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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Ⅱ 부:마태복음 17:1-27(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by Mark Yang   08/16/2019   Matthew

Message


마태복음 Ⅱ부 제 1 강

너희는 저의 말을 들어라

말씀: 마태복음 17:1-27
요절: 마태복음 17: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마태복음 17장부터는 제Ⅱ부입니다. Ⅱ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길에 있었던 사건들과 예루살렘에서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기록입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변형되신 사건과 귀신들린 아이를 고쳐주시는 사건이 대조되어 나옵니다.

Ⅰ. 변형되신 예수님

1절을 보십시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엿새 후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기초로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비밀과 제자의 길을 가르쳐주신 엿새 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신 후 3박 4일간 산악 훈련을 떠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를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를 데리고 높은 산으로 가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고난과 십자가의 말씀을 들은 후 충격을 받고 밥맛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만 가면 예수님과 함께 화려한 영광을 얻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소망을 물거품이 되게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낙심하고 풀이 죽었습니다. 특히 대표로 나서서 ‘주여 그리마옵소서.’하다가 호되게 책망 받은 베드로는 절망과 낙심으로 인해 해가 중천에 뜨기까지 잠을 자고 일어난 후에 기도실에 들어가 또 잤습니다. 이들은 영적으로 어려서 영적인 세계를 잘 알기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영광스런 영적 세계를 보여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세 제자들이 산에 올라갔을 때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갑자기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형체가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에서 빛이 나기 시작하더니 태양과 같이 강열하여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또 흙먼지가 묻고 구겨져 있던 주님의 옷이 변화되어 빛과 같이 눈부시게 희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그 형체가 찬란한 영광의 형체로 변화 되셨습니다. 와! 이는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산에 올라오시기 전 예수님의 모습은 죄인들을 섬기느라 상한 모습이었습니다. 무리들을 섬기시느라 자주 굶으신 예수님.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신 예수님! 이 예수님의 모습은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사람들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습니다(사53:2)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을 함부로 대하였습니다. 제자들도 종종 예수님을 만만히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본래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본래 해와 같이 빛나는 온전한 영광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성경에서 흰 옷은 순결과 승리를 상징합니다. 구약에서 모세도 하나님을 만난 뒤 얼굴에 광채가 나서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러나 이는 반사된 빛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본체가 천지를 창조하신 영광스런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에게는 아무도 가까이 할 수 없는 영광의 광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장차 모든 인생들을 심판하실 엄위하신 심판주요, 거룩한 빛에 거하십니다. 변형되신 예수님의 모습은 실로 제자들이 이 때까지 경험하지 못한 장엄한 모습이었습니다. 이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장차 이 땅에 오실 영광스런 모습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제자들 몰래 변형되지 않으시고 제자들 앞에서 변형되신 데는 어떤 뜻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 속에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새겨주기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마음 속에는 가난하신 예수님, 양들을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 고난 당하시는 예수님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의미있고 보람있지만 죽도록 고생하시는 예수님만을 바라볼 때 자주 슬픔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신들도 결국 예수님처럼 고생만 할 것이 아닌가 생각할 때면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습니다. 항상 손해 보다가 마지막에도 손해볼 것 같았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십자가의 도리를 마음으로 영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끝이 아닙니다. 우리의 진정한 목표는 십자가를 지며 고생하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딤후2장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 할 것이요(딤후2:11,12)” 계22장은 말합니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리로다(계22:5)”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세세토록 왕노릇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희생한 것은 작지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광은 너무나 큽니다. 이 예수님의 영광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 땅에서 자신있게 주를 위해 희생하고 불의한 세상에서 의를 위해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에는 어떠한 모습의 예수님이 새겨져 있습니까? 영광의 주님이 새겨져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올라가시는 예수님, 나의 죄를 위해 처절하게 고통 당하시고 죽으신 예수님만이 새겨져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 죄사함의 은혜 때문에 눈물도 흘리고 예수님을 따르고자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은혜는 조금씩 사라지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니 항상 손해만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 때 신앙생활이 무거운 연탄 리어커를 끌고 언덕 위를 오르는 것처럼 피곤하게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안따르자니 인생이 허무하고 또 심판 받을 것같아 세상으로 갈 수도 없습니다. 이 때 생각나는 것이 하필이면 십자가 많은 U.B.F.로 오게 되었는가? 적당히 주일 예배만 보면 되는 그런 곳에 인도되었으면 좋았을걸 하고 생각하며 운명주의적으로 신앙생활 하게 됩니다. 이는 그 마음에 영광의 예수님이 새겨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보좌 우편에 앉아 계셔서 만유를 통치하고 계십니다. 이 빛나고 영광스러운 예수님을 생각할 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가 깨닫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승리의 확신 가운데 기쁨으로 사명의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영적인 눈을 밝히어 영광스런 예수님의 참모습을 보게 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대화의 내용은 장차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모이면 자신들의 죽음에 관해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이면 어떻게 하든지 먹고 살 일에 대해 이야기 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이 보통 사람의 죽음과 다르다는 것을 시사하여 줍니다. 보통사람이 죽는 것은 자기 죄를 인해 죽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죽으심은 바로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로서의 대속의 죽으심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여 생명을 얻게 하는 예언의 성취로서의 죽으심입니다. 이것은 구속역사의 핵심이요, 정점입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하여 말씀을 나눈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십자가의 죽으심을 앞두신 예수님에게 고난을 감당하시도록 격려하고 합심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가장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섬기느라 많은 고생을 한 사람들입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200만 명의 노예백성을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기 위해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는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를 사모하고 사모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의 땅을 눈으로만 보고 건너가지는 못하게 하셨습니다. 엘리야는 악녀 이세벨의 영향력아래서 불신과 우상숭배가 가득한 이스라엘에서 홀로 450인의 바알의 선지자들과 싸운 고난의 선지자입니다. 그는 일생 아합과 이세벨에게 쫓겨다니며 주림과 위험 속에 생명의 위험을 수없이 겪었습니다. 한 번은 너무 괴로운 나머지 “주여 이제 고생이 족하옵니다. 저의 생명을 취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세상에서 고생만 죽도록 하고 아무 영광도 누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다시 세상에 나타난다면 한맺힌 할아버지 유령이 되어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와 엘리야가 변형되신 예수님 곁에 영광스런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모든 고난을 거친 그들이 현재 하나님 나라의 영광 중에 거하고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의 고난은 장차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지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많은 고난을 당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난 당하심으로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서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모세나 엘리야, 예수님은 서로 다른 시기에 살았으나 모두 영광 중에 동시에 나타났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도 주님을 위해 많은 고난을 겪으면 장차 모세와 엘리야같이 예수님의 영광에 참예하게 될 것입니다.

Ⅱ.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4-13)

4절을 보십시오. 영광스런 광경을 목격한 베드로가 무슨 말을 하였습니까?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기도시간에 졸고 있던 베드로는 갑자기 나타난 장엄하고 영광스런 광경에 놀라 정신 나간 소리를 하였습니다.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이는 베드로의 내면을 잘 말해 줍니다. 그는 변형되신 예수님과 위대한 하나님의 종 모세와 엘리야를 영광 중에 만나자 더이상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바로 이거야! 그는 이 때까지 모든 고생을 보상 받는 것 같았습니다. 이 일이 꿈이 아니길 바랬고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말기를 원했습니다. 세 분이 좀 더 머무르려면 초막이라도 얼른 지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는 초막 문지기를 하더라도 영광 중에 있기를 원했습니다.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사사건건 트집잡는 바리새인들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이런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변화산에 살어리랏다. 사랑하는 예수님, 모세, 엘리야와 함께 변화산에 살어리랏다. 어기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우리는 이러한 베드로의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고난을 싫어하는 인간의 본성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죽으실 것을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수제자 베드로는 그 의미도 모르는체 영광만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엿새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못지시도록 말리다가 호되게 책망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기 욕심과 이상을 버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말을 할 때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었습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구약에서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상징했습니다.(출16:10, 19:9)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영접치 않자 하나님께서 직접 제자들을 push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이시기 때문에 제자들은 절대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반드시 들어야 할 말씀이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이 고난받고 죽으시며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고난 없이 직통으로 영광받는 메시야만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증거하는 메시야,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메시야는 고난을 통하여 영광을 받는 메시야입니다. 고난을 통한 영광, No cross no crown. 이것을 영접해야 합니다. 우리도 할 수만 있으면 고난없이 영광만 받고자 합니다. 시험공부는 하지 않았으면서 혹시 A+ 나오지 않았을까 기대합니다. 열심히 양들 심방하고 1:1하지는 않으면서 양들이 쑥쑥 자라나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세상에 그런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심은대로 거두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도 썩는 밀알의 진리에서 이를 잘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고난받지 않고 영광을 누리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단이 주는 것입니다. 사단은 사람들에게 쉽게 십자가를 지지 않고 영광을 얻으라 말합니다. 그리고 그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사단이 주는 세상 영광은 곧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영광 뒤에는 허무와 죄의식과 고통이 뒤따릅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만이 영광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둘째,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려면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본성상 십자가를 싫어합니다. 엔트로피 법칙에 의하여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십자가가 있어야 생명력이 있고 성장이 있습니다. 매일 놀고 먹는 사람들은 힘이 남아 돌아가니까 spirit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사명이 없이 놀고 먹을 때 오히려 무기력해집니다. 방학 때 집에 내려가 할 일 없이 빈둥거릴 때 얼마나 무기력하고 비참했는가 알 수 있습니다. 반면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동작이 다르고 눈동자의 빛이 다릅니다. 계단을 올라갈 때도 올라갈 때도 어슬렁 어슬렁 허우적대며 올라가지 않고 두 계단씩 박력있게 올라갑니다.

십자가를 질 때 우리는 능력이 생기게 됩니다. 목자생활을 하려면 사실 십자가가 많습니다. 전공공부 외에도 말씀공부, 소감, 메시지 준비, 각종 기도모임, 1:1 양들 심방, 아르바이트까지 몇 배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힘이 듭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다 보면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능력이 생기면 더 많은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또 말씀의 종이 되려면 우리는 1:1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는 열심히 1:1하는 사람도 있고 적당히 지내는 분도 간혹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다릅니다. 목자는 1:1 하면서 더 많이 배웁니다. 1:1하면서 말씀의 깊은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양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애를 쓰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내면이 성장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과 1:1 하다 보면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다 품을 수 있는 풍성한 내면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1:1을 하지 않으면 목자로서 성장이 없습니다. 1:1의 십자가는 우리를 위대한 성경선생이요, 하나님의 종으로 성장하게 합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강하게 하고, 성장하게 만듭니다.

이종국 목자님은 처음에 왔을 때 너무나 연약하고 꺼벙하고 실수가 많아서 소망이 잘 가지 않았습니다. 예상대로 이 분은 목자가 된 뒤 일 년 내내 양을 좇아 다녀도 한 명도 치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fishing가면 양으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돌아왔습니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이 때 마음으로부터 포기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분은 1:1의 십자가를 지고자 결단하고 양이 붙거나 말거나 5년 동안 꾸준히 fishing하고 심방을 다녔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이 분의 내면이 몰라보게 강해진 것입니다. 또 양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끈질기게 돕는 내면성이 생겼습니다. 그 열매로 김문규 형제님 같은 신실한 양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또 이번 수양회에서는 ‘주는 그리스도’강의를 능력있게 감당하며 큰 말씀의 종이요, 목자로 성장하였습니다.

이주석 목자님도 처음에는 “코가 커서 교실에 산소를 부족하게 한다.”는 것 외에는 주목 받지 못하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분은 조용히 누구보다도 열심히 fishing하고 1:1을 하였습니다. 이 때 이 분은 Mark T.회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큰 일꾼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십자가는 참으로 유익한 것이요,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 십자가라면 어찌하든지 좀 덜 지고자 투쟁하였습니다. 이는 어찌하든지 덜 성장하고 싶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십자가를 사랑하고 십자가라면 어찌하든지 더 지고자 하는 십자가의 용사로 변화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6-8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오직 예수님 외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세도 엘리야도 그 영광도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베드로의 심정이 얼마나 허탈하였을까요?(이럴 줄 알았으면 사인이라도 받아둘 걸 하고 아쉬워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영적인 눈이 조금 띄어졌습니다. 그들은 이 영광스러운 사건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였습니다.(벧후1:16-18)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이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잘못된 메시야관이 전파될까 경계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엘리야 문제를 꺼냈습니다. 서기관들은 말라기 4:5 말씀에 근거하여 메시야보다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엘리야가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예수님이 메시야로 죽으실 때가 아직 멀지 않았을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엘리야가 이미 왔음을 말씀하시며 예수님도 이와 같이 메시야로 오셨지만 사람들이 함부로 대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비로서 오리라 한 엘리야가 세례 요한임을 깨달았습니다.

Ⅲ.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신 예수님(14-27)

산상의 변화와 산밑의 광경은 영광과 고난, 빛과 어두움, 하늘과 땅으로 대조되어 나옵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오자 문제많은 양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리 중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했습니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 지라” 귀엽던 아들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눈이 뒤집어지고 거품을 흘리는 모습을 아버지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같은 절망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아이는 잘 있다가도 불만 보면 뛰어 들어가고 물만 보면 다이빙 하였습니다. 18절을 볼 때 그 아이의 문제는 귀신들린 것이었습니다. 귀신은 아이를 불과 물에 뛰어 들어 죽게 하고자 했습니다. 그 아버지를 고통과 비탄에 빠뜨렸습니다. 그는 이런 아이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왔으나 마침 예수님이 계시지 않아 인턴 제자들에게 고쳐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아이를 앞에 놓고 능히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은 세상의 운명적이고 슬픔 가득한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현실 세계는 귀신의 세력이 놀아나는 비탄과 운명으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귀신의 세력에 이끌려 다니는 아이나 무력한 아버지는 이해할 수 있어도 무력한 제자들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고통하는 이 세대를 위해 세우신 영적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하여 무력한 모습으로 있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무엇이라 대답하셨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 오라” 예수님은 그 시대가 믿음이 없고 가치관이 삐뚤어진 시대로 보셨습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훈련을 받았으므로 아이의 문제를 능히 해결할 수 있는 자립적인 목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그 세대를 대표할 만한 영적 지도자들이었으나 무능했습니다. 이들을 보시는 예수님은 절로 탄식이 나왔습니다.

아이를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귀신이 나가고 아이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 때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님께 나아와 실패의 원인을 물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은 작지만 살아있는 믿음이요 생명력이 있는 온전한 믿음입니다. 이는 온전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제자들이 실패한 원인은 자신들의 경험과 능력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큰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겨자씨만큼 작지만 온전한 믿음이 요구됩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얼마나 많이 불신함으로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실 수 없는가 깨달아야 합니다. 하루 24시간 우리는 믿음의 생각보다 불신적인 생각에 더 많이 시달립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가 무능력하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불신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능력없음을 자학할 것이 아니라 불신을 회개하고 믿음으로 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해야 합니다.

에수님은 제자들이 갈릴리에 모였을 때 또 다시 인자가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가르치셨습니다. 이 번에도 반발하거나 헛소리 하는 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심히 근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잊어버릴만 하면 반복하여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진리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제자들의 마음에 새기고자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24-27절은 성전에 관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지만 사람들로 오해케 하여 실족케 하는 일이 있을까 하여 세금을 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돕기 위하여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영광을 마음에 새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영광을 바라보며 십자가를 지고 생명의 구주 예수님을 좇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