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제 2 강
성령의 능력을 의지한 바울
말씀/ 고린도전서 2:1-16
요절/ 고린도전서 2:4,5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
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제 1 강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도에 대해 배웠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고 거리끼는 것이지만,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가 됩니다. 십자가의 복음만이 인간을 죄와 사망 권세에서 구원할 뿐만 아니라 위기 가운데 있는 인류 문명을 구원하여 생명 문화를 창출해 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길만이 생명의 길임을 확신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사랑하고 기쁨으로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복음을 전하는 증거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또한 이 세상의 지혜는 일시적이고 거짓되지만 십자가의 복음은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의 지혜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 십자가의 진리는 아무나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만이 깨달아 알 수 있는 비밀스러운 것입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허락하사 십자가의 비밀을 깨달아 알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이 시대를 거슬려서 확신있게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만을 붙든 바울 (1-5)
첫째, 메시지의 주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복음을 메시지의 주제로 삼고 전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이란 뛰어난 말솜씨와 심오한 사상을 담고 있는 시나 철학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개척할 때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복음만 전하고자 작정하였습니다. 이것은 보통 결단이 아니였습니다. 바울이 살던 당시에는 말솜씨로 사람을 평가했습니다. 그래서 수사학이 발달했습니다. 수사학이란 미사학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말을 아름답고 설득력 있게 하여 청중을 사로잡는 법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당시에 가장 인기있는 학과는 수사학이었습니다. 수사학 교수는 가장 존경을 받았고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당시는 라디오나 TV가 없는 시대였으므로 말 잘하는 수사학자가 최고의 인기였습니다. 어떤 도시에 유명한 수사학자가 나타나 연설을 하면 사람들은 구름 떼 같이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당시 변사들은 유명한 철학자들이나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의 시 구절을 인용하여 아름답고 화려한 말로 청중을 사로잡았습니다. 고린도시는 온통 이런 분위기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고린도에 나아가고자 할 때 심적 부담이 컸을 것입니다. 지혜를 자랑하는 헬라 지성인들에게 걸맞는 철학적이고 사상적인 메시지를 전하여 그들을 놀라게 하고 처음부터 제압을 해야 되지 않은가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멋있게 메시지를 전하지 아니했습니다. 이는 그가 말과 지혜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헬라 문화의 중심지인 다소에서 성장하였으며 당시 유명한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하여 당시 양대 사상인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을 섭렵한 대 학자요 사상가였습니다. 바울이 아그립바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서 간증 메시지를 전하자 베스도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이를 볼 때 그는 학문에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행26:24). 아덴에서 바울이 철학자들과 변론할 때 그들이 바울을 말쟁이라고 한 것을 보면 변론에는 그를 당할 자가 없었습니다 (행17:18). 사도 바울은 얼마든지 헬라의 시인들보다 더 아름다운 말을 할 수 있었고, 철학자들보다 더 심오한 철학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인격과 아름다운 생애, 그 중에서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만을 전하고자 결심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도 스승으로서의 그리스도, 질병을 치료하시는 의사로서의 그리스도, 사회사업가로서의 그리스도, 도덕적으로 흠이 없으신 윤리도덕가로서의 그리스도, 인간으로서 모범을 보이신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 인류역사의 신기원을 이룬 위대한 사상가요 혁명가로서의 그리스도 등 여러 측면에서 예수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측면에서만 예수님을 배운다면 예수님의 참 모습을 배웠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참 모습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데에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나아갈 때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고자 결심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죄의 은혜를 누릴 수 있고 영생을 누릴 수 있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 결심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의 메시지는 인기가 없기 때문에 이를 전한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헬라 사람들은 진리를 탐구하고 즐기기는 하지만, 진리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은 싫어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라는 말만 들어도 온 몸을 떨며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십자가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 같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 십자가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할 때 사람들의 조소와 경멸과 배척을 받을 각오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그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외에는 아무 것도 전하지 아니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복음만이 사람을 근본적으로 살리기 때문입니다.
헬라 사람들뿐만 아니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십자가를 좋아하는 시대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은혜와 축복과 평강의 메시지는 듣기 원하지만 십자가의 메시지는 귀를 틀어막고 듣기 싫어합니다. 물질적으로 부요하게 될수록 사람들은 더욱 십자가를 꺼리고 멀리합니다. 특히 매이기를 싫어하고 놀기를 좋아하며 자유분방한 신세대들은 십자가의 메시지를 혐오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기를 쓰고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십자가의 복음만이 사람을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기 때문입니다.
메시지의 내용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의 메시지인 케리그마( )로서 초신자들에게 전도를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행20:21). 죄를 회개하고 죄 용서함을 받고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의 길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예수님의 인격과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교훈적인 면으로서 이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복음진리 위에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 이는 신앙성장과 관계되는 것으로서 디다케( )라고 합니다. 신앙성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고 내면성을 조각시키는 일이기 때문에 (롬8:29) 그 내용도 자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메시지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말과 지혜를 자랑하는 고린도를 개척하고자 할 때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만을 전하고자 결심했습니다. 사도행전 18:5절을 보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였습니다. 바울은 1년 6개월 동안 유하면서 십자가의 복음만을 담대히 증거하였습니다 (행18:11). 이 때 도저히 복음역사가 일어날 것 같지 않던 그곳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위대한 말씀의 종이 되고자 하는 소원을 갖습니다. 말씀의 종도 베드로와 같이 한번 메시지를 전하면 3천명씩 회개하는 능력있는 말씀의 종이 되고 쉽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맡으면 잘 전해보고자 무진 애를 씁니다. 어떤 분은 말씀을 잘 전하기 위해 철학책을 읽기도 하고 삼국지와 같은 책을 읽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비상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말씀의 종이 되는 것은 요원하게 느껴집니다. 이는 단순히 말씀을 믿고 복음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로이드 죤스 목사는 "목사와 설교"라는 책에서 "위대한 설교는 위대한 주제에 달려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는 메시지의 가장 위대한 주제입니다. 복음 자체가 가장 큰 지혜요, 아름다움입니다. 금은 도금할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철학적으로 문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입힐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단순히 믿고 있는 그대로 전할 때 가장 능력있게 전달됩니다. 저는 중국이 낳은 석학 임어당이 쓴 "나는 왜 기독교인이 되었는가"라는 소책자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학식있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서 목사가 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신학공부를 할 때 복잡하고 인본적인 신학이론이 그의 영적 눈을 가리워 버렸습니다. 그 후 그는 30년 동안 기독교를 등지고 인본주의를 신봉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본주의에 대해 깊은 회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그는 아내의 인도로 교회에 나가서 예수님에 관한 단순한 메시지를 듣게 되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그가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을 때 그의 심령에 역사하던 모든 의심의 구름이 걷히고 찬란한 태양 빛이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무디가 캠브리지 대학에 가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대학생들은 국민학교밖에 안 나온 저 무식쟁이가 어떻게 대지성인들인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단 말인가 생각하고 팔장을 끼고 거만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그들은 무디가 전하는 단순한 복음의 메시지에 압도당하여 눈물로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은 그 자체가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 복음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복음만을 전하고자 결심한 것입니다.
둘째, 말씀 전하는 자의 자세: 3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이 말씀은 바울이 어떤 자세로 복음역사를 섬겼는가를 말해 줍니다. 약하였다는 것은 무리한 전도 여행과 과도하게 역사를 섬기므로 육신이 약해진 것을 뜻합니다.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는 것은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가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던 것은 고린도시의 음란하고 퇴폐적인 분위기에 눌려 기가 죽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화려한 고린도 문화 앞에서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이는 강한 원수의 세력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고 복음을 전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원수 마귀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가를 잘 알았습니다. 사도행전 18:6절을 보면 그가 십자가의 말씀을 전할 때 유대인들이 대적하여 훼방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의 마음에 두려움이 생기고 더 이상 복음을 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 때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행 18:9,10) 바울이 이 말씀을 믿고 두렵고 떨림으로 복음을 전했을 때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마귀와의 영적 전투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에서 마귀의 궤계를 능히 파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사단과의 영적 전투에서 가장 무서운 비밀병기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단의 머리통을 박살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33) 예수님은 십자가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죄를 이기고 죽음을 이기고 마귀의 세력을 이기고 세상을 이깁니다.
셋째, 믿음의 기초: 사도 바울은 말씀을 듣는 자들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기초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기초하기를 원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말씀을 가르칠 때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되도록 노심초사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복음역사를 성령의 역사로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기 때문에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특히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매년 여름 수양회 때마다 사람들이 숨은 죄를 진실되게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는 수양회의 분위기가 좋기 때문이 아니라 십자가의 복음을 듣는 자들의 마음에 성령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지혜의 권하는 말로 사람들을 설득하여 예수님을 믿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머리로는 예수님을 믿을지 모르지만 그 마음에 성령의 역사가 없기 때문에 아무런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 지식과 뛰어난 언변으로 사람을 설득하여 끌어모을 수 있고 신앙생활을 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지혜에 기초한 믿음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이런 믿음은 인간의 사상이나 신학적인 이론에 기초하거나, 인간의 의리나 인간관계에 기초한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은 이론적이고 관념적이고 인본적이어서 생명력이 없습니다. 이런 믿음은 시련이 닥치고 핍박과 유혹의 바람이 불게 되면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이 쉽게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에 기초한 믿음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생명력이 있습니다. 이런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체험에 기초한 믿음이기 때문에 뿌리가 견고합니다. 이런 믿음은 반석 위에 세운 집과 같이 어떤 핍박과 유혹 가운데서도 결코 무너지지 아니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의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에 기초하기를 원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성령께서 친히 그들의 마음에 능력으로 역사하시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기초가 신학적인 이론이나 인간관계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에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II. 세상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 (6-16)
6-16절까지는 사도 바울이 왜 그렇게 십자가의 복음만을 전하고자 하는가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여기서 '온전한 자'란 인간적으로 성숙한 자가 아니라 믿음이 성숙한 자 곧 믿음의 사람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믿음의 사람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고자 하는데 이는 세상의 번뜩이는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지혜도 아니요, 잠시 있다 없어질 관원 곧 통치자의 지혜도 아닙니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합니다. 영지주의와 같은 고대 신비종교에서는 사람을 육적인 인간, 정신적인 인간, 영적인 인간으로 구분했습니다. 그들은 구원에 이르는 비밀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공개되지 않고 극히 소수의 영적인 사람들만이 그 비밀을 전수받아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원에 이르는 복음의 비밀을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은밀히 전수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가리켜 만민에게 공개된 비밀이라고 합니다. 복음은 비밀이기 때문에 매우 귀한 것이요, 또 누구든지 소유할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배척하는 자들에게는 복음의 비밀이 가리워져 있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자들만이 그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세상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지만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알지 못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지혜는 역사에 영원한 오류를 남겼습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 지혜로는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없습니다. 세상 지혜는 시대에 따라 변하고 결국 없어지기 때문에 참된 지혜가 아닙니다. 이는 사람을 속이는 거짓된 지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근본문제를 해결해 주고 살려주는 참된 지혜입니다. 이는 어느 시대, 어느 사람에게나 다 적용되는 불변의 진리입니다. 이 하나님의 지혜는 비밀한 가운데 감취어져 있던 것인데 때가 되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 지혜는 인간의 이성으로 깨달아 알 수 없고, 철학이나 과학이나 신학 등 세상학문을 통해서도 알 수 없습니다. 이 지혜는 사람들의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고, 마음으로도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지혜는 오직 믿음으로만이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세상의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자들에게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마11:25-27). 이 지혜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서 예비하신 것으로써 마음이 겸손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만이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볼 때 복음은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심오한 복음의 비밀을 깨달아 알 수 있을까요? 10절을 보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것을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깊은 것이란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 계획 등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 만민을 향한 하나님의 깊고 넓은 사랑과 만민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만민 구원계획 등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어떻게 깊고 깊은 비밀한 하나님의 세계를 깨달아 알 수 있을까요? 사람의 지혜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만이 가능합니다. 성령은 영적 세계의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속사정은 그 사람이 고백하기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속담에 "열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의 속은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의 영은 사단의 영을 말합니다. 이 세상의 영은 에베소서 2:2절을 보면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으로서 이 영을 받은 자는 복음진리를 알 수도 없고 순종할 수도 없습니다. 이런 자들이 복음을 들으면 반발하고 배척합니다. 세상의 영은 고린도후서 4:4절을 보면 혼미케 하는 영으로서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사람의 심령에 비취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은 영적인 축복들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죄사함과 의롭다함을 얻게 된 것과 영생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리킵니다. 세상의 영을 받은 받은 사람은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영적인 것들이 얼마나 귀한 줄을 깨닫지 못하고 돼지가 진주를 발로 차듯이 무가치하게 여기고 배척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는 성령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축복들이 얼마나 귀한가를 알고 이를 귀하게 여기고 감사하게 됩니다. 육에 속한 자연인은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여 Ph. D를 몇개나 가졌다 할지라도 영적인 것을 미련하게 보고 깨닫지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만이 분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합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이상에서 볼 때 영적인 사람은 차원높은 고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성경선생이 되려면 신학을 공부하고 심리학이나 교육학도 공부하고 세상학문을 많이 해야 좋은 성경선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런 것들을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보다도 본질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사람이 될 때 영적인 세계를 이해할 수 있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육의 세계에 속한 모든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육에 속한 사람은 심리학적인 차원, 철학적인 차원 곧 이성의 차원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이성의 차원을 초월하여 영의 차원에서 인간을 이해하기 때문에 육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인간을 돕는데 있어서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사람을 올바로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좋은 성경선생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의 말과 지혜가 난무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복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죄 가운데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릴 수 있는 길은 십자가의 복음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마치 고린도와 같이 퇴폐적이고 음란한 문화가 난무합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굴복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복음을 전함으로써 이 시대를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힘써 십자가의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생명 구원의 역사를 왕성히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