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 View


고린도전서 4:1-21(영적인 아비, 바울)

by Mark Yang   08/18/2019   1Corinthians

Message


고린도전서 제 4 강

영적인 아비, 바울

말씀/ 고린도전서 4:1-21
요절/ 고린도전서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고린도전서 1-4장은 고린도 교회내의 분쟁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1-3장까지에서 계속되어 온 분쟁에 관한 권면을 4장에서 결론 짓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분쟁에 관한 문제를 이렇게 길게 다루는 것은 교회내의 분쟁문제는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살펴 볼 4장에서는 그들이 분파를 형성하여 서로 판단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1-5). 그리고 그들이 분파를 만들어 분쟁하는 근본원인이 교만해졌기 때문임을 지적하고 (6-13), 영적 아비로서 그들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14-21).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복음 사역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가 어떠해야 되는가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충성된 청지기 (1-5)
첫째,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 (1,2). 1절은 믿는 자들이 복음 사역자들을 어떤 자로 여겨야 하는가를 말해 줍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찌어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일군'에서 '일군'이란 벤허에 나오는 것과 같이 배 밑창에서 지휘자의 명령에 따라 배를 젓는 하급노예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일군이란 그리스도께 종속되어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자를 뜻합니다. 신자들은 복음 사역자들을 생각할 때 사람들에 의해 좌우되는 존재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해 좌우되는 그리스도의 종임을 인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 자기가 좋아하는 복음 사역자를 내세워 분파를 만들지 않게 됩니다.
신자들은 복음 사역자들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생각해야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로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복음을 말합니다. 복음은 천국의 비밀로서 감취어져 있던 것인데 이제는 모든 사람에게 계시된 것입니다. 이는 아무나 함부러 다루어서는 안되는 매우 귀하고 신비스러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비밀인 복음을 맡아 수호하고 전파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복음의 수호자요 전파자였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마음을 알고 주인의 재산을 잘 관리하여 주인에게 유익을 끼쳐야 합니다. 이러한 청지기에게 끊임없이 간절히 요구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청지기에게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좋은 머리나 학벌이 아니라 충성심입니다. 충성된 자의 특징은 이중 마음을 품지 않고 단 마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거짓되지 않고 진실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맡은 바 일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핑게되지 않고 책임성 있게 해 냅니다. 한마디로 믿을만한 하고 신뢰할만한 합니다.
창세기 24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종은 좋은 예가 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살았을 때 하나님께서 약속의 아들 이삭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어릴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모리아 산에서 자신을 번제로 드리려고 한 사건 때문에 충격을 받아서인지 평소에 말이 없고 들에 나가 조용히 사색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는 돌아가신 사라 어머니만 생각하고 나이 40이 되도록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청지기를 불러 하나님을 경외하는 고향 땅에 가서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여 오도록 사명을 주었습니다. 아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을 계승할 자이기 때문에 믿음의 여인을 맞이하여 믿음의 가정을 이루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에게 감당하기 힘든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이 때 그는 감당키 힘든 일은 처음부터 맡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거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이 사명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의 길을 구체적으로 인도해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기도대로 인도하셨습니다. 믿음있고 아리땁고 순결하고 부지런하고 싹싹하고 사람을 품고 섬기는 내면성을 지닌 리브가를 이삭의 동역자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종은 중대한 일을 성사시켰으니 오랫만에 관광도 하면서 편히 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맡은 바 일을 끝까지 감당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먹고 쉬는 일보다 맡은 바 사명을 더 중히 여겼습니다. 그는 누가 보나 안보나 하나님 앞에서 맡은 바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하는 충성된 사명인이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종이라고 나올 뿐 이름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 앞에서 충성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종들은 이와 같은 청지기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은 종말의 때에 일어날 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는 노아의 때와 같이 사람들이 육체가 되어 영적인 소원을 잃고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에만 열중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깨어 있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인지 말씀하셨습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마 24:45,46) 예수님은 이 말세에 때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어 주는 충성되고 지혜있는 청지기를 간절히 찾고 계십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둘째, 하나님의 판단에 맡길 것 (3-5). 우리가 그리스도의 일군으로서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면 사람들이 우리를 인정하고 칭찬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 반대로 사람들로부터 판단을 받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3-5절에는 그리스도의 일군들이 받게 되는 세가지 판단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판단을 받게 됩니다. 양들이 목자의 메시지나 사생활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판단합니다. "우리 목자님은 말씀은 잘 전하는데 은혜가 없어" "우리 목자님은 훈련은 잘 시키는데 말이 너무 독선적이라서 덕이 없어" "우리 목자님은 덕은 있는데 무랑태수와 같이 훈련을 잘 못시킨다 말이야" 이렇게 목자를 판단하는 데에는 재미가 있는 모양입니다. 사람들은 재미로 하는지 모르지만 판단을 받는 본인들은 매우 심각합니다. 그리스도의 일군들은 자신이 섬기는 양들로부터 판단을 받을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로부터도 판단을 받습니다. 이런 판단에 의해 인기가 좌우됩니다. 주님을 위해 순수하게 열심히 일을 했는데 사람들로부터 인간적인 야심을 가지고 있다느니, 정치적이라느니 등의 판단을 받을 때 화가 나기도 하고 억울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힘써 일하고 싶지 않게 됩니다. 때로는 배신감을 느끼기도 하고 사람들을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게 됩니다. 또한 자기를 변명하거나 자기를 판단하는 상대방을 공격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사람들로부터 "글은 힘이 있고 은혜가 있지만 말은 졸하다." "생김새가 너무 볼품이 없다." "사도직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는 등 많은 판단을 받았습니다. 이 때 사도 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개는 매우 작은 일이라." 바울은 사람들의 판단을 매우 작은 일로 여기고 별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판단이 정확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보실 때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자연히 사람들로부터 판단을 받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판단에 신경을 쓰다 보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사람들의 판단을 초월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판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할 것이 있으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맡은 바 사명에 충성해야 합니다.

둘째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판단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양심의 판단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은 속일 수 있지만 양심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양심이 우리를 고발합니다. 이 양심의 판단은 비교적 정확합니다. 그러나 양심도 상황과 관습에 따라 변하고 또 화인맞은 양심과 같이 양심이 무디어질 수 있기 때문에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한다고 할만큼 하나님 앞에서 충성스럽게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의롭다 함을 얻지는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이 판단은 가장 정확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이 숨어있는 속 생각도 잘 아시고 다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두움에 감추인 은밀한 것이나 마음의 뜻도 다 살피십니다. 이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 때는 모든 것이 벌거벗은 것 같이 다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판단에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최후 심판날에 선악간에 모든 것을 심판하셔서 각각 그 행한대로 상벌을 주실 것입니다. 판단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사람들이 주님의 종들을 함부러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판단하는 그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판단 문제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서로 판단함으로써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판단으로 인해 관계성이 파괴됩니다. 사람들은 대개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만의 이야기를 듣고 쉽게 판단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판단을 내리려면 편견없이 상대방의 이야기를 모두 다 들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남을 판단할 자격이 없으므로 주님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아야 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판단에 신경쓰기보다 모든 판단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묵묵히 주님께서 맡겨 주신 일에 충성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II. 만물의 찌끼 (6-13)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영적 교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서로 파를 나누어 분쟁하는 근본 원인은 교만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교만해진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로, 그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고와 삶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기 때문에 말씀을 떠나서는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말씀 앞에 교만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공부할 때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보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 그들은 자연히 영적 교만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째로, 배우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울이나 아볼로에게서 배울만큼 배웠기 때문에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목자에게서 배우는 마음이 사라질 때 교만해지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나 끊임없이 배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7). 그들은 스스로 남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목자 바울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무 것도 받지 않고 스스로 가진 것처럼 자신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들은 과거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서 자신들을 구원하시고 모든 것을 은혜로 채워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새롭게 기억해야 합니다. 과거 아무 쓸모없는 나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주님의 종들을 통해서 구원하시고 키워주셨는가 항상 그 은혜를 기억해야 됩니다. 이때 우리는 교만해지지 않고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넷째로, 그들은 목자없이 왕노릇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목자가 자기를 구속한다고 생각하고 목자없이 마음대로 왕노릇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부요해졌고 높아졌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마음을 낮추는 투쟁을 해야 됩니다. 마음이란 가만히 놔두면 자연히 높아지게 됩니다. 마음이 높아지면 교만해져서 쓸모없게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지만 교만한 자는 대적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마음을 낮추는 투쟁을 해야 됩니다. 신앙이 성숙해진다는 것은 결국 마음을 낮추는 투쟁을 통해서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겸손해질 때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9-13절에서는 고린도 성도들과 대조적으로 사도 바울이 어떤 생활을 했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학식이 많고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세상에서 존경과 사랑과 대우을 받으며 부요하고 멋진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반대로 사람들이 보기에 미련하고 약하고 비천한 삶을 살았습니다. 바로 이 시간까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는 생활을 했습니다.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습니다. 왜 이런 삶을 산 것입니까? 이는 순전히 그리스도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때문에 미련하게 되고 약하고 비천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죽도록 수고하고 저주를 받고 핍박을 당하고 비방을 받았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그리스도 때문에 만물의 찌끼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내가 생각건대"라는 말씀은 사도 바울이 복음사역을 섬기면서 고난을 많이 당하는 가운데 깊이 생각을 했음을 말해 줍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도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존경과 사랑과 대우를 받는 대신에, 사형죄수를 굶주린 사자들의 밥이 되어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가장 낮고 비천한 자리에 두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와 복음을 위하여 멸시와 천대와 고난을 받도록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님의 종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가도록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로서 모든 피조물로부터 존경과 사랑과 섬김과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을 죄와 사망권세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섬기는 종이 되셔서 죄인들을 품고 섬기셨습니다. 마침내는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으시고 죽음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던 죄인들이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되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 사역자들도 그리스도께서 가신 겸손의 길, 멸시와 수난의 길, 섬김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자들은 세상에서 인정받고 존경받고 영광받고자 하는 마음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만물의 찌끼 같이 될 정도로 고난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고자 결심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우기를 원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었을 때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친철히 말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가신 섬김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고자 세상의 부와 명예와 안락한 삶을 버리고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언더우더는 8개국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할만큼 유능하고 능력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편히 살 수 있었지만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는 주님의 선교명령을 좇아 당시에 땅끝이라고 생각되는 조선에 선교사로 왔습니다. 그가 미개한 조선에 선교사로 오고자 하자 그의 약혼녀는 개척 선교사가 당할 엄청난 고생과 역경을 이겨낼 자신이 없어 그와 파혼을 했습니다. 그는 조선선교를 결혼도 포기하고 만 26세 때 미혼으로 조선에 선교사로 왔습니다. 그리고 30세가 되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 복음역사를 섬겼습니다. 그러다가 1989년 3월에 한국에 의료선교사로 온 릴리아스 호튼 양과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그 때 호튼 양은 언더우더보다 8세가 많은 38세였습니다. 언더우더는 결혼도 주와 복음역사를 위해 한 것입니다. 그들은 결혼을 한 후 신혼여행을 북부 지방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 여행으로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여행은 당시 외국인으로서는 대단한 모험에 속하는 것이어서 많은 선교사들이 극구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계획대로 개성, 솔내, 평양, 강계, 의주, 그리고 압록강 강변의 여러 읍을 순방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전도여행을 할 때 그들은 완전히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여인숙 기둥이 무너질 정도로 구경꾼이 모여들었습니다. 당시에는 창문이 창호지로 되어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손가락으로 침을 발라 창호지를 뚫고 그들 부부를 들여다 보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곳은 너무나 많은 사람이 모여 들어 조를 짜서 질서정연하게 구경을 하도록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야! 저것도 사람이라는 군. 원 참으로 야만스럽게 생긴 짐승 같은 것도 다 있지." "눈알이 새파란 구슬 같구먼. 저게 보일까?" 등의 말을 하며 재미있게 구경하였습니다. 언더우더 부부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조롱과 멸시를 참으며 미개한 조선 땅에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때문에 만물의 찌끼와 같이 된 복음 전도자들을 통해서 이 땅에 생명의 복음이 널리 전파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III. 영적인 아비 (14-21)
사도 바울이 자신이 만물의 찌끼 같이 수고한 것을 기록하는 것은 그들을 부끄럽게 하고자 함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 같이 그들의 영적 교만을 깨우쳐 주고자 함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들을 이렇게 권면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그들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스승으로서 권면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아비로서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승은 많이 있을 수 있지만 아비는 하나 뿐입니다. 여기서 스승은 가정교사로서 아이의 의복, 식사, 예절 등을 돌보며 무지를 깨우쳐 주고 훈련시키는 자들을 말합니다. 스승과 아비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스승은 의무적으로 하지만, 아비는 사랑으로 합니다. 스승은 수익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만, 아비는 아이 자체를 목적으로 합니다. 스승은 어느 정도 책임을 가지고 가르치지만 근본적으로 그 인생을 책임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비는 근본적으로 그 인생을 책임지고 그의 인생문제, 결혼문제, 장래문제까지 다 돌봐주고자 합니다. 스승은 문제많은 아이들보다 공부 잘하고 순종 잘하는 훌륭한 학생들에게 관심을 갖지만, 아비는 아무리 못난 자식이라 할찌라도 애정을 가지고 돌봐 줍니다. 아비와 자식의 관계는 혈연으로 맺으진 관계요 생명이 결탁된 관계입니다. 그래서 자식이 고통하면 아비도 함께 고통하고, 자식이 영광을 누리면 아비도 함께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이 아비의 마음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또한 이 아비의 마음은 양들을 위해 어떤 희생도 무릅쓰는 목자의 마음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들은 양들에 대해서 영적인 아비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사도 바울은 영적인 아비로서 고린도 성도들에게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양들에게 나는 본받는 자 되라고 말하려면 매사에 본이 되어야 하는데 이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입니다. 그가 이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기에 힘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말할 때의 진정한 의미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애쓰는 것과 같이, 너희도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기에 힘써라"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 11:1절에 그 의미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사도 바울은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말한 후에 그들이 구체적으로 이를 실천할 수 있도록 영적인 아들 디모데를 보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제자양성의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본받기에 힘씀으로써 디모데에게 좋은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을 본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을 하기에 힘썼습니다. 이제 디모데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실제 생활에서 좋은 본이 될 것입니다. 이로써 본을 끼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역사는 말로 하는 역사가 아니라 실생활에서 구체적으로 본을 끼치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키우심으로써 복음역사의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랜 세월동안 이들을 믿음의 조상으로 키우시기 위해 노심초사하셨습니다. 특히 아브라함 한 사람을 키우시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이는 이들을 믿음으로 사는 예로 남기고자 함이었습니다. 이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그 믿음의 자취를 따라 오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롬4:12). 우리가 제자양성을 성공적으로 하려면 가르치고자 하기보다 실 생활에서 본을 끼침으로 그 믿음의 자취를 따라 오도록 해야 함을 배웁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먼저 예수님을 본받는 생활을 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번 고린도에 나아가고자 하였으나 가지 못하였습니다 (고후1:15,16). 이로 인해 어떤 이들은 바울이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고린도에 오기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하고 교만해졌습니다. 그러나 실상 바울이 고린도에 나가지 못한 이유는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주께서 허락하시면 그들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라 그의 능력을 알아 볼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능력은 사람을 죄와 사망권세로부터 구원하는 능력이요, 실 생활에서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바울은 영적 아비로서 그들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21) 바울은 그들이 회개하지 않고 오만한 마음으로 분파를 나누어 분쟁을 일삼는다면 징벌하러 나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진실되게 회개하면 용서하는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영적 교만을 회개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적인 아비의 마음을 허락하사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로 사신 하나님의 양무리들을 책임감을 가지고 사랑으로 품고 섬길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