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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Ⅱ부:마태복음 21:23-46(모퉁이의 머릿돌 되신 예수님)

by Mark Yang   08/16/2019   Matthew

Message


마태복음 Ⅱ부 제 6 강


모퉁이의 머릿돌 되신 예수님


말씀: 마태복음 21:23-46
요절: 마태복음 21:4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지난 강의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공부했습니다. 예수님은 왕이시지만 세상 왕들과는 달리 겸손의 왕이요, 사랑과 평화의 왕이요, 공의의 왕이 되십니다.
오늘 본문은 왕되신 예수님의 권세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랑은 잘 알지만 예수님의 권세는 잘 알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이 함부로 대할 때가 많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그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두 가지 비유를 통해 그들의 죄악됨과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권세가 어디서 온 것인가를 가르쳐 주심으로 예수님에 대한 바른 자세를 갖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Ⅰ. 두 아들의 비유(23-32)

23절을 보십시오. 그 전날 예수님은 성전을 깨끗케 하시고 이제는 성전에 들어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성전 본래의 기능을 회복하셨습니다. 성전에는 예수님에 대하여 적개심으로 가득찬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생명의 위협 가운데서도 양무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데 전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양무리의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이 때 기성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개혁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유대 최고회의 기관인 공회의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영적 권세로 인해 자신들의 권위가 큰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거세게 항의했습니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그들은 사도들이 사도행전에서 복음역사를 이룰 때도 이와 꼭 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행4:7). 사도들 뿐만 아니라 종교 개혁자들, 청교도 등 하나님의 종들이 교회의 부패를 개혁하기 위해 시도할 때마다 이를 저지하려고 반대하는 기득권들이 항상 동일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성전 개혁이나 가르침의 내용보다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가 하는 눈에 보이는 자격증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의 질문에는 예수님의 말에 꼬투리를 잡고자 하는 계략이 숨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숨은 계략을 아시고 역공격을 하셨습니다.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24, 25)”. 만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라고 하면 왜 그를 믿지 않는가 추궁을 받을 것이요 또한 요한이 증거한 예수님의 권세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만일 사람에게로서라고 하면 모든 백성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므로 백성들이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대답이었습니다. 흔히 정치가들은 명확하게 대답하기보다 애매모호하게 대답함으로써 빠져 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습니다. 그들은 능수능란한 종교 정치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거짓되고 위선적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절대적인 진리가 없었습니다. 절대적인 진리가 없기 때문에 백성들의 눈치를 보고 상황에 따라 자신들의 모습을 변형해 나갔습니다. 그들은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는 거짓말쟁이로서 마귀의 자식들이었습니다(요8:44). 누구든지 그 마음에 절대적인 진리가 없으면 상황에 따라 행동하는 거짓된 인간이 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신 질문을 통해서 자신이 하늘로부터 온 영적 권세로 일하고 있음을 증거하셨습니다. 복음의 일꾼들은 타이틀이나 지위나 인간적인 권위로 일해서는 안되고 위로부터 오는 영적 권세로 일 해야 됩니다. 우리는 육신의 나이나 신앙 경륜이나 목자나 선교사라는 타이틀을 내세우며 양들이 순종하도록 은근히 요구하기 쉽습니다. 인간적인 권위를 내세울 때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순종할지 모르지만 마음으로는 반발하게 됩니다. 참된 권위는 예수님과 같이 겸손하게 낮아져서 섬기고 희생하고 사랑으로 돌보는 데서 나옵니다. 그 때 사람들은 마음으로부터 존경하고 순종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의 근본 문제가 무엇인가를 깨우쳐 주시기 위해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한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얘야,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 좀 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예, 아버지여 가겠소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큰 아들은 언제든지 대답을 시원스럽게 잘하는 ‘yes man'이었습니다. 그는 “얘야, 청소 좀 해라.”하면 “예, 하겠습니다.”, 또 “얘야, 1:1 말씀 공부 좀 해라.”하면 “예 하겠습니다.”라고 시원스럽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 번도 청소하거나 공부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남이 청소할 때마다 심방 간다고 밖으로 나가고, 1:1 말씀 공부하라고 하면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드러 누워 버렸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아버지가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자 “싫어요, 나 탁구치고 싶어요.”하며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후에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포도원에 가서 일했습니다. 이 비유에서 볼 때 진정한 회개와 순종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 속에서 행동으로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있었지만 고의로 회개치 않고 불순종했습니다. 그들이 불순종한 근본 원인은 자기 의에 기초한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파괴 되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큰 아들은 종교 지도자들, 작은 아들은 세리와 창기들을 가리킵니다. 세리는 처음에 재물에 대한 욕심과 이기심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거절했습니다. 또한 창기들은 정욕과 죄의 소욕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후에 세례 요한의 회개의 메시지를 듣고 자신들의 죄를 눈물로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죄악된 생활을 청산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과거 어떤 죄악된 삶을 살았을지라도 진실되게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에게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이 과거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중요시 하지 않으시고 현재 회개하고 진실되게 예수님을 믿는가 안믿는가를 중요시 하십니다. 우리가 세리와 창기와 같이 과거 어떤 죄악된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진실되게 회개하면 다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황태자와 황공주로 영접해 주십니다.

Ⅱ. 포도원 농부의 비유(33-41)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이 말씀을 듣고도 회개치 않자 그들을 돕기 위해 다시 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그들의 문제가 무엇이며, 또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한 집 주인이 아름다운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주인은 매우 기름진 산에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사5:1,2). 또 주인은 도적이나 사나운 짐승이 포도원을 침범하여 해치지 못하도록 돌담을 높이 쌓아 울타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포도원 안에는 즙짜는 구유를 설치했습니다. 즙짜는 구유는 단단한 바위를 파서 역청을 발라 만들기 때문에 만들기가 힘듭니다. 또 높은 망대를 세워 도둑이나 짐승들이 오는 것을 감시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주인은 포도원을 위해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없을 만큼 온 마음을 써서 가꾸었습니다(사5:4). 농부들이 일하기만 하면 자연히 크고 아름다운 극상품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모든 환경을 마련했습니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 농부는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좀 더 넓은 의미로는 포도원은 세상을, 농부는 인간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 황량한 광야와 같은 세상을 개척하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하여 지극히 아름다운 에덴동산을 창설하사 이를 다스리며 지키라는 청지기 사명을 주셨습니다. 인간은 말씀에 순종함으로 영적 질서를 지키기만 하면 이 축복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인간이 타락한 후에도 적절한 햇빛과 비를 주심으로 열매 맺을 수 있는 모든 환경을 마련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을 일반 은총이라고 합니다. 올해 우리나라는 냉해로 인해 농작물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햇빛만 좀 덜 쪼여도 열매를 잘 맺지 못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환경을 마련해 주지 않으시면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고 그들이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모든 영적 환경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로마서 9:4, 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영적 축복이 열거되어 나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양자로 삼으시고 친히 그들 가운데 거하심으로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또한 언약 관계를 맺으시고 거울과 같은 율법과 보배로운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또한 다른 민족들이 헛된 우상을 숭배하고 있을 때 참 하나님을 경배하고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예배 제도를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사무엘, 다윗과 같은 훌륭한 믿음의 조상들을 허락하여 주심으로 그들을 본받고 성장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축복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서 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많은 영적 축복을 주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또 열국을 품고 섬기는 제사장 나라의 직분을 잘 감당토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열매 맺을 수 있는 모든 환경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캠퍼스 포도원을 주셨습니다. 온 세계에 산재해 있는 캠퍼스는 아름답고 광활합니다. 또 캠퍼스 지성인들은 젊고 순수하고 진리를 사랑하며 무한히 성장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캠퍼스는 해마다 새롭게 들어오고 나가기 때문에 흐르는 물과 같이 맑고 신선합니다. 캠퍼스 사역은 흐르는 물에서 물고기를 잡는 것 같이 어려움은 있지만 물이 흐르기 때문에 물고기는 언제나 싱싱합니다. 세상에 일할 곳이 많이 있지만 캠퍼스 포도원처럼 아름다운 포도원은 없습니다. Carl Wilson은 ‘캠퍼스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인력 저수지’라고 하였습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구원해 줍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에서 지친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고 우리에게 참 만족과 기쁨과 안식을 누릴 수 있게 합니다. 또 우리에게는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말씀을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성경 교재를 허락하시고 또한 영적 비밀을 깨우쳐 주는 많은 성경선생들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함께 복음 역사를 섬길 수 있는 믿음의 동역자들을 주셨습니다. 이는 실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큰 축복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으로 갔습니다. 주인이 농부들에게 세로 준 것은 그들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주인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창조적 지혜를 발휘하여 자율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경영권도 다 맡겨 주셨습니다. 만일 주인이 수시로 와서 일일이 간섭한다면 자율성을 잃어버리고 노예와 같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을 신뢰하여 모든 것을 다 맡겼습니다. 또한 세도 보통 7:3 아니면 6:3, 좀 후한 주인의 경우가 5:5인데 이 주인은 9:1로 하여 소득의 10분의 1만 내면 되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일하게 된 것은 말할 수 없는 은혜요 축복이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주인의 일방적인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늘 주인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함으로 이 은혜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상은 어떠했습니까?

34절을 보십시오. 세월이 흘러 실과 때가 가까웠습니다. 갓 심은 포도나무는 3년 동안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3년 후부터 열매를 맺기 시작합니다. 주인은 때가 되자 약속한 실과 얼마를 받으려고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냈습니다. 농부들은 이들을 주인의 대사로서 융숭히 대접하고 실과 중 가장 좋은 것을 보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정반대로 종들을 잡아 하나는 삼청교육대에 보내어 심히 때려 병신을 만들고, 하나는 물고문으로 죽이고, 또 하나는 돌로 쳐서 온 몸에 멍이 들게 했습니다. 주인은 당장에 그들을 진멸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참았습니다. 주인은 농부들을 여전히 신뢰하고 다른 종들을 전보다 더 많이 보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주인을 무시하고 전보다 더 종들을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은 포도원을 가꾸기 위해 죽도록 고생하고 있는데 주인은 놀고 있다가 세만 받아가는 세리와 같이 생각했습니다.

종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가리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백성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도록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귀를 막고 말씀을 듣지 않고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감사치 않았습니다. 그들이 처음에 포도원을 맡게 되었을 때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감사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자 점점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신들이 포도원에서 일하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자격이 있어서 선택된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배가 부르게 되자 과거 죄 가운데서 고통하며 사명이 없어 비참하게 살던 시절을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기본적인 구원의 은혜마저 잊어버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파괴되고 영적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배은망덕하고 은혜를 악으로 갚게 된 것은 기본적인 구원의 은혜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과거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서 주님의 은혜로 구원 받고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일하게 되었는가 하는 기본적인 은혜를 잊어버리고 감사치 않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파괴되고 배은망덕한 몹쓸 자가 되어버립니다. 신앙생활에서 기본적인 구원의 은혜를 늘 새롭게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자는 주님의 축복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를 잊어버리고 감사치 않는 자는 은혜 받지 않을 때보다 더 비참하게 되어버립니다.

둘째로, 그들은 교만했습니다. 농부들은 포도원 주인이 아니라 세로 든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마땅히 주인을 주인으로 대접하고 공경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포도원을 열심히 가꾸다 보니 포도원에 대한 애착이 들고 결국에는 자신이 주인인 양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주인의식이 너무 강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다보니 자기 의가 생겼습니다. 자기 의는 필연적으로 교만을 낳게 됩니다. 그들은 마음이 높아지고 교만해졌습니다. 그러자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교만하게 되면 못쓰게 되어 버립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셋째로, 그들은 탐욕에 빠졌습니다. 37절을 보십시오. 주인은 마침내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보내면서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는 최소한의 양심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그것마저도 무참하게 짓밟았습니다. 농부들은 아들을 보자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여 버렸습니다. 농부들은 포도원을 열심히 가꾸어 아름다운 극상품 포도 열매를 많이 맺었습니다. 그러나 축복을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그 축복을 감당하는가가 더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열매를 많이 맺자 욕심이 생겨 주인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아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욕심은 점점 커져서 마침내는 포도원을 통채로 삼키고자 아들까지 죽이는 무서운 죄를 범한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게 됩니다(약1:15).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골3:5). 탐욕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든 죄의 근원이 됩니다. 탐욕은 자라납니다. 탐욕은 독버섯과 같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칩니다. 또한 탐욕은 만족할 줄 모릅니다. 탐욕은 무저갱의 심연과 같아서 아무리 채우고 채워도 끝이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부패하게 된 것은 공직자들의 탐욕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탐욕이 발견되면 자라기 전에 빨리 뽑아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이 비유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로, 하나님은 길이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주인이 농부들의 완악하고 포악한 마음을 알면서 계속해서 종들을 보낸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종들이 얻어 맞아 병신이 되어 돌아오거나 죽어 시체로 돌아올 때 이를 참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참고 또 참았습니다. 마침내는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기까지 참았습니다. 인내는 고통입니다. 주인은 이 모든 고통을 감당했습니다. 주인이 이렇게 고통하면서까지 아들을 보내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농부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요3:16). 주인은 농부들 자체를 사랑했습니다. 주인은 악한 농부들과 바른 관계성을 맺기 위해 사랑하는 독자까지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보냄으로 농부들이 주인의 사랑에 감동하여 마음으로부터 돌이키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농부들이 아들만 영접하면 지난 날의 모든 죄악을 다 용서해 주고자 하였습니다. 주인의 목적은 짜르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어찌하든지 살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주인의 마음은 곧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인간은 늘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불순종하고 반발하고 대적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인간들을 길이 참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2:4절에서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하해와 같이 깊고 넓습니다. 죄인들을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찬양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4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비유를 마치신 후 종교 지도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그러자 그들은 바로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는 것인 줄 알지 못하고 흥분하여 대답했습니다.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찌어다.” 그들의 문제는 말씀 앞에 자신들을 비추어 보고 회개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AD 70년에 멸망 당하고 포도원은 겸손하게 축복을 감당할 줄 아는 다른 백성, 곧 복음을 영접한 이방인들에게로 넘어 갔습니다(43). 하나님은 결코 무골호인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인생들로부터 만홀히 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갈6:7). 하나님은 최후로 보낸 독생자 예수님도 영접지 않고 끝까지 회개치 않을 때 반드시 심판하시는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세를 바치기에 힘써야 합니다.
Ⅲ. 모퉁이의 머릿돌(42-46)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이 비유의 뜻을 잘 깨닫지 못하자 시편 118:22,23절을 인용하여 그들의 영적 무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4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보다 자기들이 원하는 집을 짓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인 메시야, 민족적인 메시야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영적인 메시야로 오셨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인 건축자들에 의해 쓸모없다고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그들로 인해 하나님의 구속역사는 실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실패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악을 선으로 바꾸사 친히 구속역사를 이루어 나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종교 지도자들이 버린 돌을 주어다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옛날 유대에서는 모퉁이의 머릿돌을 기초로 기둥을 세우고 집을 지었으며, 그 머릿돌에 건축자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그러므로 모퉁이의 머릿돌은 건물의 기초석으로 가장 중요한 돌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역사의 초석이 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 개개인의 구원의 반석이 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의지할 때 구원을 받게 되지만 그렇지 않고 예수님을 대적할 때 깨어집니다. 또한 장차 예수님께서 심판주로서 오셔서 심판하시면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가루가 되어 박살이 나고 맙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돌인 동시에 심판의 돌이 되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종교 지도자들은 이 비유가 바로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였으나 백성들이 무서워 할 수 없었습니다(45,46).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캠퍼스 포도원을 주시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모든 영적 환경을 마련하여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열심히 일하여 열매를 많이 맺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세를 바침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겸손하게 받은 바 축복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일생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복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