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네시모를 위해 간구하는 바울
■ 말씀 :빌레몬서 1-25
■ 요절 :빌레몬서 10
“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빌레몬서는 바울의 서신 가운데 가장 짧은 서신이요 또 유일하게 사(私)적인 서신입니다.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감옥에 갇힌 노사도 바울의 복음정신과 한 몹쓸 영혼에 대한 위대한 사랑이 잘 나타나 있어서 이 서신을 읽는 사람의 마음을 뭉클하게 합니다. 사바티에르(Sabatier)라는 학자는 “본서는 몇 줄에 불과한 짧은 서신이지만 이 짧은 서신은 신약이라는 보고 중에서도 가장 순수한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빌레몬서를 쓰게 된 동기는 이러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다가 유대인의 고소를 받아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재판 결과 아무 죄가 없음이 판명되어 무죄석방 될 수 있었지만 로마 복음화의 불타는 비전 가운데 어떠하든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황제에게 상소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와서 셋집이라 불리우는 마메르티누스 감옥에서 2년 동안 자기를 지키는 근위병들과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감옥에 갇힌 지 얼마 후에 에바브라가 로마에 와서 골로새 교회에 거짓교사가 들어와 여러 가지 이단을 가르친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신앙을 바로 잡기 위해 골로새서를 쓰고, 또한 가장 주력했던 전도지인 에베소 교회와 그 부근의 교회에 주려는 목적에서 에베소서를 기록하여 두기고 편에 보내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마침 로마 감옥에서 바울을 만나 회개한 오네시모를 그의 주인에게 돌려보내어 용서를 받도록 하기 위해 빌레몬서를 기록하여 오네시모와 함께 두기고 편에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빌레몬서는 바울이 로마 옥중에 1차로 투옥된 지 주후 60년경에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와 함께 거의 같은 시기에 썼다고 보고 있습니다.
빌레몬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3년간 체류하면서 두란노 서원에서 2년 동안 날마다 복음을 전할 때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들었다고 하였습니다(행 19:10). 이때 빌레몬이 골로새에서 에베소에 왔다가 바울의 메시지를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고, 고향에 돌아가서 에바브라와 함께 골로새 교회를 설립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후 그는 골로새 교회의 감독으로 있다가 네로 황제 때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빌레몬서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여기에는 ‘용서’라는 단어가 나와 있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용서의 사랑이 서신 전반에 짙게 깔려 있습니다. 바울은 용서 받은 자로서 오네시모를 복음으로 낳았고, 그를 주인 빌레몬에게 보내면서 그를 용서하도록 간구하고 있습니다. 용서의 사랑은 아무 쓸모없는 오네시모를 살렸고 쓸모 있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용서의 사랑은 바울과 빌레몬과 오네시모와 모든 성도들을 하나 되게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는 그 무엇보다도 용서의 사랑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용서의 사랑이 없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를 잃고 서로 미워하고 복수심과 원한에 사무쳐서 응어리진 마음으로 지옥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는 사람들조차 용서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원한과 복수심과 인간적인 갈등에 사로잡혀 신음하며 고통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용서의 사랑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용서의 사랑으로 서로 용서함으로써 응어리진 것을 풀고 마음에 참 평화와 기쁨과 자유함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빌레몬의 믿음의 선한 영향력 (1-7)
1-3절은 인사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및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은 거의 모든 서신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이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의 죄수 바울’(Paul, a prisoner of Christ Jesus)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감옥에 갇혀 있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잡힌바 되어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는 편지를 쓰면서 항상 복음역사를 위해 함께 수고하는 동역자들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디모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그가 복음으로 낳은 영적 아들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된 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빌레몬도 그의 제자이지만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라고 함으로써 그들의 사이가 사랑으로 깊이 맺어진 친밀한 관계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자매 압비아는 빌레몬의 아내를 말하고, 아킵보는 그의 아들로서 골로새 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골 4:17). 이들은 온 식구가 함께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가정이었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박 철규 학장님과 옥희 사모님 그리고 모친과 아들, 딸이 다 주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가정입니다. ‘네 집에 있는 교회’라는 것을 보면 빌레몬은 그의 집을 성도들의 예배처소로 내어놓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적어도 3세기까지는 가정교회 형태로 모임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당시 호화찬란하고 웅장한 이교도의 신전과 대조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간구합니다.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항상 은혜와 평강이 넘쳤습니다. 이는 세상이 주는 평강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온 것이었습니다.
4-7절은 빌레몬을 향한 바울의 감사와 기도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을 생각할 때마다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4). 바울에게는 나의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나의 하나님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인격적으로 만난 하나님, 내가 섬기고 있는 하나님, 내가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 하나님, 하나님과 나 사이에 어느 누구도,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개입할 수 없는 인격적이고 친밀한 나의 하나님을 믿는 개인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거나 외로워하거나 답답해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오는 참된 기쁨과 자유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바울이 빌레몬을 인하여 감사하는 이유는 주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5).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성도에 대한 사랑은 우리 믿는 자들이 가져야 할 기본자세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성도에 대한 사랑이 없는 자는 참된 믿음이 아니요, 성도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믿음이 없는 자는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은 반드시 성도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됩니다.
6절은 빌레몬을 위한 바울의 기도입니다.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 이 말씀은 빌레몬이 성도들을 섬기고 또 오네시모를 용서함으로써 갖게 되는 믿음의 교제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할 선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 영광이 되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은 빌레몬의 선한 행위로 인해 고통과 슬픔과 비애 가운데서 평안을 얻었으며, 바울 자신도 그의 사랑으로 인해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습니다(7).
이상에서 우리는 빌레몬이 믿음의 선한 영향력의 소유자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행한 선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짐작컨대 그가 노예를 소유하고 있고 그의 집을 예배처소로 제공한 것을 보아서 물질적으로 부요한 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개 물질적으로 부요한 사람은 그 부를 자기와 자기 가족을 위해서 쓰거나 남을 위해서 쓰더라도 어느 정도 선을 그어놓고 그 이상은 쓰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자기를 위해서는 부요하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인색합니다. 또 졸부들은 물질이 좀 있다고 해서 거들먹거리며 없는 사람을 무시하고 거만을 부립니다. 이런 자들은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내고 부에 대한 좋지 못한 인식을 심어놓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로서 사업에 성공하여 돈을 번 사람은 자선 사업이나 공공 도서관 건립 등 공공의 이익을 위해 물질을 기부함으로써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미 국민의 98%가 매년 어떤 형태로든 기부행위에 참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로써 미국이 약육강식과 빈익빈 부익부를 낳은 자본주의의 발원지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자원 봉사와 함께 기부 문화가 뿌리 내리고 있기 때문에 미국 사회가 지탱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인간의 선한 마음으로는 잘 되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를 위해 독생자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 주신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덧입을 때만이 기꺼이 기쁨으로 할 수 있습니다. 빌레몬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재물에 소망을 두고 자기와 자기 가족을 중심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또 돈을 벌기 위해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치기도 하고 상처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영접한 후에는 그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더 이상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께 두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물로 선한 일을 하고 생명을 살리는 선한 사업에 투자하기 시작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나눠주기를 좋아하고 주와 복음역사를 위해 기쁨으로 드리기 시작했습니다(딤전 6:17,18). 그의 집도 기꺼이 성도들의 예배처소로 제공하고 시시때때로 음식으로 섬겼습니다. 그러자 과거에는 썰렁하던 그의 집이 이제는 사람들로 붐벼서 은혜와 생명력이 차고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의 집은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곳이 되었습니다. 그의 믿음의 선한 영향력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고 사람들에게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빌레몬과 같이 믿음의 선한 영향력을 소유한 사람들이 많이 나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I. 오네시모를 위한 간구 (8-25)
바울은 빌레몬의 믿음의 선한 영향력을 인하여 감사한 후 8절부터는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8-10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네게 마땅한 일’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도망간 노예를 용서하고 형제로 받아들이는 것은 당시의 윤리 수준으로는 결코 마땅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노예 제도는 참으로 가혹하였습니다. 로마제국 내에는 자유민의 4배에 해당되는 약 6천만명의 노예가 있었습니다.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주인은 노예에 대하여 생사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 노예가 수정으로 된 술잔들을 안뜰로 나르다가 그 중 하나를 떨어뜨려 깨뜨렸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 노예를 즉시 연못에 집어던져 넣으라고 명했습니다. 그런데 그 연못에는 사나운 칭성상어가 있어 그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말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반항적인 노예는 즉시 제거되었습니다. 도망가다가 잡히면 잘해야 그의 이마에 도망자라는 라틴어 단어의 첫 문자인 ‘F’자가 낙인으로 찍혔습니다. 사소한 죄로 인해 십자가형으로 죽은 노예들이 부지기수였다고 합니다. 오네시모는 주인에게서 도망할 뿐만 아니라 주인의 재물을 도적하여 도망하였으니 백번 죽어 마땅하였습니다. 당시 사회 윤리로서는 그를 용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높은 윤리 수준으로는 그를 용서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하여야 할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대 사도요 그의 목자로서 이런 높은 윤리적 수준을 자기 제자인 빌레몬에게 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권위에 의한 명령이 아니라 도리어 사랑으로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때까지 한 번도 나이 많은 것을 내세우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나이 많은 것과 그리스도를 위해 갇힌 자 된 것을 기초로 빌레몬의 심정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10절에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가리켜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새 역사를 창조하는 바울의 복음정신과 쓸모없는 한 영혼에 대한 깊고 넓은 목자의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무슨 일을 하려면 일할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옥과 같은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건 개선을 바라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부모를 원망하고 사회를 원망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중풍병자가 되어 무기력하게 드러누워 지냅니다. 그러나 바울은 환경이 힘들다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런 환경에 처하게 하신 하나님을 원망하고 동족인 유대인을 원망하고 로마 사회를 저주하고 드러누워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감옥과 같은 환경에 도전하고 운명에 도전하고 불가능에 도전하여 새 역사를 창조했습니다.
그는 또한 도망간 천한 노예를 복음으로 낳고 영적인 아들로 삼았습니다. 나이 많아서 낳은 아들이이요 옥중에서 고난 중에 낳은 아들이기 때문에 더욱 귀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오네시모는 노예요 도망자이요 절도범이었습니다. 대개 제자로 키우기 위해서는 인간기초가 있고 학벌도 있고 인물도 내세울만한 쓸만한 자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제자양성은 쓸만한 자를 불러서 제자로 키우는 것이 아니라 아무 쓸모없는 자를 불러서 회개시키고 병든 내면을 치료해 주어서 쓸만한 자로 키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쓸모없는 무자하고 늙은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믿음을 심으시고 그의 병든 내면을 감당해 주심으로 복의 근원이요 열국의 아비로 키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비린내 나는 어부들을 불러 그들의 약점과 허물과 실수를 다 감당해 주심으로 그들을 인류의 스승들로 키우셨습니다. 특히 이기심과 탐욕으로 깊이 병든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사 성 마태로 키우신 것은 우리가 제자양성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네시모가 어떻게 바울을 만나게 되었는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는 자유가 그리워서 주인의 돈을 훔쳐가지고 도망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는 거리에 휩싸여 몸을 숨기고자 국제도시인 로마로 갔습니다. 그런데 어찌하다가 바울을 만나게 되고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사람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천사와 같이 따뜻하게 영접하고 귀히 여기고 또 죄로 인해 파멸해 가는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용서의 복음, 사랑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오네시모의 마음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자기와 같이 몹쓸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보배 피를 흘리시고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용서의 사랑에 감격하여 눈물 콧물 흘리며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진실되게 회개 소감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바울은 그가 어떤 자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비천한 노예 신분이요 또 주인에게서 도망 나온 도망자요 거기에다 주인의 돈을 훔쳐 달아난 중죄인임을 알았을 때 그를 용납하고 가까이 두기에는 꺼려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를 품고 아들과 같이 그를 귀히 여기고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의 병든 내면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옥중에 있는 바울을 가까이서 섬기는 심복이 되어 많은 도움을 주는 유익한 자가 되었습니다(11-13). ‘오네시모’라는 이름은 ‘유익’ 또는 ‘가치’를 뜻하였지만 그는 죄로 인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무익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그가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듣고 그 인생이 180도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가 되었습니다(골 4:9). 바울은 그를 가까이 두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도망 나온 주인에게 돌아가서 용서함을 받고 주인과 새로운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보내면서 그를 용서해 줄 뿐만 아니라 사랑 받는 형제로 용납해 줄 것을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용서의 복음이 어떻게 사람을 새 사람 되게 하고, 무가치하고 무익한 사람을 유익하고 가치 있는 사람으로 변화시키는가를 보게 됩니다. 복음에는 아무리 쓸모없는 자라도 유익한 자로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나같이 쓸모없는 자가 변화되어 쓸모 있는 자가 될 수 있을까 염려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죄의 세력에 사로잡혀 좀처럼 변하지 않는 양들을 볼 때 절망적인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어떤 죄인이라도 변화시켜 새 사람 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복음은 노예 상인이었던 존 뉴톤을 변화시켜 한 소자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수많은 영혼들을 주님께로 돌이키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게 했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역사는 우리 가운데도 충만합니다. 저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저는 과거 교만하고 정욕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운명적이고 병든 병아리와 같이 몸과 마음이 연약하여 아무 쓸모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저를 변화시켜 겸손하고 거룩함을 사모하고 남을 배려하고 어떤 역경 가운데도 굴하지 아니하는 강하고 담대한 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축복을 나누어 주는 유익한 사람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나에게 임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도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로서 무가치하고 무익한 자였으나 복음을 영접했을 때 가장 유익하고 가치 있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딤전 1:13-14).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딤전 1:15) 오네시모는 빌레몬으로부터 용서함을 받은 후 자유인이 되어 로마로 돌아와 자기와 같이 불쌍한 처지에 있던 노예들과 도시 빈민들에게 소망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디모데가 순교한 이후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되어 30년간을 일하다가 화형을 당하여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을 대신하여 자기 곁에 머물게 하여 섬기게 하고자 하나 빌레몬의 허락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않고 자발적으로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이란 자유의지에서 나온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기 때문에 인간에게 선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전능하시다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실 수 있지만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기 때문에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선을 행하되 남이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억지로 하기 쉽고 분위기에 말려서 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선이 아닙니다. 자유의지에서 자발적으로 하는 선만이 진정한 선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잠시 동안 주인을 떠나 도망한 것은 그로 하여금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돌아와 신실한 종이 되어 빌레몬의 곁에 영원히 있게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15).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그를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받아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16). 바울에게 있어서 오네시모는 이처럼 소중한데 하물며 육신으로나 주 안에서 상관된 빌레몬에게는 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레몬이 바울을 친구로 생각한다면 바울을 대하듯이 그를 반갑게 맞아 주기를 간구합니다(17).
바울은 더 나아가서 오네시모가 주인의 돈을 훔침으로써 손해를 끼친 것을 직접 변상할 테니 나에게 청구하라고 말합니다(18). 친필로 쓰는 것은 확실하게 갚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빌레몬이 바울에게 진 영적인 빚은 갚으라고 말하지 않겠다고 합니다(19). 여기서 우리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음으로서 그 대가를 치르신 그리스도의 속죄의 그림자를 보게 됩니다. 바울이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오네시모를 구원하고자 한 것은 우리 주님의 크신 구속의 사랑을 덧입었기 때문입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바울이 원한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빌레몬이 순종함으로 인해 마음의 기쁨과 평안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바울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까지 간청하는 바울의 간구를 빌레몬이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를 형제와 같이 따뜻하게 영접하고 축복한 후에 바울에게로 되돌려 보내지 아니할 도리가 있겠습니까? 바울은 빌레몬에게 옥중 생활을 끝내고 나가면 머물 수 있는 처소를 예비해 주기를 부탁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기도로 그들에게 나아가게 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22). 23,24절은 작별 인사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옥고를 치루고 있는 에바브라와 그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그들에게 문안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들 심령과 함께 있기를 간구하면서 서신을 끝맺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주인의 재물을 가지고 도망 나온 오네시모를 육신의 상전인 빌레몬에게 보내면서 그를 용서해 주도록 허리를 숙이면서 온 마음으로 간구하는 바울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바울의 내면에는 그리스도의 용서의 사랑이 흘러 넘쳤고, 이 용서의 사랑이 오네시모를 변화시켜 새 사람 되게 하고 무익한 자에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유익한 자가 되게 하였음을 배웠습니다. 이를 볼 때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바로 용서의 사랑임을 보게 됩니다. 스데반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무자비한 바울이 어떻게 이런 용서의 사랑을 베풀 수 있었을까요? 이는 그가 하나님의 크신 용서의 사랑을 덧입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은 우리 죄를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신 데에서 가장 잘 나타났습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하나님의 사랑은 추상적인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알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저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기초로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뜨겁게 영접하시고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이 가장 잘 나타난 곳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의 극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심으로 우리를 향하신 사랑이 어떠한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8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하나님의 크신 용서의 사랑을 덧입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일만 달란트 곧 몇 십조 원에 해당하는 빚을 진 자였으나 아무 값없이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에 형제가 우리에게 진 100데나리온 곧 몇 백만 원의 빚은 무조건 용서해야 함을 비유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우리가 중심으로 형제의 죄를 용서치 아니하면 천부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치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마 18:35).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해 준 것 같이 우리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도록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골 3:13)고 권면하였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덧입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생활입니다. 용서는 용서 받는 사람을 살릴 뿐만 아니라 용서하는 나도 살고 마음에 참 기쁨과 자유와 행복을 누리게 합니다. 반면에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면 마음에 미움과 증오심과 원한이 쌓여서 이것이 나에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큰 해독이 됩니다. 마음에 원한을 품고 있으면 결국 나도 망하고 다른 사람도 망하게 됩니다.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사는 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는 것입니다. 제가 목자생활 하면서 가장 마음 아팠던 것은 자식과 같이 생각하고 마음을 바쳐 사랑한 형제가 은혜를 배반하고 떠나갈 때였습니다. 저는 심장에 못이 박히는 아픔과 고통을 느꼈습니다. 저의 마음은 형제에 대한 괘씸한 생각과 미움으로 인해 부글부글 끓었고 잠을 잘 이룰 수 없었습니다. 기도를 해도 “하나님께서 손을 좀 봐 주십시오”라는 기도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기도하는 가운데 내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아무 값없이 엄청난 죄를 탕감 받았지만 형제가 나에게 진 하찮은 죄로 인해 형제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대는 악한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저의 죄를 눈물로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고 축복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제 마음에 알 수 없는 하늘의 기쁨과 평화가 물밀 듯 밀려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이를 통해 형제를 용서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할 뿐만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을 위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쓸모없는 한 노예에 대한 사도 바울의 사랑은 바로 사망에 처한 인류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루터는 “우리는 다 하나님의 오네시모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다 죄와 사단의 노예요, 또 생명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멀리 도망 나온 죄인이요, 하나님의 재물을 도적질하여 사리사욕을 취한 강도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하시고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서받은 자로서 마음으로부터 형제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의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가정을 변화시키고, 캠퍼스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덧입고 서로 용서함으로써 참 행복을 맛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사람을 변화시키는 역사에 귀히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