 가는 것도 모르셨습니다. “오늘 진료 끝, 회의중”이라는 팻말을 붙여 놓고는 무리들을 외면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오는 대로 누구든지 다 영접하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막6:34절은 그들이 목자없는 양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목자없는 양은 부모없는 고아와 같이 돌봐주는 자가 없기 때문에 불쌍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고아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자 불쌍히 여기시고 무조건 도와 주고자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병을 치료해 주심으로 그들의 선한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들에게는 보호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들을 인도하고 방향을 제시해 줄 지도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들을 돌봐 주고 먹여 주고 살려 주는 자가 필요했습니다.그들에게 인생의 의미를 가르쳐 주고 절대적 진리를 가르쳐 주어야 할 성경 선생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목자의 역활이요 필요성입니다. 그들에게는 이러한 목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목자가 되어야 할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권위나 지키고자 혈안이 되었지, 양들에 대해서는 무관심 했습니다. 헤롯은 이들의 피를 빨아 죄악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참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에게 선한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저녁이 되어도 예수님은 무리들을 돌보는 일을 그치질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의 배에서는 꾸룩꾸룩 하는 전화 벨이 울렸습니다. 빌립은 잠시 앉아서 쉬겠다고 하더니 허기가 져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서로 쳐다 보았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이 너무하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음이 서로의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참다 못해 긴급 소회를 열고 예수님께 나아와 말했습니다.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제자들은 자신들이 배고픈 가운데서도 무리들의 저녁 식사를 염려할 만큼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리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먹이고자 하는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머리를 짜내어 생각한 것은 식사 때가 더 늦기 전에 빨리 그들을 보내어 각자 알아서 먹을 것을 책임 지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먹으라’ 더치 패이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현재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요 합리적인 방법입니다. 그들의 상황 파악은 정확했습니다. 이곳은 빈 들입니다. 때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밤이 되면 날씨도 추워지고 사나운 짐승들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또 무리들도 너무 많고 어린 아이들까지 있기 때문에 더 지체하면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책임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책임질 수 없었습니다. 상황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우리 목자님들은 이런 상황이 잘 이해갈 것입니다. 저라도 이런 제안을 했을 것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먹으라’ 이것이 최선의 선택인 것 같습니다.
오늘날의 상황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신세대들을 피상적으로 보면 아주 발랄하고 적극적이고 자유로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깊게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 보면 그들이 얼마나 불쌍한지 알게 됩니다. 우선 그들은 진정한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그들은 중고등학교시절 부모들의 강한 요구와 푸쉬는 받았지만 진정한 관심과 사랑과 이해를 받지 못하고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또한 입시의 짐에 눌려서 고통하던 자들입니다. 그리하여 요즈음 신세대 양들은 같이 놀아주고 적극적으로 사랑해 주고 관심 가져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 정도가 심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을 생각할 때 참으로 불쌍하지만 귀찮은 생각이 들기 쉽습니다. 또한 캠퍼스 상황은 빈 들과 같습니다. 절대진리가 없습니다. 요즈음은 선후배간의 예의나 의리도 없어졌습니다. 지독히 개인주의적입니다. 십년 선배와 약속하고도 아주 쉽게 약속을 안 지킵니다. 그러고도 죄의식도 없습니다. 그래서 나이 많은 목자들이 속이 많이 탑니다. 겉으로 보면 자유분방합니다. 반바지 차림의 등교생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돈을 벌어서 자유를 즐기는 분위기는 뭔가 비정상적인 것을 추구하며 스트래스를 풀고자 하는 분위기입니다. 진리에 대한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 어려운 그런 상황이 마치 빈 들과 같습니다. 또한 때가 저물은 시대입니다. 특히 음난과 퇴폐적인 문화가 아주 번져있다는 것입니다. 대학에 오기 이전부터 음난한 비디오 등을 통해 내면이 아주 정욕적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대학에 오자마자 깊은 정욕으로 고통하며 괴로와하는 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많은 죄악에 노출되어 있고 또한 육신적으로는 풍요롭기 때문에 자유를 주체치 못하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생각할 때 참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그런데도 더욱 불쌍한 것은 부모나 교수들도 이들을 돌봐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차를 사주어 사랑을 표현하고 마XX같은 교수는 도덕 관념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이들에게는 목자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들을 돕다 보면 정말로 짜증나는 일이 많고 너무 많은 수고가 필요합니다. 또한 인간 기초가 부족하여 제자로 양성하기란 정말 힘든 일입니다.그래도 한국의 상황은 아직은 양호합니다. 마약과 sex와 반발로 가득하고 정신 분열증 환자와 같은 미국의 양들을 먹이고 제자로 키운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리하여 양들을 돕다가도 포기하기가 쉽습니다. 제자들처럼 ‘너희가 먹을 것을 먹으라’외치고 싶습니다.
그러나 16절을 보십시오. 16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예수님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말씀하십니다.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이곳이 빈 들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방법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책임지고 보호하고 먹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미 그들을 먹이고자 작정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말씀하셨을까요?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는 예수님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책임감 있는 목자들로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왜 이런 막중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까? 이는 그들이 지도자요 목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는 무슨 일에든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 절대적인 책임감을 갖듯이 그 시대의 지도자들은 그 시대의 백성들에게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책임감은 목자의 심정에서 나옵니다. 이는 곧 부모의 마음입니다. 진정한 부모라면 자기 자식이 배고파 울 때 “너희가 먹을 것을 먹어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슨 짓이라도 해서 먹을 것을 구해 올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마음이 목자의 책임감입니다. 또한 목자의 심정은 빚진 자의 심정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유다이즘에 사로잡혀 이기적인 야심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때 그는 성도들을 핍박하는 잔인한 자요 포행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거듭났을 때 그는 빚진 자의 심령으로 가득하였습니다. 한 영혼, 한 영혼에 대한 간절한 목자의 심정과 책임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그는 복음의 능력을 체험한 후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로마인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과 그들에 대한 책임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의 이 목자의 심정과 책임감은 결국은 로마를 복음으로 정복하였고 전세계를 복음화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는 로마서 1:14,15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이런 책임감은 사도 바울을 위대하게 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와 같은 목자의 심정과 책임감이 넘쳐 능력의 역사를 이루는 위대한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갖도록 함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한들 제자들이 무슨 수로 먹일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의 주머니 사정을 잘 아십니다. 어제 저녁에 베드로의 바지를 빨다가 그의 주머니에 양들의 이름이 적힌 수첩 하나 밖에 없는 것을 아셨습니다. 다만 빌립의 주머니에는 동전 몇 개가 있지만 꾸시 꾸시 몇 개로 자기 군것질 할 것 밖에 안된다는 것도 잘 아셨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전화 벨소리가 울리는 자기 배도 채울 수 없는 상태임을 잘아십니다. 그런데 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나는 퇴근할테니 너희가 알아서 해!” 하고 회피하고자 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믿음을 갖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갈 것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친히 이들을 먹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다만 믿음으로 예수님의 하시는 일에 동참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런 믿음을 가지고 무리들을 먹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저는 U.B.F 책임목자이신 이사무엘 선교사님을 생각하면 할수록 존경하는 마음이 앞섭니다. 왜냐하면 그 분의 누구라도 따라갈 수 없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 분은 20세기가 낳은 돈키호테 같습니다. 그래서 엉뚱한 기도제목을 많이 제시하셨습니다. 나이아가라 수양회에서 400명이 참석하는 수양회를 갖을 수 있도록 기도하자고 한여름 대낮에 헛소리를 하는 듯 했습니다. 또한 1985년에는 1995년까지 USSR이 개척될 수 있도록 기도하자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난 주에는 미국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1310명이 참석하는 국제 여름 수양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또한 1995년이 2년이나 남은 올해까지 CIS에 100여명에 가까운 선교사들이 나가게 되었으며 이번 CIS 여름 수양회에는 소련 대학생들이 주인들로 참석하게까지 되었습니다. 또한 모스크바에서 이번 MSU 수양회에 18명이나 참석하는 기적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이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하나님은 이사무엘 선교사님의 믿음을 통하여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입니다. 믿음은 사람을 위대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이는 우리가 예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갖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후 어떻게 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먹입니까? 우리의 사정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하며 자기 확신을 계속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현재 자기들에게 있는 것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것은 많은 무리를 먹이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초라하고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많은 무리를 먹일 어떤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어떤 가능성(A Certain Possibility)을 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믿음으로 내놓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게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가능성을 발견만 해서도 안됩니다. 부족하지만 이것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이를 기초로 친히 능력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나의 오병이어는 무엇인가 찾아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일대일 이었습니다. 저는 새로 시작한 병원 생활을 하며 매일같이 많은 일들에 짓눌렸습니다. 내가 전문의로 여기 왔지 머슴으로 왔는가? 하며 절망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루에 일대일 한팀하는 것도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눈치를 보지않고 일찍 퇴근하여 와도 8시반은 되었습니다. 한 팀하면 하루가 갑니다. 화요일과 수요일은 또 평신도 목자공부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5팀만 하여도 한주일이 거의 여유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지난 주는 6팀을 하였습니다. 저의 오병이어는 바로 일대일 성경공부입니다. 죄인이 큰 일은 못해도 매주 5팀 이상씩의 꾸준한 일대일의 오병이어를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드릴 수 있는 오병이어가 있습니다. 1;1의 오병이어, 기도의 오병이어, 심방의 오병이어, 편지의 오병이어, 아니면 이희규 목자님과 같이, 같이 놀아주기를 원하는 양과 잘 놀아주는 오병이어도 있습니다. 이들을 믿음으로 주님께 드릴 때 주님께서 이를 받으시고 친히 능력으로 역사 하십니다. 우리가 오병이어를 드릴 때 예수님은 이런 것을 가져왔느냐고 책망하거나 무안을 주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를 받으시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떡을 떼어 남자만 해도 오천명이나 되는 무리를 먹이셨습니다. 그들은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12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차고 넘쳤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사랑도 차고 넘쳤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오병이어를 축사하시는 능력의 분이십니다.
Ⅱ. 바다 위를 걸으신 예수님 (22-36)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후 예수님은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무리를 보내신 후 홀로 산에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큰 역사 후에 조금도 영적 긴장을 풀지 아니하시고 깨어 기도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새로운 역사 방향을 잡으셨습니다. 우리는 큰 역사를 이룬 후 좀 쉬어야 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쉬고자 할 때 자신도 모르게 사단의 시험에 들기 쉽습니다. 이때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과 개인 시간을 가짐으로 새롭게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큰 역사를 치른 후 심신이 지치고 피곤해졌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바람이 거슬리자 물결을 인하여 괴로이 노를 젖게 되었습니다. 폭풍우나 태풍도 아니고 바람이 거슬리는 정도인데도 그들은 괴로워 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밤사경에 그들을 도우시기 위해 바다위로 걸어오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유령으로 생각하고 무서워 소리 질렀습니다. 그들은 내면이 약해지자 예수님을 ‘오 유령이다’하며 생각하고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잘 이해하시고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하시고 따뜻이 위로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말을 듣자 정말 예수님인 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간청했습니다. 베드로는 언제나 유별났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오라”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용감하게 물 위로 걸어 갔습니다. 그러나 바람을 보자 갑자기 두려움에 사로잡혀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를 구원하신 후 그의 불신을 책망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여기서 볼 때 의심할 때 두려움이 생기게 되고 세상 조류에 빠져들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의심치 않고 주님만을 바라볼 때 캄캄한 세상 가운데서도 담대히 전진할 수 있습니다. 한 발씩 한 발씩 현실적인 문제들을 믿음으로 헤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사 바람이 순식간에 그쳤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절하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게네사렛 땅에 이르사 사방에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목자없는 양같은 많은 신세대 양무리들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처한 상황은 빈 들이요 죄악의 밤은 깊어 갑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들을 먹이고 제자 양성 하고자 할 때 절망적인 생각이 듭니다. 그리하여 ‘너희가 먹을 것을 먹으라’는 식으로 회피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과 목자의 심정과 책임감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통하여 이 시대 양무리들을 먹이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간절한 소망을 영접하고 믿음으로 오병이어를 드림으로 고대와 전세계 캠퍼스 양무리를 먹이는 역사에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