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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23-마태복음 16:1-28(베드로의 신앙고백)

by Mark Yang   08/16/2019   Matthew

Message


마태복음 제 23 강

베드로의 신앙 고백

말씀: 마태복음 16:1-28
요절: 마태복음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 의 아들이시니이다”

오늘 말씀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그리고 제자들에게 관한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그들은 모두 영적 분별력이 없었으며 특히 역사의식이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께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반면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신앙고백 했습니다. 이 고백은 베드로에게 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가에게 깊은 의미를 줍니다. 그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메시아가 되시며 또 예수님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 시대에 대한 영적 통찰력을 가져야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제자의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1-12)

1-12절에는 역사 의식이 없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하나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요, 다른 하나는 제자들입니다.

첫째, 시대의 징조를 분별할 줄 모르는 종교 지도자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인간관과 세계관은 정반대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영적 세계를 믿고 몸의 부활도 믿었습니다. 그들은 형식적이고 율법적이긴 하였지만 하나님게 대한 열심을 가지고 율법을 좇아 살고자 많은 투쟁을 하였습니다(행23:8,행22:3). 예를 들어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착실히 드렸습니다. 반면 사두개인들은 영적 세계를 인정치 않고 현실세계를 중시했습니다. 그들은 부활도 천사도 영도 다 믿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부를 축적하고 권력과 결탁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을 보수주의 신앙을 가진 자들이라면 사두개인들은 자유주의 신앙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상반된 사상 때문에 평소 서로를 경멸했습니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데 있어서는 동역을 잘 했습니다. 그들은 에수님을 제거하고자 하는 악독한 마음을 품고 예수님께 와서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이시오.” 그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수많은 표적을 보아왔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예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충분히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아니 믿을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할 꼬투리를 잡기 위해 하늘로서 오는 다른 표적을 구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이는 그들이 천기를 분별할 능력이 있다면 시대의 징조도 능히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일기예보에는 지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독감을 예방하고 또 주말을 즐겁게 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대의 흐름이나 역사의 변화를 알리는 사건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는 고통하는 백성을 돌보고 병든 그 시대를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적 지도자로서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고 백성들을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안정만을 생각하고 양무리들에 관해서는 무관심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은 모두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고 백성들을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로 인도한 자들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은 영적 통찰력을 가진 자였습니다. 당시 소돔과 고모라는 겉보기에는 에덴 동산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악하여 멸망 직전에 있음을 알고 간절히 중보기도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자신과 그 시대에 대해서 무책임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회개한 후 그는 시대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이교 사상과 싸우며 복음을 변명하고 확증하는 위대한 기독교 사상사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아야 할 시대의 징조가 무엇입니까? 이 시대는 누가 보나 종말을 향하여 치닫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큰 능력과 영광을 재림하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말세의 징조에 대해 여러 가지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서 12:4절에는 마지막 때에는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은 얼마나 엄청나게 더하게 되었습니까? 인류가 이때까지 쌓아 놓은 과학지식은 15년 만에 바꾸어 진다고 합니다. 오늘날 인류는 호랑이 등에 차고 있는 인간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호랑이가 질주하고 있기 때문에 내릴 수도 없고 또 호랑이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도 없어 인류는 방향없이 어디론가 무섭게 달려 가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국은 멸망입니다. 사도 바울은 딤후 3:1-4절에서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면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가 되어 가고 있는 모든 일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떄가 가까왔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게 되면 인생을 함부로 살지 않고 이런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삶의 지혜를 가질 수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약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의 표적이란 요나가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살아난 것 같이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표적 중의 표적입니다. 이는 메시아의 표적으로서 승리의 표적이요 영광의 표적입니다. 예수님은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가 전한 메시지를 듣고 회개한 것 같이 그들도 회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치 않고 여전히 악하고 음란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인하여 심히 슬퍼하시며 떠나 가셨습니다.

둘째, 역사의식이 없는 제자들: 예수님과 제자들이 호수 건너편으로 갔을 때 제자들이 떡 가져 오기를 잊었습니다. 이때 마침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6) 예수님은 제자들을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악영향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의논한 후 에수님이 떡에 관해 말씀하신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떡을 가지고 오지 않은 일로 예수님께로부터 책망 받을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8) 결혼문제가 있는 자는 모든 것을 결혼문제와 관련시켜 생각합니다. 이와같이 제자들은 떡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떡과 관련시켜 생각했습니다. 떡 문제는 장래 안정(security)문제입니다. 그들은 장래에 대한 염려로 심령이 막히고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젊고 미래가 창창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좀더 높고 좀더 고상한 것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들의 또 다른 문제는 역사 의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냐?” 그들은 “열 두 바구니이다”라고 합창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물으셨습니다.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더냐?”(10) 그들은 다시 합심하여 “일곱이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역사 창조자로서 무엇보다도 역사 의식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역사의식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이런 그들을 심하게 책망하시면서 역사교육을 시키셨습니다. 이는 역사의식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의식이 없는 자는 현시대에 대한 영적 통찰력을 가질 수 없고, 미래에 나아갈 방향 감각을 가질 수 없습니다. 역사의식이 없는 자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어찌 내 말함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누룩은 침투하는 힘이 있어 조금만 넣어도 전체를 부풀게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누룩은 악영항을 의미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세속주의의 악영향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경계해야 할 누룩도 세속 인본주의입니다. 오늘날은 세속 인본주의가 교회 내에도 깊이 침투하여 순수 복음신앙을 가진 자가 이상한 자로 취급당하고, 세속 인본주의 신앙을 가진자가 멋있게 신앙 생활하는 자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힘써 복음신앙을 붙들고 세속 인본주의를 경계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분별력을 잃고 말려들게 됩니다.

Ⅱ. 주는 그리스도(13-23)

첫째, 베드로의 신앙고백(13-20):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셨을 때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13) 그들은 대답했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례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14). 세상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예수님을 이때까지 살았던 위대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인식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그 당시 성자로서 최고의 존경을 받았던 세례 요한이라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열정적인 선지자였던 엘리야라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백성들로 인해 눈물을 많이 흘렸던 예례미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시대 백성들은 예수님을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에수님의 참모습을 알지 못했습니다. 에수님은 인간의 지혜로 더듬어서 알 수 없는 깊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것은 제자들에게 개인적이고도 인격적인 답을 요구하시는 질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나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는 객관적인 관계가 아니라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예수님과 나 사이에는 그 어느 누구도, 또 어떤 것도 개입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개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의 중심을 지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왜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해 물었을까요? 어거스틴이나 칼빈이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누구인지 모른가도 해서 구원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은 나의 구원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아느냐에 따라서 구원이냐 심판이냐 하는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요한 17:3절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 곧 영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십니까? 에수님의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베드로가 수제자의 자리를 놓칠새라 재빨리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리스도란 약속된 메시아, 곧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란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그 본체가 영존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신앙고백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 되는 것으로서 매우 중요한 고백입니다. 로마서 10:9절은 말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은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음면 구원을 얻으리라” 이 신앙고백은 우리의 구원과 관계되는 것이므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초대 성도들의 경우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사회에서 핍박을 받고 심지어는 화형을 당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어떤 불이익과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면서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습니다. 그들이 에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것은 에수님께서 자신들을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시는 생명의 구주가 되시며 나의 인생을 다스리시는 왕이 되신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 신앙고백은 구원의 기초요 신앙생활의 출발점입니다. 이 신앙고백을 하게 될 때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는 구주와 죄인, 왕과 신하, 주인과 종의 관계가 됩니다. 또한 이 신앙고백을 하게되면 나는 더이상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예수님께 속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왕이 되시고 나의 전부가 되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때 주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시고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우리가 이 신앙고백을 하지 아니할 때 우리는 마음에서 다른 이상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오 전능하신 돈이여! 당신은 나의 왕이시니이다. 오 아름다운 여인이여! 당신의 나의 왕이시니이다. 오 세상 권력과 명예여! 당신은 나의 구주이십니다” 이런 엉뚱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을 해야 됩니다.

베드로가 이런 신앙고백을 한 것은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에베소서 1:17절은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실 때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지식과 지혜와 직관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 수 없습니다. 이는 오직 위로부터 계시가 임해야 됩니다. 계시의 영은 겸손한 자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11:27).

18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여기서 ‘반석’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의미합니다. 카톨릭에서는 교회의 절대 권위를 세우기 위해 ‘반석’을 베드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불완전한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얼마 후에 예수님께로부터 사단이라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또 그는 예수님의 수난 기간에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반석되신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기초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고전13:11). 그러므로 18절 말씀은 이렇게 풀이할 수 있습니다. “너의 이름은 베드로라. 그리고 네가 고백한 진리는 반석이라. 내가 그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여기서 ‘교회’는 건물이나 제도나 조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엄밀히 말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사람들의 공동체를 뜻합니다. 이 교회의 권세가 어떠합니까?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음부의 권세란 죽음의 권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권세가 결코 교회를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에수님은 베드로와 같이 신앙고백을 한 자에게 천국 열쇠를 주십니다.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 말씀은 복음 전하는 자의 권세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 전하는 자들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십니다. 복음 전하는 자가 복음을 전하면 구원의 역사가 일어 나지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아무런 역사도 일어 나지 않게 됩니다. 복음 전하는 자들에게는 생사여탈권이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그만큼 특권이 있는 반면 책임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복음이 완성되지 않았음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가 경계하셨습니다(20).

둘째, 예수님이 어떻게 그리스도가 되시는가(21-23): 21절을 보십시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시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예수님은 “must”라고 하심으로 반드시 겪어야 할 과정임을 강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고난의 메시야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을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 하였도다”(사53:3). 세상 왕들은 무력으로 백성들을 정복하고 다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큰 권능을 가지셨지만 결코 무력을 사용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난과 죽으심을 통해 그리스도요 왕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예언의 성취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두신 하나님의 뜻은 세상 죄를 위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다 살기를 원하지 죽기를 원치 않습니다. 세상에 거꾸로 매달려 살아도 살기를 원합니다. 살아도 편히 살기를 원하지 아무도 고난을 원치 않습니다. 또한 죽더라도 아무 고통없이 편안히 죽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죄 때문에 많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너무 고난을 많이 받으셔서 슬픔의 주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속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온전한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우리의 주요,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심을 통해 사랑의 왕이 되시고 평화의 왕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심을 통해 주의 주가 되시고 왕의 왕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심을 통해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는 생명의 주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억센 팔로 예수님을 붙들고 간했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충성심도 컸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고난보다 영광만 생각했습니다. 베드로의 인간적인 생각은 예수님께 시험이 되고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방해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심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사람의 일이 아무리 선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기초하지 아니할 때 결국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사단적인 생각이 되어 버립니다.

Ⅲ. 제자의 길(24-28)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람들의 생활양식이 어떠해야 하며, 또한 궁극적인 희망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사람들의 생활양식: 24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예수님의 사람들의 생활양식은 예수님과 같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크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인간의 욕망을 부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명의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람들도 자기 생각과 계획과 욕심을 부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람들은 날마다 사명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우리가 힘든 세상에서 하루하루 살아 나가기도 벅찬데 왜 사명의 십자가까지 져야만 하는 것입니까? 이는 사명의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죄와 삶의 십자가를 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명의 십자가 없이 자기만을 위해 살 때 편하고 행복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명의 십자가가 부담스러워 좀 자유스럽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사명을 떠났습니다. 처음 얼마 동안은 편하고 자유로운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조금 후에는 더 무거운 죄의 짐이 그를 누르고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점점 곤고해지고 고독해지고 권태로워졌습니다. 마침내는 악령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명의 십자가가 없는 삶은 그 자체가 죽은 삶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위해 이기적인 삶을 사는 자는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예수님은 25,26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William MacDonald씨가 쓴 “단 한번 뿐인 인생”이라는 책은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패트라는 사람이 뉴욕 시가지를 걷고 있는데 갑자기 흉기를 든 괴한이 나타너서 “목숨을 내놓든지 돈을 내놓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라고 협박했습니다. 그런데 패트는 “목숨을 내놓겠다. 돈은 내 노년에 필요하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와같이 사람들은 가치관이 전도되어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알지 못합니다. 사람이 만일 부와 명예와 권세와 세상의 모든 것을 얻었다 할지라도 죽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 귀한 것을 어디에 쓸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인생은 시행착오할 기회가 없이 단 한 번의 기회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하여 자신을 잃을 때 결국 모든 것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되시기 때문에 전 인생을 바쳐서 섬길 만한 절대 가치가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사람들은 자기 부인을 통해 고상해야 되고 희생적인 사명인의 삶을 통해 영광스러워야 합니다. 이것이 생명의 길이요 행복의 길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사람들의 희망: 사람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자 남을 해치고 악을 행합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예수님께서 처음 이 땅에 오셨을 때는 구주로 오셔서 죄로 병든 인생들을 섬기시고 살려주셨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십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는 초라한 모습으로 오시지 않고 심판주요 영광의 주로서 그 천사들과 함께 영광 중에 오십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새 하늘과 새 땅도 임하게 됩니다. 그 때 모든 악한 자들을 멸하시고 세상의 모든 불의를 제거하십니다. 또한 진리를 좇아 의롭게 산 자들에게는 상을 주시고, 욕심을 좇아 자행자지한 자들은 심판하십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 자들은 그 마음에 하늘나라에 대한 산소망이 있기 때문에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죽음을 맛보지 않습니다(28).

이시간 한 분 한 분이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신앙고백을 해야 되겠습니다. 또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사명의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통해 영광스러운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