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Ⅱ부 제 8 강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말씀: 마태복음 22:15-46
요절: 마태복음 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오늘 본문에는 그 시대의 대표적인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율법사들이 차례로 나아와 예수님을 시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 여지없이 K.O패 당하고 물러갔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혜로 대적자들을 물리치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심오한 영적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지혜와 총명의 신, 모략과 재능의 신이 충만하신 분이십니다(사11:2). 예수님은 대답 가운데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되는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Ⅰ. 가이사의 것, 하나님의 것(15-22)
세 종류의 종교 지도자들 가운데서 가장 먼저 바리새인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직접 나서지 않고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님께 보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방의 지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반면 헤롯 당원들은 친로마파였습니다. 그들은 평소 견원지간이었으나 예수님을 모함하는 데는 야합했습니다.
그들은 이때까지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다가 이제는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나타났습니다. 평화의 가면을 쓰고 매혹적인 친절로 인간을 타락시키는 것이 바로 사단의 고단위 수법입니다. 삼손의 파멸은 블레셋 군대가 아니라 블레셋 여인의 위장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솔로몬의 멸망도 외부의 적 때문이 아니라 그가 취한 이방 여인들의 유혹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입에 발린 아첨의 말을 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이 말은 아첨의 말이지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잘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참되신 분이십니다. 이는 예수님에게는 거짓이 조금도 없고 인격과 본성이 참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되시기 때문에 참 그 자체가 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진리로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시거나 상황에 따라서 행동하지 않으시고 진리에 기초해서 행동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추켜 세운 후에 가시 돋힌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예수님께서 만일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가하다’고 하면 선민 이스라엘의 명예를 더럽히고 외세에 굴복한 자라고 선전하여 백성들과의 관계성을 차단시킬 수 있었습니다. 또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불가하다’ 하면 선동자, 가이사에 대한 반역자로 고소하여 즉각 헤롯 당원이 체포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진퇴양난으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들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고 그들의 악함을 책망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아’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의 정체를 한마디로 드러내셨습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는 예수님의 눈을 아무도 속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로 하여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게 하여 그 형상과 글이 뉘 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데나리온은 세금을 거두어들일 목적으로 특별히 주조된 로마의 은전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자 14세 이상, 여자 12세 이상부터 65세까지 인두세를 바쳤습니다. 셋돈에는 가이사의 화상과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만인의 주, 신성한 아구스도의 아들 디베랴 가이사” 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21).”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기며 물러갔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국가에 속하여 산다는 사실과 모든 국민에게는 국가에 대한 의무가 있음을 인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국가 밖으로 끌어내어 그들을 국가와 분리시키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개 이단들은 반국가적, 반사회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로마가 비록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지만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함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상에 기초한 것입니다(롬13:1).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탈세하지 않고 세금을 내야 합니다. 주민세도 내야 합니다. 또한 형제들은 국토방위의 의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학생들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고 직장인들은 기본적으로 직장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국가에 대한 의무를 수행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의무도 다해야 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땅의 시민권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하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빌3:20). 예수님은 궁극적이며 최상의 것은 하나님의 왕권임을 선언하시고 인간이면 누구나 하나님의 왕권에 충성하는 것을 최고의 지표와 원리로 삼아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혼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마땅히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또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됩니다(신6:5). 또 첫 열매나 소득의 1/10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자세가 잘못되면 모든 것이 잘못됩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이 말씀은 정교 분리의 원칙을 말해 줍니다. 국가 권력은 신앙 양심을 침해해서는 안되고, 또한 중세 시대와 같이 교회 권력이 국가 권력을 손에 쥐어서도 안됩니다.
Ⅱ. 산 자의 하나님(23-33)
바리새인들이 여지없이 K.O패를 당하고 물러가자 이번에는 머리를 잘 돌리는 사두개 박사들이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종교적 합리주의자들로서 초자연적인 것과는 전혀 무관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이성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모두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기적이나 부활을 믿지 않았고 천사와 영도 부인했습니다(행23:8). 자연히 그들이 중시하는 것은 현세의 삶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정치 권력과 결탁하여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세계를 전혀 몰랐습니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현대판 사두개인에 해당됩니다. 그들은 합리적인 이론으로 성경의 진리를 무너뜨리고 사람들에게 불신을 심어 영적 생명을 파괴합니다. 이들은 사단의 도구들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신명기 25:5,6절을 기초로 해괴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후사가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 들었다가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 두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24-28) 사실 이것은 확률로 따지면 실제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로서 그들이 만들어 낸 가상적인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 질문하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만일 부활이 있다면 형제끼리 아내 쟁탈전을 벌이는 혼란과 싸움과 무질서가 생길 것이므로 부활은 있을 수 없으며 또 있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오류는 부활을 현재 삶의 연장 선상으로 생각한데에 있습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그들의 마음의 생각과 생활 양식이 어떠합니까? 그들은 부정적이고 운명적이었습니다. 그들이 만든 이야기는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그들은 모두 아들을 낳지 못하는 운명주의에 시달리다가 죽었습니다. 여자는 아들 낳지 못하는 죄 때문에 일곱 번이나 결혼을 해야 했고, 또 남편 모두를 잃었으니 이 얼마나 기구한 운명입니까? 사두개인들 중에는 공회 회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부와 권세를 소유했습니다. 공부도 많이 하여 박사 학위도 소유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 내면은 어둡고 부정적이고 슬프고 운명적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참된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들 내면에는 허무와 절망이 깊이 깔려 있었습니다. 사람이 어떤 훌륭한 인간 조건을 가졌다 할지라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근본적으로 허무와 운명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은 어떠합니까? 부활 신앙이 있는 자들은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근본적으로 밝고 긍정적입니다. 천국에 대한 산소망이 있기 때문에 땅의 일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죽어도 영원히 살 것을 믿기 때문에 주와 복음을 위해 자신 있게 희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삶에는 은혜가 있고 생명력이 넘칩니다. 또한 삶의 여유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부활 신앙이 없는 자들은 환난을 당하면 재앙에 엎드러지지만, 부활 신앙을 가진 자들은 환난의 때에 부활의 소망으로 더욱 불타게 됩니다.
사두개인들의 삶은 또한 쾌락 추구적이었습니다. 그들은 겉은 고매한 종교 지도자들이었지만 내면은 쾌락 추구적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생각하기조차 힘든 해괴망칙한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장가 들고 시집 가는 일과 부부생활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사람이 영생에 대한 소망이 없을 때 자연히 현실에 집착하게 되고 쾌락 추구적이 됩니다. 영생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은 사는 날 동안 어떻게 하면 인생을 즐길 수 있을까? 주말은 어떻게 즐기며, 휴가는 어떻게 즐길 것인가? 하는 것에 마음을 씁니다. 사도 바울은 “만일 부활이 없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전15;32)고 하였습니다.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너무나 해괴하여서 대답해 줄 만한 가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은혜로우신 주님께서는 그들의 영적 무지를 깨우쳐 주시기 위해 말씀하셨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그들의 영적 무지는 오해를 낳고 오해는 그들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성경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모세 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했는데 모세 오경에 부활이라는 말이 없다고 해서 부활의 진리를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출애굽기에서 부활의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도 성경에 삼위일체라는 말이 없다고 해서 이 진리를 부인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도처에 삼위일체의 진리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단들의 특징은 성경을 잘 아는 것처럼 많이 인용하지만 실상은 성경을 잘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부분적으로만 알고 전체적으로 알지 못하며, 또 문자적으로만 알고 그 속에 담긴 영적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오류에 빠집니다. 우리는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성경을 바로 알 수 있습니까?
성경은 전체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부분적으로 옳다 할지라도 성경 전체 사상에 위배되면 옳지 않은 것입니다. 또한 역사적인 사실을 기초로 해서 본문 전후의 문맥을 잘 살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겸허한 마음으로 성경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 깊이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단들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 자기들이 주장하는 바를 성경 이곳, 저곳에서 인용합니다. 그들은 성경의 역사성을 무시하고 풍유적으로 해석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므로 머리로 알 수 없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알지 못하는 영적 무지로 인해 어두움의 세력에 사로잡혀 어두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바로 알 때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 받을 뿐만 아니라 빛과 생명과 희망이 넘치는 복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 자체에 생명이 있고, 어두움을 밝히는 빛이 있고,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성경 안에 온 인류가 살 길이 있습니다.
둘째로,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알되 성경에 대한 상식적인 지식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능력 등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사두개인들의 문제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 장가 가고 시집 가는 것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요, 또한 죽기 때문에 종족을 보존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부활 시에는 완전한 인격적인 개체로 변화되고 더 이상 죽음이 없기 때문에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활 시에 우리 믿는 자들은 천사와 같은 영적인 존재로 변화됩니다. 천사들은 영적인 존재로서 완벽하고 지칠 줄 모르며 하나님을 섬깁니다. 또한 그들은 항상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며 기쁨으로 그 분의 뜻을 따르고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고 찬양합니다.
부활 시에 우리의 몸은 허약하여 질병으로 고통하고 죄의 소욕에 시달리는 현재와 같은 그런 육신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은 신비로운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새로운 육신이 되어 하나님 나라에서 살기에 합당한 몸이 됩니다. 고전15:42-44절은 말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우리 육신은 연약합니다. 또 죄의 소욕에 시달리며 추하고 욕됩니다.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죽어 땅에 묻혀 썩게 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영혼은 구원 받았지만 육은 아직 구원 받지 못했습니다. 이 육의 몸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부활하여 완전히 구속됩니다. 이것을 몸의 구속이라고 합니다(롬8:23). 하나님은 능력이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흙으로 육체를 만드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사 살아 있는 생령이 되게 하신 생명의 주가 되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어찌 우리의 썩고 욕되고 약한 몸을 썩지 아니하고 영광스럽고 강하고 신령한 몸으로 변화시킬 수 없겠습니까?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찬양합니다.
사두개인들은 영적 무지로 인해 생명력이 없는 죽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부활의 진리를 심기 위해 출3:6절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망명생활 40년에 절망 중에 있는 모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다”(I am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 이 말씀은 시제가 현재형입니다. 이는 하나님은 항상 살아 계시는 분으로서 영존하시는 분이심을 말해 줍니다.
또한 하나님은 믿는 자들에게 부활의 새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말해 줍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부족하지만 믿음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불신 세상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온전히 믿음으로 살므로 믿음의 조상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여 이 땅에서는 나그네임을 자처하며 장막 생활을 하다가 죽어 막벨라 굴에 장사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에게 부활의 새 생명을 주셔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육신은 죽었지만 그들의 영은 살아서 현재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믿는 자들에게 부활의 새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육신은 언젠가는 죽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에게 부활이 없고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우리의 생은 얼마나 허무하고 비참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그를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부활의 새 생명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살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죽은 자는 사두개인들과 같이 부활의 믿음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불신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끊어져 영적으로 죽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믿음이 없어 생각이 부정적이고 운명적입니다. 이들의 말은 죽었고 행동도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의 하나님이 되실 수 없습니다. 니체는 하나님이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말한 니체가 죽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사고 방법을 가진 니체가 죽은 것입니다. 죽은 자들은 결코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습니다.
반면 산 자는 어떤 자들입니까? 이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이 믿음으로 산 자들입니다. 부활의 믿음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의 말은 살아 있고 행동도 살아 있습니다. 이런 자들의 얼굴은 빛이 납니다. 이런 자들의 삶에는 죽음의 요소가 없습니다. 항상 밝고 긍정적이고 생명력이 넘치고 희망찹니다. 이런 자들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Ⅲ. 크고 첫째 되는 계명(34-46)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을 KO패 시키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자신의 성경 실력을 과시해 보고자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율법사는 율법에 능통한 성경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613개의 계명 중에서 어떤 계명이 가장 크고 근본적인 계명인지 끝없이 변론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험문제는 아주 난해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37,3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크고 첫째 되는 계명(the first and greatest commandment)은 모든 계명의 원리가 되는 계명으로서 가장 중요한 계명입니다.
마음(heart)은 사전에 보면 “사람의 지정의의 움직임, 또 그 움직임의 근원이 되는 정신적 상태의 총체”라고 정의 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인격의 중심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중심으로 진심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른 데 빼앗기고 입술로만 하나님을 사랑하기 쉽습니다. 마음은 세상에 빼앗기고 몸만 왔다갔다 한다면 하나님은 슬퍼하십니다. 하나님은 부족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요구하십니다.
또 목숨(Soul)이란 ‘육신의 생명’으로서 ‘살아 있는 힘’을 의미합니다. 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젊음, 정력, 에너지를 뜻합니다.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열심을 다해 정열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젊음을 다른 곳에 소비해 버린다면 하나님을 사랑할 힘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활화산 같은 젊음을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쏟아 보십시오. 그러면 위대한 역사를 창조할 것입니다.
뜻(mind)은 지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우리의 지성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지성이 없다면 자칫 잘못하면 맹목적이 되고 또 신비적이 되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이상에서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전인격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 세상 어떤 것보다도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할 대상은 하나님 한분 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왜 이렇게 전폭적인 사랑을 요구하는 것입니까? 우리를 얽어매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는 전적으로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사랑하는 독생자를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내어주시기까지 전폭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사랑의 관계성이 맺어지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인격적으로, 전폭적으로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성이 맺어지게 됩니다. 이 때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 바 되어 사랑의 샘이 생기게 되어 사랑하기 힘든 사람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해 울고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눠 줄 수 있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행복의 원천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게 되면 세상을 사랑하게 되고,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그때부터 불행이 시작됩니다.
39절을 보십시오.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예수님은 “둘째는 그와 같으니” 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동일하게 취급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에서 이웃 사랑이 나오고,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보다 덜도 아니요 더 이상도 아닙니다. 이는 내가 내 몸을 사랑하는 것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몸을 끔찍이 사랑합니다. 몸이 좋지 않으면 쉬고 병이 나면 약을 먹습니다. 배가 고프면 먹습니다. 자기 몸에 좋다고 생각되는 것은 아낌없이 투자합니다. 사람이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은 본능적입니다. 이렇게 자기 몸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웃은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입니다. 이 두 계명은 성경의 요약이요 핵심입니다. 이 두 계명은 ‘사랑’이라는 한마디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1서 4:8). 신앙생활이란 법조문을 지키듯이 기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41-45절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그릇된 메시야관을 바로잡아 주심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자세를 갖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만 가르치므로 그리스도의 인성만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성령에 감동되어 수 백년 후에 오실 그리스도를 ‘내 주’(my Lord)라고 고백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이 본래 영원 속에 살아 계신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최대 원수인 죽음을 정복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세상을 통치하시다가 세상 끝날에 심판주로 오실 것입니다. 그날부터 모두 예수님의 영적 권세에 압도 되어 아무도 감히 묻는 자가 없었습니다(46).
한 분 한 분이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생명력과 행복이 넘치는 복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