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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1-5:32(가인에게 표를 주신 하나님)

by Mark Yang   08/14/2019   Genesis

Message


창세기 제 5 강


가인에게 표를 주신 하나님


말씀: 창세기 4:1-5:32
요절: 창세기 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우리는 지난 강의에서 죄가 어떻게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또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배웠습니다. 아담의 범죄는 대수롭지 않은 작은 사건같이 보였지만, 온 인류를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뜨리게 한 치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아담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죄가 어떻게 후손에게 유전되어 성장하고 퍼져 나갔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죄는 인간의 정신세계와 영적 세계를 병들이고 또한 인류 문명을 병들게 했습니다. 인간은 죄의 세력 아래서 병든 인생을 살다가 영원한 파멸에 처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줄기차게 소망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인간 내면에 역사하는 죄의 속성과 완악한 인간들을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Ⅰ. 가인과 아벨(4:1-8)

1절을 보십시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여 가인을 낳았습니다. 이때 하와는 잉태의 고통 중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소감 발표를 했습니다. 그가 또 얼마 후에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그들은 각각 하나님께 예물을 드렸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최초의 제사 제도를 보게 됩니다. 제사란 범죄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 바른 관계성을 맺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제도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는 관계성이 단절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통해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사죄의 은총을 덧입고 하나님과 화해할 수있게 하셨습니다. 이는 실로 인간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이 제사 제도는 후에 레위기에 구체적으로 계시되며 종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되고,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배 의식이 되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각각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치 아니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가 있고, 받지 아니하시는 제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제사를 받으시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을까요? 어떤 사람은 가인의 제물은 피가 없는 농산물이므로 받지 않으셨고, 아벨의 제물은 양을 희생한 피의 제물이었기 때문에 받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레위기 2장에서 곡식 가루로 소제를 드리라고 하신 것을 보면 제물 자체는 문제가 안 됨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제물, 가인과 그 제물이라고 하신 것을 보면 제물을 드리는 사람 자체가 문제임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그들이 드린 제물을 통해 그들이 어떤 자세로 드렸는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 2:14절에 보면 곡식으로 소제를 드릴 때는 첫 이삭을 드리라고 하였고, 레27:26절에서는 육축의 첫 새끼를 여호와께 돌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가장 귀한 것을 정성스럽게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땅의 소산 중 얼마를 드린 것을 보면 성의없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가장 귀한 것을 희생적으로 드렸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이 믿음으로 드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히11:4). 아벨은 먼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감사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정으로 주님께 사죄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비참한 죄인임을 알고 주님의 긍휼만을 구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겸손했고 감사와 회개의 심정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는 제물보다 먼저 자신을 주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믿음으로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감사하는 마음이나 회개의 심정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의가 충만하여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것을 하나님께 자랑하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으로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그를 받으실 수가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18:9-14절을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나옵니다. 바리새인은 배를 내밀면서 거만한 자세로 이상한 감사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기도가 아니라 자기를 자랑하는 기도였습니다. 반면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리새인의 기도는 받지 아니하시고 세리의 기도만 받으시고 그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시며(사57:15). 상한 심령의 제사를 열납하십니다.(시51:17)

우리는 열심히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고, 많은 양들을 돌보고, 헌금을 많이 하면 하나님께 예배를 잘 드린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보는 것은 신경을 많이 써서 하지만, 사람들이 보지 않는 개인적인 기도시간은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또 우리의 마음은 감사와 찬송 대신에 원망과 불평과 신경질과 추한 생각과 인간적인 생각으로 가득찰 때가 많습니다. 또 주일날 예배 드릴 때도 마음 준비 없이 참석하여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형식적이거나 가식적인 제사는 받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삼상16:7b) 하나님은 많은 활동보다 우리의 마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실된 회개를 원하십니다.(요한1서 1:9,10) 하나님은 제사보다 순종을 원하십니다.(삼상15:22,23) 하나님은 우리의 삶, 우리의 인생 전체를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기를 원하십니다.(롬12:1) 이것이 우리의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

제사를 거절당한 가인은 하나님께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그는 심히 분하여 안색이 굳어지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습니다. 안색이 그 죄를 스스로 발표했습니다(사3:9). 얼굴은 마음의 창이라고 합니다. 마음에 문제가 있으면 표정이 굳어져서 심각해집니다. 가인은 마음의 분을 참지 못하여 하나님께 핏대를 내며 씩씩거렸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지 않으셨을 때, 그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고 회개하기보다 하나님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대들었습니다. 그의 근본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는 한마디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치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시고 가인과 그 제물을 열납치 않으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주권으로 겸손하게 믿음으로 드리는 제사만 받으시고, 믿음으로 드리지 않는 제사는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가인은 이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하고 자신의 그릇된 자세를 고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고 자기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음에 불만을 품고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치 않았을 때 아벨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아벨과 비교하게 되고 시기심의 노예가 되어 자신을 감당할 수 없는 상태로까지 굴러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치 않을 때 하나님께 섭섭한 감정을 품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반발하게 됩니다. 또한 남과 비교하고 시기하고 인간적인 갈등으로 뼈가 썩는 듯한 고통을 맛보게 됩니다. 어떤 분은 가난한 환경 가운데서 태어나 돈없고 빽없는 설움을 맛보며 성장했기 때문에 가진 자들과 권세잡은 자들에 대한 반항심이 뿌리 깊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께도 꼭같이 반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어떤 분은 율법적인 아버지 밑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들에 대해서도 여전한 것을 보았습니다. 조그만 어려움이 생겨도 하나님께 섭섭한 감정을 품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또 주님의 종들에 대해 반발하고 대드는 자들이 있습니다. 또한 남이 잘되는 것을 참지 못하고 비교의식과 시기심과 인간적인 갈등으로 늘 속이 부글부글 끓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은 강대국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시고, 또 어떤 사람은 약소 민족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크고 잘 생기고 재능이 많은 자로 태어나게 하시고, 어떤 사람은 아담하고 평범하고 단순한 자로 태어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나에게 두신 하나님의 주권은 선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선한 뜻을 두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영접할 때 우리는 매사에 무슨 일을 당하든 불평하기보다 감사하게 되고, 반발하기 보다 순종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남과 비교하여 시기하기 보다 상대방을 인정하고 배우고자 하게 되고, 더 나아가 존경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나에게 두신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할 때 우리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 그러나 사단의 시기로 하루 아침에 모든 재산과 사랑하는 자녀들을 잃었습니다. 그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하나님을 원망하고 저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이 소식을 듣자마자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며 말했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그의 신앙은 하나님의 주권에 기초했기 때문에 축복의 날이나 환난의 날에도 조금도 요동함이 없이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주권 신앙을 가진 자는 범사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요셉은 어머니가 4명이 있는 집에서 태어나 배다른 형제들 틈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운명적인 아이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아버지의 편애로 형들의 시기를 받아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갔습니다. 그는 운명의 노예가 되어 형들을 저주하며 저주스러운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두신 선하신 주권을 영접했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환경을 이기고 자신을 이기고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사무엘서를 읽어보면 다윗과 요나단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나옵니다. 특히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마음은 우리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며 진한 감동을 줍니다. 요나단은 이스라엘 황태자로서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자였습니다. 그러나 다윗 때문에 그의 왕 자리는 큰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윗을 적수로 삼고 시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했기 때문에 오히려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난 중에 있는 다윗을 도와 역경 중에서 아름다운 우정의 꽃을 피웠습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으로 비교 의식과 시기심을 극복하고 아름다운 우정의 꽃을 피우는 새 역사를 창조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신앙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은 사람을 성숙하게 합니다.

가인이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치 않고 씩씩거리며 대들 때 하나님께서는 당장에 그를 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참으시고 그의 문제를 조근조근 설명해 주셨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 말씀에서 볼 때 가인의 문제는 평소 선을 행치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을 행치 않게 되면 낯을 들지 못하게 됩니다. “선을 행치 아니하면” 이 말씀의 원뜻은 “마음에 선한 경향을 갖지 아니하면”이라는 뜻입니다. 마음에 선한 경향을 갖는다는 것은 마음이 하나님께로 열려 있고, 의롭고 진실되게 살고자 하는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마음에 선한 경향을 갖지 않는 것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세상 가치관대로 살고 싶은 마음을 뜻합니다. 가인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지 않고 마음이 원하는 대로 육신의 소욕을 좇아 살았습니다. 그가 선을 행치 않을 경우 죄가 문에 엎드리게 됩니다. 이는 굶주린 사자가 문 앞에 숨어 있다가 문만 열고 나오면 삼키려고 하는 것과 같이, 죄가 그 사람을 덮치고자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를 가볍게 생각합니다. 죄는 즐길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죄의 쾌락을 좇아 삽니다. 그러나 죄는 짓는 그 순간부터 우리를 사로잡아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죄는 즐길 만한 것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대항해서 싸워서 다스려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죄를 다스릴 수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5:16-18절 말씀과 로마서 6:12-14절 말씀은 우리에게 그 비결을 가르쳐 줍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영적 소원과 죄를 짓고자 하는 죄의 소욕이 있습니다. 이 둘은 서로 대적하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영적 소원이 강하면 죄의 소욕이 힘을 잃게 되고, 죄의 소욕이 강하면 영적 소원이 힘을 잃게 됩니다. 죄의 소욕을 물리칠 수 있는 비결은 적극적으로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때 죄가 나를 지배할 수없게 됩니다. 우리가 성령을 좇느냐? 육의 소욕을 좇느냐?, 하나님을 좇느냐? 세상을 좇느냐? 이것은 자유의지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육의 소욕을 좇을 때 죄에게 지배당하여 죄의 종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적극적으로 죄와 싸우며 죄를 다스리도록 투쟁 방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이 말씀을 영접치 않았습니다. 그는 회개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회개치 않는 그의 심정은 더욱 완악하게 되어 동생에 대한 시기심으로 불탔습니다. 이 시기심은 미움의 감정으로, 미움의 감정은 증오의 감정으로, 증오심은 마침내 살인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들로 유인하여 뒤에서 돌로 잔인하게 쳐 죽였습니다. 최초의 살인자와 최초의 순교자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요한1서 2:11절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여 갈 곳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요한1서 3:11,12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예수님은 마태복음 5:21,22절에서 형제에 대한 분노나 욕하고 무시하는 것조차도 금하셨습니다. 이는 그것이 형제를 죽이는 살인적인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형제에 대한 미움 감정이 있거나 무시하는 마음, 또 시기심이 있으면 즉시 회개해야 됩니다.

Ⅱ. 죄와 벌(4:9-15)

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죄를 범한 가인을 찾아와 물으셨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이 말씀은 가인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사랑의 음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검사가 죄수 다루듯이 엄하게 심문할 수도 있었습니다. “너 왜 그런 악한 짓을 했지?”하며 무자비하게 때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인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회개할 수 있도록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하며 대들었습니다. 그는 살인죄를 은폐하고자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는 살인죄에 위증죄까지 범했습니다. 그는 청문회의 위증자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질문에 아담은 숨기고 책임전가를 했지만, 가인은 속이고 반항했습니다. 정말 이런 자는 당장에 쳐 죽여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오래 참으시고 현장 검증적인 질문을 하셨습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피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10). 아벨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고 있었습니다.(히11:4b)

하나님은 회개치 않는 그에게 벌을 내리셨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그가 농사를 지으면 땅이 더 이상 효력을 내지 않게 됩니다. 또한 그는 쉼이 없는 방랑자가 되어 지구상에 어디를 가도 안식을 누릴 수없게 되었습니다. 유리방황하는 것은 김삿갓과 같이 멋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일정한 좌표나 목적도 없이 방황하는 인생을 산다는 것은 저주스러운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늘 불만과 두려움과 악령에 시달리고 평강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죽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편히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그는 양심의 고발에 고통하며 고독과 죄의식에 시달리며 밤마다 악몽을 꾸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가인의 모습은 바로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를 범하면 반드시 벌이 있다는 것을 배웁니다. 우리가 죄 짓기를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도 죄를 짓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죄에는 반드시 벌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 벌은 외적인 것보다도 내면의 고통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아담의 속성이 불순종이라면 가인의 속성은 반항심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담의 불순종의 피와 가인의 반항심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순종하기보다는 무조건 불순종하고 반발하고 대들고 거스리는 마음이 있습니다. 특히 젊은 지성인들에게는 이것이 더욱 강합니다. 순종하면 주체성이 없는 자같고 반발하면 주체성이 있는 자같이 생각됩니다. 그러나 반발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은 영적 성장이 없고 영적 세계의 비밀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런 자들은 항상 자존심을 내세우며 무익한 인간적인 갈등을 합니다.우리가 영적 세계의 비밀을 깨닫고 영적으로 자라나려면 반드시 반발심과 불순종을 십자가에 못박고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가인은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죄에 대한 중압감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보다는 벌이 너무 무겁다고 원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의 낯을 뵙지 못하여 주님의 보호와 도움을 받지 못하므로 만나는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 것이라는 죽음에 대한 공포심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벌을 받으면서도 회개치 않고 완악한 마음으로 이상한 소감 발표를 하였습니다. 이런 자는 당장에 쳐죽여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1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가인의 생명을 귀히 여기시고 아무도 그에게 복수하기를 허락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표를 주심으로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가인의 표는 살인자의 표가 아니라 사랑의 표였습니다. 하나님은 살인자요, 거짓말쟁이요, 반발하고 거스리는 완악한 그를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가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 심판을 유보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죄인들을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벧후3:9, 딤전2:4) 이를 위해 천년을 하루같이 참으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죄를 지어도 당장에 심판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고 자행자지 할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2:4,5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혹 내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우리는 하나님의 길이 참으시는 사랑을 깨닫고 진실되게 회개해야 합니다.

Ⅲ. 가인의 후예, 셋의 후예(4:16-5:32)

4:16-24절까지는 가인의 후예에 대한 기록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가인은 회개치 않고 결국 여호와 앞을 떠나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습니다. ‘놋’이란 ‘유리함’이란 뜻입니다. 가인은 성을 쌓음으로 최초로 세속 도시를 건설하였습니다. 또 가인의 후예들은 육축을 치고 수금과 퉁소와 같은 악기도 만들고 동철로 각종 기구와 전쟁 무기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문화를 창조함으로써 하나님 없는 인본주의 문화 세속 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인의 후예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라멕입니다. 그는 두 아내를 취하여 그로부터 일부다처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살인자의 후예답게 사람의 피를 마구 흘렸습니다. 자기를 조금이라도 상하게 해도 사람을 죽이고, 상처를 입히면 소년이라도 마구 죽였습니다. 그는 생명을 경시하고 잔인했습니다. 그리고 아내들에게 ‘검의 노래’라는 시를 지어 자랑삼아 발표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죽이는 자는 77배나 무력으로 보복한다고 함으로써 아내들에게 자신의 힘을 과시했습니다. 그는 가인보다 11배나 더 강력범이었습니다. 가인의 후예는 피흘림의 역사를 계속 했습니다. 전쟁, 살인, 강간, 강탈, 폭력 등 죄의 역사는 점점 심화되어 갔습니다. 인간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인간의 죄악도 함께 발달하여 무서운 속도로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죄는 보편화되고 죄의식은 약화되어 갔습니다. 가인의 죄는 그로 끝나지 않고 후손들에게 무서운 영향을 끼쳤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가 성장한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죄는 마치 암과 같습니다. 우리의 세포는 조절기능을 받을 때 정상적인 조직이 되어 우리의 건강을 유지시켜 줍니다. 그러나 암은 자기 나름대로의 조직이 있어 조절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자라고 퍼져 나갑니다. 그 성장 속도는 빠릅니다. 그래서 다른 정상 조직을 파괴시키고 전신에 영향을 미쳐 결국에는 생명을 잃게 됩니다. 이를 볼 때 죄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처음부터 철저하게 다루어야 함을 배웁니다. 그렇지 않을 때 무섭게 번져서 나중에는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결국 영적 생명을 잃게 됩니다.

가인의 후예들을 살펴볼 때 세상은 소망이 없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4:25절부터는 셋의 역사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 대신에 셋을 허락하심으로 친히 의의 역사가 끊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셋의 후예는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는 그 때부터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의식을 시작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5장에는 아담 자손의 계보가 나옵니다. 이 계보는 셋으로 이어지는 믿음의 계보입니다. 셋의 후예를 통해 장차 인류를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할 메시야가 탄생됩니다. 셋의 후예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에녹입니다. 유다서 14,15절을 보면 에녹이 살던 시대는 불경건하고 거스리고 강퍅했습니다. 이런 시대에 에녹은 경건한 생활을 하며 의를 전파했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가지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을 중심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몸부림쳤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고, 죽음도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로 옮기워졌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셋을 허락하심으로 의의 역사를 친히 이루어 나가셨다는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과 같이, 가인의 후예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미워하여 핍박하고 의의 역사를 짓밟고 파괴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해 친히 의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십니다. 엘리야 시대에 모든 사람이 바알을 섬기고 하나님의 종들을 죽이는 절망적인 시대에도, 하나님은 자기를 위해 친히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7천을 남겨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도 거룩한 씨들을 곳곳에 남겨 두시고 친히 의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십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거룩한 씨들입니다. 어두운 시대에 주권적으로 구속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는 소망의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존귀와 영광을 돌려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