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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Ⅱ부:마태복음 22:1-14(황태자의 혼인 잔치)

by Mark Yang   08/16/2019   Matthew

Message


마태복음 Ⅱ부 제 7 강


황태자의 혼인 잔치


말씀: 마태복음 22:1-14
요절: 마태복음 22: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오늘 말씀은 “황태자의 혼인 잔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는 인생들을 천국 잔치에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또 이 초청을 거절한 자들이 받게 될 심판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독생자를 허락하시기까지 우리를 위해 놀라운 구원의 잔치를 배설하시고 간절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내가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구원의 잔치에 오소서!” 이 시간 인생들을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기쁨으로 이 초청에 응함으로 구원의 기쁨을 충만히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혼인 잔치에 오소서(1-4)

예수님은 이 때까지 종교 지도자들의 완악한 마음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 두 아들의 비유와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치 않기로 결심했는지 여전히 완악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다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1). 2절을 보십시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고금을 막론하고 혼인 잔치는 즐겁고 기쁘고 복됩니다. 신랑 신부는 결혼을 해서 기쁘고, 총각 처녀들은 나도 장차 저렇게 은혜와 축복 가운데서 결혼하리라는 희망에 부풀어서 즐겁습니다. 또한 결혼한 사람들은 “나도 한 때 저렇게 즐겁고 기쁘고 희망찬 때가 있었지” 하며 과거를 회상하며 기뻐합니다. 그런데 이들보다도 더 기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는 신랑 신부의 부모들입니다. 진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이고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교육을 시키느라 온갖 해산의 수고를 감당하며 키운 자식을 결혼시키는 부모의 기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큽니다. 하물며 하나 뿐인 황태자를 위해 혼인 잔치를 준비하는 임금의 기쁨은 어떠하겠습니까? 황태자의 혼인 잔치는 임금에게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자신들의 행복과 관련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임금에게 사랑하는 외아들이 있었습니다. 임금에게 있어서 이 아들은 자신의 분신으로서 생명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또 머지 않아 왕위를 계승할 황태자이기 때문에 더욱 귀한 존재였습니다. 임금은 어릴 때부터 황태자를 장차 한 나라를 다스릴 지도자로서 필요한 모든 훈련을 시켰습니다. 황태자는 궁중 교육을 받으며 신앙과 인격과 실력이 조화된 영육 간에 훌륭한 지도자로 성장하였습니다. 이제는 나이가 차서 결혼할 때가 되었습니다.
황태자의 결혼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황태자비가 될 신부는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여 골랐습니다. 가장 첫째 조건은 믿음이 좋아야 했습니다. 아무리 얼굴이 예쁘고 집안 배경이 좋아도 믿음이 좋지 않으면 서류 심사에서부터 탈락 되었습니다. 그 다음 심사 기준은 기도의 여종인가 아닌가 였습니다. 무슨 일을 만나면 인간적인 방법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고 조용히 기도하는 기도의 여종이어야 했습니다. 또한 부지런하고 모든 사람을 품고 섬길 수 있는 넓은 마음과 온화함과 덕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까다로운 심사 끝에 신부를 골라 혼인 잔치를 성대히 준비했습니다.

임금은 궁중의 일류 요리사들로 하여금 갖가지 음식을 준비하게 했습니다. 예로부터 궁중요리가 유명합니다. 궁중전골, 탕수육, 팔보채, 양장피, 완자, 라조기, 깐풍기, 가상단탕, 부용제비집, 상어 지느러미 요리, 원숭이 골, 곰 발바닥 등 이름도 알 수 없는 갖가지 진기한 요리들이 산해진미로 준비 되었습니다. 또한 포동포동하게 살진 양과 칠면조와 소들을 수없이 잡아 바베큐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볼쇼이 발레와 러시안 댄싱을 위시하여 각 나라 춤과 빈 필 하모니 오케스트라 단을 초청하여 성대한 음악제도 준비하였습니다. 물론 플레시드 도밍고, 루치아노 파파로치, 호세 까레라스 3대 테너 가수를 초청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또한 문학인들의 축시 낭송, 연극, 축포와 불꽃놀이도 준비하였습니다. 근위병들은 멋진 복장을 하고 화려한 입장식과 퇴장식을 하기 위해 피나는 연습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1년 전부터 세계 각국에 축하 사절단과 국내의 모든 귀빈들에게 초청장을 발부하였습니다. 황태자의 결혼식이 있는 그 주간은 특별 공휴일로 선포되어 온 나라 백성이 일주일 동안 함께 즐거워하게 했습니다. 임금은 사랑하는 아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하였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당시 혼인 잔치에 초청하는 것은 1년 전부터 초청장을 발부한 후 결혼식이 임박해서는 구체적인 날짜와 시간과 장소를 알리고 종들을 보내어 모셔왔습니다. ‘그 청한 사람들’은 이미 오기로 약속된 사람들입니다. 황태자의 혼인 잔치는 아무나 참석할 수 없고 선택 받은 자들만이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임금의 초청을 받아 황태자의 혼인 잔치에 참예할 수 있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이 큰 은총이요 특권입니다. 그들은 혼인 잔치에 참예하여 모든 축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 영광된 혼인 잔치에 오기를 싫어했습니다. “오기를 싫어하거늘” 이는 고의적인 배척이었습니다. 당시 풍습은 처음 초청을 수락한 후에 두 번째 초청을 거절하면 주인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했습니다. 더구나 임금의 초청을 거절한 것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보통 임금이라면 노발대발하여 당장에 옥에 가두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임금은 달랐습니다. 임금은 깊은 이해심과 넓은 아양과 인내심을 가지고 다시 초청하였습니다. 아마 종들이 가서 무례하게 굴어 화가 나서 오기 싫어한 모양이라 생각하고 이번에는 잘 훈련받은 다른 종들을 보내어 정중하고도 간절하게 초청을 하였습니다.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임금의 초청은 참으로 간절하였습니다. 임금은 조금도 아쉬울 것이 없었습니다. 또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안 오면 시베리아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내겠다고 엄포를 놓고 강제로 오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은 강제로 하지 않았습니다. 강제로 할 때 겉으로는 억지 웃음을 웃지만 마음으로는 불평 불만과 반발심으로 가득 차게 되어 은혜와 기쁨이 없게 됩니다. 임금은 인격적인 분이기 때문에 그런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 인격적으로 정중히 초청했습니다. 제발 좀 참석해서 혼인 잔치의 기쁨을 누리도록 아쉬운 소리를 하였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임금은 어찌하든지 이들을 초청하여 이들이 마음으로부터 기뻐하고 축복된 잔치를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임금은 참으로 겸손하고 온유합니다. 무엇보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합니다.

비유에서 임금은 하나님을, 황태자는 예수님, 청한 사람들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 넓게는 인생 모두를 가리킵니다. 천국은 마치 신랑 되신 예수님의 혼인 잔치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의 혼인 잔치를 성대히 준비하시고 우리 인생들을 초청하십니다. 이 잔치에 초대 받은 자는 복됩니다. 계19:6-10절은 이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는 구원의 잔치요 생명의 잔치입니다. 또한 은혜와 사랑의 잔치요 소망의 잔치요 기쁨과 희락의 잔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생들의 구원을 위하여 준비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인류 구원을 위하여 오랜 세월 동안 선지자들을 보내어 메시야 탄생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약속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죄로 병든 인생들을 섬기시고 마침내는 모든 인류의 죄짐을 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파하시고 천국의 문을 여셨습니다. 이로써 인생들을 그토록 괴롭히던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죄의식으로 고통하며 또 허무와 무의미와 같은 죽음의 요소에 시달리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배 피를 흘리심으로 단번에 우리 죄를 다 사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믿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사죄의 은혜를 덧입기만 하면 됩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보배피로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성령을 허락하사 영적으로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성화(聖化)라고 말합니다. 성화는 성령께서 죄인을 죄의 부패에서 깨끗하게 하시고 그의 전 본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갱신(更新)하여 죄인으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로우시며 계속적인 사역입니다.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거듭남은 우리의 의지나 업적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이지만, 성화(聖化)는 성령의 역사에 인간의 협력이 요구됩니다. 이 때문에 성경은 죄와 마귀의 유혹에 대항하여 싸우며 힘써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끊임없이 권면하고 있습니다.(롬12장, 고전6:9,10, 갈5:16-23, 벧전1:15,16, 히12:4 등) 구원파는 이러한 성화를 무시합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허락하사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영적으로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게 하신 것은 큰 은혜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을 허락하시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주셨습니다. 또한 우리의 영혼이 메마르지 않고 이 험한 세상에서도 열매 맺는 복된 삶을 살 수 있도록 풍성한 하나님의 말씀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잔치는 부족함이 없이 풍성합니다. 생명도 풍성하고 은혜도 풍성하고 사랑도 풍성하고 소망도 풍성합니다. 다만 죄인들이 이 구원의 잔치에 참석하고자 마음을 결정하는 일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인생들의 구원을 위하여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하시고 간절히 초청하십니다. “내가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구원의 잔치에 오소서!”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은혜 베푸시고 축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민6:24-26). 우리 인생들이 어두움과 절망 상태에서 벗어나 구원의 기쁨, 영생의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Ⅱ. 만나는 대로 청하여 오너라(4-10)

임금이 정중하고도 간절하게 초청했는데도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첫째로, 무관심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그들은 돌아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황태자의 혼인 잔치에 대해 무관심 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농사하는 일, 장사하는 일과 같은 자기 일에 있었습니다. 눅14:18-20절에는 “나는 밭을 샀으니 불가불 나가 보아야 되겠다.” “나는 장가 들었으니 가지 못하겠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노아 시대나 롯의 시대와 같이 영적인 것에는 무관심하였고, 먹고 마시고, 시집 가고 장가 가고, 사고 팔고 하는 세상 일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임금의 초청에 응하는 것은 그 어떤 일보다 우선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일보다 자기 일을 더 앞세웠습니다. 이 자기 중심성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자기 일에는 관심이 많지만 영적인 일에는 무관심합니다. 컴퓨터를 배우고 운전학원과 영어학원에 다니고 아르바이트를 하는데는 정신없이 바쁘지만 성경공부할 시간은 없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증오하지도 않고 적대하지도 않고 조롱하지도 않지만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한마디로 자기를 사랑하고 세상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복음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복음에 대한 무관심과 태만은 실상은 자기 영혼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지혜로운 자 같으나 참으로 어리석은 자입니다. 이런 자는 노아 시대나 롯의 시대의 사람들같이 갑자기 재앙이 임할 때 피할 겨를도 없이 멸망하게 됩니다.

둘째로, 적극적으로 핍박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그들은 악 감정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들이 왜 이렇게 핍박했을까요? 아마 종들이 황태자의 혼인 잔치에 오도록 끈질기게 간청하자 귀찮았는지 모릅니다. 밤낮으로 전화를 걸고 문턱이 닳도록 심방 오는 것을 견딜 수 없었는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도록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자 화가 났을 것입니다. 그들은 종들이 평화를 파괴하는 침입자요, 자신들이 나아갈 진로를 방해하는 훼방자요 인권을 무시하고 사생활을 침입하는 무뢰한으로 생각하고 잡아 능욕하고 죽여 버렸습니다. 이는 임금에 대한 큰 도전이었습니다. 그들은 임금을 우습게 보고 자행자지 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은혜와 사랑이 충만한 분이시지만 언제까지 참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죄를 심판하시는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은 무섭습니다. 임금은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살라 버렸습니다. 이를 볼 때 임금이 이때까지 참으신 것은 힘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택함 받은 백성으로서의 은혜와 특권을 저버리고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이고 마침내 메시야까지도 죽였을 때 그 결국이 어떠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A.D 70년에 로마 군대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켰습니다. 그 후로 이스라엘은 1948년 독립하기까지 약 1900년 동안 세계 각 나라에 흩어져서 온갖 조롱과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한 자에게 임한 진노의 심판이었습니다.

청한 사람들의 거절로 인해 즐거워야 할 혼인 잔치가 살인자들을 진멸하는 심판의 잔치가 되어 버렸습니다. 혼인잔치가 더 이상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임금은 잔치를 포기하거나 연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임금은 잔치를 결코 포기치 않았습니다. 인간은 불신으로 인해 실패했으나 하나님은 실패치 않으셨습니다. 8, 9절을 보십시오. 임금은 종들에게 새로운 방향을 주었습니다.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이 말씀에는 어찌하든지 혼인 잔치를 이루고자 하시는 포기치 않는 임금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거리 길에 있는 자들은 VIP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황태자의 혼인 잔치에 들어 올 자격이 없는 비천한 자들입니다. 대개 사거리 길에 있는 자들은 할 일이 없어 서성대는 건달들과 또 죄를 짓고 밤거리를 헤매는 자들이 많습니다. 임금은 이런 자들을 데려오라고 명하였습니다. 눅4:23절에서는 “사람들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명하였습니다. 임금은 잔칫집을 손님들로 가득 채워서 혼인 잔치를 성대하게 이루기를 원하였습니다.
여기서 ‘사거리 길’은 세계 각 나라를, ‘만나는 사람들’은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택한 백성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절함으로써 구원의 축복이 이방인들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이로써 구원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복음을 허락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과거 사거리 길에서 갈 길 몰라 방황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부르사 구원의 잔치에 참여케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계 각처로 나아가서 구원의 기쁨을 알지 못하여 사거리 길에서 방황하고 있는 자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복된 사명인의 인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종들은 만나는 대로 무차별 초청하였습니다. 도덕적으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지위가 높은 자나 천한 자나, 백인이나 흑인이나, 정상인이나 신체 장애자나 누구든지 초청하였습니다. 초청 받은 자들 중에는 세리, 창기, 강도, 김대두와 같은 살인자, 사마리아 족속, 중풍 족속, 니고데모 족속 등 각종 죄인들이 있었습니다. 지난 여름 미국 M.S.U 국제 수양회에 참석하였을 때 각종 죄인들이 천국 잔치에 초청을 받고 자기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곳에는 정욕의 노예 되었던 자, 펑크락에 빠졌던 자, 알코올 중독자, 마약 중독자, 마약 판매자, Home Sex주의자 등 각종 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간증하자 은혜가 차고 넘쳤습니다. 이와 같이 천국 문은 어떤 몹쓸 죄인이라도 들어갈 수 있도록 활짝 열렸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종들로부터 배울 것이 있습니다. 이는 임금이 명령에 대한 그들의 절대적인 충성심입니다. 그들이 사거리 길에 가서 시커먼 죄인들을 혼인 잔치에 초대한다는 것은 마음 내키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지 않고 임금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생각을 버리고, 자존심을 버리고, 또 쉬고 싶은 생각을 버리고 말없이 임금에게 충성했습니다. 그들의 충성으로 말미암아 혼인 잔치가 이루어 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임금을 사랑하고 임금의 마음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한 사람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았습니다(벧후3:9). 그들은 충성된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런 자들을 통해 이루어 집니다.

Ⅲ 혼인 예복(11-14)

그런데 천국 잔치를 누리는 데에는 한 가지 요구되는 조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예복을 입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도 구라파에서는 음악회에 갈려면 반드시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바티칸 성당에 들어 가려면 반드시 긴 바지나 긴 치마를 입어야 합니다. 짧은 바지나 미니 스커트를 입은 자는 쫓겨납니다. 당시 결혼식장에도 반드시 예복을 입어야 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혼인 자리에 손님이 가득찼을 때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풍습에는 혼인 예식을 경건하게 거행하기 위하여 입장할 때 모든 손님들에게 예복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잔치 집에 들어오기는 했으나 예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그가 왜 예복을 입지 않았을까요? 그는 자기 옷이 예복보다 더 좋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예복을 입는 것에 대한 반발심 때문에 예복을 받고도 입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먹는 데만 관심이 많아서 예복 따위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어쨌든 그가 예복을 입지 않은 것은 임금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것이요, 황태자의 혼인 잔치를 가볍게 여긴 것입니다. 이는 임금에 대한 반발심이요 불순종이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임금이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그러자 저가 유구무언이었습니다. 이는 입이 있지만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임금은 사환들에게 명했습니다.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결국 예복을 입지 않은 그는 천국 잔치에 들어 왔으나 천국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쫓겨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를 볼 때 천국 잔치에 참석할려면 예복이 매우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임금은 그 사람이 과거 어떤 생활을 했는가 그의 과거를 묻지 않았습니다. 임금은 그의 선악을 문제 삼지 않으시고 그가 예복을 입고 있는가 안 입고 있는가만 문제 삼으셨습니다.

그러면 예복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갈 2:16).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옷. 믿음의 옷을 가리킵니다(롬 13:14). 우리는 이 옷을 입어야만이 천국에 들어가서 구원의 잔치에 참예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옷을 입으려면 반드시 자기 옷을 벗어야 합니다. 교만과 정욕으로 더럽혀진 옷, 불신과 불순종과 반발심으로 얼룩진 옷, 율법과 자기 의로 딱딱해진 옷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 피로 우리의 추하고 더러운 죄를 씻음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주님의 정결한 신부가 되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예하여 천국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계19:7,8)

1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예복은 입지 않은 자는 교회에 들어 왔으나 복음을 영접치 않고 믿음으로 살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런 자들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 활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 잔치에 초청을 받는 자는 많지만 구원을 받는 자는 소수입니다. 우리 모두가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천국 잔치에여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