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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5:1-7:40(신자의 도덕)

by Mark Yang   08/18/2019   1Corinthians

Message


고린도전서 제 5 강


신자의 도덕


말씀/ 고린도전서 5:1-7:40
요절/ 고린도전서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사도 바울은 1-4장에서 고린도 교회 내의 분쟁문제를 다루었습니다. 5-7장에서는 고린도 교회 내의 음행문제, 소송문제, 결혼문제 등 신자의 도덕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문제들을 다루는데 있어서 단순히 개인의 도덕문제로 다루지 않고 그 문제들이 신앙 공동체, 즉 교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도덕적으로 타락한 이 시대에 신자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며, 또한 교회가 어떤 모임이 되어야 하는가 공부해 보고자 합니다.

I. 성도덕의 문제 (5:1-13)
사도 바울은 1절에서부터 고린도 교인들을 심하게 질책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심지어"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는 너희 가운데 "심지어" 아비의 아내(계모 또는 첩)를 취하는 패륜행위가 있다니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하는 강한 책망의 말입니다. "취하였다"는 동사는 현재형으로서 패륜행위는 어쩌다가 실수하여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현재도 계속되는 행위임을 말해 줍니다. 이러한 패륜행위는 인간의 도덕률에 위배되는 악으로서 불신 세계에서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음행보다도 더 문제시 하는 것은 이 사건을 대하는 고린도 성도들의 태도였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영적으로 크게 분노하고 이 일을 행한 자를 중징계하고 교회 밖으로 쫓아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크게 문제 삼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용납하고 물리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교만해졌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음행을 행한 자를 물리칠 수 없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음란한 고린도시의 영향을 받아 교회도 세속화 되어 죄의 개념이 없었는지 모릅니다. 또한 개인적인 친분이 있거나 평소 두터운 인간관계 때문에 그런 문제를 감히 거론조차 할 수 없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예수님의 사랑으로 너그럽게 용서했다고 생각하고 그렇지 못한자를 판단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그런 일 행한 자가 헌금을 많이 내는 사람이거나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이라 현실적으로 쫓아내기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극도의 개인주의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야 어찌 되었든 나만 신앙생활을 잘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고린도 교인들은 그 일 행한 자를 물리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태도가 하나님 앞에 교만한 것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그들과 함께 있어서 그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고 사단에게 내어 주었습니다. 이는 그 사람의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여기서 육신은 부패한 죄의 근성을 의미합니다. 사단에게 내어 준다는 것은 교회에서 축출하는 것을 말합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지배하시는 것처럼 사단은 교회 밖을 지배한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축출된 사람은 사단의 권세 아래로 넘기운 자요, 하나님의 나라에서 떠난 방랑자가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 사람을 출교함으로써 그가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회개하여 그 영혼이 구원받기를 바란 것입니다. 어쨋든 범죄자를 방치해 두는 것은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파멸에 이르도록 방치하는 것으로서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6절에서는 음행의 죄가 신앙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룩은 밀을 주원료로 누룩곰팡이를 번식시켜 만든 발효제입니다. 누룩은 조금만 넣어도 전체에 퍼집니다. 또 그 퍼지는 속도가 매우 빠르며, 보이지 않게 역사합니다. 이 누룩은 악영향을 의미합니다. 악영향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쉽고 빠른 속도로 퍼져서 치명타를 입히기 때문에 매우 심각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특히 음행의 죄는 흑사병과 같아서 빠른 속도로 무섭게 전염되기 때문에 철저히 다루지 아니하면 교회 전체가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연애 감정만 품더라도 영적인 냄새가 나지 않고 구린내를 풍기게 되어 모임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되어 버립니다.
7,8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누룩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이 말씀은 출애굽기에 나오는 유월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일주일 동안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유월절 전에는 집안에 있는 모든 누룩을 제거하고 유월절 기간 동안 누룩없는 새 가루 덩어리를 뭉쳐서 떡을 구워 먹었습니다. 이것을 무교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유월절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고기를 먹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교회를 가리키고, 묵은 누룩은 음행이나 우상숭배와 같은 세상적인 악영향을 가리킵니다. 또한 새 덩어리는 예수님의 피로 거듭난 신자들을 가리키고, 유월절 양은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순전'이란 정직하고 거짓이 없는 진실을 의미하고, '진실함'이란 진리를 뜻합니다. 우리 신자들은 유월절 어린 양되신 예수님의 보배 피로 구속받았으므로 이제는 과거 죄악된 옛생활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에 기초하여 진실된 새 생활을 해야 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구약에서 유월절은 1년에 일주일 동안 지켰지만,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신자는 일생동안 진리의 말씀에 기초하여 순수하고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9-13절에서는 음행, 탐람, 우상숭배, 후욕, 술취함, 토색하는 자들에 대해서 교회 내에 있는 자들과 교회 밖에 있는 자들을 각각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고 한 것은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고 한 뜻은 아니었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세상에서 살 수 없고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구를 떠나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이런 죄인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이런 자들을 경계하거나 판단하거나 피해서는 안됩니다. 만일 우리가 이런 자들을 적대시 하고 세상 사람들과 유리된 고고한 신앙생활을 한다면, 우리는 세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사람들과의 관계성이 단절되어 세상 살아나가기가 힘들 것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이런 자들을 전도의 대상으로 삼고 낮아져서 겸손하게 섬김으로 믿는 자로서 좋은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그들을 그리스도의 품안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세상을 도피해서 사는 자가 아니요, 세상 안에 살면서 적극적으로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자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자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지만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면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는 자입니다.
11절에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세상 밖의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 내의 사람들입니다. 만일 교회 내에서 소위 신자라고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숭배를 하거나 쌍스러운 욕을 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그런 자와는 사귀지도 말고 사적으로 음식을 함께 먹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을 행한 자는 참된 신자가 아니라 신자인 척 가장하여 신앙공동체를 해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은 우리 믿는 자들의 진실되고 선한 마음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취하는 악한 자들입니다.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지만 교회 내에서 악한 일을 행하는 자들은 성도들이 판단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행을 행한 악한 사람은 교회에서 내어 쫓아야 됩니다. 우리는 이런 자들을 잘 참고 너그럽게 봐 주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무섭게 책망하여 회개하도록 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단호하게 쫓아내야 합니다. 형제들의 돈을 빌리고 갚지 않고 고의로 떼어먹는 자,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형제의 돈을 훔치고 주민 등록증을 위조하여 비시 카드를 만들어 돈을 빼내는 사깃꾼은 단호하게 쫓아내야 합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교회가 이 세상에서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하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보배피로 세우신 거룩한 공동체이므로 순결함과 진실됨과 진리를 지켜야 합니다. 만일 교회가 세속화 되어서 진실함과 순수함을 상실해 버린다면 맛잃은 소금과 같이 영향력을 상실하여 아무 쓸모없게 되어버릴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있어서는 안될 모임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교회의 생명력은 순결함과 진실됨과 진리에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음란하고 부패할지라도 교회는 진리에 기초한 높은 도덕성을 견지함으로써 이 세상을 교화시키는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II. 소송 문제 (6:1-20)
첫째, 소송 문제: 고린도 교회 내의 도덕 문제의 둘째는 성도 상호간의 소송 문제였습니다. 소송 문제의 대부분은 물질에 관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돈을 꾸어 갔다가 갚지 않았거나, 동업을 하다가 피차간에 해결하기 힘든 문제가 생겨서 이 문제를 세상 법정에 고소한 것 같습니다. 성도들 간에 물질 문제는 깨끗해야 합니다. 가까운 성도일수록 물질 문제는 분명하고 깨끗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험에 들게 되고 관계성이 파괴되어 버립니다. 성도 간에는 할 수 있는대로 돈 거래를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불가피하게 돈을 꾸어야 할 경우는 반드시 약속된 날짜에 갚아야 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물질 생활이 깨끗치 못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준다면 이는 불신자보다 못한 악한 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 상호간에 발생하는 문제들은 교회 내에서 해결해야지 세상 법정에 고소해서는 안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세상법정이 불의하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 내의 문제는 교회 내에서 해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세상을 판단할 뿐만 아니라 천사도 판단할만큼 영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 내에서 믿음 있는 자들을 세워서 해결하기 보다 믿음이 없는 자들을 세워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4). 바울은 이런 그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 책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피차 송사함으로써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허물이란 패배를 뜻합니다. 그들이 송사 문제로 싸우게 되면 서로 상처만 입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되고 사회적인 영향력을 상실함으로 결국에는 피차 손해만 보고 망하게 됩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손해를 보고 속아 주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형제는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9-11절은 우리가 믿는 형제간에도 불의를 행하고 속여서는 한 될 필연적인 이유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나라는 의이기 때문에 불의한 자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믿고 오직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 자들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고린도 성도들 중에도 과거에는 불의한 자들이 있었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습니다(11).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것은 별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그 까짓 하나님 나라, 유업으로 받지 않으면 그만이지 뭐"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말처럼 무서운 말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것은 지옥을 유업으로 받는 영원한 파멸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말 속에는 반대로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신자의 궁극적인 소망입니다. 우리에게 이 영광스러운 소망이 있기 때문에 주와 복음을 위해서 자신있게 희생하고 헌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억울하게 손해도 보고 뻔히 알면서 속기도 하고 부당하게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12-20). 12절부터 사도 바울은 5장에 나온 음행에 관한 문제로 다시 돌아가 엄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악용하는 것에 대한 반박의 말입니다.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다고 해서 음행을 행하는 일에서까지도 자유롭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자유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음행과 같은 부도덕한 문제에서조차 자유롭지 않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고 자신에게 해로운 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은혜가 되고 자신에게도 기쁨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유는 진리 안에서만 누릴 수 있습니다 (요8:3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무슨 일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부도덕한 일을 함으로써 그것의 지배를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누구에게든지 빼앗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13-20절에서 우리 몸으로 음란한 행위를 할 수 없음을 여러 모양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13절에서 식물과 배의 관계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당시 고린도 사람들은 성욕을 음식 먹는 것에 비유하여 말함으로써 비도덕성을 합리화하였습니다. 음식이란 몸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요 즐거운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욕도 우리 몸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요, 즐거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유롭게 섹스를 즐겨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식물은 도덕적인 문제와는 아무 상관없으므로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이 관계는 몸과 음란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음란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를 위해 존재하며, 또한 주님은 몸을 위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것과 같이, 창조의 권능으로 우리 죽을 몸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신 것과 같이, 우리의 몸도 장차 육의 소욕의 지배당하지 아니하는 신령하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됩니다.
또한 15-17절에서는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지체로 창기의 지체를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19절에서는 우리 믿는 자들의 몸은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성령의 전임을 말해 줍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보배피로 값주고 사신 것이기 때문에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첫째로, 소극적으로는 음행을 피해야 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음행은 요셉과 같이 적극적으로 피해야 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정욕의 소욕으로 말미암아 뜨거운 불씨와 같습니다. 만일 우리가 불씨를 안고 기름 가까이 간다면 불씨는 불이 붙어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끌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극적으로 음행을 피해야 합니다. 음행은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게 됩니다. 음행으로 인해 갖가지 질병에 걸려 고통하게 됩니다. 또한 정서가 불안해지고 인격이 파괴됩니다. 심하게 되면 정신이상이 되어 미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음행을 적극적으로 피해야 합니다.
둘째로, 적극적으로는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몸을 의의 병기로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육과 혼과 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육은 운동을 통해서 건강한 신체로 단련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기 때문입니다. 또한 혼은 정신을 말합니다. 정신세계도 우리가 어떻게 단련하는가에 따라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병든 생각을 할 수 있고, 또 생각으로 온갖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정신 세계가 황폐하게 되어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없어 정신적인 미숙아가 되어버립니다. 반면에 정신 세계를 단련시키면 깊은 사고를 할 수 있어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학문을 통해서 인류에 업적을 남길 수도 있습니다.
육과 정신과는 달리 영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처소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함으로써 영적인 세계를 체험할 수 있고 영적인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몸을 건전하게 적극적으로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도 은혜를 끼칠 수 있으며, 우리 자신도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사신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III. 결혼생활의 문제 (7:1-40)
7장 말씀은 사도 바울 당시와 오늘날 문화배경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많고 또 실제로 적용할 수 없는 부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부부생활의 원리와 말세를 사는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좋지만 음행의 연고로 결혼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독신생활이 좋다는 것을 강조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혼이란 것은 반드시 정욕을 이길 수 없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합심해서 잘 감당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녀를 낳아서 양육함으로써 종족을 보전하는 중대한 사명도 있는 것입니다.
3-5절에서는 부부간에 서로 의무를 다해야 함을 말해 줍니다. 유교에서는 아내는 무조건 남편에게 순종할 것만 가르치고, 남편이 아내에게 할 의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이조 여인들은 500년 동안 남성 우위 사회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서러움과 억압을 당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항상 상호 윤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부부는 피차 서로 지배하고 또 피차 서로의 지배를 받습니다.
8-16절은 부부 중 어느 한편이 불신자일 경우에 생기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부부가 다 신자일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음행의 연고 없이 절대로 이혼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 불신자일 경우에 불신자인 아내나 남편이 함께 살기를 원하면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불신자인 남편이나 아내에게 영향을 끼쳐서 거룩하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 문제로 갈라서기를 원하면 갈리게 하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불신자인 남편이 신자인 아내에게 하나님과 남편 중에서 어느 한쪽을 택하도록 강요하며 심하게 핍박할 경우에는 갈라서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때도 신자가 먼저 갈라서도록 요청해서는 안됩니다.
17-24절까지는 종이나 자유자나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해야 함을 말해 줍니다. 어떤 상황에서 부르심을 받았든 주어진 상황에 충실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건개선을 할 수 있으면 하라고 하십니다. 다만 거기에 너무 얽매여서 사람들의 종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25-40절은 임박한 환란, 곧 종말이 가까운 때에 사는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가정생활이나 결혼문제에 얽매이지 말아야 됩니다. 또한 희로애락의 감정이나 물질문제에 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형체는 그림자와 같이 사라지는 것임을 알고 세상 일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남편이나 아내를 기쁘게 하기에 힘쓰기 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고린도시와 같이 음란합니다. 우리 나라는 선진화가 되어 갈수록 음란이 보편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음란이 하나의 문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아무 죄의식 없이 자연스럽게 죄를 짓습니다. 우리가 이런 죄악된 분위기 가운데서 순결한 생활을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아니 때로는 어리석은 사람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대가 어떠하든간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진리의 말씀을 좇아 순결한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의 직분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