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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Ⅱ부:마태복음 24:1-51(능력과 큰 영광으로 재림하실 예수님)

by Mark Yang   08/16/2019   Matthew

Message


마태복음 Ⅱ부 제 10 강
능력과 큰 영광으로 재림하실 예수님
말씀: 마태복음 24:1-51
요절: 마태복음 24:30b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본문에는 인류 역사의 전 과정과 종말의 상황을 예언하시는 예언자 예수님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이에 따른 유대 민족의 종말, 더 나아가 인류의 종말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예언하셨습니다. 이 가운데 전자의 예언은 이미 성취되었고 후자의 예언은 장차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끊임없는 재난의 연속입니다. 수많은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의 출현, 끊일 줄 모르는 민족과 민족간의 전쟁, 기근, 지진 등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심한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요사히 사람들은 핵 공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세상은 외형적으로 볼 때 잘 되어 나가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내면을 살펴 보면 심한 흑암 중으로 쫓겨 들어가고 있습니다(사8:22). 인류 역사는 마치 호랑이 등에 탄 인간이 내릴 수도 없는 상황에서 방향 없이 어디론가 질주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은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 말씀은 인류 역사의 흐름과 방향이 무엇이며, 또한 인류의 궁극적인 희망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Ⅰ. 온 세상에 전파될 복음(1-14)

첫째,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1,2).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왔습니다. 제자들은 그동안 성전을 자주 보고 성전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들었는데 왜 하필 이때 주님으로 하여금 성전 건물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였을까요? 이는 23:37-39절의 말씀과 연결시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그리스도를 배척한 것으로 인해 황폐하게 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상상하기 힘들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식민지 종교에 대해 포용적이었고 또 유대는 로마 총독과 비교적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모든 것이 희망적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곧 지상 메시야 왕국을 건설하실 것이라는 꿈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반박하기 위해 성전의 아름다움과 견고함을 상기시켰는지 모릅니다.
어쨌든 제자들은 미래를 보기보다 눈에 보이는 현상을 중시하였고, 내면을 꿰뚫어 보기보다 번쩍이는 외적인 것에 더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2).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전은 AD70년 로마 군대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한 병사가 성전 안에 횃불을 던져 전소시키고, 70여차에 걸친 파괴 공사로 성전을 위시하여 예루살렘 전 도시가 옛터를 찾아볼 수 없을만큼 철처히 파괴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물을 보는 제자들의 눈과 예수님의 눈이 전혀 다름을 보게 됩니다. 제자들의 눈으로 볼 때 인류 역사는 희망적으로 보입니다. 인류는 그동안 경이로울 정도로 과학문명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컴퓨터와 전자 산업, 유전자공학의 발달은 인류의 생활 양식과 사고에 대 변혁을 가져오게 했으며, 이로 인해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편리한 생활을 영위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주과학의 발달은 인류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외형적인 것만 보면 인류는 무한히 발전할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으로 내면 세계를 볼 때 도처에서 인류 멸망의 징조를 보게 됩니다. 물질문화 문명은 그 어느 때보다 발달하였지만 인류의 도덕성과 영성은 그 어느 시대보다 타락했습니다. 인류는 물질 문명의 발달과 함께 죄악도 함께 발달하였습니다. 오늘날 미국이나 구라파와 같은 선진국은 부도덕 상태(immoral)를 넘어서서 탈도덕(amoral) 상태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죄악이 관영하면 반드시 심판이 있게 마련입니다.

둘째, 말세의 징조(3-13). 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과 제자들은 감람산 위에 앉으셨습니다. 감람산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며 온 예루살렘 시가가 한 눈에 보이고 성전은 바로 눈 앞에 보이게 됩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충격을 받고 시대에 대한 깊은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종용히 와서 물었습니다.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세의 징조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말세에 있을 징조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입니다. 예수님은 말세의 징조로서 가장 먼저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오늘날 인류를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은 핵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때문에 북한의 핵 제조에 온 세계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중국의 핵 실험과 러시아의 동해 핵 폐기물 투기에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 AIDS가 인류를 파멸시킬 것처럼 무섭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핵을 조심하라.” 또는 “AIDS를 조심하라.”고 하시지 않고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셨을까요? 이는 핵이나 에이즈는 육체를 멸망시키는 것이지만 사람들의 미혹은 영혼을 파멸시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말세가 되면 시대가 불안해지고 이를 틈타 거짓 그리스도들이 출현하게 됩니다. 거짓 그리스도는 거짓 사상과 거짓 희망을 확신있게 가르침으로 사람을 미혹하여 진리에서 떠나게 만듭니다. 미혹이란 근본적인 진리에서 떠나게 하는 것으로서 여기에는 그 배후에 악령이 역사하고 있음을 암시해 줍니다. 악령이 역사하고 있기 때문에 분별하기 힘들고 또 보이지 않는 가운데 강하게 끄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말려들게 됩니다. 거짓 그리스도의 특징은 십자가의 길보다 쉽고 편한 길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도록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거짓 그리스도들은 이 진리를 외면하고 쉽고 편하게 신앙생활할 것을 가르칩니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건설된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보다 이 땅에서 평화와 안녕을 누리며 편히 잘 살 수 있다는 이상적인 유토피아를 제시합니다.
이미 잘 알려진 통일교, 애천교,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을 비롯하여 백백교, 반석교, 섹스교, 삭발교, 한국 기독교 에덴성회, 엘리야 선교회, 요사히 특별히 활개를 치고 있는 박옥수 구원파 등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미혹케 하는 대표적인 거짓 그리스도들입니다. 또한 세계정부와 세계종교의 설립을 내 세우는 새 시대 운동(New Age Movement)도 거짓 그리스도입니다.

둘째로, 재난의 연속입니다(6-8). 6,7절을 보십시오. 말세에는 전쟁과 기근과 지진과 같은 재난이 연속적으로 일어납니다. 국제법 협회에 의하면 지난 4,000년 이래 전쟁이 없었던 시기는 불과 268년 뿐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세상은 잠시도 평안할 날이 없이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 아프리카에서는 기근이 너무 심하여 4살 미만의 유아들이 7.5초당 1명 꼴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진의 빈도수도 시대를 거듭할수록 급증하고 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15세기 이전에는 200회 미만이었던 것이, 16세기에는 258번, 17세기에는 378번, 18세기에는 640번, 19세기에는 2119번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이보다 더 많은 지진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러한 재난들이 왜 일어나는 것입니까? 이런 재난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인간들의 탐욕과 이기주의, 음란과 우상숭배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인 것을 보게 됩니다. 얼마전 인도 중서부에 위치한 킬라리에서 지진이 일어나 3만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1993년 10월 11일자 Time지를 읽어보면 그 지진은 우상숭배에 대한 심판임을 보게 됩니다.
Ganesha라는 신은 새로운 시작과 행운의 신으로서 힌두의 신 가운데 가장 사랑을 받는 신입니다. 그들은 10일 동안 밤 늦게까지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Ganesha 신을 찬양하고 축제를 벌렸습니다. 지진이 일어나기 하루 전에도 약 새벽 1시까지 축제를 하다가 집에 돌아가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그날 새벽 3:56분에 지진이 나서 피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멸망했습니다. 이는 마치 지구가 폭발하는 것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재난들은 반드시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기 때문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류 역사는 재난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난은 반드시 고통을 수반합니다. 사람이 재난을 당하면 죽을 것 같은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고통들은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편히 살 때는 인생에 대해 아무런 문제 의식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환난을 당하면 인생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고, 세상에서 붙들고 있는 것들이 참된 희망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재난들은 그 자체가 종말이 아니라 종말의 징조요, 장차 올 심판에 대한 경고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재난들을 통해 인생들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 재난의 시작은 NIV영어 성경에 보면 The beginning of birth pains으로서 해산 고통의 시작입니다. 여인이 새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서운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되는 것과 같이,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러한 고통을 겪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통은 여인의 해산 고통과 같이 주기가 있습니다. 해산의 고통은 처음에는 주기의 시간이 길다가 점점 빨라집니다. 처음에는 산통인지 모를 만큼 뛰엄 뛰엄 아프다가 나중에는 1시간, 20분, 15분, 5분, 3분, 2분, 1분으로 빨라지다가 마침내 “응애!” 하는 힘찬 울음소리와 함께 새 생명이 탄생됩니다. 이와 같이 인류 역사의 재난도 그 주기가 완만하다가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와질수록 빨라지게 됩니다. 연속적으로 재난이 일어나다가 큰 환난이 일어난 후 예수님이 재림하시게 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재난들이 일어날 때 절망할 것이 아니라, 머지않아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것이라는 희망에 불타야 합니다.

셋째로,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집니다.
4-8절은 외적인 재난이라면 9-12절은 내적인 재난입니다. 신자들은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고 심지어는 순교를 당하기도 합니다. 신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인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게 됩니다(9). 사람들이 크리스찬들을 이유도 없이 괜히 미워하는 것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크리스찬들이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세상이 어둡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또한 그때는 인간 상호간의 관계성이 파괴됩니다. 인간은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고 섬기고 허물과 약점을 감당해 주며 살아야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믿음을 떠나게 됩니다. 믿음을 떠나게 되자 자연히 서로 불신하고 서로 미워하고 자기가 잘 되기 위해 서로 상대방을 모함하고 헐뜯고 짓밝게 됩니다(10,11).
또 12절을 보십시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불법이 성하면 온갖 부정 부패와 강포가 난무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무정하고 무자비하고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 되어 사람이 살기 힘든 삭막한 세상이 되어 버립니다. 딤후3:1-4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말세에 나타날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여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하지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여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가 무엇입니까? 13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외적 내적으로 재난이 심하면 견디지 못하고 현실과 타협하고 믿음을 저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을 배반하게 되면 구원을 얻지 못하고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끝까지 믿음의 중심을 지키며 견디는 자만이 구원을 얻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말년에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에게 의의 면류관이 주어집니다(딤후4:8). 견딘다는 것은 결코 소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겨우 믿음의 중심을 지키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는 적극적인 자세로 세상의 죄의 세력과 싸우는 것입니다. 거센 죄의 탁류를 이기려면 가만히 있으면 떠내려 가고 맙니다. 떠내려 가지 않으려면 말씀을 붙들고 죄의 탁류를 거스려 적극적으로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야 할 복음(14). 그러면 세상은 언제 끝이 오게 됩니까? 14절을 보십시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이 말씀은 기독교 역사관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역사에는 세속사와 구속사가 있습니다. 세속사는 일반 역사로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인간이 지내 온 발자취를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세속사는 바다의 출렁이는 물결과 같이 수많은 사건들이 발생했다가 사라집니다. 여기에는 뚜렷한 방향과 목적이 없습니다. 역사가들은 세속사에 의미를 부여하고 역사의 흐름과 원칙을 찾으려고 노력하지만 허무를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속사는 태초와 종말이 있고 또 복음전파를 통한 인류 구속이라는 분명한 흐름이 있습니다. 범죄로 말미암은 낙원 상실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낙원회복이라는 분명한 목적과 방향이 있습니다. 역사의 주체자도 세속사에서는 누구를 역사의 주체자로 삼아야 할지 분명치 않습니다. 과거에는 통치자들을 역사의 주체자로 보았으나 오늘날은 민중을 역사의 주체자로 봅니다. 그러나 구속사에서는 복음 전파자들이 역사의 주체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인류가 타락한 후 오랫동안 복음을 준비하시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사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복음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 전파를 통해서 인류 구원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복음의 일꾼들을 택하시고 연단하시고 파송하시고 쓰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들로서 이 세대에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역사 창조의 주역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음 전파자들을 통해 인류 구속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써 해야 할 일은 천국 복음을 모든 민족에게 전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시대에 우리 크리스챤들이 감당해야 할 지상 과제입니다.

Ⅱ. 구름타고 오실 예수님(15-31)

15-22절 말씀은 예루살렘 멸망시에 일어날 환난에 관한 말씀이요, 23-29절은 그리스도 재림하시기 바로 직전에 일어날 대 환난에 관한 말씀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이 말씀은 우상숭배의 극치인 신성모독을 의미합니다. 죄악이 극에 달했을 때 예루살렘이 멸망하게 됩니다. 그때는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해야 됩니다. 또 그때는 물질에 연연하거나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에 얽매인 자들에게는 화가 있게 됩니다(17-19). 그날은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전무후무한 환난이므로 겨울이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20,21). 기도는 환난의 때에 믿는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특권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택하신 자들을 위해 환난의 날들을 감해 주십니다. 만일 주께서 그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시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22).
그때에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직전이기 때문에 미혹의 역사가 더욱 강력하게 일어납니다. 그들은 큰 표적과 기사를 행하며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려 합니다. 큰 표적과 기사를 행하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어 쉽게 미혹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때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거나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번개같이 재림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어느 한 나라나 어느 한 지역에서 일어나는 국지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이듯이 세상이 타락하여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많아질 때 주님께서 반드시 재림하시게 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대 환난 후에는 인류에게 생명의 에너지를 공급하던 해가 어두워지게 됩니다. 그때는 더 이상 해 볼 일이 없어지게 됩니다. 또 숫한 신비를 간직한 달도 볼 수 없게 됩니다. 해가 8분동안만 없어도 모든 생물이 얼어서 죽어 버린다고 합니다. 별들은 이때까지 한번도 서로 부딪힘이 없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질서 정연하게 운행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그날에는 하늘의 권능들이 나사 풀리듯이 풀려 수많은 별들이 태풍에 과일 떨어지듯이 우수수 떨어지게 됩니다(계6:13). 그 떨어지는 소리가 얼마나 큰지 그 소리에 놀라 기절하게 됩니다.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들이 드러나게 됩니다(벧후3:10). 그때는 그동안 인류가 쌓아 놓았던 모든 문명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맙니다. 그날은 인류 최후의 심판 날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면 너무 무서워서 기절하게 됩니다(눅21:26). 그때에는 땅의 모든 족속이 자기들이 지은 죄로 인해 심판 받을 것을 두려워 하여 슬피 울며 통곡하게 됩니다. 그때는 아무리 후회에도 소용 없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재림하시게 됩니까? 30b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셨고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구름타고 가신 그대로 다시 오시게 됩니다(행1:11). 예수님께서 처음 구속주로서 이 땅에 오실 때는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오셨습니다. 또 말구유에 가장 비천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슬픈 인간으로 오시고 종의 형상을 입으셨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 배척을 당하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못박혀 비참하게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는 만왕의 왕으로서, 온 세상을 심판하실 심판주로서 오십니다. 그때는 가시 면류관 대신 금 면류관을 쓰시고, 홍포 대신 가슴에 금띠를 띤 빛난 옷을 입으시고, 그 손에는 만국을 심판하실 홀을 들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강림하실 때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수많은 천군 천사들의 우렁찬 나팔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지게 됩니다. “주 예수께서 강림하신다!” 하는 소리와 함께 “팜파라 바 팜파라 바 팜파라 팜파 팜파 바...” 하는 팡파르가 온 천지에 울려 퍼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하실 일이 무엇입니까? 3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천사들을 보내어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게 됩니다. 그때에는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 우리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만일 이때 나의 이름이 호명되지 않으면 끝장입니다. 그날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과 형벌의 날이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과 영광의 날입니다. 그날에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님의 복음을 복종치 않고 자행자지 한 자들에게 형벌을 주실 것입니다(살후1:8). 또한 그날에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믿는 자들을 괴롭히던 모든 불의의 세력들, 곧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을 멸하십니다(고전15:24). 그때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만왕의 왕이 되어 다스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기시고 사랑과 평화로 다스려 주십니다. 우리는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랑하는 우리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살게 됩니다(계21:1-4). 이것이 신자들이 바라는 궁극적인 희망입니다. 이 희망은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야 할 참된 희망입니다. 이 희망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이 희망을 우리의 마음에 간직할 때 우리는 어떤 환난 가운데서도 절망치 않게 됩니다.

Ⅲ. 깨어 있으라(32-51)

그러면 예수님의 재림을 희망하는 자들은 어떤 자세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까? 32,33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무화과 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알고 여름 옷도 꺼내고 선풍기도 손질합니다. 이와 같이 세상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말세의 징조가 나타나면 예수님이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고 하십니다. . 이는 재림의 현재성과 임박성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 곧 문 앞에 이르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는 근거없이 여유를 부리며 지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결코 먼 미래의 일이 아니요 현재 우리에게 부딪힌 절실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하므로 긴장된 마음으로 주님 맞을 준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반드시 이루어 집니다(34,35). 역사의 시작이 있으면 종말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아시고 일급 비밀에 속한 것이므로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날짜를 계산하고 몇년 몇월 몇일에 오신다고 하는 것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노아의 홍수와 같이 갑자기 임합니다. 노아 사대의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바로 직전까지도 사람들은 육신의 일에 얽매여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사람이 육신적이고 감각적이고 쾌락적인 일에 탐닉하게 되면 영적인 일에는 무디어집니다. 그때는 두 사람이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하지만 하나는 구원을 받고 다른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게 됩니다(40,41).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 또 우리가 언제 죽어서 주님 앞에 서게 될지 알지 못하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 주님 앞에 설지라도 부끄러움 없이 서기 위해서 영적으로 깨어서 준비하는 생활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42-44). 깨어 있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45절을 보십시오.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깨어 있다는 것은 충성되고 지혜있는 청지기가 되어 하나님의 양무리들에게 때를 따라 말씀을 공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부들은 때를 따라 매끼마다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많은 수고를 합니다. 만일 식사를 준비하기가 너무 힘들어 사시사철 라면만 먹도록 해 보십시오. 그러면 영양실조에 걸려 죽게 될 것입니다. 주부가 (또는 식사당번이) 충성되고 지혜로운 청지기가 되어 철따라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식사를 공급한다면 식구들(또는 장막원들)은 포동 포동 살이 찌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목자가 충성되고 지혜있는 청지기가 되어 때를 따라 양들에게 말씀을 공급해 준다면 양들은 은혜의 살이 통통하게 쪄서 무한한 행복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사명에 충성할 때 복이 있게 됩니다. 그때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맡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더디 오리라 생각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며 자행자지 할 때 엄히 심판을 받게 됩니다(48-51).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복음전파를 통해 인류 구속역사를 줄기차게 이루어 나가고 계십니다. 인류 구속 역사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됩니다. 우리는 인류 구속 역사의 주체자들입니다. 주님께서 영광 중에 재림하실 그날까지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되어 하나님의 양무리들에게 생명의 꼴을 먹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천국 복음을 힘써 모든 민족에게 전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