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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Ⅱ부:마태복음 26:31-75(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by Mark Yang   08/16/2019   Matthew

Message


마태복음 Ⅱ부 제 13장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말씀: 마태복음 26:31-75
요절: 마태복음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체포당하시고 공회에서 심문 받으신 사건이 나옵니다. 이는 예수님의 생애 중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때입니다. 그러나 밤 하늘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별빛이 더욱 찬란히 빛나듯이, 이 때 메시아로서 예수님의 모습이 더욱 잘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고난받으시기 전에 먼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의 싸움을 싸우셨습니다. 이 기도의 싸움은 외롭고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이는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자기와의 투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서 고난의 십자가를 질 영력을 덧입으시고 인류 구속역사를 능히 섬기실 수 있었습니다. 이 시간 겟세마네 동산으로 나아가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배웁시다.

Ⅰ.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예수님 (31-46)

때는 예수님께서 유월절 식사 후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으로 가시는 도중이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31). (This very night you will all fall away on account of me.) 이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 때문에 실족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왜 예수님 때문에 실족하게 되는 것입니까? 제자들이 이 때까지 경험한 예수님은 모든 질병과 귀신들과 자연의 세력까지도 제어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큰 능력과 권세를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곧 원수들의 손에 의해 무기력하게 체포당하시고 심문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고난의 의미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성적도 잘 나오고, 건강도 좋아지고, 가정도 축복 받고, 모든 것이 잘 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잘 믿었는데도 오히려 일이 어렵게 될 때 예수님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실족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받는 고난과 시련은 다 뜻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시고 또한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받는 고난과 시련은 장차 영광스러운 희망을 위한 보증 수표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체포당하시면 제자들이 다 도망갈 것을 아셨습니다. 소망을 두고 키워 온 제자들이 위기의 때에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다 도망갈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낙심되고 괘씸하겠습니까? 너무 괘씸한 생각이 들어 판단하고 정죄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가랴 13:7절 말씀을 기초로 그들을 이해하시고 도망가시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시키셨습니다.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목자 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 주시게 되면 제자들은 자연히 흩어지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기초로 제자들의 연약한 내면을 이해하시고 섬세히 도와주셨습니다. 그리고 어두운 그들의 심령에 부활의 소망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32). 예수님은 그들이 흩어질 것을 예언하셨을 뿐만 아니라 함께 모일 것도 예언하셨습니다. 패배를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승리를 말씀하셨고, 절망을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희망도 말씀하셨습니다. 어두움이 끝이 아니라 그 너머에 비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실로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33절을 보십시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대한 충성심을 굳게 맹세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절대로 주님을 배반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말은 진실입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충성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기는 다른 제자와는 다르다는 자기 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실패를 아주 구체적으로 예언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은 베드로가 겉으로는 강한 것 같지만 그 내면은 약한 것을 잘 아셨습니다. 그의 충성심이 믿음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의지와 자기 확신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에 폭풍우가 몰아치면 쉽게 무너질 것을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자신을 아는 것보다 베드로를 더 잘 아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말씀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는 더욱 힘있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자신을 믿어 주지 않는 것 때문에 몹시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배후에 역사하는 사단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가를 몰랐습니다. 그는 너무 자신을 믿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연약함을 깊이 인정하시고 기도하고자 하셨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는 곳에 이르셨습니다. 이곳은 예수님께서 평소에 습관을 좇아 기도하신 곳입니다.(눅22:39) 예수님은 이곳에서 기도의 싸움을 싸우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가장 외롭고 슬프고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대개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면 자포자기하고 잠을 자거나 아니면 어디론가 잠적해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절망의 때에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나아가 기도의 싸움을 싸우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혈과 육의 싸움을 싸우지 아니하시고 기도로 사단과의 영적 싸움을 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고 말씀하시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를 변화산상에 데리고 가서 주의 영광에 동참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겟세마네 동산에 데리고 가서 주의 고난에도 동참시켰습니다. 이는 그들의 부활의 증인뿐만 아니라 고난의 증인으로 삼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가 비록 영적으로 어리지만 기도의 동역자로 삼으시고 기도 부탁을 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큰소리치는 베드로와는 대조적으로 얼마나 연약한 모습입니까? 일반적으로 양들에게 연약한 모습을 보여 주면 목자의 권위가 손상 될까봐 할 수 있는 대로 강한 모습만을 보여 주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매우 연약한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주님의 마음을 알고 그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 오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 앞에서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옆집에서 꾼 닭 한 마리를 갚아 주도록 멋있는 유언을 하면서 태연히 독사 발을 마셨고, 이순신 장군도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맞이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 왜 이렇게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이는 그들의 죽음을 개인적인 죽음이었지만 예수님의 죽으심은 온 인류의 죄를 담당하는 대속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겪으신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그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조그만 십자가도 지기가 힘들어서 고통할 때가 많은 데 하물며 온 인류의 죄짐이 한꺼번에 예수님을 짓누를 때 예수님은 그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될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인간으로서 고뇌하시는 예수님의 진실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몸을 입으신 한 인간으로서 이렇게 무서운 고통을 맛보셨기 때문에 인생들의 모든 고뇌와 고통을 이해하시고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다. 히4:14절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시는 자가 아니요” 예수님은 내가 겪는 슬픔과 마음의 번민과 고통, 나의 연약함과 실패를 잘 아시고 깊이 동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히4:16)

3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땅에 엎드렸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세와 복종하는 마음을 나타내고, 또 주님께 간절히 매달리는 자세를 나타냅니다. ‘내 아버지여’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깊은 사랑과 신뢰심을 가지고 계심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힘들과 답답하고 괴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왜 나를 이렇게 괴롭게 하십니까?” 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섭섭한 마음과 원망하는 마음을 품을 때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깨어지고 진실된 기도를 할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된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치 아니하시고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셨습니다.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말씀은 주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잔을 마시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룰 수 있으면 그렇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잔’은 고통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마음의 번민과 고통을 진실되게 아뢰었습니다. 예수님은 할 수만 있으면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처음부터 십자가를 지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도 고통과 수치와 멸시를 원치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고 수치스럽고 저주스럽게 죽으셔야만 하셨습니다.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저주스러운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심한 정신적 고통을 가운데서 번민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에 머물지 아니하시고 한 걸음 더 나아가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러나’ 이는 위대한 전환입니다. 이는 자기에서 하나님께로의 전환이요, 육에서 영으로의 전환입니다. 예수님은 심한 정신적 고통 가운데서도 자신을 기쁘시게 하기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십자가를 회피하고자 한 기도가 아니라 오히려 이를 적극적으로 감당하고자 하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두신 뜻이 무엇인가를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수차례 제자들에게 이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를 잘 아셨지만 십자가를 질 내적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하여 확신있게 십자가를 감당할 힘을 얻고자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십자가를 져야 할 것은 잘 알지만 십자가를 질 힘이 없어서 피하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1대1 말씀공부도 하기 싫고 소감도 쓰기 싫고 모든 것이 무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우리에게 겟세마네 기도가 필요합니다. 외롭고 괴롭고 답답할 때 주님 앞에 나아가 진실되게 자신의 고통과 소원을 아뢰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 보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위로부터 놀라운 은혜를 덧입혀 주시고 십자가를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내적 힘을 주십니다. 우리는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서 놀라운 영적인 비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쳐 복종시킴으로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자 하는 영적 투쟁이었습니다. 기도란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보다도 자기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여 “그러나 아버지의 원대로 마옵시고 내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찾고 순종하기보다, 내가 원하는 것만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청구합니다. 그리고 그 청구한 것이 빨리 나오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람을 의심하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나의 소원은 좁고 편협하고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크고 원대하고 완전합니다. 사람이 자기의 뜻을 부인하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영적인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4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기도하신 후 제자들에게 오사 그들이 자는 것을 보셨습니다. 베드로는 코를 골며 엎드려 자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왜 잤을까요? 유월절 만찬 때 양고기를 많이 먹고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셨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마음이 슬프고 피곤했기 때문이었을까요? 대개 마음이 슬프고 피곤하면 잠을 많이 자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깨우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이 말씀은 우리가 깨어 기도해야 할 절대적인 이유가 무엇인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단의 시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강하고 또 간교합니다. 사단의 시험은 유혹입니다. 이 유혹은 달콤하고 힘이 있어 우리의 힘과 지혜로 이길 수 없습니다. 사단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습니다(벧전5:8). 우리가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사단의 시험에 들어 영적 분별력과 영적 힘을 상실하여 사단의 밥이 되고 맙니다.

둘째로, 육신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은 약하도다.” 이 말씀은 육신이 약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육신이 약하므로 더욱 때어 기도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강하면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약하기 때문에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깨어 기도하게 되면 연약한 육신도 이길 수 있지만, 기도하지 않으면 건강한 육신을 가진 자도 자신 하나도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기도는 힘든 영적 투쟁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영적 투쟁없이는 영적으로 승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깨어 기도할 때 영적 분별력이 생기고 또 악의 세력과 싸울 수 있는 영적 힘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무거운 십자가도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후에 깨어 기도함으로써 연약함을 이기고 많은 십자가를 지는 능력있는 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핍박으로 인해 흩어진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며 기도하라.”(벧전4:7)

4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은 두 번째 기도에서 우리는 진전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첫 번째 기도에서는 십자가를 부담스러워 하고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기도에서는 십자가를 마음으로 영접하고 적극적으로 감당하고자 하는 자세가 생겼음을 보게 됩니다. 제자들은 피곤을 못 이겨 전보다 더 깊이 잠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십자가를 질 내적 힘과 확신을 얻으시고, 십자가를 지고자 단호히 결단하셨습니다. 그 후 제자들에게 오사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웠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45,46). 예수님께서 기도의 싸움에서 승리하셨을 때 그 마음에 역사하던 모든 고민과 슬픔이 사라지고 대신에 확신과 용기로 충만하셨습니다.

Ⅱ. 체포되고 심문받으신 예수님 (47-75)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가 공회에서 파송된 큰 무리를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왔습니다. 그들은 검과 뭉치를 가지고 왔습니다. 유다가 이미 약속한 신호대로 예수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십니까?” 하며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뻔뻔스럽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는 마귀가 그 속에 들어가 마귀의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요13:2). 예수님은 “친구여, 내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고 하시며 스스로 체포 당하셨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아시면서 스스로 체포당하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는데 있어서도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당하시자 제자 중 하나가 검을 빼어 대 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서 떨어뜨렸습니다. 그는 베드로였습니다(요18:10). 그는 싸워야 할 적이 무엇인지 모르고 혈과 육의 싸움을 싸웠습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겉으로는 용감하게 보이나 실상은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52절을 보십시오.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한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해 줍니다. 토인비는 그의 역저 “역사의 연구”에서 무력을 쓴 나라는 다 망하였지만 온유의 법칙을 쓴 나라만이 남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육신 하사 십자가에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님만이 인류의 진정한 구주가 될 수 있음을 증거했습니다. 검을 사용하게 되면 문제가 쉽게 해결되는 것같이 보이지만 오히려 더 많은 문제를 만들어 냅니다. 예수님께서 검을 사용치 않으신 것은 검을 사용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열 두 영, 즉 12군단 72,000명 더 되는 천사들을 불러와서 순식간에 원수들을 무찌를 수 있었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면 통쾌하지만 성경에 예언된 인류 구속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자기를 구원하는데 있지 않고 성경에 예언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강도가 잡히는 것처럼 체포당하시는 이유도 성경을 이루려 하심이었습니다(56).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배반할 때도(26:24), 또 제자들이 위기의 때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는 것도(26:31), 자신이 체포당하시는 것도 모두 성경의 눈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환난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심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56).

그들은 예수님을 대제사장 가야바가 있는 공회 앞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도망가다가 큰 소리 친 것이 생각나서 되돌아와 멀찍이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국을 보려고 대제사장의 집뜰에서까지 가서 하속들과 함께 앉았습니다. 공회는 재판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해 뜬 후부터 해지기까지 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백성들이 두려워 야간 불법 집회를 열고 예수님을 심문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해 놓고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 증거케 했습니다.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그러나 그 증거조차도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요2:19). 예수님은 한마디 변명도 하지 않으시고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과 같이 침묵하셨습니다. 이 침묵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를 시키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심문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64절을 보십시오.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선포하셨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사 만왕의 왕으로서 온 세상을 통치하실 것과 장차 심판주로서 재림하실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왜 자신의 메시야 됨을 시인하신 후에 “그러나” 라는 접속사를 쓰셨을까요? ‘그러나’라는 접속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nevertheless)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질문할 때 믿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꼬투리를 잡고자 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불신앙에도 불고하고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사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으시고 장차 세상에 심판할 심판주로서 강림하게 될 것을 그들에 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심문을 받고 있으면서 그들에게 심판의 복음을 증거하고 계셨습니다. 이에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으며 신성모독죄로 예수님을 사형에 언도했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죄목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대제사장이 옷을 찢은 것도 위법이었습니다(레21:10). 그들은 사형을 언도한 후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리며 조롱했습니다.

한편 베드로는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아 있을 때 한 비자가 와서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모든 사람 앞에서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노라”고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슬그머니 앞문까지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비자가 “이 사람이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맹세까지 하면서 부인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저주하며 맹세까지 하며 부인했습니다. 이 때 이를 보고 있는 닭이 참다못해 베드로에게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울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그가 실패하게 된 것은 자신을 믿고 깨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심으로서 인류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내 원대로 할 때 그 때는 기분이 좋은 것 같지만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십자가를 질 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친히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우리 모두가 겟세마네 기도를 배워서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영적인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