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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Ⅱ부:마태복음 21:1-22(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

by Mark Yang   08/16/2019   Matthew

Message


마태복음 Ⅱ부 제 5 강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입성

말씀: 마태복음 21:1-22
요절: 마태복음 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 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오늘 말씀에는 예수님의 주 되심(Lordship)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때까지 섬기는 종으로서 죄로 병든 인생들을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생들을 섬기시느라 그 영화롭고 아름다우신 모습이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와 같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이와 정 반대로 예수님께서 만유의 주로서 주권을 행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주 되심을 나타내셨고, 입성하실 때도 영광스러운 왕으로서 입성하셨습니다. 또한 입성하신 후에는 성전의 주인으로서 성전을 깨끗케 하셨고, 성전에서 어린 아이들의 찬미를 받으셨습니다. 또한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으로써 무화과 나무에 대해서 주권 행사를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 되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의 주권에 기초한 성숙한 믿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1-11)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인간적으로 볼 때 초라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볼 때 영광스러운 입성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첫째, 주가 쓰시겠다(1-3).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 일행은 예루살렘에서 약 5리 떨어진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두 제자들에게 맞은편 마을로 가서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오라는 이상한 지시를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남의 나귀를 풀어 끌고 오라니 절도범이 되라는 말인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3).” 예수님은 이때까지 섬기는 종으로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입성 준비를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주 되심을 의도적으로 나타내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때까지 백성들의 열광을 촉발시키는 행동을 피해왔으나 이번에는 의도적으로 백성들의 열광을 촉발시키셨습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The Lord needs them) 이 말씀은 예수님이 창조주로서 우주적 권위와 만물에 대한 최고의 소유권을 가지신 분이심을 말해 줍니다. ‘주’란 구약에서 ‘여호와’대신 사용한 것으로서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란 ‘스스로 있는 자’, 즉 영존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출3:14,15). 예수님은 본래 영존하시는 하나님이 되십니다(사9:6). 이 예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시며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보지 않고도 맞은편 마을에 나귀와 나귀 새끼가 있는 것을 다 아셨고 또 사람들이 무엇이라 말할 것까지도 다 아셨습니다. 주 되신 예수님은 우리가 마음 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또한 아무도 안보는 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의 눈으로부터 숨겨질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때까지 ‘인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심으로써 자신을 낮추시고 인간과 동일시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자신을 ‘주’라 칭하시고 주권을 행사하심으로서 자신이 바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Lord)라고 하실 때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자세가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로부터 은혜 받고 사랑 받는 단계에서 예수님을 섬기고 순종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신앙이 예수님의 절대 주권에 기초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할 때 우리의 믿음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어린 아이의 단계에 머물고 맙니다. 또한 예수님의 주 되심을 인정하지 않을 때 인본주의 신앙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만유의 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유를 주관하시는 주인이 되십니다. 요한복음 1:3절은 말합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골로새서 1:16절은 말합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예수님은 세상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쓰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주인으로서 나귀와 나귀의 주인에 대해 주권 행사를 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나귀의 주인은 진짜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에 불과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물질, 시간, 생명, 자식까지도 사실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청지기 곧 관리인에 불과합니다(창2:15).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할 특권을 받은 반면, 주인을 위해 맡은 바 소유를 잘 관리하여 유익을 남겨서 주인이 필요로 할 때 드려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이런 청지기 사상이 있을 때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또 꾸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주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런 청지기 사상이 있을 때 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때문에 자기 자신을 위해 쓰는 것은 조금도 아까워 하지 않지만 주님을 위해 쓰는 것은 아까워 합니다. 그러나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것으로서 내가 잠시 관리하고 있다가 때가 되면 주인에게 돌려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날 때 빈손으로 왔다가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은혜로 이것 저것을 소유하고 누리다가 빈 손으로 가게 됩니다. 미국의 강철왕 카네기는 아무리 부자라도 빈 손으로 간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죽을 때 자기 손을 관 밖으로 내 놓으라고 했다고 합니다. 구약의 욥도 이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단의 시기로 하루 아침에 모든 소유와 자녀들을 잃었을 때에도 조금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찬양했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 사도 바울은 이를 한마디로 잘 표현했습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11:36)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주께서 쓰시겠다 하면 기꺼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물질, 우리의 시간, 우리의 청춘, 우리의 자식, 우리의 양, 더 나아가 우리의 전 생애를 주님께서 원하실 때 기꺼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쓰시겠다 할 때 자기 것인양 내놓지 않고 움켜쥐고 있는 자는 현명한 자 같으나 가장 어리석은 자입니다. 우리 생애에 있어서 가장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것은 주님께 쓰임 받는 것입니다.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주께서 쓰시겠다 하실 때에 자신을 기꺼이 드린 자들입니다. 본문의 나귀 새끼는 예수님께 쓰임 받은 것으로 나귀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나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적극적으로 주님께 드려서 쓰임 받지 않으면 결국 불의의 병기로 사단의 도구가 되어버립니다(롬6:13). 우리의 인생을 결산하게 될 때 자신을 위해서 쓴 것은 하나도 남지 않고 주님께 드려서 쓰임 받는 것만이 남게 됩니다.

둘째,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4,5).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은 우연히 된 일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전 약 500년 전에 선지자 스가랴로 하신 예언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입니다(4). 5절을 보십시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자신의 왕 되심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때까지 자신의 왕 되심을 드러내기를 꺼려하셨습니다. 이는 이사야의 예언과 같이 들레지 아니하고 조용히 메시야의 사역을 감당코자 하셨기 때문입니다(사42:2). 그러나 이제 곧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속죄의 피를 흘려야 하셨기 때문에 이 일이 한편 구석에서 행하여져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왕 되심을 만천하에 공식적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의 왕이 되십니다. 왕은 백성을 다스리는 자로서 행, 불행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누가 왕이 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율법적인 사울이 나라를 다스릴 때는 백성들이 불행하였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이 나라를 다스릴 때는 백성들은 행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나라 뿐만 아니라 모임이나 가정이나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모임이나 가정이나 개인은 사랑과 평화와 은혜가 충만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모임이나 가정은 근본적으로 두려움과 불안과 슬픔과 비참함이 가득차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을 때 근본적으로 사단이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가정에서 남편이 왕이 되어 권위를 부리고 아내에게 복종을 강요하고 자식들을 비인격적으로 거칠게 대할 때 그 가정은 불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남편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이해와 사랑으로 섬기고 인격적으로 대할 때 그 가정은 행복이 차고 넘치게 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겸손의 왕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왕이시지만 세상 왕들과는 달리 한없이 겸손하고 온유한 왕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서 가장 영광스럽고 위엄 있고 장엄한 모습으로 입성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가장 초라한 모습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께서 초라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다니!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납니다. 이는 겸손의 극치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높이고 권위 부리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한없이 낮추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만인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 되십니다. 말은 전쟁을 상징하지만 나귀는 평화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은 평화의 왕이심을 말해 줍니다. 세상은 군비 경쟁으로 인해 지구는 마치 화약고와 같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언제 핵전쟁이 일어나 하루 아침에 멸망할지 모르는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가 이렇게 된 것은 세상 왕들이 자기의 권좌를 유지하고 강화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무력으로 무장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참된 평화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참된 평화가 도래하려면 평화의 왕 예수님을 모셔야만 합니다.

셋째,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6-11). 6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리석을 만큼 단순히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이해를 초월하는 믿음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온 후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었습니다(7). 이는 왕되신 예수님께 대한 존경과 충성, 복종과 헌신의 표시였습니다(왕하 9:13). 그들의 행동은 무리들에게 선도가 되어 무리들도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길에 폈습니다. 겉옷이 없는 자는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며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예비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기쁨이 충만하여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며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호산나’란 “우리를 구원하소서!”란 뜻입니다. ‘다윗의 자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다윗에게 약속한 메시야를 뜻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 메시야의 그림자였습니다. 통치자가 공의와 사랑을 조화시켜 한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공의를 세우고자 하면 사랑이 없는 차가운 사람이 되어버리고 사랑을 나타내고자 하면 공의가 무너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공의와 사랑이 잘 조화된 인격의 소유자로서 백성들을 사랑과 평화, 공과 의로 다스렸습니다. 이 때문에 다윗 왕국은 메시야 왕국의 모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메시야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행13:22). 백성들은 수세기 동안 다윗과 같은 메시야가 나타나 그들을 다스려 주기를 갈망했습니다. 로마 통치 아래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과 같은 힘있는 메시야가 나타나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그들을 사랑과 평화로 다스려 주시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들은 구원자를 애타게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시대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참된 통치자를 갈망합니다. 사회가 부패하면 의로운 통치자를 갈망합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번영을 가져다 줄 능력 있는 통치자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도덕적으로 의롭고 경제 부흥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능력 있는 통치자가 나타난다 할찌라도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와 기쁨과 행복은 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생들의 근본 문제는 죄 문제요 또 죄로 인한 죽음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정말 영혼 깊은 곳에서 갈망하는 것은 죄와 사망의 세력을 잡은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해 줄 참된 구원자를 갈망합니다. 겉으로 볼 때 사람들은 현실 문제로 고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실상은 죄 문제로 고통하며 자신을 죄와 사망의 구렁텅이에서 건져 주도록 절규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정욕의 늪에서 구원해 주기를 갈망합니다. 어떤 사람은 운명의 쇠사슬과 허무와 세력에서 구원해 주기를 갈망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열등감과 자의식에서 구원해 달라고 울부짖습니다. 예수님은 인생들을 얽어매고 있는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구원의 왕이 되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참 자유와 기쁨과 평화가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 마음 깊은 곳에 거짓 왕을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면에 참 자유와 기쁨과 행복을 누리려면 거짓 왕을 몰아내고 겸손의 왕, 평화의 왕, 구원의 왕을 모셔들여야 합니다.

무리들이 얼마나 열렬히 찬송하였는지 예루살렘 온 성이 소동할 정도였습니다. ‘소동’이라는 헬라어 원어는 ‘지진’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입성은 예루살렘을 중심부에서 흔드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는 유월절이 가까웠기 때문에 예루살렘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수많은 순례객들로 붐비었습니다. 예수님은 장안의 화제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 예루살렘 온 성이 소동할 정도로 입성하셨을까요? 이는 예루살렘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자 함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시온성입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시온에서 나와 세상 만방에 흘러나갈 비젼을 보았습니다(사2:3). 누가복음 24:47절은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사랑을 영접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눅19:41-44).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메시야를 거절함으로써 마지막 파멸의 운명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예루살렘을 진동시키시고 백성들이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신 것입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예수님은 나의 왕으로서 내 마음의 중심에 임하여 사랑과 평화와 공의로 다스려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교만하고 세속적인 생각과 인본적인 생각으로 가득차 있을 때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내 마음의 왕으로 모시려면 높아진 마음을 낮추고 부요해진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Ⅱ. 성전을 깨끗케 하신 예수님(12-17)

예수님은 입성하신 후 가장 먼저 성전에 들어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하신 일을 통해 성전이 어떤 곳이 되어야 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첫째, 성전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 들어 가시자 유월절 대목으로 양과 비둘기를 매매하는 자들의 소리와 환전상들의 돈 바꾸는 소리로 시끄러웠습니다. 성전 안은 기도 소리, 찬송 소리, 1대1 말씀 공부하는 소리 대신에 장사꾼들의 외침 소리, 짐승의 울음 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이를 보신 예수님의 눈에는 거룩한 분노의 불길이 치솟았습니다. 예수님은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둘러 엎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이 어떤 곳이 되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 도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 56:7절과 예레미야 7:11절을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써 성전에 대한 이사야의 희망과 예레미야의 격노를 하나로 묶어 사용하신 것입니다.

성전은 한 마디로 기도하는 집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하는 곳입니다. 무엇보다 성전은 만민의 구원을 위해 중보 기도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차고 넘쳐야 합니다. 또한 성전은 거룩한 곳입니다. 성전이 거룩함을 잃어버리고 물질화 되고 세속화 될 때 가장 악취를 풍기는 곳이 되어버립니다. 세상이 아무리 타락하더라도 성전 만큼은 그 신성을 유지하고 거센 죄악의 탁류 속에서도 중심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성전은 이스라엘의 중심이기 때문에 성전이 부패하면 이스라엘 전체가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은 반드시 개혁되어야 했습니다. 성전 개혁은 영적 개혁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도 교회가 개혁되어야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전이 이렇게 부패하게 된 데에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은 물질주의에 깊이 물들어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했습니다. 이들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 중에서 모독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들로 인해 분노하시고 성전을 깨끗케 하셨습니다.

둘째, 성전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시니” 당시 소경과 저는 자들은 성전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에서 쫓겨난 자들이요 소외된 자들이요 쓸모 없다고 버려진 자들입니다. 그들은 병들고 연약한 자들로서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사랑과 도움이 필요한 자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부자나 권세를 가진 자들은 환영하였지만 이런 자들은 내어쫓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뜨겁게 영접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고쳐 주심으로 건강한 인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성전이 어떤 곳이 되어야 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전은 영적으로 눈먼 자들과 앉은뱅이된 자들이 나아와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고침을 받고 구원을 받는 곳입니다. 성전은 의인들이 와서 광내는 곳이 아니라 죄인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건강한 인생을 사는 곳입니다. 한마디로 성전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셋째, 성전은 찬미가 넘치는 곳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성전에서 아이들은 계속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성전의 분위기와는 상관 없이 예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마음에 시기심과 분이 가득하여 예수님께 항의했습니다. “애들이 소리 지르는 것을 왜 듣고만 있소.” 이 때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어린 아이들의 찬미는 거짓이 없고 순수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찬미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인생들로부터 찬미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가 되십니다(계5:12). 성전은 주 되신 예수님을 찬양하는 찬양소리로 차고 넘쳐야 합니다.

III. 믿음의 능력(18-22)

첫째,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18,19). 이튿날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성으로 들어 오실 때 몹시 시장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길가에서 한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열매를 얻고자 가셨습니다. 무화과 나무는 잎이 무성하면 반드시 열매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나무는 잎만 무성할 뿐 아무런 열매가 없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그러자 무화과 나무가 곧 말라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에 대해 주권 행사를 하셨습니다. 우리는 무화과 나무가 애매하게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되어 동정심이 갑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영적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행하신 것이었습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는 예루살렘 성전을 상징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겉모양은 무성한 잎 같이 금과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고, 성직자들은 온갖 보석으로 꾸민 가운을 입고 경건하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은 말로 다 할 수 없이 부패했습니다. 이로 인해 예루살렘은 결국 AD 70년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가 저주를 받은 것 같이, 열매 없는 개인이나 모임이나 나라도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보기에 잎만 무성한 신앙생활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는 신앙생활을 해야 함을 배웁니다.

둘째, 믿음의 능력(20-22).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잎이 무성하던 나무가 순식간에 마른 것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같이 권세를 가진 능력 있는 말씀의 종이 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속 마음을 잘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 21, 22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 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제자들은 능력 있는 사람이 되려면 특별한 은사나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로부터 무슨 신기한 비법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믿음만 있으면 산도 옮길 수 있고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믿음의 능력, 기도의 능력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능력을 체험할려면 반드시 사단이 심어주는 마음의 의심을 극복해야 됩니다. 마음에 의심이 생기면 무기력하게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마음의 의심을 물리치고 단순히 믿고 기도할 때 주님께서 그 믿음의 기도를 받으시고 친히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불신의 사람, 의심의 사람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한 분 한 분이 주 되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이 주님의 절대 주권에 기초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주님께서 쓰실만한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이 되어 새 역사를 창조해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