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 View


골로새서 3:18-4:1(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과 사회생활)

by Mark Yang   08/16/2019   Colossians

Message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과 사회생활

말씀/ 골로새서 3:18-4:1
요절/ 골로새서 3: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로새서는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하는 ‘그리스도론’과 ‘그리스도인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문제는 개인생활과 가정생활, 사회생활과 대인관계로 나누어집니다.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을 입은 자들이 가져야 할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윤리의 특징은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 의무의 윤리입니다. 이것은 당시에는 전혀 새로운 일로서 혁명적인 일이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여자는 수에도 치지 아니할 정도로 무시당했습니다. 부인들은 남편의 종속물에 불과했고, 여자들에게는 법적 권리가 없었습니다. 남편은 아내와 이혼할 수 있으나 아내는 이혼을 할 권리가 없었습니다. 헬라 사회에서도 여자들은 마음대로 외출할 수 없었고, 부인들에게는 완전한 정절과 순종이 요구되었습니다. 유대와 헬라 사회에서는 모든 특권은 남편의 것이고, 모든 의무는 여자의 것이었습니다.

로마 사회는 부권사회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노예로 팔 수도 있었고, 사형을 집행하는 법적 권리까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든 특권은 아버지의 것이고 모든 의무는 자녀의 것이었습니다. 또한 당시에 노예는 물건에 불과했습니다. 노동 조건에 관한 규정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노조도 물론 없었고, 파업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노예가 노동 연령이 지나면 버려져서 죽었습니다. 노예는 결혼의 권리조차 없었습니다. 결혼하여 아이가 생기면 그 아이는 주인의 것이 되었습니다. 모든 권리는 주인의 것이고 모든 의무는 노예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윤리는 권리와 의무가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상호 의무의 윤리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윤리는 특권이나 권리에 대한 생각이 배후에 숨겨지고 책임과 의무가 주요(主要)한 것이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부부관계와 부모와 자녀관계, 상전과 종의 관계에 나타난 상호 의무의 윤리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I. 남편과 아내의 의무 (18-19)

첫째, 아내의 의무 (18). 앞서 말한 대로 당시 아내들은 남편의 종속물로서 남편에게 절대 복종해야 했습니다. 아내는 예수 믿기 전에도 남편에게 복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노예적인 복종이었습니다. 이는 복종이 아니라 굴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난 후로는 동등하므로 더 이상 복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복종하지 않는 자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에 바울은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마땅하니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자신을 남편의 권위 아래 두는 것으로서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것입니다. 이는 남편을 무시하지 말고 남편의 권위를 존중할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대개 여자는 감성적이어서 이해와 사랑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남자는 이성적이어서 권위를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남자는 권위가 손상당하면 견디기 힘들어합니다.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되려면 질서가 바로 서야 합니다. 가정에 질서가 바로 서려면 남편의 권위가 세워져야 합니다. 남편의 권위가 세워지려면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남편의 노예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노예는 억지로 어쩔 수 없이 복종합니다. 그러나 아내는 억지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해서 남편이 아내에게 명령할 권리를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아내가 가정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아내의 남편에 대한 복종은 그가 남편을 돕는 자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과 남편이 가정의 머리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영접하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원래 남녀는 동등하게 지음을 받았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하나님께서 남자의 옆구리에서 갈빗대를 취하여 여성을 만드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남성의 어느 부분에서 여성을 창조하실까 생각했다. 하나님께서는 여성이 너무 건방지게 머리를 쳐들지 않도록 머리에서 창조하지 않고, 너무 호기심이 많지 않도록 눈에서 만들지 않고, 몰래 엿듣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귀에서, 너무 말이 많지 않도록 입에서, 너무 질투심이 많지 않도록 가슴에서, 너무 욕심이 많지 않도록 손에서, 너무 쏘다니지 않도록 발에서 창조하지 않고, 육체의 감춰진 곳을 택하여 그것으로 창조하여서 겸손하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남자의 옆구리에서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심으로 남자와 동등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역할은 남자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돕는 배필이 되게 하셨습니다. 남자는 큰소리치지만 여자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아내는 남편이 없이 살아갈 수 있지만, 남편은 아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남자는 세상을 지배하지만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여자라고 하였습니다. 탈무드에도 여성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신앙심이 깊은 남성이 신앙심이 깊은 여성과 결혼했으나 자식이 없으므로 서로 이혼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사악한 여성과 재혼하였다. 그의 새 아내는 그를 사악케 만들었다. 한편 이혼당했던 신앙심이 깊은 그녀는 다시 사악한 남성과 결혼하여 사악한 남편을 바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를 볼 때 돕는 배필의 사명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돕는다는 것은 성숙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남편에게 맹종하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남편이 하는 것은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고 남편을 하나님처럼 섬깁니다. 그러다가 함께 사단의 시험에 들어 멸망합니다. 이것은 올바른 동역이 아닙니다. 남편을 올바로 동역하려면 늘 깨어서 기도함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자를 남자의 동역자(파트너)로 창조하셨지만 여자가 동역을 잘못함으로 범죄하게 되고, 이로 인해 아내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의 다스림을 받게 되었습니다(창 3:16). 결혼을 한 후에 아내가 남편의 사랑을 받으려고 애를 쓰는 것은 저주받은 여인의 소원입니다. 아내가 저주받은 여인의 소원을 좇아 남편의 사랑을 받으려고 애를 쓰게 되면, 남편은 아내를 기쁘게 하려고 애쓰다가 아내에게 얽매여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여자가 돕는 배필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때 가정이 제대로 서지 못하게 되고 불행하게 됩니다. 범죄로 말미암아 여자의 지위가 남편의 다스림을 받는 주종의 관계로 전락하였으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지위가 회복되어 남편과 아내는 동등하게 되었습니다(갈 3:28). 그러나 아내로 하여금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신 것은 아내가 돕는 배필로서 역할을 잘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질서를 바로 잡아 주신 것입니다. 동등하다고 해서 아내가 남편을 무시하고 남편에게 대들고 불순종하면 남편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가정에 질서가 서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가정에 화평이 없게 되고, 자녀들도 제대로 성장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은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 매우 중요합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남편의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으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가 되기 때문입니다(엡 5:22-24). 현대에 와서 여성들의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많은 여성들이 성경의 진리에 반발하여 페미니스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것으로써 가정을 파괴시키는 불행의 원인이 됩니다.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은 가정의 질서를 지키고 하나님의 뜻을 섬기기 위한 것이므로 결국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가르침은 남편이 가정의 군주가 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아내에게 성경 말씀대로 나에게 복종하라고 요구를 하면 안 됩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아내의 자유의지에 기초해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과거에는 남편은 가정의 군주로서 독재자였고 아내는 아이를 낳고 기르고 남편의 필요한 것을 섬기는 하인과 거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아내는 남편의 노예가 아님을 말해 줍니다. 결혼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가져온 가장 근본적인 결과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주종 관계가 아니라 협력관계요 동역관계로 본 것입니다. 결혼은 남편이나 아내의 어느 한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기쁨과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에게 요구하기보다 서로 감당해주고 각자의 역할에 충실함으로써 행복을 창조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남편의 의무 (19). 19절을 보십시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남편에게 주는 교훈은 적극적인 교훈과 소극적인 교훈으로 나누어집니다. 남편들에게 자기 아내를 사랑하도록 권면한 것은 당시에 아내를 쉽게 버릴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여인을 쉽게 취할 수 있었던 문화적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하는 것은 육체적인 에로스의 사랑이나 정신적인 필리아의 사랑이 아니라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에베소서 5:25절에서는 더 한층 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비유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께 하듯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희생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남편이 아내를 희생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이조시대에는 남편은 남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권위를 부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남편의 권위는 자기 희생적인 사랑을 통해서만이 세워질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로지 사랑의 방법으로만 가능합니다. 사랑은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믿는 것입니다. 사랑은 한마디로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남편들에게 주는 소극적인 교훈은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를 보면 당시에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남편들이 아내들을 많이 괴롭혔던 것 같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괴롭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감정적으로 화를 낸다거나 말을 함부로 한다거나 힘이 좀 세다고 해서 손찌검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언어적인 폭력이나 물리적인 폭력은 아내를 괴롭히는 주 원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정당한 이유라도 폭력은 절대로 금물입니다. 남자들은 아내를 때리면서 맞을 짓을 했으니까 버릇을 고쳐주어야 한다고 때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내는 자기가 맞을 짓을 했다는 것을 인정할지라도 맞은 것으로 인해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고 남편을 남편으로 존경할 수 없게 됩니다. 물론 아내는 남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면 안 되지만, 남편은 자존심이 상한다고 해서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통계적으로 아내가 남편과 이혼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남편이 부드럽고 친절하지 못하고 거칠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자들은 감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부드럽고 친절한(gentle and kind) 남자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제비족들이 이런 여자의 약점을 이용하여 부드럽고 친절하게 함으로써 여자를 꼬십니다. 남편이 아내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서 자신의 인격이 나타나게 됩니다. 아내를 황공주와 같이 대하면 남편은 황공주의 남편이 되므로 황태자가 되지만, 아내를 식모같이 대하면 남편은 식모의 남편이 되어 머슴이 됩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아내를 황공주와 같이 귀히 여기고 아내의 의견을 존중해 주고 아내의 고충을 들어 주고 이해해 주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문자 메시지도 보내기도 하고 선물을 사 줌으로써 아내가 행복을 느끼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반찬이 좋아지게 됩니다.

남편과 아내의 의무는 우리 죄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내어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디도서 2:4절을 보면 아내도 남편을 사랑해야 함을 말해 줍니다. 결국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적인 사랑은 오래 가지 못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은 변함이 없고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부부 윤리가 세상에서의 부부 윤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내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남편에게 자발적으로 순종합니다. 남편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내를 귀히 여기고 아껴주며 이해해 주고 돌봐 줍니다. 이렇게 남편과 아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 될 때 자녀들은 그 가운데서 무한한 행복을 누리며 구김살 없이 아름답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II. 부모와 자녀의 의무 (20-21)

첫째, 자녀의 의무 (20). 20절을 보십시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여기서 순종은 18절에 나오는 복종과는 다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복종은 헬라어로 ‘휘포탓소’(ὑποτάσσω)인데 이는 ‘~ 아래에 두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순종은 헬라어로 ‘휘파쿠오’(ὑπακούω)로서 상대의 말을 주의해서 듣고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녀의 부모에 대한 순종은 십계명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해도 좋고 안 해도 괜찮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해야 할 계명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6:1-3절에서는 좀 더 자세히 권면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고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막내 딸 Little Sarah에게 매년마다 에베소서 6:1절 말씀을 요절로 붙들고 투쟁하도록 하셨습니다. Little Sarah 선교사님은 시카고에서 2세들의 목자로서 그들을 잘 이해하고 품고 섬기는 위대한 목자의 직분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는 매년마다 이 말씀을 붙들고 투쟁하는 가운데 부모님에게 순종하는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고 이것이 축복받는 비결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간증했습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원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요 근본적으로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인 동시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해서 하나님을 믿고 헌신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부모의 말을 들으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에 있어서는 어떤 경우라도 타협하거나 양보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때로 부모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섬길 것이냐 부모를 섬길 것이냐를 놓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어리석은 요구를 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부모 자신이 하나님의 위치에 서겠다는 엄청나게 교만한 말로서 사단적인 말입니다. 십계명에서도 첫째부터 넷째 계명까지는 하나님에 관한 계명으로서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대신 할 수 없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제 오 계명에 해당됩니다. 또 부모가 도적질 해 오라고 한다거나 누구를 죽이라는 말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어기지 않는 한에서 부모님에게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둘째, 부모의 의무 (21). 21절은 아비들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우리가 결혼을 하게 되면 자녀를 낳게 되고 자연히 부모가 됩니다. 부모는 자녀를 낳고 키우면서 많은 수고를 합니다. 그런데 부모는 자녀에 대해서 그릇된 관을 갖기 쉽습니다. 이는 자기가 낳고 기른다고 해서 내 소유로 생각하고 함부로 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은 내 자식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소유로서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키우도록 위탁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충성된 청지기로서 자녀들을 하나님의 쓰실만한 사람으로 키울 의무가 있습니다.

자녀 양육에 있어서 부모가 피해야 할 함정은 지나치게 관대함과 지나치게 엄격함입니다. 어떤 부모는 먹고 살기 힘들어서 자녀들을 거의 방치해 버립니다. 대부분의 문제 아이들은 자녀들에 대한 부모의 무관심에서 생겨납니다. 또 자녀가 병들고 못쓰게 되는 주된 원인은 부모가 자녀를 마음대로 좌지우지 하는 것입니다. 특히 어머니들이 자녀에게 너무 헌신적인 나머지 모든 것을 다 해 줌으로써 중풍병자를 만들어 놓거나 또는 지나치게 간섭함으로써 자율성이 없는 아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너무 관대하여 훈련이 없는 경우에도 쓸모없게 만들지만, 너무 엄격하여 주눅이 들게 하는 것도 못쓰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부모의 의무는 자식을 징계하는 것만이 아니라 격려하는 것입니다. 루터는 “채찍을 아끼면 자식을 잃는다. 이것은 진리이다. 그러나 그가 잘 하였을 때 줄 사과를 채찍 옆에 준비하라.”고 하였습니다. 자녀를 훌륭하게 키운 부모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징계보다 칭찬을 더 많이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칭찬과 징계의 비율을 9대 1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됩니다. 징계도 절대로 감정적으로 해서는 안 되고 사랑으로 해야 됩니다. 자녀들이 훈련을 통해서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부모는 아무리 어린 자녀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해 주고 그들의 인격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보고 본받을 수 있도록 역할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가장 잘 키울 수 있는 것은 자녀들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고 기도해 주는 일입니다. 에베소서 6:4절에서는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녀를 하나님이 쓰실만한 사람으로 양육하는 가장 좋은 지침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한마디로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노엽게 한다는 것은 감정들을 흥분케 하거나 자극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부모로서의 권위를 내 세우며 자녀의 의견을 무시하고 밀어 붙일 때 마음이 상하게 됩니다. 감정적으로 큰소리를 치거나 때릴 때 마음이 상하게 됩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이해할 수 없는 언행으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고 낙심하게 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아무 생각 없이 언어폭력을 쓰기 쉽습니다. “이 돌대가리야 그것도 몰라. 죽어라 죽어”, “이 바보 같은 놈아, 너는 싹수가 노랗다.”라고 말할 때 낙심하게 됩니다. “너는 왜 동생 보다 못하냐?” 또는 “이웃집 애보다 못하냐?“ 하고 비교할 때 낙심하게 됩니다. ”너는 다리 밑에서 주어왔다. 우리 집안에는 너 같은 애가 없다.“와 같은 말을 할 때 마음에 깊이 상처를 받게 됩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자님은 딸이 하루는 수학을 28점을 받아와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딸을 도와주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딸을 도와주고자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 틀린 문제를 다시 풀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못 풀자 참고 참다가 화가 나서 ”이것도 못 푸냐 이 돌대가리야“라고 자신도 모르게 욕을 했습니다. 그러자 몇주 동안 딸이 말을 안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목자님은 자신이 크게 실수한 것을 알고 ”내가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리고 ”네가 긴장해서 그런 것 같으니 너는 잘 할 수 있어“라고 격려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다음 수학시간에 기도를 했는데 ”수학시험을 잘 봐서 아빠에게 돌대가리라는 심한 말을 듣지 않게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빠의 격려에 힘입어 시험을 잘 보아서 98점을 받았다고 합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게 되면 자녀는 부모를 공경할 수 없게 됩니다. 정도가 심하면 어떤 모양으로든지 부모에게 복수를 하고자 하게 됩니다. 복수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부모가 가장 싫어하는 일을 함으로써 부모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골탕을 먹입니다. 부모에게 반항을 하고 폭력적이 됩니다. 부모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신앙을 버리는 일인 줄 알고 신앙을 버리기도 합니다. 청소년들이 탈선하는 경우를 보면 대개 부모가 자식들을 노엽게 함으로써 부모와의 관계성이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아동 뒤에는 문제의 부모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우려면 훌륭한 부모가 되기에 힘써야 합니다. ‘CEO가 되는 길’이라는 책을 보면 50명의 CEO를 연구해 본 결과 한결같이 부모들이 훌륭했습니다. 특별히 어머니가 훌륭했습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믿어 주었습니다. “나는 너를 믿는다.” “너는 잘 할 수 있어.”라고 격려했습니다. 가치교육은 7살까지 끝난다고 합니다. 매질은 7살까지 해야 효과가 있지 그 후로는 효과가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11살이 넘은 후로는 절대로 손찌검을 해서는 안 됩니다. 진실된 그리스도인이 가장 되기 힘든 곳이 가정입니다. 왜냐하면 가정에서는 모든 것이 다 노출되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인정을 받고, 무엇보다 부모가 자녀에게 인정을 받는다면 진실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III. 상전과 종의 의무 (3:22-4:1)

오늘날 우리는 노예시대에 살고 있지 않지만 상전과 종에 관한 교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용합니다. 우리는 조직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윗사람으로서 해야 할 의무와 아랫사람으로서 해야 할 의무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첫째, 종의 의무 (22-25). 다른 교훈들은 1절씩 핵심적으로 언급되어 있지만, 종들에 대한 교훈은 길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당시 종은 주인에게 물건 취급을 당하며 가혹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노예를 하나님의 자녀로 동등하게 대우했습니다. 이로 인해 수많은 노예들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로 몰려 왔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누구나 형제라고 불렀기 때문에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거부하고 맞먹으려고 함으로 상전과 종 사이에 갈등관계가 형성되기 쉬웠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종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그리스도인 종들이 가져야 할 자세는 육신의 상전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순종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하는 것과 동일한 단어로서 상대의 말을 주의해서 듣고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은 육신의 상전에게 순종을 하되 눈가림식으로 하지 말고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고 합니다. 종들은 노예근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보면 열심히 하지만 주인이 보지 않으면 눈가림식으로 적당히 합니다. 만일 그리스도인 종이 그렇게 하면 그리스도를 욕먹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주께 하듯 마음을 다하여 섬길 때 세상에서도 인정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프랑스 루이 14세 때 재무장관을 지낸 콜베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소년시절에 포목점에서 점원으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돈 많은 은행가가 호텔에 와서 머물면서 옷감 하나를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잘못 계산하여 돈을 배나 받아왔습니다. 주인은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그 소년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 돈을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주인은 “그 사람은 돈 많은 사람이니 괜찮아”하고 말했지만 그 소년은 주인과 싸워가며 그 돈을 돌려주었습니다. 이에 주인은 화가 나서 그 소년을 해고시켜버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은행가는 그를 자기 은행에 취직시켰습니다. 그는 그 은행에서도 누가 보든 안 보든 주께 하듯 정직하게 일을 하여 나중에는 재무장관이 되었습니다.

24,25절은 종들이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이 말씀은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의 인정과 칭찬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인정과 칭찬을 바라며 하라는 것입니다. 종들이 마음을 다해 성심성의껏 일할 때 영광된 약속이 있습니다. 당시의 종들은 아무리 일을 열심히 잘 한다 할지라도 상을 받는 것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일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인이 시키는 것만 하고, 주인이 있을 때만 하고, 혼나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눈치껏 하였습니다. 아무리 감시 체제를 만들어 놓아도 소용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애써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인만 좋게 한다고 생각하면 일할 의욕이 안 생기고 주인에 대한 쓴 뿌리를 갖고 손해의식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상을 받는다고 할 때 열심히 일할 수 있는 동기가 생기게 됩니다. 그들은 임금 때문에 일하는 것이 아니고, 지상의 주인을 만족하기 위해 일하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일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고 하나님의 상을 받기 위해 합니다. 우리가 상전들이나 고용자들을 충성되게 섬길 때 실상은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하는 모든 일이 주님의 일이며 주님께서 주신 일이므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일에 대한 청지기 자세입니다.

둘째로, 불의를 행하는 자는 반드시 그 대가를 받기 때문입니다(25). 25절을 보십시오.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시는 분이 아니고 공평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행한 대로 보응을 하십니다. 종이나 주인이나 동일하게 잘못을 행한 자는 주님께로부터 징계를 받게 됩니다. 악을 행한 자는 교육을 받았거나 무식하거나 신분이 높거나 낮거나 강자이거나 약자이거나 부하거나 가난하거나 관계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징계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때때로 악을 행하는 자들이 벌을 받지 않고 선을 행하는 자가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러나 최후 심판 날에 그 행한 대로 반드시 보응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차별대우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기보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종들에 대한 바울의 교훈은 양심적인 노동자가 되어 이전보다 더 좋고 유용한 노예가 되게 하는 것처럼 생각되어 노예 제도를 옹호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노예제도를 옹호하거나 폐지하는 것과 같이 사회개혁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근본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화되어 변화된 사람을 통하여 가정이 변화되고 사회가 변화되도록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사람이 변화되어야 가정도 변화되고 사회도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에 있는 어려운 일을 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열심히 일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합니다. 또한 기독교는 어려운 환경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에 맞서서 싸우도록 격려합니다. 당시에 노예들이 이 교훈을 깊이 영접하고 그대로 행했을 때 그들은 로마제국을 복음화 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당시 노예들 가운데는 오네시모와 같이 주인의 재산을 훔쳐 달아나기도 하고 주인을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노예들은 아주 착하고 순종을 잘 하였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인이 밤늦게 집에 돌아가는데 어느 한 곳에서 노래 소리가 들렸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노예들이 자고 있는 돼지 우리간 같은 곳에서 잠자기 전에 찬송을 부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는데 주인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인 건강하게 해 주시고, 형통하게 해 주시고 훌륭한 일 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인은 크게 감동을 받고 그들에게 가서 ‘나도 예수 믿겠다’ 하며 노예를 다 풀어주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자꾸 생기므로 마침내 대 로마제국이 기독교화한 것입니다.

둘째, 상전의 의무 (4:1). 4:1절을 보십시오.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상전은 모든 것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함부로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상전들은 자기에게도 하늘에 주인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상전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이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탈란트 비유에 나오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주인으로서 나에게 맡겨 주셨다는 청지기 사상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상전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특히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부부관계와 부모와 자녀관계와 상전과 종 관계에 있어서 그리스도교 윤리를 살펴 볼 때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 의무의 윤리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윤리의 전체 방향은 “상대방이 나에게 무엇을 해 줄 것인가?”가 아니라, “나는 상대방에게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구하는 자세보다 섬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문제는 대부분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데에서 생겨납니다. 서로 요구하기보다 서로 낮아져서 섬기고자 할 때 문제가 생길 수가 없습니다. 남편은 남편으로서, 아내는 아내로서, 부모는 부모로서, 자녀는 자녀로서, 윗사람은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은 아랫사람으로서 맡은 바 의무에 충성하게 되면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됩니다.

또 그리스도교 윤리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관계가 ‘주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행해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주 안에서’(18,20), ‘주를 두려워하여’(22) ‘주께 하듯 하고’(23) ‘주께 받을 줄 아나니’(24)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24), ‘주는 외모로’(25) 등에서 ‘주’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지만 그 집에 항상 계시고, 둘이 있을 때도 그 가운데 계십니다. 가정의 주인도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직장의 주인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부부간의 관계도 그리스도가 중심에 와 계시고,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도 그리스도가 중심에 계셔야 합니다. 주인이나 종은 다 같이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살 때 진정으로 행복이 있게 됩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각자 맡은 바 의무에 충실함으로써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에서 승리하고 행복을 창조해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