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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Ⅱ부:마태복음 20:1-34( 섬기러 오신 예수님)

by Mark Yang   08/16/2019   Matthew

Message


마태복음 Ⅱ부 제 4 강

섬기러 오신 예수님

말씀: 마태복음 20:1-34
요절: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본문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와(1-16), 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의 말씀입니다(17-34).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복음의 일꾼들이 하나님께 대해 가져야 할 바른 자세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또한 예수님은 큰 자가 되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참으로 큰 자가 어떤 자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복음의 일꾼으로서 바른 자세를 갖고, 참으로 큰 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포도원 품꾼의 비유(1-16)

이 비유는 19:30절을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부자 청년은 영생을 갈구하였지만 세상 보화를 버리지 못해 영생의 문턱에서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런 부자 청년과 달리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다는 자기 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받을 엄청난 축복을 말씀하신 후 아울러 경계의 말씀도 주셨습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그리고 이를 비유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일꾼의 자세가 어떠해야 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먼저 찾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1절을 보십시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예수님은 천국을 엄청나게 큰 포도원을 가진 포도원 주인에 비유하셨습니다. 이 주인은 큰 부자이지만 늦게까지 자고 일어나서 아침 겸 점심을 먹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포도원에 들여 보낼 일꾼을 구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일하는 부지런한 자였습니다. 흔히 부자들은 거만하여서 일꾼들이 이력서를 써 가지고 와서 허리를 굽히며 “제발 나를 채용해 주십시오” 라고 아쉬운 소리를 할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은 정반대로 일꾼을 초청하기 위해 먼저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장터에 가서 일자리가 없어 놀고 섰는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인격적으로 초청하였습니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 품꾼은 복음의 일꾼, 포도원은 하나님께서 복음 역사를 감당하도록 주신 사명의 땅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는 구체적으로 캠퍼스 포도원을 가리킵니다. 일자리가 없는 실업자들이 직장을 애타게 찾듯이, 죄 많은 인간들이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 구원을 요청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교만과 자존심 때문에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먼저 죄인들을 찾아 오셔서 아쉬운 소리를 하셨습니다. 이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이사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습니다(사1:4-6). 그들은 죄로 인해 괴로움을 당할수록 더욱 더 마음이 완악해져서 하나님을 배척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 먼저 찾아 오시고 상한 심정으로 초청하셨습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1:18). 범죄한 백성들을 치료하시기 위해 자신을 낮추시고 먼저 찾아 오시다니! 이는 실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 오신 것은 마태에게 있어서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마태가 세리였을 때 아무도 그를 초청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그와 말하는 것조차 꺼려했습니다. 그는 몹시 고독했습니다. 그의 유일한 친구는 ‘머니’라는 삽살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그를 먼저 찾아 오셔서 ‘나를 좇으라’고 초청하셨습니다(마9:9). 마태는 감격하여 무조건 좇았습니다. 죄인들을 먼저 찾아오신 하나님은 실로 은혜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사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2절을 보십시오. 포도원 주인은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 보냈습니다. 그리고 제 삼시(아침 9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장터에 모여 자기를 고용해 줄 사람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아무도 고용해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아무 하는 일이 없이 서서 기다렸습니다(7). 노동자들은 하루 벌어서 먹고 살기 때문에 공치는 그날은 배고파 우는 자식들과 슬픈 아내의 얼굴을 쳐다 보며 인생의 비참함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일거리가 없는 노동자가 비참한 것과 같이 사명이 없는 인생은 비참합니다. 사람들은 일이 많으면 일이 많다고 불평합니다. 그리고 일을 하지 않고 쉬고 놀면서 편히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아무 사명이 없이 노는 것은 큰 벌입니다. 사람이 아무 할 일이 없이 놀 때 그 마음은 장래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또한 인생의 허무와 무의미에 시달리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안일과 죄에 빠져 술취하며 방탕하다가 결국에는 폐인이 되어 버립니다. 사람에게 할 일이 없으면 빨리 늙고 못쓰게 되어 버립니다. 사람에게 할 일이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것도 고귀하고 가치있는 사명이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사람이 무의미한 일을 반복해서 하는 것도 큰 벌입니다. 시베리아에서 큰 벌 중의 하나가 아무 의미가 없이 하루종일 맷돌을 돌리거나 삽으로 떠서 산을 옮기는 일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의미 있고 가치있는 일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일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그때 건강하고 만족과 기쁨이 넘치는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여러가지 할 일이 많이 있지만 사람을 복음으로 낳고 키우는 일처럼 의미 있고 가치있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캠퍼스 포도원에서 샛별과 같은 젊은 지성인들을 복음으로 낳고 키우는 일은 얼마나 축복된 일입니까?

4절을 보십시오. 포도원 주인은 할 일이 없어 놀고 섰는 품꾼들에게 사명을 주었습니다.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이것은 실로 품꾼들에게 임한 은혜였습니다. 품꾼들은 이제 더 이상 장래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과 허무와 무의미에 시달리지 않아도 됩니다. 자신을 쓸모 없는 자라고 자학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은 이제 주인의 아름다운 포도원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열심히 일만 하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은혜입니다. 거기에다 삯도 주시니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것 중의 하나가 사명의 존재라는 것입니다(창1:28). 사람이 사람다운 인생, 보람있는 인생, 건강한 인생, 일생 후회 없는 행복한 인생을 살려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위해서 열심히 일해야 됩니다.

셋째, 하나님은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주인은 조금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장터에 나가 일꾼을 찾고 있습니다. 제 6시(정오)와 제 9시(오후 3시)에 나가 일꾼들을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포도원에는 얼마든지 일할 거리가 많기 때문에 많은 일꾼이 필요합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마9:37,38). 그러나 주인이 일꾼을 찾는 진정한 이유는 할일 없이 놀고 있는 자에게 사명을 줌으로써 은혜를 베풀고자 함이었습니다. 이는 십일 시에도 나가서 일꾼을 부르는데서 잘 나타났습니다. 십일 시는 오후 5시이기 때문에 일할 수 있는 시간은 1시간 밖에 되지 않습니다. 또 그들은 그동안 힘든 일을 피하여 빈둥빈둥 놀면서 죄를 지었거나, 아니면 병약하여서 아무도 고용해 주지 않는 쓸모없는 자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고용하는 것은 주인에게 큰 손해가 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어서 그들도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도록 하였습니다. 주인은 돈 버는데 관심이 있기 보다 품꾼들의 행복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사람들에게 사명을 감당할 기회를 부여하고 사람들이 포도원에서 사명을 열심히 감당함으로써 행복한 인생을 살기를 원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주인은 은혜를 베풀기 위해 사람을 찾았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은혜로 사람을 천국 복음 역사에 부르십니다. 그리고 개개인이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사명을 감당함으로써 행복한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실로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포도원에는 누구라도 들어 올 수 있도록 넓게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열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후 6시 마감 시간이 되면 문을 닫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결산을 합니다. 이제 일이 다 끝나 일꾼들이 삯을 받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청지기에게 나중 온 품꾼들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고 하였습니다. 청지기는 오후 5시에 온 자들에게 한 데나리온씩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았으므로 0.1데나리온만 주어도 됩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의 처 자식을 생각하고 하루 품삯을 주었습니다. 이 삯은 일한 대가라기보다 온전한 은혜였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영생을 얻는 것도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일을 적게 한 사람은 삯도 적게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누구나 공평하게 영생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넷째, 하나님은 절대 주권을 가지신 분이시며 그 주권은 선합니다. 10-12절을 보십시오. 이른 아침부터 일했던 품꾼들은 1시간만 일했던 품꾼들이 한 데나리온씩 받는 것을 보고 큰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그들은 열배 이상 일했으므로 열 데나리온을 받을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청지기는 이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씩 주었습니다. 이에 그들은 주인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그들의 원망은 상대적으로 생각해 볼 때 타당하게 보입니다. 그들이 옳고 주인이 불공평하고 잘못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불평은 타당치 못합니다. 그들은 주인이 늦게 온 자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을 보고 “우리 주인은 참으로 은혜와 자비가 풍성한 분이시구나” 생각하고 주인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주인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남과 비교하여 자기 의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절대성을 상실하고 상대적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과거 할 일이 없어 비참할 때에 포도원에 불러 주신 주인의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먼저 부르심을 받고 남보다 일을 좀 많이 했다고 해서 특권의식을 가지고 특별대우를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교만해져서 은혜를 감사치 않았습니다. 은혜를 감사치 않는 것은 죄의 뿌리입니다(롬1:21). 대개 열심히 일을 하여 자기 의가 많고 율법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남과 비교하여 이렇게 되기 쉽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심령에 은혜가 없고 불평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 죄로 인해 아무 쓸모 없던 죄인을 예수님의 보배 피로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일할 수 있게 하신 그 자체만으로도 늘 감사해야 됩니다.

13-15절을 보십시오. 주인은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했습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주인은 약속을 지켰기 때문에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자기의 것을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습니다. 주인은 이 권리를 은혜 베푸는데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인의 주권은 선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주권은 선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하나님이 나에게 잘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쁘다,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이는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했거나 상대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이 잘못된 것입니다. 인생들은 아무도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이의를 달거나 원망할 수 없습니다(롬9:14-21).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주시요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인생 개개인에게 두신 뜻은 언제나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두신 선하신 주권을 영접하고 그 주권에 절대 순종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할 때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게 됩니다(16).

Ⅱ. 참으로 큰 자(17-34)

예수님은 이제 인류 구속 역사를 섬기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자 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일을 더욱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예수님의 마음에는 자신에게 닥쳐 올 모든 일이 하나님의 확고한 계획 속에 있다는 분명한 통찰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흑암에 대한 통찰력 뿐만 아니라 광명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또한 고난에 대한 지식 뿐만 아니라 승리에 대한 지식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고자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주님의 지속적인 헌신이요, 또한 자신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이루어 드리고자 하는 결단의 표시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복음의 비밀을 계시하시고 그들이 예수님의 고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도록 마음 준비를 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겪어야 할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중대사를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중대사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전혀 귀에 들어 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고난에 대해 말씀하실 때 마음이 불안하기는 했지만 예수님의 입성과 함께 영광스러운 메시야 왕국이 건설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19:28절에서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으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몹시 흥분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 왕국이 건설되면 누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을 것인가에 대해 예민해졌습니다. 그때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자리 청탁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치맛바람의 효시입니다.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야고보와 요한은 수제자들이었지만 여전히 마미 보이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특권의식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베드로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 때문에 항상 속이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베드로가 없다면 내가 No.1이 될텐데 베드로를 데리고 온 안드레를 원망하기도 하였습니다. 무슨 일에든지 베드로가 항상 선두를 달리기 때문에 그들은 정상적으로 하면 베드로에게 국무총리 자리를 빼앗길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좀 비겁하지만 어머니를 동원하여 선수를 친 것입니다. 그들은 베드로에 대한 경쟁심과 시기심과 열등감 때문에 뼈가 썩는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 문제 때문에 영적으로 꽉 막혀버렸습니다. 그들은 높이 되고자 하는 인간적인 야심 때문에 내면이 깊이 병들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반드시 베드로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열 제자들도 두 제자에 대해 분히 여긴 것을 보면 그들도 큰 자가 되고자 하는 인간적인 야심으로 충만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열 두 제자들은 모두 큰 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어떤 자가 참으로 큰 자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첫째로, 참으로 큰 자는 고난의 잔을 마시는 자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높은 자리를 구하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의 문제는 마땅히 구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구해야 할 것은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것이어야 하고 육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이어야 하고, 땅의 것보다 하늘의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영적으로 눈을 뜨지 못했기 때문에 마땅히 구해야 할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구해야 할 것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고난의 잔을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잔은 고난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고난의 쓴잔을 마셔야 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기의 철학 때문에 독배를 마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온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의 잔을 마시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잔을 마심으로 부활의 영광에 이르시고 만왕의 왕이 되셨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큰 자가 되려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잔을 마시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고난 없이는 결코 영광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두 제자는 ‘마실 수 있나이다.’ 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높은 자리만 주신다면 얼마든지 고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세상에는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서 목숨을 내 놓고 투쟁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들은 자기 영광을 위해 투쟁하기 때문에 참으로 큰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참으로 큰 자는 아무 사심 없이 순수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고난의 잔을 마시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비록 인간적인 야심에서 말했다 할찌라도 그 대답을 하나님 앞에서 한 서원으로 받아 주셨습니다(23). 후에 야고보는 열 두 제자 중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고(행12:2), 요한은 최후로 밧모섬에서 주님을 위해서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고난의 잔을 마신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23).

둘째로, 참으로 큰 자는 낮아져서 겸손히 섬기는 자입니다. 열 두 제자들은 높은 자리를 놓고 서로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렸습니다. 이는 그들이 아직도 영적인 사람이 아니라 세상적인 사람임을 드러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인하여 얼마나 낙심이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영적인 사람이 될 비전 가운데서 세상적인 위대함과 영적인 위대함의 차이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당시 로마 황제는 세속적인 위대함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는 위용과 영광이 넘치는 모습으로 높은 보좌에 앉아 손가락을 움직여 백성들을 임의로 주관했습니다. 그가 엄지 손가락을 내리 꽂으면 ‘죽이라’는 것이었고 엄지 손가락을 위로 치켜 세우면 ‘살려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큰 자는 돈이나 군대의 힘이나 정치 권력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을 임의로 주관하고 다스립니다. 그들은 위에서 지시하고 명령하고 권위로 다스립니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서슴지 않고 다른 사람을 희생시킵니다. 여기에는 은혜도 없고 진리도 없습니다. 이런 다스림을 받는 자들은 그 밑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이런 세상 가치관에 물들어 목자나 지부장의 권위로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종을 요구하고 인간적인 권위로 다스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참으로 큰 자는 어떤 자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26,27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참으로 큰 자는 남의 위에 서서 명령하고 지시하고 권위로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종과 같이 겸손히 낮아져서 섬기는 자입니다. 이는 진정한 위대함은 직분이나 타이틀에 있지 않고 변화된 인격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면이 모든 사람을 품고 섬길 수 있는 성숙한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섬기지만, 영적인 세계에서는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깁니다. 여기에 은혜가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큰 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높이 되고자 투쟁하기 보다 낮아지고자 투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큰 자가 어떤 자인가를 우리에게 좋은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가장 잘 요약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고 하신 것은 섬김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시지만 섬김 받기를 강하게 부인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참으로 큰 자가 되려면 먼저 섬김을 받고자 하는 마음을 부인하는 자기 부인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 받고 이해 받고 사랑 받고 높이 되고자 하는 인간적인 야심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이런 자기 부인이 없이는 결코 큰 자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오히려 섬기려 하고” 라고 말씀하신 것은 모든 사람을 품고 적극적으로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섬긴다는 것은 단순히 다과를 나누어 주고 청소를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섬긴다는 것은 고차원적인 것으로써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병든 내면을 치료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자기를 비우고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을 섬길 때 큰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인생들로부터 섬김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악된 인생들을 섬기시기 위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섬기는 종의 인생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각종 죄인들을 정죄치 않으시고 품고 섬기셨습니다. 마침내는 고귀한 목숨까지 우리 죄를 위한 대속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섬김과 희생으로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섬김과 희생 없이는 결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큰 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큰 자의 개념이 바뀌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낮아져서 섬기시고 목숨을 내어놓으시기까지 자신을 희생하신 것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의지와 순종이 섬김과 희생의 삶을 살 수 있는 원천이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을 때 섬김과 희생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은 소경 둘을 고쳐 주시는 데서도 잘 나타났습니다. 대개 심각한 문제가 있을 때 남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도와 주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하여 올라가는 심각한 상황 가운데서도 소경 둘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섬겨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서 떠나 가실 때에 소경 둘이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이때 무리가 잠잠하라고 꾸짖었습니다. 소경은 자의식이 강하고 예민하여서 쉽게 상처를 받고 눈물을 흘립니다. 소경들은 무리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고 낙심하고 자학하며 물러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장애물 앞에서 포기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더욱 소리질렀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그들은 메시야의 긍휼을 믿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포기치 않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의 믿음의 기도가 응답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러자 그들은 대답했습니다.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그들은 제자들과 달리 자신들이 예수님께 구해야 할 바가 무엇인가를 잘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져 주셨습니다. 메시야의 긍휼과 자비의 손이 닿았을 때 그들은 곧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눈을 뜨고 곧 왕되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육적인 소경보다 영적인 소경은 더욱 비참합니다. 우리가 영적인 눈을 뜨려면 다만 믿음으로 주님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자기 목숨을 내어 주시기까지 인생들을 섬기신 우리 주 예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