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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Ⅱ부:마태복음 18:1-35(천국에서 큰 자)

by Mark Yang   08/16/2019   Matthew

Message


마태복음 제Ⅱ부 제 2 강

천국에서 큰 자

말씀: 마태복음 18:1-35
요절: 마태복음 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 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오늘 말씀은 인간의 위대성이 어디에 있는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위대해 지기를 원합니다. 우리도 모두가 위대한 자, 큰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큰 자에 대한 참된 개념을 알지 못해 마음 고생 할 때가 많습니다. 이 시간 어떤 자가 참으로 큰 자인가 배워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큰 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천국에서 큰 자(1-14)

1절 말씀은 제자들의 질문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그 때에’란 “천국에서 누가 크니이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 때의 상황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 후 인자가 왕권을 가지고 올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또 세 제자들에게는 변형되신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천국이 임박했음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천국이 오는 것은 좋은데 제자들에게는 한가지 마음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누가 크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서로가 “네가 크냐 내가 크냐”를 놓고 보이지 않는 가운데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자 예수님께서 직접 해결해 주시기를 바라고 물었습니다. “천국에서 누가 크니이까?”

“천국에서 누가 크니이까?” 이 질문은 제자들 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상 권력의지를 가진 모든 인간들을 흥분시킨 질문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큰 자가 되고자 하는 권세욕과 명예욕이 있습니다. 이는 특히 남성의 세계에서 더욱 강합니다. 오늘날은 실리적인 세상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명예나 권력보다 실리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떤 모양으로든지 위대한 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남자는 결혼하면 가정의 왕이 되고자 권위를 부립니다. 또 여자들은 파출부를 두어서라도 권세를 부려 보고자 합니다. 또 아무의 간섭도 받지 않는 자기 세계만을 만들어서 자기 자신의 왕이 되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남의 위에서 명령하고, 지시하는 자가 큰 자라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어 서로 높이 되고자 시기하고 경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좇으면서도 여전히 인간적이었고 세상적이었습니다.

2, 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제자들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천국에서는 누가 크냐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변화되어 어린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조차 없다고 하십니다.

어린아이같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어린아이는 단순하고 순종적입니다. 또 내면이 순수하고 진실됩니다. 어린아이는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자기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자기의 부족함을 알기 때문에 끊임없이 묻고 배웁니다. “엄마, 이게 뭐지?”, “하늘은 왜 파래?”, “하나님은 왜 하늘을 파랗게 지으셨지?”하고 리틀 마리아가 엄마 마리아에게 계속 물었습니다. 밤 2시까지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린아이들은 한 마디로 겸손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 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세상에서는 큰 자가 되기 위해서 남을 깍아 내리고 자기는 높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정반대로 자기를 낮추는 자, 곧 겸손한 자가 큰 자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은 방법적인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인 변화의 문제입니다. 겉모양만 겸손한 척하고 속마음은 교만하다면 결코 겸손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회개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되어 새사람이 될 때 형성되는 내적 열매인 것입니다. 이는 본질적인 변화요, 인격의 변화입니다. 이렇게 인격이 변화되어 겸손한 자가 될 때 진정으로 큰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큰 자가 되길 원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자아를 발견하고 자기를 낮추는 투쟁을 해야 합니다.

겸손은 모든 면에서 행복의 기초가 됩니다. 자기를 낮추고 겸손한 마음을 품을 때 심령에 잔잔한 은혜와 평강이 차고 넘치게 됩니다. 겸손한 자는 어딜 가나 남에게 은혜를 끼치고 복의 근원이 됩니다. 겸손한 자는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는 흔히 세상에서 겸손한 자들은 짓밟힐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힘써야 할 것은 겸손을 배우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크리스챤의 덕 중 가장 중요한 덕은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세째도 겸손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장한다는 것은 결국 점점 더 자기를 낮추고 겸손해 진다는 것입니다. 성숙한 자일수록 벼이삭과 같이 머리를 숙이고, 덜 되먹은 자일수록 보리 이삭과 같이 머리를 꼿꼿이 세웁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겸손해 질 수 있습니까? 이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본체가 되십니다. 사도 바울은 큰 자가 되고자 서로 다투는 빌립보 교회의 자매님들에게 이렇게 권면하였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자기를 가장 낮추셨기 때문에 가장 위대한 자가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 위대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 큰 자는 자기를 낮추는 자일 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 소자 하나를 귀히 여기는 자입니다. 높이 되고자 하는 자가 범하기 쉬운 죄는 소자 하나를 업신여김으로 실족시키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소자 하나의 귀중성에 대해 가르쳐주십니다. 5절을 보십시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여기서 어린아이의 특성은 3,4절에 있는 것과는 정반대로 연약하고 무력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런 자는 믿음이 어린 자, 내면이 연약하여서 도움이 필요한 자를 뜻합니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는 악착같고 유능하고 똑똑한 자만이 인정을 받고, 힘이 없고 연약한 자는 무시를 받습니다. 아무도 연약한 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도와줄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위대한 자는 연약한 자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뒤에서 연약한 자들을 돌보고 섬김으로써 진정으로 위대한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소자 하나를 영접하면 이는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자를 대할 때 함부로 대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대하듯이 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무시하기 쉬운 소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시기 때문입니다(마25:40).

6-9절은 소자 하나를 실족케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이 소자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케 하는 것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불신과 회의에 빠지게 하여 믿음을 잃고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어린 자를 무시하거나 판단할 때 실족시키기 쉽습니다. 또 감당치 못할 무리한 요구를 할 때 실족시키기 쉽습니다. 또한 지도자급에 있는 목자들이 서로 다툴 때 어린 양들은 마음에 상처를 받고 실족하게 됩니다. 특히 오늘날은 믿는 자로서 좋지 못한 영향력을 끼칠 때 이로 인해 실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믿음이 어린 소자 하나를 실족시키는 것은 연자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나을 만큼 심각한 죄입니다. 우리는 육의 몸을 입고 있기 때문에 100% 완전히 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실족케 하면 화가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실족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해서 엄격하고 남에게 대해서는 관대해야 합니다. 만일 내 손이나 발이 나로 하여금 범죄케 하면 찍어 내버려야 합니다. 또 눈이 범죄케 하면 빼어 내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두 손과 두 발,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낫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정말 손이나 발을 찍고 눈을 뽑아야 합니까? 신앙생활 하다가 병신이 되라는 말입니까? 이는 자신과 의 싸움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를 쳐 복종시키기에 힘썼다는 것은 바로 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고전9:27).

10-14절은 우리가 소자 하나를 귀히 여겨야 할 이유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저희 천사들은 신자 개개인마다 수호 천사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천사의 역활이 신자들을 보호하고 지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이 어린 자는 특히 보호가 많이 필요함으로 천사들도 자연히 신경을 쓰게 될 것입니다. 소자 하나를 무시하고 판단하게 될 때 천사들이 하나님께 상소를 하게 되어 그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잃은 양 비유를 통해 소자 하나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었습니다. 실리적으로 따지면 100마리에서 한 마리쯤 잃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한마리 때문에 시간과 물질과 정열을 허비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목자는 잃은 양 하나 때문에 잠도 못자고 마음이 상하여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목자는 잃은 양을 찾아 산과 들을 헤맵니다.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마리보다 더 기뻐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소자는 상대적으로 평가하여 업신여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으로 평가하여 귀히 여겨야 할 존재입니다. 우리는 제자양성을 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소자 하나를 가볍게 여기기 쉽습니다. 그리고 말 잘듣고 쓸만한 사람만 키우고자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제자 양성이란 강한 자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연약해진 소자를 품고 살려내어 쓸만한 예수님의 제자로 키우는 것입니다.

저는 그동안 예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여서 제자양성한다는 미명하에 양들을 거칠게 대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Young Tiger는 강한 자만이 남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에 범한 죄인가 깨닫고 연약한 자를 섬기고자 투쟁하고 있습니다. Young Tiger가 연약한 자들이 살아나는 모임이 될 것을 믿습니다.

Ⅱ.형제를 용서하는 자(15-35)

신자의 공동생활 중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형제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용서하는 자는 참으로 위대한 자입니다. 형제가 나에게 죄를 범할 경우 어떻게 해야 됩니까? 15절을 보십시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우리는 형제가 나에게 죄를 범할 경우 마음에 좋지 못한 감정을 품고 복수의 칼을 갈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 우리의 마음은 평화를 상실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형제 사이의 좋지 못한 감정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먼저 내가 나에게 범죄한 형제를 1대1로 찾아가서 그의 죄를 깨닫게 해주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도록 해야 됩니다. 사람에게는 자기 보호의 본능이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공개적으로 책망하면 마음 문을 닫고 반발하게 됩니다. 그러나 인격적으로 말씀에 기초해서 섬세하게 권고하면 마음을 열고 돌이키게 됩니다. 그런데 내가 먼저 찾아간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만일 형제가 나의 권고를 듣고 죄를 회개하면 그 형제를 얻게 됩니다. 그러면 둘 사이에는 깊은 사랑의 관계성이 맺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형제가 죄를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반발하고 계속해서 마음이 완악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때는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여 자기 죄를 분명히 깨닫도록 해야 됩니다(신19:15). 그래도 듣지 않으면 신자의 공동체인 교회에 공개적으로 알려야 합니다. 이는 죄의 누룩이 신자의 공동체에 퍼지지 않도록 경계하기 위함입니다.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가 회개할 때까지 교회 밖의 사람으로 취급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볼 때 교회는 최종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모임에 하늘의 권위를 부여하셨습니다. 이 권위는 성도들의 합심기도를 통해 나타납니다. 19, 20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중에 있느니라” 이 말씀에서 볼 때 성도들의 합심기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두 사람의 합심기도는 역사를 창조하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이사무엘 선교사님과 배사라 선교사님의 합심기도는 이 시대의 죽어가는 지성인들을 살리는 위대한 역사를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간조건이나 능력을 따라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합심해서 기도하는 자들을 통해 친히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개개인이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 할지라도 마음과 뜻을 합하여 합심해서 기도하지 않을 때 아무런 성령의 역사가 없게 됩니다. 깨어진 그릇에는 아무리 물을 부어도 소용없듯이, 성령의 그릇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개인이 좀 부족할지라도 마음과 뜻을 합하여 합심해서 기도할 때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있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 합심기도를 통해 새 역사가 창조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말씀을 듣고 있던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아와 말했습니다. “주여,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아마 베드로는 사사건건 자기를 물고 늘어지는 야고보와 요한을 용서하기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당시 랍비들의 교훈에는 사람의 죄는 세 번까지 용서하고 그 이상은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큰 관영을 베풀어야 되겠다고 결심하고 일곱 번 정도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로부터 칭찬받을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 와! 이는 70×7=490번, 아니 무한정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또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한 비유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어떤 임금이 회계할 때에 일만 빚진 한 종을 데리고 왔습니다.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이며 한 데나리온 일꾼 하루 품삯입니다. 한 달란트를 벌기 위해서는 한 노동자가 1년 내내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한다 하더라도 16년이 넘게 걸립니다. 일만 달란트는 그의 힘으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거액입니다. 하루 일꾼 품삯 5만원만 잡아도 30조원입니다. 임금은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빚을 갚도록 명했습니다. 빚 때문에 그의 인생은 파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할 수 없이 엎드려서 주인에게 긍휼을 구했습니다. 제발 한 번만 봐 주십시오. 꼭 벌어서 갚겠습니다.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그 빚을 일부분도 아니고 전부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그는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가 특사로 풀려나는 것같이 무한한 해방감과 자유를 맛보았습니다. 그는 주인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덧입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은 나가다가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약 500만원 정도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동관의 목을 잡고 “야 이놈아! 빚 안갚을테야! 니 내 돈 떼먹고 살 것 같아” 하며 다그쳐 물었습니다. 그 동관은 엎드리어 간구했습니다.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그러나 그는 허락지 않고 그 동관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를 본 동료들은 심히 민망하여 이 사실을 주인에게 고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노발대발하여 무자비한 악한 종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는 빚 때문이 아니라 그의 악함 때문이었습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

이 비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이 일만 달란트요, 형제가 우리에게 진 빚은 100데나리온에 불과함을 말해 줍니다. 헬라어로 빚은 죄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죄는 일만 달란트 빚과 같이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죄의 빚에 짓눌려 신음하며 절망적인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죄의 댓가로 무서운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예수 그리스도를 피흘려 죽게 하심으로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참자유와 기쁨과 평화를 주셨습니다. 이 큰 은혜를 덧입은 자로서 형제가 나에게 지은 조그마한 죄는 무조건 용서해 주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우리가 중심으로 형제의 죄를 용서할 때 심령에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이 샘솟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을 때 그 형제와의 관계성이 단절되고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성도 단절되어 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덧입고 형제를 긍휼히 여기고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는 자는 참으로 위대한 자입니다.

결론적으로 천국에서 큰 자는 자기를 낮추며, 소자 하나를 귀히 여기며,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하는 자입니다. 이런 내적 투쟁을 통해서 진정으로 위대한 자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