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Ⅱ부 제 12 강
언약의 피
말씀: 마태복음 26:1-30
요절: 마태복음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 27장 말씀은 예수님의 수난에 관한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온 인류의 죄를 위해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못박혀 피를 쏟으시며 돌아가신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체포 당하시기 전날에 있었던 사건들입니다. 예수님은 한 여인으로부터 향유 부음을 받으시고, 그 이튿날에는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유월절 만찬을 하셨습니다. 이 시간 향유를 부은 사건과 유월절 만찬의 의미를 생각해 봄으로써 은혜 받고자 합니다.
Ⅰ.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1-13)
예수님은 그 동안 감람산 위에 앉으셔서 제자들에게 말세의 징조와 종말에 관한 비유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1a). 그후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준비시키기 위해 자신이 받을 고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2). 예수님은 유월절 날에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간 애굽의 바로의 권세 밑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크신 권능으로 해방된 해방기념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다른 민족의 해방기념일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죄와 사다늬 권세로부터 해방되는 구속의 도리의 모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10가지 재앙을 내리신 것은 애굽 사람들에게는 우상숭배에 대한 심판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구원이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속된 것은 어린 양의 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속된 것도 유월절 어린 양되신 예수님의 피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의 사건이 구속의 도리의 그림자라면 예수님의 경우는 그 실체가 됩니다.
이런 역사적인 때에 종교지도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3-5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아문에 보여 예수님을 궤계로 잡아 죽이려고 모의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최고 종교지도자들로서 마땅히 합심기도를 하고 유월절 축하 예배 준비와 메시지 연구에 힘써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은밀히 악을 도모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교권을 수호하기 위해 예수님을 제거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헤 대신에 시기심과 실의가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이 두려워 명절에는 말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예수님은 유월절에 돌아가심으로 유월절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종교 지도자들의 궤계와 가룟 유다의 배반도 쓰셔서 그 뜻을 이루어 나가고 계셨습니다.
이런 긴장감이 감도는 때에 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사는 문둥이 시몬의 집에 초대를 받아 식사를 하고 계실 때였습니다. 시몬은 과거 문둥병으로 고생하다가 에수님을 통해 나음을 받고 그 은헤에 감사하여 예수님을 초대한 것입니다. 이때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타났습니다. 이 여자는 요12:3절에 보면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였습니다. 여인은 옥합을 깨뜨려 식사하시고 있는 예수님의 머리에 통채로 부었습니다. 예수님은 식사하시다가 갑자기 향유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향유는 보통 귀한 손님들의 머리에 한 두방울 정도 뿌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깨뜨려 통채로 부었습니다. 막14:3절에 보면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깨뜨려 부었다고 하였습니다. 나드는 동인도에서 나는 감송향 뿌리에서 만든 귀한 향유입니다. 순전한 나드는 불순물이 전혀 없는 진짜 향유입니다. 이는 300데나리온 약 600만원 이상되는 돈이었습니다. 당시 향유는 여인의 결혼 지참금이었습니다. 여인은 이를 마련하기 위해 많은 고생을 했을 것입니다. 입고 싶은 실크 블라우스도 안 사입고 겨울이 되어 털 오바도 사입지 않고 한푼 두푼 적금을 하여 소중한 꿈을 가꾸어 갔습니다. 그러므로 이 향유에는 여인의 아름다운 꿈과 진심과 애정이 담겨 있습니다. 이 향유는 여인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이를 깨뜨려 아낌없이 예수님께 드린 것입니다. 여기에는 조금도 계산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여인은 이를 깨뜨려 아낌없이 예수님께 드린 것입니다. 여기에는 조금도 계산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여인은 향유를 드리기 전에 먼저 자신을 주께 드렸습니다. 여인은 자신을 주께 드리되 정열적으로 드렸습니다. 희생적으로 드렸습니다.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드렸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대한 여인의 신앙고백이요, 경배였습니다. 여인의 믿음의 향기와 사랑의 향기가 온 누리에 퍼졌습니다.
여인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이것은 사죄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눅7:47절은 말합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니라. 사랑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과거 이 여인은 세상 정욕을 좇아 살다가 추하고 더러운 여인이 되었습니다. 또 무거운 죄의 짐에 짓눌려 안식과 평강이 없는 피곤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 죄사함을 받고 천국의 기쁨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참 남편이요, 구주요, 왕으로 영접했습니다. 여인의 심령에 죄사함의 은혜와 감사가 차고 넘쳤습니다. 여인은 이를 표현할 길이 없어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드린 것입니다.
여인의 행동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8,9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향유가 방바닥에 쏟아지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 하다가 나중에는 여인에게 화를 내었습니다.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사도 요한은 이 제자를 가룟 유다라고 하였습니다. 가룟 유다가 주동이 되고 다른 몇 제자들이 동조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합리적이고 실용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여인이 향유를 허비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일 옥합을 깨뜨리지 않고 주님께 바쳤더라면 복음역사에 귀하게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용적인 입장에서 볼 때 여인의 행동은 비생산적이고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외적인 것만 보았지 여인의 내면을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여인의 진심과 애정을 보지 못했습니다. 여인의 순수하고 희생적인 사랑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감사의 눈물을 보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다만 예수님의 머리에서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고 있는 향유를 돈으로 계산하고 안타까워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실상 돈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물질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물질적이고 실용적인 가치관을 가진 자들은 우리가 주님께드리는 진심을 보고 비현실적이고 비생산적이라고 비난합니다. 우리가 fishing하기 위해 시간과 물질을 드리고, 일대일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 마음을 쓰고 애정을 쏟으며 자신으 희생하는 것을 보면 허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또한 졸업 후에 전폭적으로 인턴 훈련을 받는 것을 보면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겉으로 볼 떄 허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내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그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귀한 것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일을 통해 참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말씀공부와 영적 훈련을 통해 분명한 인생관과 영적 가치관을 가질 수 있고,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으므이 뿌리를 내릴 수 있습니다. 또한 세상을 보는 올바른 눈과, 세상을 이길 내적 힘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눈물을 H2O로 계산할 수 없듯이, 주와 복음을 위해서 드리는 진심을 물질로 계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동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인간적으로 볼 때 여인의 행동은 너무 지나치게 보입니다. 식사하시는데 에티켓도 없이 향유를 부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부담스러운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인본주의적인 생각을 물리치시고 여인을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10).” 예수님은 여인의 진심을 다 받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진심을 바쳐 일대일을 했지만 양들이 가을 낙엽과 함께 떨어져 나갈 때 귀중한 시간과 물질을 낭비하고 헛짓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야 어떠하든 간에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진심은 하나도 헛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이를 다 받으시고 어떤 모양으로든지 귀하게 쓰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좋은 일이란 아름다운 일(a beautiful thing)입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부요하지만 주와 복음을 위해서는 인색한 사람들을 보면 추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주와 복음을 위해서 진심을 드리고 아낌없이 자신을 드리는 자들을 볼 때 참으로 아름답게 보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자신을 전적으로 헌신한 허드슨 테일러나, 져드슨이나 Charles Studd와 같은 선교사들의 생애를 읽어보면 그 생애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가난한 자들은 항상 그들과 함께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도울 수 있으나 예수님을 섬기는 데에는 때가 있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틀 후면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어 자신을 희생하셔야 하셨습니다. 이런 시점에 여인의 행동은 예수님께 큰 힘과 위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행동을 메시야의 장사를 예비하는 것으로 그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인의 행한 일을 복음역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보시고 역사화시키셨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기념이란 그 정신을 배우고 본받는 것입니다. 여인의 행동은 우리 믿는 자에게 영원한 귀감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인으로부터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되는가를 배웁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길 때 형식적으로, 습관적으로 또 마지 못해 섬기기 쉽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또 우리의 심령에도 은혜와 기쁨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부족하지만 마음을 바쳐 정열적으로 주님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이때 주님께서 귀히 쓰시고 우리의 심령에도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진심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계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