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Ⅱ부 제 3 강
부자 청년과 영생
말씀: 마태복음 19:1-30
요절: 마태복음 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 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오늘 말씀은 결혼 진리와 영생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날은 결혼 진리가 땅에 떨어지고 이혼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점점 사람 살기 힘든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결혼 진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또한 오늘날은 부자 청년과 같이 눈에 보이는 것은 추구하지만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을 위해서 자신을 투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영생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영적 눈을 밝히사 영적 세계의 비밀을 깨닫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Ⅰ. 결혼과 이혼(1-12)
1절 말씀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역을 마치시고 유대 사역을 시작하고 계심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유대 사역은 베뢰아 전도라고 불리워지는데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에 입성하기까지의 사역을 말합니다(19,20장).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것은 대권을 잡고자 함이 아니라, 인류 구속 역사의 하나님의 뜻을 섬기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자신의 문제가 심각할 때 남을 돌본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메시야의 긍휼은 끝이 없습니다. “큰 무리가 좇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저희 병을 고치시더라”(2).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일일이 저희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은혜로운 사역을 감당하고 계실 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시험했습니다.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3) 바리새인들은 영적 지도자들로서 마땅히 말씀을 연구하고 하나님의 양무리를 돌보는데 온 마음을 써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넘어뜨리고자 꼬투리를 잡기 위해 온 마음을 썼습니다. 그들이 이혼에 관한 질문을 한 것을 보면 이혼에 관심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생각하는 차원이 인간적이고 육신적이었습니다. 그들의 질문이 어떤 점에서 예수님께 시험이 될까요? 만일 이혼하는 것이 옳다 하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사랑의 도에 위반되므로 백성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특히 여인들이 분개할 것입니다. 만일 옳지 않다 하면 모세의 법을 어기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옳고 그름을 대답하시기보다 창세기 2장에 나타난 결혼의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는 이혼하는 근본 이유가 결혼의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세를 뛰어넘어 영원 불변한 진리인 창세기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두신 결혼에 대한 창조 본래의 뜻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4-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남자만 창조하지 않으시고 남자와 여자를 만드사 조화있게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남자를 지으실 때 소시민적인 인간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위대한 사명인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여자를 만드시되 남자의 사랑이나 받고 깍두기나 담는 깍두기 아줌마로 만들지 않으시고 남자를 위대한 사명인으로 낳고 키우는 돕는 배필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아름다운 에덴 동산을 창설하시고 또한 에덴 중의 에덴인 결혼을 창설하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결혼을 주례하셨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창2:24). 이처럼 결혼에는 창조의 깊은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첫째로, 결혼은 하나님께서 창설하신 것이므로 신성하고 고결하고 거룩합니다. 하나님께서 결혼을 창설하시되 창조의 주권에 기초하여 창설하셨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변개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둘째로, 결혼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키 위해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되는 연합의 뜻이 있습니다. 여기서 연합은 육신의 연합 뿐만 아니라 인격의 연합, 정신적 연합, 더 나아가 영적 연합을 의미합니다. 결혼을 하게 되면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이제는 둘이 아니요 한 몸이 됩니다. 둘이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비밀이 크도다”라고 하였습니다(엡5:32). 남녀 간에는 여러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몸의 구조도 다르고 느끼는 감정도 다르고 생각하는 것이 다릅니다. 뿐만 아니라 성장 배경이 다르고 기호가 다르고 취미가 다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차이는 그들을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조화를 이루어서 아름다운 역사를 창조해 냅니다. 이는 마치 전기의 +-가 합하여 찬란한 빛을 발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결혼에 대한 이런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할 때 서로 판이한 성격으로 인해 이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결혼의 진리에 대해 말씀하신 후 결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6b).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떤 경우에나 절대로 이혼해서는 안될 이유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결혼은 서로 좋아하는 사람끼리 마음이 맞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정욕을 채우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이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기 위해 남녀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연합하는 것입니다. 결혼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시는 것이므로 거룩하고 신성하고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임의로 나눌 수 없습니다. 이혼은 몸을 나누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을 범하고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큰 죄입니다. 우리는 이혼을 꿈에서 조차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결혼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진리를 영접치 않고 계속해서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그들은 최고의 권위를 모세의 율법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제어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 선이요 절대적 선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모세를 잘못 알고 있음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모세는 어쩔 수 없이 이혼을 허락하였지, 이혼하도록 명하지 아니했습니다. 모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노예생활에 젖어 감정적이고 육신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여자들을 정욕의 대상이나 노예와 같은 소유물처럼 취급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소유물을 버리듯이 내어버렸습니다. 모세는 이런 무책임한 남자로부터 여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이혼을 방지하기 위해 여인에게서 수치 되는 일이 발견될 때만 이혼증서를 써 주도록 허락하였습니다(신 24:1). 그러나 여인에게 ‘수치 되는 일’에 대한 해석이 문제였습니다. 보수적인 학자들은 이를 간음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자유주의 학자들은 이를 광범위하게 적용시켰습니다. 예를 들어 아내가 자식을 낳지 못하다든지, 밥을 태운다든지, 요리를 잘못하는 것도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하여 이혼 조건으로 삼았습니다. 율법은 사람의 죄악된 본성을 제어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본성이 변화되지 않는 한 사람들은 오히려 법을 이용하여 합법적으로 죄를 지었습니다. 이를 볼 때 법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완악한 마음이 문제입니다. 완악한 마음이 변화되어야만 법을 올바로 지킬 수 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여기서 음행은 이혼의 조건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음행 자체가 결혼의 진리를 파괴하는 행위
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음행한 연고 외의 이혼은 근본적으로 간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혼의 동기가 근본적으로 간음하고자 하는 정욕에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정욕 때문에 가정의 행복은 파괴되고 자녀들은 깊은 상처를 입게 되고 자신도 비참한 상태로 굴러 떨어지게 됩니다.
오늘날 이혼 문제는 심각한 사회 문제입니다. 미국에서는 이혼율이 60%에 달하고 러시아에서는 훨씬 더 심각하여 이혼율이 70%에 달합니다. 오늘날 러시아의 문제는 경제 문제보다도 도덕 문제가 더 심각합니다. 그들의 상태는 부도덕(immoral)의 상태를 지나서 탈도덕(amoral)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 없는 인간 사회의 단면을 잘 말해 줍니다. 인간이 자유롭기 위해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릴 때 육체가 되어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결혼 진리를 떠나 임의로 결혼하기 때문에 이혼도 임의로 하게 됩니다. 이혼은 임의로 쉽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로 인한 마음의 상처는 쉽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혼으로 인해 자녀들이 겪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 마음에 깊은 불신과 운명과 반항심이 생기고 애정 결핍과 고독으로 인해 절망의 심연으로 곤두박질치게 됩니다. 또 파괴적이 되어 사회의 문제아가 되어 버립니다. 이혼은 자기를 파괴시키고 가정을 파괴시키고 사회와 국가를 파괴시키는 파괴적인 행위입니다. 이 땅에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기초한 가정 교회(House church) 건설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10). 그들은 결혼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꿈이 있었습니다. 만일 마음에도 안드는 여자와 결혼하여 일생 이혼도 못하고 살 바에야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독신으로 사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이 있어야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11,12).
Ⅱ. 어린 아이와 천국(13-15)
13절을 보십시오. 때에 사람들이 예수님의 안수 기도를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예수님의 축복을 받아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데리고 왔을 것입니다. 아이들은 예수님께 서로 먼저 안아 달라고 울고 떼를 쓰며 시끄럽게 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를 보고 꾸짖었습니다. 그들은 어른들이 이혼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데 어린 아이들이 시끄럽게 군다고 꾸짖었는지 모릅니다. 제자들은 어린 아이들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여인을 무시하고 제자들은 어린 아이들을 무시했습니다.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을 비판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그들을 닮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 대해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꾸짖는 제자들을 물리치셨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사랑하시고 품에 안아 주셨습니다(15). 예수님께서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말씀하실 때 이는 어린 아이들의 단순성, 순수성, 겸손, 순종심, 신뢰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예수님께로부터 사랑과 축복을 받고자 나아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틀림없이 축복해 주실 것을 믿고 나아왔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1%의 의심이나 불신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순수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왔습니다. 전적으로 예수님의 품에 안기고자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왔습니다. 천국은 바로 이런 자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같이 복잡하고 이중적이고 교만하고 불신하고 비판적이고 권위적이고 세속적인 자들은 결코 천국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험한 세상을 살면서 단순한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 생각하고 복잡하게 되고자 합니다. 또 진실되면 세상을 살기 힘들다고 생각하고 거짓말도 배우고 권모술수를 익히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점점 타락해 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어른스러움을 벗고 어린 아이와 같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성장한다는 것은 복잡한데서 단순하게 되며, 교만한데서 겸손하게 되며, 불신의 사람에서 신뢰의 사람으로 되며, 인간적인 사람에서 영적인 사람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된다는 것은 한마디로 예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가장 어린 아이와 같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이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Ⅲ. 부자 청년과 영생(16-30)
16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는 청년이었고 부자였습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돈을 많이 벌어서 청년 재벌이 되었습니다. 또 그는 눅18:18절에 보면 관원이었습니다. 그는 최연소자로 고시에 합격하여 사회적인 지위와 권세를 얻었습니다. 보통 부와 권세를 소유하면 룸 살롱에 드나들며 도덕적으로 타락한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그는 계명을 흠이 없이 지킬 만큼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선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는 누가 보나 훌륭한 자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선망의 눈초리로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세상적인 행복의 조건을 구비하였기 때문에 마땅히 행복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혀 행복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달려와 꿇어 앉아서 영생을 얻기를 갈구하고 있습니다(막10:17). 영생이란 무엇입니까? 영생이란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질적인 것으로서 반드시 참 만족과 기쁨을 주며 행복이 내포되어야 합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선한 생활을 했지만 그의 삶에는 참 만족과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는 빈 공간으로 인해 늘 허무했고 불안했습니다. 영생 문제는 그에게 있어서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심각한 인생 문제였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겉으로 볼 때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것만 추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깊은 내면에 영생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파스칼은 ‘사람이 영생을 갈망하는 것은 잃어버린 영생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이라고 하였습니다. 영생 문제는 사람이면 누구나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인생 문제입니다. 이를 해결하지 못할 때 우리는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17a절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의 선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을 바로 잡아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선이란 무엇인가?” 이는 인류 역사 이래로 끊임없이 물어온 질문입니다. 힘있는 자들은 “약한 것은 악이고 힘이 곧 선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또 예술가들은 “아름다움은 것은 선이고 추한 것은 악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용주의자들은 “내게 유익이 되는 것이 선이고 나에게 해가 되는 것은 악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개념에 불과합니다. 선이란 절대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은 지고(至高)의 선으로서 모든 선의 절대 표준이 되는 선 그 자체가 되심을 의미합니다. 또한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하지 못함을 말해 줍니다. 성경은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범죄함으로 지고의 선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이탈되어 선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또 선을 행하고자 하는 선 의지는 있으나 선을 행할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롬7:18). 인간이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한다할지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선할 뿐,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는 선할 수 없습니다. 부자 청년은 선을 도덕적인 차원에서 생각하고 선을 행하면 그 대가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을 선하다고 생각하고 자기 의가 강합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이 죄인 됨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복음을 잘 영접치 않습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의 선의 개념을 바로 잡아 주신 후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17b). 성경은 우리가 계명을 완벽하게 지키면 생명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레18:5). 그러나 문제는 인간이 범죄함으로 계명을 지킬 힘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그가 말씀에 기초해서 죄인으로서 자아를 발견하고 믿음의 길에 들어서도록 돕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 청년은 “어느 계명이오니이까?”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18,19). 예수님의 말씀에 청년은 놀랍게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와! 얼마나 놀라운 대답입니까? 마가복음에서는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다고 하였습니다(막10:20). 그는 어릴 때부터 오락실에 가고 싶은 마음을 부인하고 까다로운 율법을 암송했습니다. 또 사춘기의 이유 없는 반항심도 극복하고 청년기의 심각한 정욕 문제도 극복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모든 것을 다 지켰으나 마음에는 영생의 기쁨과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노력을 했는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단 말인가? 자기의 의를 내세웠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이것은 부자 청년에게 큰 도전이었습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계명의 정신을 지키도록 하셨습니다. 그는 계명의 마디마디는 잘 지켰지만 그 근본 정신은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십계명의 근본 정신은 사랑입니다. 처음 4계명은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신6:5), 나머지 6계명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레19:18). 그는 신앙생활이란 남에게 폐 안 끼치고 도덕적으로 선하게 사는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이란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기 소유를 파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부자 청년은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근본적으로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어서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위해 희생할 줄 몰랐습니다.
둘째로, 하늘 나라에 소망을 두도록 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의 치명적인 약점은 재물에 소망을 두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재물은 그에게 우상이었습니다. 그는 돈을 많이 벌면 주와 복음 역사를 위해서 또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쓰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돈을 많이 벌게 되자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돈에는 이상한 마력을 지니고 있어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그가 돈을 많이 벌게 되자 자신도 모르게 재물을 사랑하게 되고 재물에 소망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는 돈을 많이 벌었지만 돈을 가치 있고 올바로 쓰는 법을 몰랐습니다.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돈을 가치 있게 쓰는 것입니다. 그는 영생을 갈구하였지만 그의 소망은 땅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하늘 보화를 위해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보화는 결국 썩고 쇠하고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지지만 하늘 보화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늘 보화를 얻기 위해 세상 보화를 파는 자는 참으로 지혜로운 자입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하늘 보화를 약속하신 후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바로 하늘 보화임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을 아는 것은 바로 그 자체가 영생입니다.(요17:3)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영생을 얻는 길을 분명히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여 가니라”(22). 그는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부담스러워서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영생을 얻고 싶었지만 재물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재물로 인해 영생의 문턱에서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문제는 세상 보화와 하늘 보화를 동시에 다 얻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 보화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땅의 보화를 버려야 합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부자 청년이 재물 때문에 근심하여 물러가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이 말씀은 재물에 소망을 두는 자는 구원을 얻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심히 놀랐습니다. 그들에게는 주님을 따르면 언젠가는 부자가 되리라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구원을 얻을 수 없다면 과연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26)”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고 하나님의 방법으로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은혜로 주시는 선물입니다.(롬6:23b)
27절을 보십시오. 이에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그는 부자 청년과 달리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는데 무엇을 보상해 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귀한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28, 2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이 말씀은 주와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자는 반드시 영육 간에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는 자는 장차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자기를 희생한 자는 예수님과 함께 영원토록 왕노릇하게 됩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됩니다(30). 항상 허리를 굽히고 겸손하게 예수님을 좇아야 합니다. 교만은 금물입니다. 세상 보화를 팔고 진정한 보화 되신 예수님을 좇음으로 영생을 소유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