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제 3 강
지혜로운 건축자
말씀/ 고린도전서 3:1-23
요절/ 고린도전서 3:10,11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
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제 2 강에서 우리는 세상 지혜는 시대에 따라 변하고 결국 없어지기 때문에 참된 지혜가 아니요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만이 참된 지혜임을 배웠습니다. 이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로 깨달아 알 수 없고 오직 성령으로만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성령을 의지할 때 십자가의 복음진리를 깨달아 알 수 있고 또 확신있게 증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확신있게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할 때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복음 사역자들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복음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하나님의 밭에서 일하는 일군이요, 또한 하나님의 집을 지어가는 건축자들입니다. 복음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밭을 잘 가꾸어서 하나님께 유익을 남겨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또한 복음 사역자들은 지혜로운 건축자로서 하나님의 집을 잘 지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인생의 기초를 어디에 놓아야 되며, 또한 어떤 재료로 집을 지어야 하는가를 배우고자 합니다.
I. 하나님의 동역자 (1-9)
1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육신에 속한 자'(사르키코이스 )는 2:14절에 나오는 '육에 속한 사람'(프쉬키코스 )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중생하지 못한 자연인을 말합니다. 자연인은 니고데모와 같이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 할찌라도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육의 세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맛볼 수도 없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육신에 속한 자'는 거듭났지만 영적으로 미숙한 어린 아이와 같은 자를 말합니다. 어린 아이의 특징은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해석하고 행동합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이뻐하고 사랑해 주면 좋아하지만, 자기를 낳아준 부모라 할찌라도 훈련을 주면 "아빠 미워" 하며 미워합니다. 한번은 송어거스틴 선교사님이 모스크바 복음역사를 잘 섬기기 위해 딸 한나를 부모님께 맡기고 약 2년 후에 모스크바로 데리고 왔습니다. 아이는 처음에 새로운 환경에 적응이 안되어 잘 울고 매우 힘들어 하였습니다. 어거스틴 선교사는 한나가 계속해서 울자 훈련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볼기짝을 몇대 때렸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아이는 "아빠 미워!" 하며 가까이 오기조차 싫어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어거스틴 선교사는 아빠로서의 존재의미를 상실하고 오랫동안 많은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어린 아이는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에 딱딱한 밥을 주기보다 부드러운 젖을 먹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 어린 아이의 특징은 자제력이 약하여 감정과 욕심대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은 삐치기를 잘하고 잘 싸웁니다. 영적인 어린아이는 육의 원리를 좇아 사는 자를 말합니다. 이런 자는 본능적인 지배를 받기 때문에 시기와 분쟁을 일삼고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얽매여 지냅니다. 자존심이 강하여 조금이라도 자존심이 상하면 견디지 못하고 화를 잘 냅니다. 영적으로 어린 자들은 분별력이 없고 인간적입니다.
반면 신령한 자는 영적으로 성숙한 자를 말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자는 하나님 중심적이며 타인 중심적입니다. 이런 자는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매이지 않고 묵묵히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보며 일합니다. 매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애를 씁니다. 자기를 주장하기보다 양보하고 희생하고 섬깁니다. 이런 자는 누가 보나 은혜가 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를 개척한지 5년이 지났기 때문에 고린도 교인들은 마땅히 성장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어린 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하며 시기와 분쟁을 일삼았습니다. 이런 그들은 사람의 표준을 따라 행하는 불신자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신앙생활은 오래 하였지만 영적으로 성장하지 아니하였을 때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고 목자 바울의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끊임없이 성장해야 합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좀 더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고린도 교인들이 지도적 인물로 내세우고 있는 바울이나 아볼로는 어떤 자들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로서 하나님께서 각각 맡겨 주신대로 일하는 일군들에 불과합니다(5). 그러므로 그들은 결코 분파의 우두머리가 될 수 없습니다. 바울은 6,7절에서 하나님의 종들의 역할과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주체자가 누구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여기서 우리는 몇가지 중요한 교훈을 배웁니다.
첫째로, 복음역사의 주체자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복음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밭에서 일하는 일군들입니다(9). 다시 말하자면 복음 사역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각각 사명을 위임 받은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청지기는 주인이 아니라 주인의 마음을 알고 주인을 섬기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사역자들은 존경의 대상은 될 수 있을지언정 숭배의 대상은 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나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 뿐이십니다.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하나님이 자라나게 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복음 사역자들은 사람을 변화시키는데 필요한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은 오직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 사역자들을 볼 때 그들만을 바라 볼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음 사역자들을 도구로 쓰셔서 친히 생명 구원역사를 이루어 나가고 있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할 때 하나님보다 사람을 높이는 우상 숭배의 죄에 빠지게 되고, 사람을 중심으로 파를 만들어 하나님의 교회를 분열시키는 큰 죄를 범하게 됩니다. 또한 복음 사역자들은 자신은 청지기에 불과함을 인식하고 맡은 바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죄를 범하게 되고 또한 주님의 종이라는 권위의식에 사로잡혀 교인들 위에 군림하여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게 됩니다.
우리가 사람을 도울 때 인간의 힘으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고 자라나게 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할 때 사람을 돕는 태도가 달라지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시도록 간절히 기도하게 되고, 또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는 역사환경을 만들고자 애쓰게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생명의 창조자로서 생명의 주인이 되십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요1:4). 우리가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가꾸기만 하면 신기하게도 하나님께서 친히 자라게 하십니다.
우리가 섬기는 복음역사는 그 역사를 섬기는 목회자의 역사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양도 내 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보배 피로 값주고 사신 하나님의 양입니다. 우리는 단지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양을 피싱해서 열심히 돌보았다고 해서 내 양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역사도 나의 역사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양의 성장을 위해서 옆에서 도와주고자 하면 간섭하지 말라고 엄히 경고합니다. 우리는 청지기에 불과함으로 어떤 모양으로든지 하나님의 양이 잘 자라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동역의 필요성입니다. 바울과 아볼로는 고린도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한 사역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종들이지만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능히 홀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동역자로 삼으셔서 함께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는데 한 사람을 통해서만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바울을 통해서 역사하시지만 또한 아볼로를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는 역할이 각각 다릅니다. 바울은 황무지와 같은 곳에서 말씀을 심고 복음역사를 일구는 개척의 사명을 감당했다면, 아볼로는 후에 그곳에 가서 물을 주고 가꾸는 양육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바울이 개척한 곳에 아볼로가 침범하여 열매를 따 먹는 것처럼 보이고, 아볼로는 바울이 개척한 곳에 와서 역사를 섬기기 때문에 별로 빛이 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그런 인간적인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하나님의 양무리를 돌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서로 동역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섬겼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동역의 역사입니다. 아름다운 동역의 역사가 있는 곳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갈등하고 분열하는 곳에는 힘은 힘대로 들고 결코 성령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정욕 문제로 시름시름 죽어가고 있는 한 사마리아 여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중동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장시간 동안 영혼과 사랑의 대화를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그 여인은 메시야를 만나고 기쁨이 충만하여 동네에 가서 외쳤습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여인의 변화된 모습을 본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모여 들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요4:35-37) 여기서 예수님은 동역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는 뿌리는 자가 있는 반면에 거두는 자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복음의 씨를 뿌리고 거두는 모든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뿌리는 자가 중요한 만큼 거두는 자도 중요합니다. 또 반대로 거두는 자가 중요한 만큼 뿌리는 자도 중요합니다. 서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동역하지 않으면 결코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이렇게 서로 동역하도록 하신 것은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각각 다른 은사를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피싱을 잘하는 은사를 주시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사람을 잘 키우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에게는 사람을 잘 훈련시키는 은사를 주셨고, 어떤 사람에게는 사람을 잘 품고 섬기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개척하는 은사를 주셨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동역을 잘 하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한 사람에게 모든 은사를 주신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이러한 은사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잘 섬기라고 주신 것이지 결코 자랑하라고 주신 것은 아닙니다. 또 이런 은사는 서로 우열을 비교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각기 다른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서 동역을 한다면 효과적인 제자양성역사를 통하여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자기 것만 고집하고 욕심을 부린다면 역사도 잘 안될 뿐더러 결국에는 피차 망하고 말 것입니다.
셋째로, 복음의 사역자들은 각각 자기의 일한대로 하나님께로부터 상을 받게 됩니다1(8). 하나님은 가정 단위나 요회 단위와 같이 도매금으로 상주시는 것이 아니라 각각 인격적으로 상을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일한대로 상주십니다. 세상에서는 일하지 않고 많은 실적을 올린 사람이 인정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역사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일한대로 상주시는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상주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순수하게 해야지 치사하게 상을 바라고 하는가"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사람들로부터 인정 받지 못하면 문제에 빠집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의 상을 바라지 아니하면 자연히 사람들로부터 상을 구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구하게 됩니다. 주님을 위해 희생적으로 섬기다가도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열매가 없을 때 손해의식에 빠져 신음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상을 바랄 때 우리는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기쁨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상급이 무엇일까요? 주거 공간이 넓은 아파트일까요? 캐디락과 같은 멋진 자동차일까요? 성경은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이라고 말할 뿐 하나님의 상급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서 헌신할 때 반드시 하나님께서 상주신다는 것과 그 상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좋다는 것입니다.
II. 지혜로운 건축자 (10-23)
사도 바울은 9절에서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밭에서 일하도록 고용된 고용인이요 또한 하나님과 함께 밭을 가꾸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임을 말했습니다. 10-15절에서는 하나님의 종들을 하나님의 집을 짓는 건축자에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와서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지혜로운 건축자는 어디에 터를 닦을 것인가를 중요시합니다. 터를 반석 위에 닦는가, 모래 위에 닦는가에 따라서 그 집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어리석은 건축자는 기초공사가 힘이 들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기초를 소홀히 하고 빨리 집을 지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건축자는 느리고 돈이 많이 들고 힘이 들지만 기초공사를 매우 중요시 하고 기초공사 하는데 많은 시간과 물질을 투자합니다.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나 시카고의 시어스 타우워 같은 100층이 넘는 고층 건물들은 반석에다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한국 UBF 본부 건물은 기초가 반석이기 때문에 파기가 무척 힘이 들고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사도 바울은 1년 6개월 동안 고린도를 개척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잘 닦았습니다. 그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터는 어느 누구도 다시 닦을 수 없는 유일한 터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이는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시요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딤전 2:5).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어느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신 유일한 구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분으로서 하나님께로 이르는 유일한 길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생들의 유일한 반석이시요, 또한 교회의 유일한 반석이 되십니다. 반석되신 그리스도 위에 터를 쌓는 자만이 인생의 비바람이 몰아쳐도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인생의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집을 짓는 건축가들입니다. 우리는 먼저 집을 세우기 전에 어디에다 인생의 기초를 쌓을 것인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특히 학창 시절은 인생의 기초를 쌓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우리는 위대한 철학이나 사상에다 인생의 기초를 놓을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람이나 조직이나 교리에다 기초를 놓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정이나 의리와 같은 인간 관계 위에다 기초를 놓을 수 있습니다. 도덕성이나 박애주의와 같은 선한 마음에다 기초를 놓을 수 있고, 정의 사회를 실현하고자 하는 이념에다 기초를 놓을 수 있습니다. 또한 사명 위에다 기초를 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임은 성서한국과 세계선교를 좌우명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사명 위에다 신앙의 기초를 쌓기 쉽습니다. 사명 위에다 신앙의 기초를 쌓은 사람은 열심히 일은 하지만 내면의 기쁨이 없고 영적 성장이 없습니다. 이러한 기초들은 겉은 멋있고 화려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불완전하고 일시적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 기초가 흔들리고 삼풍 백화점과 같이 무너지고 맙니다. 예수 그리스도 위에다 터를 닦은 자만이 가장 안전하고 영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위에다 터를 닦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을 의미할까요?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고 그 분과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아름다운 생애를 본받아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반석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다 인생의 기초를 놓은 자는 세상이 아무리 요동할찌라도 조금도 요동치 아니합니다. 아무리 인생의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친다 할찌라도 결코 흔들림이 없습니다. 요사이는 시국이 불안하니까 사람들이 점쟁이를 많이 찾는다고 합니다. 시중에는 무려 1천 종류의 역술서가 간행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신이 선택한 여자를 만나기 위해 줄을 서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불안한 이유는 인생의 기초를 예수 그리스도 위에 닦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위에다 인생의 기초를 쌓은 사람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마음이 평안합니다.
12-15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 기초 위에다 집을 짓고자 하는 자는 어떤 재료로 지을 것인가를 조심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위에다 터를 닦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기초 위에 무슨 재료로 어떻게 집을 짓는가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언급한 금, 은, 보석, 나무, 풀, 짚 모두 6가지 재료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불에 타지 않은 금, 은, 보석과, 불에 타는 나무, 풀, 짚입니다. 금, 은, 보석은 비싸고 구하기가 힘들고 또 이런 것들로 지으면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반면 나무, 풀, 짚은 값이 싸고 구하기가 쉬우며 빨리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날, 최후 심판날에 불심판을 받게 될 때 그 공력이 드러나게 됩니다. 금이나 은이나 보석류로 집을 지은 자는 하나님의 불심판을 견디고 남게 됩니다. 그러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지은 집은 불에 다 타고 없어지게 됩니다.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집을 짓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을 의미할까요? 이는 불순물이 없는 순수한 복음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금과 은과 보석류는 이미 용광로에서 완전히 녹아서 제련을 통해서 불순물이 제거된 순수한 것입니다. 불순물이 얼마만큼 제거되는가에 따라 그 가치가 측정됩니다. 불순물이 온전히 제거된 금은 순금이 되어 빛을 발하게 됩니다. 용광로 훈련은 자기가 온전히 녹아나서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사람으로 빚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자기가 깨어지고 녹아날 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정금과 같은 믿음을 소유한 믿음의 용사들이 열거되어 나옵니다. 이들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살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얻은 자들입니다. 이렇게 연단된 믿음을 소유한 자들은 어떤 어려운 상황에 부딪치더라도 요동치 아니합니다. 시험에 떨어지거나 시련에 부딪쳐도 절망하지 아니하고, 어떤 달콤한 유혹에도 넘어가지 아니합니다. 오히려 시련을 통해서 믿음의 뿌리를 더 깊이 내립니다. 또한 힘들다고 해서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반면에 타는 재료로 집을 지은 자들은 인본주의 신앙을 가진 자들이요, 자기 부인이나 십자가가 없는 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편리하고 멋있게 보이지만 하나님의 불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다 타버리고 맙니다.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게 되고 그는 구원을 얻되 롯과 같이 겨우 구원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힘들지만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집을 지어야 합니다. 신앙생활하기 좀 힘들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아야 합니다. 훈련을 통해서 자기가 온전히 죽고 불순물이 없는 순수한 복음신앙을 소유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믿음의 증거를 얻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최후 심판날에 심판을 견딜 수 있고 일생 동안 힘들려 한 공력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의 모임은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세상 모임과는 달리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이 신앙 공동체는 부패되어서도 안되고 파괴되어서도 안됩니다. 분쟁은 거룩한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분쟁을 일으키는 자를 멸하실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서로 파를 나누어 분쟁하는 것은 하나님 보다 사람을 자랑하기 때문이요, 사람을 자랑하는 것은 세상 지혜를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참으로 지혜로운 자가 되려면 이 세상에서는 미련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정말 미련한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미련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요, 하나님께서 헛것으로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만물이 다 그들의 것이요, 그들은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만물이 한 하나님 안에서 통일됩니다. 이런 하나의 세계를 생각할 때 분쟁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혜로운 건축자였습니다. 그는 인생의 유일한 터이신 그리스도 위에다 복음역사의 터를 닦았습니다. 그는 이 터 위에 복음의 집을 짓기 위해 충성했습니다. 그는 결코 양들과 타협하거나 그 시대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양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도록 도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의 사람, 순종의 사람, 겸손의 사람이 되도록 도왔습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이 자기 행복과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도록 도왔습니다. 자기 중심성을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 중심적인 사람이 되도록 도왔습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고자 하는 데서 벗어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도록 도왔습니다. 한 분 한 분이 예수 그리스도 위에다 터를 닦고, 그 위에다 견고한 복음의 집을 지어 나가는 지혜로운 건축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