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 View


Q22-마태복음 15:1-39(네 믿음이 크도다)

by Mark Yang   08/16/2019   Matthew

Message


마태복음 제 22 강 김바나바

네 믿음이 크도다

말씀: 마태복음 15:1-39
요절: 마태복음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오늘 말씀에는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종교지도자들과 초라하지만 믿음이 있는 가나안 여인이 대조되어 나옵니다.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교회가 있고 신자 수도 천만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말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은 어떤 것인가 배울 수 있길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가 큰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 극복해야 할 요소가 무엇인가 배울 수 있길 기도합니다.

Ⅰ.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1-20)

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공회에서 파견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님께 나아와 따져 물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1:1하랴, 청소하랴, 소감쓰랴 시간은 없고 일은 많아서 손 씻을 겨를도 없이 음식을 먹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놓칠세라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의 손 씻지 않는 일을 문제 삼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손 씻지 않는 것을 단순히 위생상의 문제로 보지 않고 종교적인 죄로 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장로들의 유전이 있었습니다. 율법에는 문자로 기록된 성문법과 모세 이후 장로들을 통해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유전이 있었습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 장로들이 만든 유전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이 훨씬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더 중요시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손을 씻는 의식은 처음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한 동기에서 출발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반드시 손을 씻어야 거룩하고 손을 씻지 않으면 불결한 죄를 범하는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7:3,4절을 보면 유대인들은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고 시장에서 돌아와서 샤워를 하지 아니하면 먹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퐁퐁으로 열심히 씻지 아니하면 부정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장로들의 유전이 처음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한 동기에서 시작 되었지만 나중에는 사람의 생활을 규제하는 올무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3). 하나님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절대적인 계명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계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어느 누구도 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앞세워 자기들의 유익을 채우고자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 하기만 하면 부모를 공경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하나님도 섬기지 않고 부모님도 섬기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은 유전을 지킨다는 핑계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자기들 편할대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였지만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었습니다. 그들은 그릇은 열심히 씻었지만 마음은 씻지 않았습니다. 손은 열심히 씻었지만 내면의 죄를 회개하는 생활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입술로만 신앙생활을 할 때 그 신앙은 가식적이고 형식적으로 흐르게 됩니다. 그 때 신앙의 생명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말을 잘하는가를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겉으로 드러난 결과 보다도 내면에 동기를 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도 UBF 유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목자라는 체면 때문에 fishing을 하고 팀수를 채우기 위해서 1:1을 하기 쉽습니다. 사람들의 눈치 때문에 차트와 숫자에 민감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평균치를 기록하면 자족하고 또 그 보다 나으면 의인 심정을 갖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을 하든지 그 속에 마음이 들어가 있는가 그렇지 않는가를 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입으로만 떠들 것이 아니라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여야 합니다. 한 양을 돕더라도 의무감으로 해서는 안되고 heart를 드려서 섬겨야 합니다. 소감 한 편을 쓰더라도 구렁이 담넘어 가듯이 끌쩍끌쩍 쓸 것이 아니라 심령에 터치가 되기까지 깊이 묵상하고 써야 합니다. 그 때 신앙생활에 기쁨이 있고 spirit이 넘치게 됩니다. 무엇이든지 입으로 하는 것은 쉽습니다. 반면 마음으로 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투쟁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렵게 마음을 드려서 하기 보다는 쉽게 입으로 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마음이 담기지 않는 열심은 피곤한 봉사에 불과합니다. 심령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고백은 공허한 부르짖음에 불과합니다. 마음으로 하지 않는 회개나 기도는 주님을 감동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좀 초라하고 의식이 엉성하더라도 마음으로 예배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말을 세련되게 잘 하지 못해도 마음으로 전하는 메시지는 감동력이 있고 power가 있습니다. 좀 투박해도 심령으로 회개할 때 죄사함의 천국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무리들이 바리새인들의 영향을 받아 외식하기 쉬운 것을 보시고 무리들을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듣고 깨달으라.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제자들은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여 큰일 났다고 생각하고 이 사실을 예수님께 알렸습니다. 제자들은 마음에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에 게의치 않으셨습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는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유전은 하나님께서 심으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뽑으십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심지 않으신 비진리는 반드시 뽑힐 것이요 하나님께서 심으신 진리의 말씀은 절대로 뽑히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말씀전파에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에 안심이 된 베드로는 이 비유의 말씀을 설명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아직도 깨달음이 없는 그들을 가볍게 책망하신 후에 그 뜻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 집니다. 이 말씀은 해부학적으로 지극히 당연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곧 배설물이 되기 때문에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오히려 마음에서 입을 통해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입니다.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는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순수하고 진실된 인생을 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인생”에 대한 동경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의 마음은 근본적으로 타락하였습니다. 입으로는 “내 마음은 호수요 너의 마음은 유리 바다” 라고 노래하지만 그 속 마음을 열어보면 냄새나는 시궁창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롬3:10). 인간은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롬3:12). 인간의 마음은 부패하였기 때문에 마음이 원하는 대로 가만히 놔누면 자연히 악한 생각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예례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17:9)고 하였습니다. 마음은 지.정.의의 장소로서 모든 생각과 행동의 근원처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부패하였기 때문에 사람의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죄악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치 물의 근원이 더러우면 거기서 흘러 나오는 물은 자연히 더러운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 상태가 어떠합니까? 캠퍼스의 신세대들의 마음은 음란 비디오와 물질적이고 쾌락적인 대중문화로 인해 심히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사회가 발달할수록 죄도 성장하여 사람의 마음은 갈수록 걷잡을 수 없이 오염되어 가고 있습니다. 요즘 환경을 보호하고 오염된 자연을 되살리자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시급한 것은 죄로 오염된 인간의 마음을 깨끗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깨끗케 할 수 있습니까? 매일 광천수로 목욕을 해야 합니까? “깨끗한 마음 갖기 운동” 캠페인을 벌여야 합니까? 루소가 주장한대로 자연으로 돌아가기에 힘쓰면 인간내면이 변화될까요? 인간의 노력으로는 근본적으로 마음을 깨끗케 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오직 회개하고 예수님의 보배피로 죄 씻음 받고 거듭날 때만이 가능합니다. 히브리서 9:14절은 말합니다.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예수님의 보배피만이 우리의 추하고 더러운 마음을 정결케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배피는 시궁창 같은 우리 마음을 맑디 맑은 호수처럼 변화시켜 줍니다. 예수님의 보배피는 파괴된 양심을 되살리며 오염된 영혼을 깨끗하게 정화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로 더러워진 심령을 들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 때 우리의 마음이 변하고 본성이 변하여 새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변화된 우리 마음을 잘 지키도록 투쟁해야 합니다. 잠언 4장 23절은 말합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 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죄악의 파도가 넘실거리고 있습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우리 마음의 성을 무너뜨리고자 공격합니다. 우리가 조금만 틈을 주면 사단은 어느새 우리 마음에 들어와서 난장판을 만들어 놓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서 마음의 성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우리의 무기는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엡6:17). 우리는 지난 여름 수양회와 방학동안 제자양성 프로그램등을 통해서 마음이 많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러나 2주 후면 개학을 하게 됩니다. 그 때 유혹의 세력이 많을 것입니다. 사단은 이 때를 이용하여 친구들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 고개를 내밀 것입니다. “야 너 아직 일학년이다. 목자생활이야 맘만 먹으면 언제라도 할 수 있지만 노는 건 다 때가 있는 거야?” 이 때 우리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말씀의 검으로 단호히 유혹을 물리쳐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힘써 마음을 지키고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기에 힘쓸 때 영력이 충만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영향을 받는 자가 되지 않고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아무리 개혁하고 싶어도 자기 마음이 부패하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먼저 개혁할 때 가정과 사회를 개혁하고 나아가서는 세계와 역사를 개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은 마약과 에이즈와 섹스와 폭력으로 그 내면이 점점 부패해 가고 있습니다. 저는 몇 주전에 미국의 고등학교에 총기 사건이 너무 많아서 등교시간마다 경찰관이 금속 탐지기로 학생들의 몸을 수색하여 권총을 압수하는 기사를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이번 주 타임지는 미국의 심각한 폭력 문제를 cover story로 다루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통령 클링턴은 폭력 대응 법안을 발표하였지만 별 효과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강력한 법을 만든다고 사회가 개혁되지 않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서 부터 개혁의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MSU 여름 수양회가 제 3의 영적각성운동의 불씨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그랬을 때 미국 양들이 총 935명이 참석하여 회개하고 변화되는 큰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세계는 영적 대각성 운동이 필요 합니다. 그리고 이 운동은 바로 나 한 사람의 회개를 통한 자기 개혁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저희들이 말씀으로 심령이 새롭게 됨을 받아 세상을 변화시키는 변화의 주체자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Ⅱ.가나안 여인의 믿음

예수님께서 게네사렛 지방을 떠나 이방 땅인 두로와 시돈의 지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 때 가나안 여자 하나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 두로와 시돈 지방은 오늘날 팔레스타인 지방으로 이방지역입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이들은 유대인들에게 적의를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예수님을 조금도 경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유대인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대적하였지만 이 가나안 여인은 오히려 겸손하게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하였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누구에게도 말 못할 가슴 아픈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결혼할 때 남편과 이렇게 서약을 하였습니다. “아들 딸 구별 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그 후 여인은 은근히 아들을 기대했지만 낳고 보니 딸이었습니다. 여인은 남편에게 좀 미안하였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오히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하며 애지중지 하였습니다. 어느새 딸은 무럭 무럭 자라서 경복궁 미술 사생대회에 나가서 상도 타오고 음악 콩클대회에 나가서 자기 키만한 트로피도 타 왔습니다. 자상한 남편과 사랑스런 딸을 둔 여인에게는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세상에 나처럼 복 받은 여자가 또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딸아이가 친구들과 놀러갔다 오더니 머리가 아프다며 드러누웠습니다. 며칠 쉬면 괜찮으려니 싶었는데 딸아이는 비오듯 땀을 흘리며 헛소리를 해댔습니다. 날이 갈수록 증세는 점점 심해져서 엄마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나중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귀신에 들려 밤에 집을 뛰쳐 나가기도 하고 산에 올라가 소리를 꽥꽥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흉악한 귀신에 들린 딸은 더이상 과거에 귀엽고 사랑스럽던 그 딸이 아니었습니다. 여인은 딸을 안고 이 병원 저 병원 용하다는 데는 다 찾아 다녀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여인의 눈에서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딸의 고통은 여인의 고통이 되었습니다. 딸이 불쌍한 만큼 여인도 불쌍하였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예수님께 나아와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부르짖은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런 불쌍한 여인은 두말하지 않고 당장에 고쳐 주어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을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23a을 보십시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지 않고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침묵하셨을까요? 매정하게도 여인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키우시기 위해서 침묵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때로 우리가 믿음으로 간구할 때 침묵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아무 대답이 없고 잠잠할 때 주님께서 나를 외면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은 나에게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나의 믿음을 키우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에는 많은 대답이 있습니다. 주님은 침묵하심으로서 더 많은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침묵하시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인이 소리 지르는 것이 참기 힘들어 예수님께 나아와 청했습니다.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빨리 고쳐 주어 보내소서” 그러나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 집에 잃어버린 양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시며 고쳐줄 생각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여인은 뒤에서 소리를 지르다가 아무 응답이 없자 예수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이때 예수님은 여인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는 실로 여인에게 충격적인 대답이었습니다. 여기서 자녀란 선민 이스라엘을 가리키며 개는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개의 이미지는 별로 고상하지 않습니다. 개는 불결하고 수치를 모르고 탐욕스러운 것을 상징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취급하며 무시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때까지 자기에게 나아온 자를 한 번도 외면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온 몸에 문둥병이 들린 자가 나아왔을 때도 그 몸에 손을 대시며 고쳐 주셨습니다. 이방인인 백부장이 간구했을 때도 즉시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바쁘고 힘들지라도 자기에게 믿음으로 나아온 자는 누구든지 기쁜 마음으로 영접하시고 도와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번에는 도와 주시기는 커녕 여인을 개취급하시며 모욕적인 말로 물리치셨습니다. 거룩하신 예수님의 입에서 개라는 단어가 나왔다는 것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세상만민의 구주로 오신 분이 어찌 이처럼 옹졸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는데 아무리 비천한 이방여인이라도 이렇게 직접 대놓고 개취급하고 무시한다면 참기 힘듭니다. 사람이 가장 참기 힘든 것이 무시를 받고 자존심이 상하는 것입니다. 여인은 너무 자존심이 상하여 미친 개처럼 달여들어 이판사판 개판으로 싸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요 난 개같은 여자예요? 그러는 당신은... 잘 났어”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신 것입니까? 이는 여인을 실족시키고자 하심이 아니라 여인의 믿음을 견고케 하시고 그를 축복하시기 위해 믿음을 테스트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견고케 하시기 위해 이삭을 바치도록 그를 시험하신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미쁘사 사람이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십니다(고전10:13).예수님은 이 여인에게서 시험을 감당할 만한 믿음이 있음을 보시고 테스트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여인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27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재치있게 받아 넘겼습니다. “주여 옳소이다” 이 말은 “아멘 저는 개와 같이 비천한 자입니다.”라는 자기 인정입니다. 이런 자기 인정은 믿음있고 용기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인은 자기를 개 취급했다고 화를 내며 대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거절하는 듯한 말에 낙심이 되어 돌아가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이 개같은 자라고 자학하지도 않았습니다. 여인은 적극적으로 은혜만을 간구하였습니다.

“마는 개들도 제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 여인은 주님께 은혜를 구하기 위해 자존심을 온전히 버렸습니다. 사람이 겸손히 주님의 은혜를 구하기만 하면 무한한 축복을 누릴 수 있는데도 쥐
꼬리만한 자존심을 꺾지 못해 은혜의 세계, 믿음의 세계의 문턱에서 넘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열왕기하 5장에 보면 나아만 장군이 나옵니다. 그는 아람의 군대장관이었지만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문둥병을 치료함 받기 위해서 엘리사를 찾아 왔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나와 보지도 않고 요단강가에 가서 몸을 일곱 번 담그라는 말만 전달하였습니다. 이때 나아만 장군은 자존심이 상해서 “내 나라에는 강이 없더냐” 하며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위사람들의 권고로 자존심을 꺾고 순종하여 요단강에 몸을 담갔을 때 문둥병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여인도 헬라사람으로서 지성도 있고 나름대로 pride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하게 은혜만을 간구하였습니다. 여인은 믿음의 여유가 있었습니다. 여유가 있을 때 지혜로운 재치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인은 믿음으로 감정을 이기고 자신을 이겼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다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기뻐하시고 그의 믿음을 깊이 인정하셨습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그러면 여인의 믿음이 어떤 점에서 큰 믿음입니까?

첫째로, 여인은 귀신들린 딸을 예수님께 들고 나아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믿음은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문제에 짓눌려 절망하고 자포자기 하고 맙니다. 그러나 믿음있는 자는 예수님께 나아와 부르짖는 자입니다.

둘째로, 여인은 낙심치 않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침묵하실 때도 여인은 낙심치 않고 믿음으로 계속해서 간구하였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한 두번 기도해 보고 응답이 없으면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여인은 응답 받을 때까지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8: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이니라”

셋째로, 여인은 예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건간에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신뢰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습니다. 여인이 예수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의심하였더라면 도중에 절망하여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이 예수님의 사랑을 전폭적으로 믿는 주권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상황이 조금 어려워진다거나 일이 잘 안 풀리면 믿음이 연약해집니다. 목자님이 조금 서운한 말만 해도 하나님과 목자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권신앙이 있는 사람은 상황에 따라 잘 요동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말에 쉽게 기가 죽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오해와 핍박과 환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숯한 고난 가운데서도 기가 꺾이지 않고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5-37)

넷째로, 여인의 믿음은 딸에 대한 애끓은 사랑으로인해 더 절실하여졌습니다. 어머니가 딸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흉악한 귀신에 들려 어머니도 몰라 보는 딸을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 만은 아닙니다. 이는 본능적인 모성애를 넘어서서 희생적인 참된 사랑입니다. 여인은 딸에 대한 불타는 사랑 때문에 어떤 수치와 모욕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딸을 어찌든지 구원해야 겠다는 열망이 한계상황을 극복하게 만들었습니다. 한 영혼에 대한 불타는 사랑이 있을 때 아무리 어려운 상황 가운데도 믿음의 밧줄을 굳게 붙잡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사단의 권세 아래 신음하는 양들에 대한 애타는 사랑이 있을 때 어떤 아픔과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믿고 계속 해서 도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에 크게 감동을 받으시고 그 믿음을 축복하셨습니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러자 그시로 그의 딸이 나았습니다. 여인의 믿음은 위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이었으나 예수님을 불신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여인은 이방여인 이었지만 겸손하였습니다. 마음이 가난하였고 무엇보다 큰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여인의 믿음을 크게 기뻐하시고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또 이 한 사람의 믿음의 영향 때문에 그 지방에 많은 병자들이 나음을 받은 큰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무리들은 이 예수님의 능력의 역사를 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떡 일곱 개와 생선 두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32절 말씀에는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목자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외적인 형식보다도 마음을 깨끗케 하는 것이 중요함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가나안 여인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함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저희들이 날마다 형식의 껍데기를 깨고 마음을 드려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주권을 믿음으로 낙심치 않고 간구하여 믿음의 능력을 체험하는 자가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