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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Ⅱ부:마태복음 25:1-46(심판에 관한 비유들)

by Mark Yang   08/16/2019   Matthew

Message


마태복음 Ⅱ부 제 11 강


착하고 충성된 종


말씀: 마태복음 25:1-46
요절: 마태복음 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본문에는 종말에 관한 세 가지 비유들이 나옵니다. 이 비유들은 재림의 희망을 가진 자가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첫째 비유는 예비하는 생활에 대해서, 둘째 비유는 충성심에 대해서, 셋째 비유는 실제 생활에서 의를 행함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Ⅰ. 열 처녀 비유(1-13)

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여기서 ‘그 때’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를 말합니다. 또 신랑은 그리스도, 열 처녀는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은 정혼한 후부터 1년 후에 신랑이 신부 집으로 와서 혼례식을 행하고 일주일 동안 잔치를 했습니다. 신랑이 신부집으로 올 때 신랑의 친구들은 피리를 불고 춤을 추며 동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부의 친구들인 처녀들은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열 처녀 중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가 있었습니다.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가지지 아니하였으며 슬기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습니다. 기름을 준비한 여부에 따라 미련한 자와 슬기로운 자가 나누어졌습니다. 여기서 기름은 성령을 가리킵니다(사61:1, 요일2:20,27). 기름을 충분히 준비한 것은 성령 충만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기름을 준비한 자들은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진실된 크리스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늘 깨어 기도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애쓰는 자들입니다. 반면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자들은 진실된 믿음이 없는 형식적인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런 자들은 신앙생활을 하되 자기 나름대로 하며 육을 좇아 사는 자들입니다. 이와 같이 신랑을 맞으러 나간 처녀들 중에 기름을 가진 자와 가지지 않은 자가 있듯이, 신자들 가운데는 진실된 믿음을 가진 자와 형식적인 신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쌔” 보통 혼인 예식은 초저녁에 행해졌기 때문에 신랑이 초저녁에 오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그런데 이 신랑은 밤 10시가 되고 자정이 되어도 오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졸다가 자게 되었습니다. 신랑이 지체한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신자들의 기대보다 지체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열 처녀 모두가 졸며 잔 것은 인간의 연약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육의 몸을 입고 있기 때문에 졸며 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더라도 언제든지 주님을 맞이 할 수 있는 깨어 있는 상태에서 자야 되는 것입니다. 깊은 밤중이 되자 ‘보라! 신랑이로다,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이 예기치 않은 때 갑작스럽게 임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악의 밤이 깊어갈 때 불시에 재림하시게 됩니다.

처녀들은 다 일어나 등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 기름이 다 떨어져 등불이 가물가물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슬기있는 자들은 즉시 준비한 기름으로 등불을 밝힐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처녀들은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슬기있는 자들에게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슬기있는 자들은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하며 냉정하게 거절했습니다. 이를 볼 때 아무리 친한 친구나 동역자라 할지라도 믿음은 빌릴 수도 없고 빌려 줄 수도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입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그때야 헐레벌떡 기름집으로 달려 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왔습니다. 이 때 예비하였던 자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도 문은 닫혔습니다. 천국 문은 순간적으로 영원히 닫히게 됩니다. 한번 닫히게 되면 다시는 열릴 기회가 없습니다. 이 혼인 잔치의 성격이 어떠합니까? 이 혼인 잔치는 하루 이틀에 끝나는 잔치가 아니라 영원히 계속되는 천국 잔치입니다. 이 잔치는 구원의 잔치요 생명의 잔치입니다. 이 혼인 잔치는 모든 성도들이 함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러운 최대의 잔치입니다. 계시록 19:7,9절은 말은 말합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이 천국 잔치의 참석 여부는 구원이냐 심판이냐 하는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반드시 참예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 천국 잔치는 평소 재림하실 예수님을 사모하여 깨어 기름을 준비한 자만이 참예할 수 있습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잔치 집의 문이 닫힌 후에 미련한 다섯 처녀들이 와서 간청했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그 때 안에서 주께서 대답했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결국 그들은 축복된 혼인 잔치에 참예하지 못하고 밖에서 슬피 울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왜 기름은 준비하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신랑이 빨리 올 것이라 자기 나름대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근시안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생각이 깊지 못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안일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등과 함께 기름도 가져 간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등만 들고 가면서 등과 기름도 함께 들고 가는 자들을 미련한 자들이라고 놀렸을 것입니다. 십자가 없이 편하게 신앙생활하는 자들은 십자가를 지고 신앙생활하는 자들을 미련하게 보고 조롱합니다. 이런 자들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지만 가장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께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는 아무도 그리스도 재림의 날이나 또 자신이 세상을 떠날 날을 알지 못합니다. 그 날은 갑작스럽게 우리에게 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그 날이 임하더라도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깨어 기름을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Ⅱ. 달란트 비유(14-30)

달란트 비유의 목적은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맡은 바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천국은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각각 그 재능대로 주었다는 것은 공평하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서로 비교할 수 없는 성질의 것임을 말해 줍니다. 종들은 주인에게 받은 바대로 재능껏 충성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금 한 달란트는 6천 데니리온이며, 한 데나리온은 일군 한 품삸입니다. 이는 오늘날로 하면 약 1억2천만원이 되는 거액의 돈입니다. 이는 장사할 수 있는 충분한 밑천입니다. 주인은 이를 종들에게 주며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고 명하셨습니다(눅19:1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는 가장 기본적으로 생명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건강한 신체를 주시고 살아 움직일 수 있는 호흡과 운동신경을 주셨습니다. 저는 장애자 올림픽을 보면서 내가 무엇을 못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정교한 컴퓨터인 뇌를 선물로 주셔서 얼마든지 머리를 써서 장사를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또 달란트는 재능(Talent)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독특한 재능을 주셨습니다. 재능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재능은 각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많이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적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달란트를 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많은 열매를 맺으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창1:28).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가 맡겨 주신 달란트로 장사를 잘하여 하나님께 유익을 남겨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두 달람트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돈을 감추었습니다(16-18). 19절을 보십시오. “오랜 후에 그 종들이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 쌔” 여기서 우리는 주인이 반드시 돌아온다는 것과 또 와서 결산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라에는 국정 감사를 하게 되면 그동안 어떻게 정국을 운영했는가 명백히 드러나듯이, 인생의 결산을 하게 되면 일생 동안 어떤 삶을 살았는가 분명히 들어나게 됩니다. 12월이 되면 어떤 단체이건 년말 결산을 하게 됨니다. 결산을 통해 많은 유익을 남긴 사람은 상을 주고, 손해를 끼친 사람은 징계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년말 결산은 다음 해에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지만 인생의 결산은 만회할 수 없습니다. 인생의 결산은 가족 단위나 요회 단위와 같이 도매금으로 하지 않고 개개인 하게 됩니다. 고후 5:10절은 인생의 결산에 대해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삼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합이라” 하나님께서는 인생 개개인이 말하고 있는 행동하고 생각한 모든 것을 일일이 천국용 비디오로 녹화해 놓으셨다가 그것을 기초로 심판하십니다. 그 심판은 공정하기 때문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국정감사가 있다고 할 때 함부로 국정을 운영할 수 없듯이, 인생의 결산이 있다고 생각할 때 안생을 함부로 살 수 없고 두렵고 떨림으로 진지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종들은 주인에게 차레로 나와서 그동안 어떻게 장사했는가를 보고하기 시작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첫째 종이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이에 주인은 심히 기뻐하고 그 종을 칭찬했습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종이 받은 가장 큰 상급은 주인의 인정과 칭찬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과 칭찬을 받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을 때 괜히 기분이 좋고 살 맛이 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은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만족과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칭찬하시며 머리에 생명의 면류관을 씌어 주실 때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 종이 받을 상급은 더 많은 것을 맡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아무 할 일이 없이 편히 누워 쉬는 것이 아니라 많은 책임을 맡고 주님의 일을 더 많이 감당하는 것입니다. 또 종이 받을 상급은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주인의 즐거움은 세상 즐거움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적 즐거움이요 하늘나라의 영광스러운 즐거움입니다. 이 즐거움은 일시적으로 잠깐 누렸다가 사라지는 즐거움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누리는 참된 즐거움입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둘째 종은 두 달람트를 남겼다고 보고했습니다. 주인은 첫째 종과 비교하여 왜 많은 유익을 남기지 못했는가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그 마음의 충성심을 보시고 첫째 종과 동일하게 창찬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평가는 상대 평가가 아니라 절대 평가입니다.

첫째 종과 둘째 종은 장사를 잘하여 100%의 유익을 남겼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장사를 잘 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들은 작은 일에 충성했습니다. 장사를 잘하는 사람은 작은 것을 귀히 여깁니다. 재벌들의 공통점은 지극히 작은 것을 중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작은 일은 시시하게 생각하고 충성하지 않으면서 큰 일을 맡기면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에게 큰 일을 맡겨 주면 나의 진면목을 보여 주겠다”고 큰 소리 칩니다. 그러나 작은 일에 충성되지 못한 자는 역시 큰 일에도 충성되지 못합니다. 반면 작은 일에 충성된 자는 큰 일에도 충성됩니다. 작은 일에나 큰 일에나 충성심의 본질은 같은 것입니다. 충성이란 맡겨진 사명을 귀히 여기고 책임성있게 감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충성에는 진실성과 지속성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맡은 바 사명을 묵묵히 변함없이 책임성있게 감당할 때 충성되다고 합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잘하다가 뒤에 가서는 흐지부지하고, 또 책임을 맡았으나 무책임하게 할 때 충성되지 못하다고 합니다. 충성되지 못한 자는 세상에서도 쓸모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는 그 어떤 것 보다도 충성심이 요구됩니다(딤후 2:2). 한 팀의 1대1일은 작은 일입니다. 이런 작은 일에 충성할 때 큰 목자로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믿음으로 투자했습니다. 장사를 잘 하려면 때를 잘 분별하고 믿음으로 과감하게 투자를 해야 됩니다. 투자없이는 장사할 수 없습니다. 투자하지 않으면 손해도 없고 유익도 없으며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투자가 없으면 결국 큰 손해입니다. 장사를 해서 유익을 남길려면 반드시 투자를 해야 됩니다. 인생은 그 자체가 투자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 가면서 어딘가에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간과 물질과 젊음과 우리의 전인생을 무가치한 것에 투자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때 그 인생은 파산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조금도 후회가 되지 않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찾아서 투자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대학시절은 일생 투자해도 조금도 아깝지 않은 사명을 찾는 기간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일은 죄와 사망의 늪에 빠져 죽어가는 인생들을 복음으로 살리고 키우는 일입니다. 이 일을 위해 자신을 투자할 때 우리의 인생은 가장 값지고 풍성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셋째로, 장사하라는 주인의 명령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장사를 잘하여 어찌하든지 주인에게 많은 유익을 남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동기는 순수하고 진실되었습니다. 우리는 장사를 하고자 할 때 하기 힘든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습니다. 장사를 잘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장사를 잘 못하겠다는 핑계가 많습니다. 그러나 장사를 잘하는 자들에게는 핑계가 없습니다. 이들에게는 힘든 상황이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힘든 상황은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여건이 됩니다. 우리가 장사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여 어찌하든지 주님께 유익을 남기고자 할 때 장사를 잘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종과 둘째 종은 이런 점에서 착한 종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셋째 종은 어떠했습니까? 24,25절을 보십시오.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그의 문제는 한마디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는 주인을 두려워하고 실페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주인을 율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두려움 때문에 한 달란트를 땅에 감추었습니다. 그는 두려움 때문에 모험을 할 수 없었습니다. 두려움은 그를 소심하게 만들었고 그의 손과 마음과 생각을 마비시켰습니다. 두려움은 그를 쓸모없는 자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오늘날도 주와 복음을 위해 사는 것이 가장 보람되고 가치있는 일인줄 알지만 두려움 때문에 주저하고 머뭇거리고 움츠리면서 원거리 신앙생활하고 있는 자들이 많습니다. 이런 자들은 현명한 자 같으나 가장 어리석은 자입니다. 이런 자는 아무 것도 잃지 않은 것 같지만 결국에는 모든 것을 잃고 맙니다.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서 믿음으로 투자하면 손해보는 것 같지만 절대 손해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자를 넘치도록 축복하십니다. 마가복음 10:29-30절에 보면 주와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한 자는 금세에 있어 100배나 축복을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두려움은 불신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은 두려워 하는 자들을 가장 싫어 하십니다. 계21:8절에 보면 두려워하는 자는 지옥행 제1호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주인은 그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는 주인의 달란트를 받고도 주인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게을렀습니다. 그는 주로 남과 비교하여 자학하고 드러 누워지내며 헛생각을 했습니다. 또한 육신의 쾌락을 추구하며 귀중한 인생을 낭비했습니다. 인생을 낭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큰 죄입니다. 그가 한 달란트를 가져왔지만 그것은 본전이 아니라 기회 손실로서 큰 손해입니다. 그가 만일 어찌하든지 유익을 남기고자 했다면 그것을 은행에 두어 이자라도 찾았을 것입니다. 그는 주인에게 무익한 악한 종이었습니다. 주인은 그에게서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고 하셨습니다. 충성된 자는 축복을 더 받게 되고 충성치 못한 자는 받은 축복마저도 빼앗기고 맙니다. 무익한 종은 결국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됩니다(30).

Ⅲ. 양과 염소의 비유(31-46)

세 번째 비유는 실제 생활에서 의를 행해야 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예수님께서 처음 세상에 오셨을 때는 모든 인생들의 친구요 선한 목자요 섬기는 종으로서 오셨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오실 때는 천군천사와 함께 영광 중에 오셔서 자기 영광의 보좌인 심판의 보좌에 앉으십니다. 그 때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시고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듯이 인생들을 두 부류로 나누어 양은 그 오른 편에, 염소는 그 왼편에 둡니다. 이 때는 아무리 염소가 양인척 해도 불꽃같은 심판장의 눈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 편에 있는 자들을 축복하십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이 예비된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사망이나 고통이나 눈물이나 불의가 없는 곳입니다. 이 나라는 생명과 사랑과 평화와 은헤와 기쁨이 충만한 완전한 낙원입니다. 이들이 이런 엄청난 축복을 받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에수님은 그들이 예수님께서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봐 주었고 옥에 갇혔을 때에 심방을 와서 위로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의인들은 “우리가 언제 그렇게 주님을 섬겼습니까? 기억이 나지 않는데요?”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주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는 실제적인 도움이 필요하고 사랑이 필요한 자를 말합니다. 이런 자들은 무시하기 쉽고 지나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항상 이런 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런 자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캠퍼스에도 겉은 멀쩡하게 보이지만 속은 죄로 깊이 병들어 도움이 필요한 자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자들을 예수님을 섬기듯이 겸손과 온유와 사랑으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한편 왼편에 있는 자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임금은 이들에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저주하셨습니다(41). 그 곳은 영영 꺼지지 않는 유황 불못입니다. 그들은 이 곳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들이 이런 벌을 받게된 것은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 생활에서는 의를 행치 않는 위선적인 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극히 작은 자는 무시하고 돌아 보지도 않고 이기적인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결국 의인들은 영생에 악인은 영벌에 들어가게 됩니다(46).

결론적으로 주님 오실 날이 머지 않았습니다. 또 우리가 언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 할 수 있도록 깨어 기름을 준비하며 힘써 복음장사를 하여 많은 유익을 남겨야 되겠습니다. 또한 실제 생활에서 의를 행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인생을 결산할 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여”하는 주님의 칭찬과 함께 예배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